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2 화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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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지역 길 위에 피어있는 근대의 추억’
사람들의 신산스런 삶의 자취는 계속 이어진다
[안동청년기자연합 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4)
2016년 04월 01일 (금) 16:31:39 백소애/정운홍 sodoors@daum.net

 

 

►안동시 풍산읍 괴정리 수박골과 예천군 호명면의 경계

길과 사람

길은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준다. 내비게이션이 일상화된 지금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운전석 차창을 내리고 혹은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다. 옛길의 흔적까지 기계가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비게이션은 안동의 나이야가라 식당, 구농고 사거리, 안동사범학교, 아카데미극장, 문화회관, 예천의 명성극장과 같은 곳을 모른다. 더러는 옛길을 복원하기도 하지만 옛길은 점점 사라지고 각 지자체는 경쟁하듯 산책로를 개발하여 관광화 하고 있다.

길은 사람이 평생을 다녀도 다 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옛길에 대한 추억은 쌓이고 새로이 생기는 길에는 또 수많은 사연이 남겨질 것이다. ‘한 명의 노인이 사라지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격언이 있다. 옛길과 옛집, 옛 지명과 상호를 기억하고 사연을 말해주고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세대의 시대가 저물고 가고 있다.

안동시 도산면 태자1리에는 30~40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버스가 들어왔었다. 시골마을에 학생들이 없어지고 가구 수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버스는 끊겨졌다. 그러다 한적한 이 시골마을에 몇 해 전부터 버스가 다시 운행을 재개했다. 태자1리에서 동네반장만 45년간 했던 금용탁(78) 할아버지는 집 앞 텃밭을 무료로 제공해서 버스 정차장으로 쓰게 했다. 주민들 민원 덕에 어렵사리 재개된 버스운행이 혹여 손님이 없어 취소라도 될까 싶어 특별한 용무가 없이도 마을사람들은 번갈아 가며 버스를 타고 안동시내에 다녀오기도 했단다. 녹전이 고향인 김노미 할머니(77)는 당시 태사리로 길이 안 났을 때라 열아홉에 재 넘어 금용탁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예안까지 장 보러 가자면 토끼길 같은 고갯길을 삼십 리나 걸어서 다녀와야 했다.

도산면 가사리에 사는 이일영(81) 할아버지도 비슷했다. 열일곱에 녹전까지 가마꾼 둘을 사서 사십 리 길을 걸어 한 살 많은 박복남(82) 할머니한테 장가들러 갔다. 빈 가마를 메고 가던 중간에 장에 들러서는 가마꾼에게 술 두 되에 고기 안주를 사주고 마을 입구까지 가마를 얻어 타고 갔다. 무사히 초례를 치르고 새신부는 가마를 타고 시집을 왔다. 촌에서 가마까지 타고 시집 왔으니 호강했다 싶지만 산 넘어 비탈길 가마 속에서 이리저리 부딪치고 아파도 새신부가 싫은 소리도 못 내겠고, 차라리 걷는 게 나을 뻔 했다는 할머니. 그게 벌써 64년 전 1953년도의 일이다.

   
 
 

►1976년 12월 27일 새벽4시에 치러진 도산면 서부리 강석수씨의 전통혼례 사진. 대낮에 했더라면 마당은 물론이고 길모퉁이며 담벼락에 구경꾼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도산면 서부리에서 예안이발관을 운영하는 강석수(67) 씨는 서부리의 유일한 이발사다. 수몰 전 예안에서부터 이발 일을 한 그는 1970-80년 호시절을 기억한다. 장날에는 인근의 도산, 녹전, 온혜 사람들로 인사태 났다. 이발사 네 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에 7~80십 명을 이발했고 직원들은 돌아가며 밥을 먹어도 정작 사장인 그는 점심을 거르는 일이 허다했다. 예천이 고향인 옆지기 엄영자(65)씨와는 1976년 12월 27일 새벽4시에 집 마당에서 결혼을 했다. 혹한의 추위 그것도 새벽시간에, 아들 귀한 집이라며 어머니가 좋은 날과 시를 받아 왔다는 게 하필 그 날 그 시간이었다. 새벽 4시에 치른 전통혼례에 사람도 닭도 음식도 꽁꽁 얼었다. 함지기 친구가 실랑이고 뭐고 간에 함을 벗어던지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장병호(84) 할아버지는 예천군 호명면의 중심지인 오천리 터줏대감이다. 지대가 낮아 비가 조금만 내려도 내성천 물에 잠기기 일쑤인 오천에서 격동의 한세월을 살아오신 분이다. 지보면이 고향인 조봉희(85)할머니와는 1951년 중매로 결혼했다. 안동가톨릭농민회의 초창기 활동 회원인 그는 1963년 온 가족이 개종하며 오천공소의 탄생을 도왔다. 당시 명동성당 집회에 가기 위해 대로로 가지 않고 소릿길로 이리저리 피해서 갔다. 비 내리던 어느 날, 그의 행방을 파악하고 있어야했던 파출소장이 자전거를 타고 이리저리 그를 찾아 나섰다. 마침 들일을 하고 있던 그를 발견하곤 민망하여 담배 한 보루만 전해주곤 돌아서 가던 뒷모습을 마을길이 끝날 때까지 그저 바라본 적도 있다. 길은 이렇게 갖가지 사연과 역사가 함께 한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 안동과 예천의 경계에 섰다. 우리는 그간 같은 문화권 안에 있으면서도 그 교집합 점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었다. 문경에서 뻗어온 34번 국도는 예천을 지나 풍산을 거쳐 안동시내를 관통해 영덕까지 이어지고 경계 없이 넘나드는 시내버스는 매일 두 지역을 오가건만 우리는 지도상 금그어놓은 그 경계에서 멈칫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문화가, 이바구와 전설과 길과 도로와 사물, 그 많은 것들이 옛날과 근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우리는 지금 지역과 사람, 문화를 이어주는 옛길을 통해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길 위에 피어있는 근대의 흔적을 추억하고 주막, 나무, 버스, 정류소, 옛집, 사람살이 등을 통해 안동과 예천 이 예사사람들의 신산한 삶의 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과거 조상들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걸으며 생겨난 길, 일제강점기 침탈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길, 근대 산업시대에 경제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길 등 시대의 흐름과 목적에 따라 변화된 길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떤 의미로 기억되고 기록되고 변화해왔는지를 살펴본다.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고 부려지고 해체되고 통합되는 길 위의 인생을 통해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길에 얽힌 사연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영남대로와 옛길 그리고 신작로

