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만큼 삐삔네로 살아도 우린 친구데이"
안동·예천 경계없는 새랄과 구담리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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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예천 경계없는 새랄과 구담리를 가다
  • 권기상/배오직
  • 승인 2016.03.3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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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청년기자연합 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3)

지난 2008년 6월 경북도청 이전 예정지 발표를 시작으로 2011년 10월 신도청 이전을 위한 1단계 공사가 착공됐다. 그리고 지난 3월 10일 경북도청은 안동시 풍천면 도청대로 455번지에서 개청식을 가졌다.

경북도청은 1896년 을미개혁을 시작으로 120년 동안 대구시에서 더부살이하며 정치, 행정, 사회를 비롯한 300만 도민의 삶을 지탱해 왔다. 조선의 멸망과 함께 들이닥친 식민통치라는 억압과 통한의 세월을 시작으로 6·25를 겪고 전쟁으로 움푹 폐인 폐허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경제성장을 이룩하며 지난 한 세기가 넘는 역사를 써왔다.

대구살이를 하며 도청이전이라는 과제를 실천하기까지는 수많은 인재들의 녹록치 않은 과정의 힘과 노력이 들어갔다. 그중 신도청이 지금의 안동·예천으로 결정된 주요요인에는 두 지역이 화합된 힘으로 공동의 이익과 발전을 함께 할 것을 천명했던 것이 주효했다고 알려져 있다. 풍천면 가곡리와 호명면 산합리 두 시·군경계가 접경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안동·예천이 공동으로 경북발전의 새로운 축을 자처한 것이다.

사실 이 지역과 인근은 안동과 예천을 접하며 가장 가까운 교류와 협력의 문화가 많은 곳으로 주민들의 삶과 문화가 공존하며 녹아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 접경지역을 따라 형성돼 있는 근·현대시기를 위주로 안동과 예천의 공통생활사와 각 지역민들의 삶을 찾아보았다.

안동시와 예천군을 경계하는 접경지역 중에서 구담리와 자연부락인 새랄이라는 곳은 근대이후 양 지역의 행정단위를 공유하며 살고 있는 곳으로 손꼽히는 동네다. 구담리는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와 예천군 지보면 암천리 주민들이, 새랄은 안동시 풍산읍 오미2리와 예천군 호명면 본리 주민들이 근대이후 함께 한 마을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다.

특이한 것은 구담동과 새랄은 한동네에 접경되는 지역이라는 겉모습은 같았지만 주민들의 생활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구담리는 행정경계가 무너진 반면 새랄은 두 지역의 경계가 개울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구담리에는 규모가 작은 신풍리 사람들이 구담으로 흡수되는 반면 새랄에는 오미2리와 본리의 규모가 비슷해서 각기 구락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품앗이나 두레형태의 공동생활양식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새랄, “이북하고 똑 같다 카이!”

자동차를 타고 34번 국도를 타고 풍산읍에 내려 경북도청의 배산인 검무산 북쪽 뒤편을 보며 924번 지방도로를 따라 호명면 방향으로 약 10여분 가다보면 우측으로 본리, 큰마, 밭마라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마을 입구에 설치된 버스 정류장에는 본리(새랄)라고 적혀 있다. 표지석 뒤쪽으로 임시로 매어 놓은 현수막이 여기가 안동과 예천의 경계임을 알려주며 펄럭이고 있다.

▲옛 자연부락 지명인 새랄 동네 앞 도로에는 본리라는 예천지명의 표지석과 정류장이 예천 땅임을 알리고 있다.

본리, 새랄은 예천군의 옛 지명인 위라면(位羅面)으로 위라면 소재지가 있어서 본마라고도 불리었다. 하지만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자연부락인 새랄과, 가른밭, 밭마를 병합해 본리로 만들었으며 호명면에 편입됐다. 이때에 소재지도 호명면 오천으로 옮겨졌다.

