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론만 들먹이지 말고 청사진을 내놔라
청년 문제는 청년 문제가 아니다
심판론만 들먹이지 말고 청사진을 내놔라
청년 문제는 청년 문제가 아니다
  • 허승규
  • 승인 2016.03.17 17: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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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승규 (청춘안동517 공동대표)

어떤 문제가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차원으로 논의된다면 우리는 문제가 ‘정치화, 이슈화되었다’고 한다. 도박중독은 개인의 심리적 차원도 있지만, 이런 현상이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특정 계층 또는 경제 불황기와 같은 특정 시기에 급증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구조적 차원의 성격을 지닌다. 사회적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사적인 방식이 아닌 공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영역이 바로 다수의 한국 시민들이 욕을 하는 ‘정치’의 역할이다.

2015년, 한국 사회에서 청년 문제는 충분히 ‘정치화’되고 ‘이슈화’되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청년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해법을 ‘공적으로’ 내놓고자 한다. 유명 인사가 취업을 걱정하는 청년들을 두고 ‘요즘 청년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거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배부른 소리다’고 하면, 여론의 몰매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다들 청년이 문제라고 하는데, 문제의 원인, 쟁점, 대안은 각양각색이다. 필자 또한 지금 한국 사회의 청년 문제를 분명하게 정의하긴 어렵다. 청년 자체가 지니는 세대적인 특성에 근거하여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산업화 세대나 민주화 세대와 달리 지금의 청년들의 사회경제적 자립 요건이 나빠졌다는 외환위기 이후의 세대론을 펼치기도 한다. 청년 문제보다 계급 문제가 우선이라며 세대론의 과도한 해석을 경계하는 흐름도 있고, 청년뿐만 아니라 노인 빈곤, 청소년 행복도 등등 세대를 가로지르는 전 사회적 위기가 청년층에게도 나타난 것이며, 청년문제는 전 사회적 위기의 청년 버전이라는 분석도 있다.

올해 스물여덟의 청년인 필자가 보기에,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청년만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청년 문제가 다른 사회적 문제와도 복합적으로 얽혀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꿈과 기회의 영역에서 청년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소외감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세대론적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정치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측면을 포괄한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청년 문제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이 세대론적 성격이 강한지, 계급론적 성격이 강한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현재 청년들이 겪는 ‘청년 문제’는, 비단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데 있다. 이는 ‘청년 문제가 허상이다’는 주장과는 다르다. ‘청년 문제’는 있되, 그것이 세대를 가로지르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보육 문제가 부모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부모들이 겪는 문제’가 허상은 아니지 않은가.

청년 문제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지속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대략 의무교육을 마친 시기에 청년은, 자신들의 꿈과 기회를 찾아 의무교육 이후의 사회라는 영역에서 삶을 그리고자 한다. 꿈, 취업, 공부, 사랑, 육아, 결혼, 주거 등등 인간으로서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을 추구하기에 앞서 냉소와 포기를 접하게 된다면,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다운 삶을 지속 가능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좌절은 냉소, 포기, 탈출, 자살 등으로 나타나며, 사회적 차원에서 높은 자살률, 낮은 행복도, 낮은 출산율과 같은 지표로 드러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절대적 재화의 양의 부족이 아닌, 문제 해결 능력, 갈등 해결 능력의 부족인 것이다. 즉 문제는 ‘성장’이 아니라 ‘정치’인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한국의 최고 권력자의 주요한 국정과제는 ‘성장’이다. 2015년을 기준으로 4만 달러 성장인 것이다. 지금의 문제가 1인당 국민 소득 지표가 4만 달러면 해결되는 문제인가? ‘경제성장’이 지속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경제성장’을 한다고 해서 지금의 사회가 지속가능할 것인가? 한국 사회는 인간다운 삶이 지속 가능한 사회인가?

필자는 지금의 청년 문제에 대해 명쾌한 분석과 해법을 내놓기엔 부족한 사람이다. 청년 문제와 관련한 다양한 강연, 토론, 도서, 기사를 접한 지가 오래되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고민할수록 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근에 안동의 청년자립공동체 ‘바름협동조합’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열었을 때에 사회자가 했던 마무리 멘트는 새삼 되새기게 된다.

“저의 할아버지는 올해 91살이신데요. 손주들의 미래를 걱정하십니다. 청년 문제는 청년들의 문제가 아닌, 부모님들, 어르신들, 우리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청년 문제를 창조적으로 풀어간다면 지역도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년층의 비율이 높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청년 담론을 이야기하자니 누군가는 그런다. 안동에 청년들도 적은데 시민들이 이야기를 들어주겠냐며. 우리 가까이에 청년들을 걱정하는 어르신들의 마음이 있다. 자기 자식, 손주에 대해 걱정하는 ‘사적인’ 마음을 조금씩 ‘공적으로’ 풀어보자. 청년 문제는 어르신들의 문제이자, 지속가능성의 문제이다. 명절에서 친척들의 조언을 듣고 ‘각개약진’하는 방식만으론 안 된다. 청년문제가 세대를 가로질러, 청년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제들이 풍성하게 논의되는 정치를 기대한다. 청년도, 노인도, 소수자들도 지속 가능한 삶을 상상할 수 있기를. 총선이 다가온다. 심판론만 들먹이지 말고 누가 더 지속 가능한 사회를 그릴 수 있는지 토론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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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기 2016-03-17 18:10:28
심판론이라는게 잘 와 닿지 않니더 무슨 의미인지? 야당이 말하는 정권 심판론이라면 그 말이 일이있는 말이 될 수 있으나, 화살의 방향을 칼자루를 쥔 쪽으로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청년정책의 입안은 칼자루를 쥔 쪽에서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물론 대안도 없이 심판론을 들먹이는 것도 문제이긴하다. 오늘의 젊은 청춘들이 핼조선에서 탈출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곳을 천국으로 바꿀수있는의식의전환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