영남대로는 옛날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다니던 길 즉 조선시대 부산에서 한양으로 이동할 때 영남지역을 거쳐가는 길을 말한다.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던 영남대로는 서울 남대문에서 부산의 동래에 이르는 960리 길로, 조선시대 9대 간선로 가운데 하나였다. 영남대로는 대개 도로의 폭이 넓은 곳은 10미터, 중간은 7미터, 좁은 길은 3미터쯤이며 한강과 낙동강의 물줄기를 따라 이루어졌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서울과 부산간 신작로의 모체가 되고 오늘날 교통망의 근간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1918년 편찬‧발행한 1/50,000 안동지도 (사진제공:종로도서관)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1918년 편찬‧발행한 1/50,000 예천지도 (사진제공:종로도서관)

『대동여지도』에 보면 영남대로는 부산에서 대구-상주-조령-충주-용인-서울로 이어졌으며, 실제로 걸어서 가면 14일이 걸렸다고 한다. 이 길은 경상도 58개 군현, 충청도와 경기도의 5개 군현에 걸쳐 있었고, 29개 지선이 이어져 있었다. 영남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영남대로 외에도 영천과 안동을 지나 죽령을 넘어 서울로 가는 영남좌로와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서가는 영남우로가 있었다. 서울까지 걸어서 가면 영남좌로는 15일, 영남우로는 16일이 걸렸다고 한다. 현재 온전히 남아있는 영남대로 구간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 구간이 방치되거나 개발로 인해 변형되고 흔적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없어져버린 상태다.

영남대로 예천구간은 지보면 대죽리-지보나루-의성 다인 진도나루-반정고개-풍양면 우망리-풍양면 흥국재-삼강나루를 잇는 60리(24km) 길이다. 이 길로 곧장 가면 문경새재와 연결되는 토끼비리(토천兎遷, 토끼벼루)가 나온다. 당시 예천읍을 비롯한 풍양면, 지보면, 호명면과 안동 의성 주민들은 이 길을 따라 한양으로 갔다.

개항기 이전 경상도지역의 도로교통체계는 동래로(문경-대구-동래), 영해로(문경-영덕-영해), 울산로(상주-의성-울산), 통영로(상주-김천-창녕-마산-통영), 통영별로(함양-진주-고성-통영) 이렇게 5개 노선으로 나뉘었다. 영해로는 안동까지가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갈 때 거치는 길로, 수륙교통의 허브인 안동에서 영해 사이는 상품 유통로의 역할을 했고 영해는 동해안 일대를 수호하는 군사적 거점이라 간선도로로 정했다고 한다. 개항 후 1911년~1938년 사이에 건설한 도로 중 1등도로는 상주~칠곡구간과 대구~부산구간이 2등도로는 진주~상주선, 안동~영덕, 동래~경주구간 등이다. 그밖에 각 도에서 3등도로를 건설하면서 경상도의 도로망은 현재의 틀을 거의 확립했다. 1938년 이후의 도로건설은 도로등급에 의해서가 아닌 관할별로 국도(도로등급제 1·2등도로), 지방도·부도府道(3등도로), 읍·면도(등외도로)로 분류했다.