새랄이라는 지명은 다른 지명인 사리울, 사라, 위라곡, 본동이라고도 했다. 이 마을은 옛날 삼한시대 때 사기점이 있어서 사라울이라 했는데 이것이 변해 사라, 새랄이 됐다. 옛 위라면 소재지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민가가 들어서 옛 모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연로한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구전되고 있다.

▲새랄 입구에서는 당산주 5그루가 마을을 안으며 지키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가 1972년 예천군 보호수로 지정됐다는 표지석 뒤로 총 5그루의 당산목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중 두 그루는 약 20년 정도 자란 것으로 오래된 당산목이 죽어가는 것을 우려해 마을주민이 기존 나무의 씨를 받아 새로이 심은 것이다.

정월대보름이면 본리 주민들만이 제물을 마련해 동제를 지내고 음복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자연부락인 새랄은 마을 중앙에 세로로 흐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동쪽은 안동, 서쪽은 예천이다. 개울을 따라 행정구역 경계가 한마을을 가르고 있다. 안동 쪽 마을은 풍산읍 오미2리며 예천 쪽은 호명면 본리다. 1914년 이전에는 마을전체가 예천군이었다. 새랄에는 예천 임 씨와 최 씨, 안동 김 씨 세 개의 성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당산주를 뒤로하고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곳곳에 무너져가는 낡은 흙벽돌집과 창고가 많이 보여 사람들의 운기가 이미 오래된 것을 짐작케 한다.

전성기에는 마을 전체가 200호가 넘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수가 많지 않다. 본리에 약 50세대, 70명 정도만이 남아 있으며 오미2리에는 약 30여 세대에 50여명만이 있을 뿐 나머지 가구들은 주인이 없는 빈집으로 허물어지거나 공터인 곳이 많다. 마을 곳곳에 보이는 흙벽돌로 지은 집과 창고, 건조장 등은 마을의 공동화가 오래전 진행된 것을 짐작하게 했다.

오미2리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92세 최 씨 할머니는 “마을에서 젊은이를 본 지가 오래됐다”며 마을이 너무 조용하단다. 그리고 본리와 한 동네지만 동네잔치나 윷놀이와 같은 행사를 행정구역이 달라 따로 치러야 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어릴 적 할배나 웃어른 때에는 새랄마을 전체 주민들이 꽹과리, 징, 풍물을 치며 다 같이 어울려 놀았는데 마카 죽고 나니까 젊은이도 떠나고 이젠 그런게 없어 졌어”라며 말해 주었다.

▲마을이 너무 조용하다며 웃어 보이는 오미2리 최 씨(92) 할머니.

복개한 개울 위 콘크리트경계를 따라 마을 안쪽으로 끝자락에 들어가면 왼편으로 예천 청주 정씨 재실이 예천 주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안동 쪽 야산에는 예천의 대표적인 충(忠)을 상징하는 인물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재실 앞에서 방문자를 맞이하는 두 개의 안내문에는 안동의 정탁 묘와 예천주소의 재실을 소개하고 있다. 재실(齋室)은 17세기 후반 정탁을 추모하고 제향하기 위해 손자 정시형이 세웠으며 새랄의 배산인 광석산(廣石山)아래 남남서향을 바라보고 있다.

▲새랄 동네 중앙으로 흐르는 복개천을 따라 올라가면 안쪽 끝 예천군 호명면 본리에 위치한 예천 청주정씨 재실 입구.

약포 정탁은 1597년 선조 30년 2월 당쟁의 희생으로 모함에 빠진 이순신이 서울로 잡혀와 죽음에 직면했을 때 선조에게 그의 출중한 무예와 인격을 논하며 목숨을 구해준 일화가 유명하다. 정탁은 몇 명되지 않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안동의 서애 류성룡과 함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정승의 자리에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높은 솜씨를 발휘한 대학자이자 명재상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순신을 추천 발탁한 사람이 류성룡이었다면 모함을 받고 죽음 직전에 놓인 이순신을 살려낸 사람은 정탁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천군 용문면 버들밭 외가에서 태어난 정탁은 9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버지와 안동군 와룡면 지내리로 옮겨갔다. 이후 20세 되던 해 그와 가족은 다시 예천군 예천읍 고평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7년 동안의 안동체류기간이 그에게 있어 학문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 시기여서 17세에 퇴계를 찾아 수학했다.

