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경북도청 안동 이전 有感」
‘현역시절, 지역균형발전 차원 도청이전 제기’
「역사적인 경북도청 안동 이전 有感」
‘현역시절, 지역균형발전 차원 도청이전 제기’
  • 김길홍 (전 국회의원)
  • 승인 2016.02.16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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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흘러 숙원 이루어지니.... 안동웅부 발전모습 재현 기대”
《특별기고》김길홍 (안동사랑운동본부 이사장, 제13·14대 국회의원)
♦ 김길홍 (안동사랑운동본부 이사장, 제13·14대 국회의원)

드디어 경상북도 도청이 대구에서 안동으로 이전했다. 안동과 예천이 공동으로 도청을 유치해 안동시 풍천면 갈전리를 소재지로 한 경북도청이 2016년 3월 대망의 신도청 시대를 열고 행정업무를 시작한다. 80년 대 부터 도청의 안동이전을 숙원사업으로 여겼던 안동시민으로서는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더구나 필자는 88년부터 96년까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안동지역의 불균형 발전의 해결과 경북도청의 안동이전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정치인으로서 오늘의 신도청시대 개막을 보는 감회가 훨씬 남다르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도청이전의 숙제가 풀렸기 때문이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은 산지가 대부분이며 교통과 소득과 생산이 크게 낙후된 오지(奧地)로 유명하다. 산업화의 주역으로 일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인다안동(人多安東)을 자랑했지만 실제로는 경제발전의 특별한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소외당하며 지내왔다. 안동지역 주민은 낙후(落後)와 가난의 한을 품고 조상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지역의 발전과 도약을 성취하는 계기를 찾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몸부림치면서 시민들이 뜻과 힘을 모아 투쟁해 왔다.

도청이전의 숙원 달성과 투쟁의 명분은 지역의 균형발전이었다. 도청이 북부의 중심인 안동·예천으로 옮겨짐으로서 지역의 균형발전을 이룩할 거점도시가 새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도청이전을 희망하는 경북도의 또 다른 시군들이 그동안 치열하게 경합했으나 상대적으로 낙후의 정도와 주민소득의 격차를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안동과 예천으로 이전이 확정됐다.

돌이켜 볼 때, 1988년 노태우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지역균형발전은 국정의 주요지표로 제시됐다.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실에 지역균형발전 비서관을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소관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당시 행정부는 이때를 전후하여 안동댐과 임하댐의 건설로 수몰과 기후의 피해를 받고 있는 주변 지역주민과 해당 자치단체들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도 했다.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지역균형발전 문제와 도청이전 필요성이 제기됐다. 안동의 지역시민사회는 ‘도청유치주민연합’을 결성하여 시민운동 차원의 캠페인을 벌였다. 국회에서도 지역의 균형발전을 정치 문제화하여 경북·강원·호남 등지의 지역낙후 실상과 불균형 발전 사례를 고발하고 정부의 적극적 관심과 특별지원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지역에서도 도청유치 서명운동과 집회 시위 및 모금운동 등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지역출신 국회의원은 서울의 국회 본회의와 관련 상임위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당정협의 과정에서도 지역주민의 여론을 반영하는 의정활동을 함께 진행했다.

안동시민, 출향인사, 안동시와 시의회, 지역 국회의원이 모두 참여했다.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도청의 안동이전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일치했다.

당시 현역의원이었던 필자는 처지가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제도권 정치인으로서 제일 큰 지역의 민원과 현안인 도청이전에 대한 여론 수렴과 가능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건 지역활동의 범주 안에 속한 까닭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집권여당의 국회의원이 허가 받지 않은 집회나 시위 또는 서명운동에 참가하여 강경한 원외투쟁을 강행한 전례가 거의 없었다. 지역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불법시위와 집회에 선뜻 참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같이 현역 의원의 난처한 입장은 이전투쟁을 주도하는 도청유치연합 등 시민단체와 반대 야당으로부터 집중적인 포화를 받기도 했다. 도청이전을 위한 노력이 소극적이라든지, 여당의 경북지역 중진의원에 비해 정치적 힘이 부족해 안동으로 도청을 이전할 수 없다는 등의 유언비어와 인신공격에 시달리기도 했다.

96년 4월 15대 총선에서 도청이전 문제가 핫이슈로 등장했다. 3선 당선을 준비했던 필자로서는 최대의 복병을 만나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집권당의 재선의원으로서 도청을 안동으로 가져오는 것만이 3선의 지름길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상대 야당의 후보와 재야·시민단체 등은 안동역 광장에서 안동이전을 반대하는 여당 중진의원의 화형식을 가졌다. 이런 식으로 도청이전을 총선이슈로 삼아 여당후보인 나를 강하게 압박했다. 고민을 거듭한 필자는 4.19 학생데모 가담 이후 생전 처음으로 청년당원을 중심으로 도청이전촉구 집권당 당원 시위대를 결성했다. 당일 흰 한복차림으로 도청이전주민연합이 주최하는 안동역광장 집회에 참가한 후 시내일원을 행진하는 가두시위까지 감행했다.

상대후보는 합동 선거 연설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김영삼 대통령의 멱살을 잡더라도 도청을 안동으로 가져오겠다고 시민들을 무책임하게 선동했다. 선거운동 도중 필자는 도청이전의 중압감을 해소하고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합동 선거유세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임기 중에 도청을 안동으로 이전하지 못하면 국회의원직을 중도 사퇴하겠다는 강수의 카드까지 동원했으나 허사였다. 출마한 총선후보 3명의 구도 상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그 후보는 당선됐으나 2천년 임기까지 도청이전을 실천하지 못해 결국 공약(空約)을 남발한 셈이 됐다.

2000년부터 16년이 흘러서 안동시민은 도청의 안동이전이라는 감격적인 숙원을 이루었다. 안동시민 모두가 축하하고 축복받을 경사가 틀림없다. 필자의 나이 올해 일흔 네 살이다. 인생살이 아무리 아웅다웅해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형편이 나아지게 마련이다. 제반 여건이 갖추어지면 소원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만고의 이치를 터득하게 된다. 이제야 현역 의원 시절 이루고자 했던 도청이전의 소원이 현역 은퇴 후 20년 만에 이루어지고 보니 만감이 교차함을 느낀다.

그동안 대를 이어 도청이전에 계속 앞장 서 심혈을 기울였던 지역의 국회의원, 안동시장, 지방의회의원, 시민운동단체 지도자들과 안동시민들의 노고에 축하와 감사를 드린다.

최근 여유 있는 마음으로 가끔 고향에 들러 안동의 곳곳을 둘러보는 기회를 갖는다. 현역 의원 때 도청이전을 대비하며 예산을 끌어와 기반시설 조성 공사를 했던 현장과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안동발전에 적지만 나름의 힘을 보탰다는 보잘 것 없는 기억들을 되살리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인구 30만에서 17만 명으로 줄어든 나의 영원한 고향이 도청이전을 역사적 계기로 만들어 안동웅부(安東雄府)의 발전된 모습을 하루빨리 재현하기를 다시한번 간절하게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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