잊혀진 놀이 - 딱지치기
잊혀진 놀이 - 딱지치기
  • 김윤한
  • 승인 2009.04.19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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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한의 추억마당

종이도 귀했던 시절

60~70년대, 궁핍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귀했다. 먹을거리는 물론이고 산업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에 공산품은 더욱 귀했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딱지를 접을 종이를 구하는 일은 수월치가 않았다.

더욱이 딱지는 얇은 종이로 만들면 무게가 없어서 딱지놀이를 하기 어려운 까닭에 딱지를 접으려면 지나간 달력을 오려서 접거나 다 쓴 공책 표지를 찢어 딱지를 접곤 했다.

딱지는 공책 표지를 반으로 접은 것을 두 장 포개어서 딱지를 접는데 반으로 접은 종이 양 끝을 45도 각도로 접은 다음 차례차례 접고 끼워서 완성하는데 어릴 적 아마 내 손으로 가장 먼저 만들어 본 것이 딱지가 아닌가 한다.

지금이야 종이가 너무 흔해서 공해가 되는 시대이지만 당시에만 해도 종이가 귀한 시절이어서 딱지를 많이 가진 친구를 보면 무척이나 부러웠다. 요즘 아이들이 보면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을 터이지만.

딱지는 앞면과 뒷면으로 나뉘는데 딱지 따먹기는 바닥에 깔려 있는 상대방의 딱지를 내 딱지로 힘차게 때려서 뒤집으면 따먹게 되는 놀이였다. 역시 요즘 아이들이 보면 ‘에이 시시해’하겠지만 우리 시절에는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팔이 아프도록 딱지치기를 했다.

계급장이 그려진 딱지

종이로 접은 딱지놀이가 단순하고 시시해 보이기 시작하던 때에 나온 것이 두꺼운 마분지에 그림이 인쇄된 종이 딱지였다. 그 종이 딱지는 마분지에 화투 크기보다 조금 작게 칸을 나누어 그림과 군대의 계급이 인쇄되어 있는 것이었다.

안에 그려진 그림은 대개가 군인의 모습이나 탱크나 군함 같은 전쟁과 군대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당시는 한국전쟁 이후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문화가 널리 퍼져 있던 때이기도 했고 월남전 파병과 이들의 무용담이 전해지던 때라서 그랬던 것 같다.

인쇄는 컬러를 사용했지만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이라 그림과 색상이 일치하지 않아서 벌겋게 번진 것처럼 잘못 인쇄된 것도 많았지만 어쨌든 그 딱지는 돈을 주고 사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접는 딱지 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딱지는 일일이 한 장씩 가위로 오려내어야 되었다. 딱지를 사가지고 와서는 행여 한 장이라도 잘못 오려질까봐 가위로 조심조심 오리곤 했다.

딱지놀이는 어른들의 화투놀이를 흉내 내서 선을 잡은 사람이 딱지를 몇 장씩 포개어 사람 두 대로 무더기를 지어서 엎어놓으면 상대방이 한 군데를 선택해서 딱지 몇 장을 놓으면 사람 수대로 엎어 놓은 딱지를 뒤집어 맨 아래에 있는 딱지의 계급이 높으면 그 딱지를 따먹거나 지게 되면 상대방이 놓은 딱지 양 만큼 딱지를 주어야 하는 놀이였다.

그 때만 해도 딱지에 그려진 군대 계급은 작대기 하나가 그려진 이등병부터 별 네 개 대장과 별 다섯 개 원수까지(아마 국가원수의 계급을 대장 바로 위인 별 다섯 개로 정한 듯함) 골고루 그려져 있었다.

별이 많아진 동글 딱지

네모난 딱지 시대가 가고 나온 것이 동글 딱지였다. 기술도 많이 발달해서 동글 딱지는 인쇄술도 예전보다 좋아졌을 뿐 아니라 지질도 더 맨들맨들해졌고 동그란 모양에다 기계로 칼자국을 내어서 한 장씩 뜯어내기만 하면 되었다.

딱지 따먹기 놀이를 하는 요령은 종전의 네모 딱지와 같았지만 딱지 따먹기 할 때 아이들이 계급이 높은 것을 선호하는 까닭에 사병이나 영관급 이하의 계급은 없어지고 별 계급만 1개에서 10여 개까지 그려져 있었다. 별의 개수도 나중에는 열 개를 훨씬 초과해서 딱지 따먹기 놀이를 할 때 누구의 별이 더 많은가 일일이 세어야 할 정도까지 되었다.

어른들이 사랑방에서 화투놀이에 빠져들고 있을 즈음 아이들은 시장 장옥 아래나 비와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앉아서 무척이나 오랜 시간을 딱지 따먹기를 했다. 어느 비가 오는 날 시장 장옥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딱지치기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돈이 귀했던 시절, 어른들은 돈이 많으면 부자였듯이 아이들은 딱지만 많이 가지면 마치 부자가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딱지 따먹기에 빠져서 밥 먹을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딱지치기를 하다가 부모들께 혼난 적도 많았다.

컴퓨터에 빨려 들어간 아이들

그 당시만 해도 장난감 같은 것이 흔치 않은 시기여서 그나마 문명(?)화 된 놀잇감은 딱지가 거의 유일했던 때였다. 마을에 흑백 텔레비전이 한두 대가 있었지만 그것은 밤이 되어야 볼 수 있었고 아이들의 놀잇감은 여전히 귀하던 시절이었다.

▲ 김윤한 시인
우리는 거의 매일 딱지 따먹기를 했다. 심지어는 책보자기(책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책을 보자기에 싸서 다녔다.)에 딱지를 함께 넣어서 학교에 갔다가 소지품 검사 때 선생님께 걸려서 혼이 난 적도 있었다.

그 때 선생님께 혼이 난 것보다는 딱지를 압수당한 것이 더 아까웠을 정도였다. 우리들의 딱지 사랑은 아마도 중학교에 들고서야 끝이 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아예 딱지 놀이가 무언지도 모를 것이다. 컴퓨터가 가정마다 보급된 이후 아이들이 직접 손으로 만지고 노는 놀잇감은 대개가 사라지고 아이들은 모두 컴퓨터에만 빠져 있는 것 같다. 오프라인 시대 딱지 놀이는 이제 흔적 없이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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