그는 안동의 퇴계로부터 심학(心學)의 요체와 도학의 참된 뜻을 배우고 익혀 큰선비로 성장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그는 성현의 길을 따라 이기론 중심의 정통 성리학뿐 아니라 경학, 지리, 병서, 상수 등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병학분야에 탁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천 청주 정씨 재실 맞은편 안동 땅에 위치한 약포 정탁의 묘.

조선시대에는 예천이었던 오미 2리 약포의 묘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이여송 장군의 풍수참모 두사충을 구명해준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두사충은 병영의 진을 잘못 쳐 벽제관전투에 패전한 책임으로 참수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당시 우의정이었던 약포가 이를 보고 노력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주었다. 이에 두사충은 구명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정탁의 집터와 신후지지(身後之地. 생전에 미리 장만한 묏자리)를 정해 주었다.

두사충은 경북 문경군 동로면 생달리 반송근처에서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을 발견, 정확한 지점을 약포 하인에게 "반송이 있는 곳으로부터 백보지내(百步之內)"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연주패옥혈은 옥으로 만든 망건 관자 세말, 금관자 세말이 나온다는 명당을 일컫는 말로 조선시대에는 각 신분에 따라 관자 재료의 사용이 제한됐는데 정 1, 2, 3품의 당산관은 금, 옥관자를 하고 정3품 이하 서민들은 뼈, 뿔, 호박 등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에 낙향한 약포는 하인에게 두사충이 정해준 신후지지를 물었다. 반송부근에서 하인이 손으로 갈전동 쪽을 가리키며 신후지지를 말하려는 순간 말이 갑자기 하인에게 뒷발길질을 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나의 터가 아니구나?"라고 탄식하며 돌아온 뒤 이곳에 안장됐다고 한다.

▲새랄 마을 공동배수지에서 내려다 본 마을 중앙부분 전경.

약포의 묘를 뒤로하고 내려와 본리마을 회관으로 행했다. 당산주가 있는 마을 입구에서 우측골목으로 약 100여 미터를 들어가면 오미2리 마을회관이다. 본리마을회관은 당산주를 좌측으로 약 150미터 정도 돌아가면 마을 앞 넓은 들을 바라보며 들어서 있다.

한마을에 안동과 예천으로 나눠져 있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에 최고령의 96세 할머니는 “이북하고 똑 같다 카이! 안동사람은 예천 땅을 안밟을 수 없고 예천사람은 안동 땅을 안밟을 수 없고....... 근데 한 동네를 갈라 노이 노는 것도 시시마큼 삐삔네로 놀고 좀 안됐지 뭐!” 라며 공허한 웃음을 보였다. 18세 꽃다운 나이에 안동 풍산읍의 신양에서 시집와 한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어도 본리사람들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오미2리를 그냥 ‘안동땅’이라고만 한다고 했다.

지금은 대형마트나 편의점들이 많지만 근·현대만하더라도 시골은 생필품을 살 수 있는 곳은 오일장이었다. 장은 주요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고 생활권역을 가늠하게 한다. 지금의 새랄 주민들은 버스가 안동에서 마을까지 들어와 풍산장과 안동장을 다니고 있다. 하지만 버스가 운행되지 않았던 근대, 할머니들이 어리거나 시집온 시절에는 봇짐을 머리와 어깨에 이고지고 마을 뒷산인 광석산, 일명 열쓱이재를 넘어 예천장을 다녔다. 옛날에는 숲이 우거지고 도적들이 많아 최소 10명이 모여야 재를 넘었다고 해서 열쓱이재라고 할머니가 귀띔해 주었다. 인근 산합리 쪽의 주민들도 뒷산 재를 이용했다. 오미2리 주민들은 풍산, 예천, 구담장을 왕래한 반면 본리 주민들은 대부분 예천장을 이용하였고 간혹 구담장도 넘나들었다.

▲예천 본리마을회관 마을 어르신들이 취재에 응해주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장날에는 주로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과 잡곡들을 가지고 장을 보고 돈이 없어 점심도 못 먹고 산을 넘어 다녔다고한다. 아낙들은 목화 길쌈과 양잠으로 허리가 휘었던 시절을 되뇌며 한숨을 섞어 말을 이어갔다. 새랄 뒷산인 열쓱이재를 넘어 뒤편 직산리에 양잠협동조합이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에서 양잠이 성행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호명면 주민지원센터의 한 직원은 “새랄은 양쪽으로 나눠져 있어도 길흉사와 마을일은 함께 해요”라며 “그런데 양쪽 세가 비슷해 한 동네라기보다 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세히 들어보면 말씨 같은 경우도 조금 다르고 주민들 간 왕래도 다른 마을처럼 그렇지는 않다”고 일러 주었다.

실제 본리마을회관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말을 더듬어 들어보면 상주방면의 ‘여’자 말투를 미약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미2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본리마을회관에 갈수 있다고 한 반면, 본리할머니들은 안동땅 마을회관에는 가지 않는다고 말을 해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안동·예천 행정개편으로 한 동네가 되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에는 “알 수는 없지만 그래 되믄 좋지!”라며 주저한 대답이지만 한마음을 보였다.

▲구담리 맞은편 낙동강건너에서 바라본 전경.

안동·예천 경계 없는 구담동

차량을 타고 새랄을 빠져나와 호명면 오천동 홍구삼거리에서 957번 지방도를 따라 남쪽으로 약 10여분 이동하면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에 이른다. 예천군 지보면 암천리 강정마을과 접경한 지역이다.

이곳은 안동, 의성, 예천 3개 시·군이 인접한 경계에 위치한 까닭에 조선시대 이래로 행정관할 지역이 세 번이나 바뀐 동네다. 조선 때에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안동군 풍산면에 편입됐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예천군 지보면 신상면 암천리의 일부와 호명면 금릉동의 일부를 병합해 구담리를 만들었다. 이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 때에는 안동군 풍서면에서 풍천면으로 편입됐다.

현재 행정구역은 구담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1리에는 120여 세대에 21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2리에는 약 230여 세대에 45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는 마을이다. 주민들에 의하면 가장 번성기에는 500호가 넘었을 만큼 풍천면에서는 가장 큰 생활지로 알려져 있다. 1927년 4월6일자 동아일보 사회면을 보면 근대시기에도 약 300호가 넘는 큰 동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산 김씨(담암공파)와 순천 김씨(국담공파)의 집성촌으로 반상(班常)이 존재해 빈부격차가 심했으며 타성의 진입이 어려웠고 텃세가 강한 곳으로 인근에서는 유명하다.

큰 동네였던 만큼 구담에는 자연부락도 많다. 1리에 거뭇개, 뒤지골, 안골 등 3개가 있고 2리에는 섬마, 시장 등이 있다. 거뭇개(玄浦) 혹은 검은개는 구담리의 동쪽 첫머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낙동강유역에 자리함으로써 홍수로 인해 강물이 범람할 때마다 이곳에 검은 흙이 쌓여 들판을 이루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뒤지골 혹은 뒤주골, 뒷골(杜洞)은 거뭇개 서쪽에 있는 마을로 1700년 경 김덕생(金德生)이라는 큰 부자가 살았는데 생산한 양곡을 집에 다 쌓지 못해 이곳에 큰 창고를 짓고 곡물을 보관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마을의 이름을 곡식을 보관하는 뒤주에 비유해 붙여졌다. 동산말량은 뒤지골 서쪽 산등성이에 마을이 있어서 부르게 됐다. 안골(內洞)은 마을 중앙에 위치하는데 남북으로 비탈지게 깊숙한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 지어진 이름이고 뱃나들(舟津)은 안골 앞에 있는 곳으로 마을 앞 낙동강에 나룻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다. 섬마(島村)는 안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1640년경에는 류 씨들이 많이 살았는데 성씨에 쓰는 버들 유(柳)자의 버들은 물가 또는 섬에서 잘 자란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구담은 낙동강의 흐름에 의해 생긴 아홉 개의 깊은 소(沼)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조선조 가뭄으로 인해 농사를 위한 연못 9개를 만들었다하여 유래됐다는 설이 구전되고 있다.

1900년대 초반까지 양반 지주들은 마을의 중앙인 안골에 터를 잡았고 뒤지골, 장터 일대에는 주로 소작이나 장사를 하는 타성들이 안착했다. 당시에는 집성인 양 김 씨의 3, 4가구가 구담의 토지 90%이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소작농이 많았다고 한다.

▲구담리 뒷산에서 서쪽에 위치한 강정 - 사진 중앙의 소나무 숲을 중심으로 좌우 뒤편.

구담과 접경해 있는 예천군 지보면 암천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동군 풍서면의 구담리 일부를 병합해 만들었다. 특히 구담동과 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 자연부락 강정은 낙동강변에 자리 잡은 암천리 남동쪽 마을이며 강정(江亭)이라는 정자(亭子)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강정에는 현재 도청이 들어와 산을 깎고 빌라와 여관 등이 들어서면서 약 40여 가구에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10가구가 채 되지 않았다. 강정은 풍천초등학교 옆으로 흐르는 개울을 경계로 안동과 나누고 있지만 주민들에게는 의미가 크지 않다. 마을행사나 길흉경조사 등 경계 없이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담리 마을 안에 예천군 지보면 이정표가 행정경계를 알리고 있다.
▲현대화 된 구담시장

구담리에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1910년대 초반부터 장이 형성돼 4일, 9일 닷새마다 장이 열렸다. 근·현대에는 그 규모도 제법이어서 경상도 장사꾼들에게는 꽤 유명했다. 구담장은 다른 지역에 비해 물건 값이 싸고 양도 많아 인근 시·군에서 모인 장꾼과 장사꾼, 각종 난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근대시기에는 낙동강 하구인 부산에서 이곳까지 소금배가 오르내리며 소금과 해산물을 구담의 농산물과 물물교환도 이루어졌다. 구담 인근 농산물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쌀, 사과, 마늘, 고추, 땅콩 등이 많이 생산됐다.

“장날이면 걸어 다니질 못하고 밀려다닐 정도로 사람이 많았지. 오후저녁 때면 마구 술 취해서 구부르고 난리가 아니었어. 술 먹고 취해서 온 동네를 쓸고 다녔어.......허허” 약 60 년 가까운 터줏대감이라고 자처하는 구담한약방 김 씨 할아버지가 예전 성시를 이루었던 시절을 말해주었다.

예전에는 강정마을에서 닭전이 열렸고 전이 커지면서 돼지, 소, 곡물까지 각종 난전과 모전이 늘어났는데 결국 장소가 좁아져 6.25전쟁 이전에 지금의 장터로 이전하게 됐다. 처음에는 구담 양반들이 사농(士農)을 중시하고 공상(工商)을 천하게 여겨 장을 마을 안에 설 수 없도록 해 마을 강변 모래사장에 들어섰다. 이후 시장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활성화되면서 시장 안에는 장옥과 가설영화관이 생길 만큼 번성했다.

▲구담동 앞 낙동강에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여름에는 배를 타고 겨울에는 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사진. 풍천초등총동창회)

1975년 8월 6일자 경향신문의 사회면 기사에 따르면 구담1,2리는 예부터 낙동강 상류 요충지였으며 지역에서 생산되는 각종 농산물의 집산지였다. 또한 초겨울이 되면 엉성한 나무다리를 놓지만 워낙 교통량이 많아 얼마 못가서 군데군데 부서져버리기 때문에 겨울철에도 주민들은 맨발로 강물을 건너는 일이 많았다. 이에 따라 교량가설은 인근부락 10개동의 2천3백여 가구 1만2천여 주민들이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된다고 기록해 현대시기의 인근 마을규모와 구담동의 비중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학교와 의료기관, 금융기관이 있어서 인근 지역에서는 주민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구담1리 노인정에서 만난 86세 할머니는 “옛날다리가 노이기 전에는 배 타고 강 건너 댕기며 농삿일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지. 애를 마이 먹었지. 힘도 마이 들고....... 다리 놀 때는 추왔는데 부역으로 마이 나가서 돌도 마이 나르고........ 그래도 그 나부레 마이 벌어먹었지 뭐”하고 허허 웃어 보였다.

할머니는 나무다리를 11월 초·중순경에 추워지기 시작하면 설치하고 봄에는 비에 떠내려갈 것을 염려해 동민들이 함께 철거했다고 했다. 마을 앞 구담교는 1977년 10월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340m의 새마을 대교로 가설돼 교통과 경제권의 요충지로 발전했다.

지금은 좁은 안동·예천 경계가 된 개울은 어릴 적 동네주민들이 모여 빨래를 할 만큼 물이 많았다고 한다.

“여름에는 물이 많아 배까지 차서 빨래를 못했고 동네 우물에서 했지요. 겨울에는 빨래방맹이에 얼음이 덩기덩기 붙어가 얼음위에서 빨래를 하고 그랬지요. 뭐, 으이그 추와라! 하하”웃으며 몸서리를 쳐 보이기도 했다.

▲1939년 풍천초등학교는 시북정에서 1학급으로 개교했다.(사진. 풍천초등총동창회)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말에 할머니는 “우리 초등학교 들어 갈 땐 하회에 있는 풍남초등학교에 등록하러 갔고 마을 중간에 있는 시북정에 모여가 공부하다가 학교가 다 지어가 들어 갔지”라며 당시에는 예천·안동 관계없이 인근지역에서 모여 한 학급에 80명이 넘는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실제 풍천초등학교는 1939년 5월 10일 시북정에서 1학급으로 개교했다. 시북정(市北亭)은 구담1리 장터 뒤편 마을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선조 때 호조참판을 지낸 신빈(申賓)이 주택을 지으면서 대청을 정자식으로 건립했다. 후에 주택이 김종영에게 양도되면서 그의 아호로 정자 이름을 지었다.

구담에서 나고 자라 시집간 할머니는 그동안 15년 정도를 객지생활하고 돌아와 구담을 잘 안다고 입담을 늘어 놓으셨다. 노인정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근·현대 구담리와 강정의 이야기는 경계를 두지 않고 살았고, 지난 근대이후의 많은 굴곡을 이겨낸 기센 동네임을 알려주었다.

취재를 마무리하며 대중가요 '안동역에서'로 유명한 김병걸 작사가의 노래 중 '검정고무신'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이 가사의 무대가 구담장이라고 한다. 김병걸 작가가 어릴 적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가사다. 가사에서는 민초들의 어렵고 힘들었던 지난 삶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며 다독이고 있다.

보리쌀 한말 이고 장에 가면 사오려나 검정고무신

밤이면 밤마다 머리맡에 두고 고이 포개서 잠이 들었네

잃어버릴라 닳아 질세라 애가 타던 우리 어머니

꿈에서 깨어보니 아무도 없구나 세월만 휭휭 검정 고무신 우리 어머니

 

권기상(FMTV 경북총국 편집부장)/배오직(경북인뉴스 객원기자)

[안동청년기자연합·안동아카이브연구회 공동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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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2016-10-01 16:32:10
잘 읽었니더~ 지역의 근현대사를 한 눈에 알 수 있었니더^^
그런데 부락이하는 말이 자꾸 나오는게 눈에 거슬려서....사전을 찾아보시면 아마 다시는 안쓸 말 이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