안동부는 옛날에 둘레가 있는 2,947척(893m) 높이 8척(약2.4m)이나 되는 성으로 싸여 있었고, 동서남북의 4대문이 있었다. 동문은 동문동에, 서문은 서문동 서문교에, 남문은 남문동에, 북문은 북문동 북문교에 있었다. 도로는 성곽을 중심으로 동로 서로 남로 북로가 있었는데, 동로는 개목(犬頂)에서 금소역, 서로는 서문에서 풍산(안교역), 남로는 영호루에서 일직(운산역), 북로는 석수암에서 옹천역까지였다. 국역 『영가지』에는 안동을 ‘동로(東路) - 견항로에서 금소역에 이르는 30리, 금소역에서 배방리의 청송부 경계에 이르는 40리, 견항로에서 임하현에 이르는 30리, 임하현에서 추현의 진보현 경계에 이르는 30리, 임하현에서 동산현의 영양현 경계에 이르는 40리’ ‘서로(西路) - 모은루(慕恩樓, 세조 때 부의 서쪽 5리에 세워진 누정)에서 풍산현에 이르는 30리, 풍산현에서 백야현의 예천군 경계에 이르는 10리’ ‘남로(南路) - 영호루에서 일직현에 이르는 30리, 일직현에서 오야기현의 의성현 경계에 이르는 15리’ ‘북로(北路) - 석수암에서 옹천역에 이르는 35리, 옹천역에서 풍현의 영천군 경계에 이르는 25리, 송저현에서 감마의 예안현 경계에 이르는 20리’라 설명하고 있다.

안동시의 도로는 1965년 40,710km이며 포장율이 8.0%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에는 72,932km로 연장되었으며 포장률은 72.9%로 크게 개선되었다. 포장률은 1970년 30.9%, 1975년 65.4%로 증가한 이후 1980년대에 60~70%대를 유지하였다.

근대의 길은 ‘신작로(新作路)’에서 시작된다. ‘신작로’라는 단어는 요즘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국어사전 속의 ‘신작로’는 ‘새로 만든 길이라는 뜻으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새로 낸 길’ 혹은 ‘큰길’을 이르는 말이다. 신작로는 일제강점기 때 강탈을 목적으로 우리 국토에 많은 길을 새로 내게 되면서 사용된 말로, 국토의 균형발전이 아닌 수탈과 편의 위주의 도로 정비가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안동의 최대번화가인 안동 중앙통. 조흥은행 쪽에서 목성교 방향으로 본 사진이다. 집과 상가마다 일장기가 걸려있고 오른편으로는 목욕탕이 보인다. 사진:사진으로 보는 근대 안동(서문당)

일제는 주로 내륙과 항구를 연결하고, 농산물이 풍부한 지방도를 개수해 침략과 수탈의 수단으로 삼았다. 1906년 3월 일제는 전국의 주요 도로를 개수하는 전국 도로 개수 계획을 세웠는데 이 시기에 개수되고 신설된 도로를 ‘신작로’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 정조 15년(1791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는 ‘暗行御史(암행어사) 鄭東觀(정동관)이 입시하여 新作路(신작로) 닦는 일에 부역한 백성들의 삯이 균등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 논의함(1791-01-21(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종실록 42권, 고종 39년 9월 6일 양력 1번째 기사에도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가 아뢰기를, “각릉의 재관(齋官)들이 연이어 올리는 보고에 의하면, ‘건원릉(健元陵), 현릉(顯陵), 목릉(穆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경릉(景陵), 홍릉(洪陵)의 위토(位土)의 전답이 산릉의 해자(垓字)와 신작로(新作路) 안에 섞여 들어갔기 때문에 능을 지키는 군사들이 의존하는 바가 부실하게 될 것이라고 호소하느라 날이 갈수록 더욱 소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빨리 구획하여 수호군들이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해 주소서.”라는 내용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신작로는 일제강점기 때 ‘생겨난’말이 아닌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말’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고 추측된다. ‘새로 만든 길이라는 뜻으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새로 낸 길’이라는 국어사전 속 의미가 이미 근대 이후에 쓰인 말이라는 뜻이 되지만, 신작로는 조선시대 때부터 사람과 말, 수레가 다니는 길, 크게 ‘큰길’혹은 ‘새로 만든 길’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일제에 의해 진행된 도로조사에서 안동선은 함창, 용궁, 예천 그리고 동북부의 지역경제 중심지인 안동을 거쳐 다시 남쪽으로 가서 의성, 의흥을 지나 신주막에서 부산가도(영남대로)와 합류, 낙동강 상류 여러 읍치를 말굽형으로 연계하여 경부철도와 연계 편의를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이후 안동의 최대 번화가인 조흥은행 골목에는 이미 신작로가 닦여 있었으며 전신주가 세워져 있었고 벽돌건물의 은행거리 앞에는 자동차가 다니기도 하였다.

경북북부권을 대표하는 가장 큰 도시지만 ‘낙후’된 도시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안동. 안동과 교집합으로 이어져 내려온 예천. 예천군의 감천면은 ‘본래 감천현으로 고려8대 현종 때부터 안동부에 붙어서 계속 내려오다가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예천군에 편입되어 감천면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 안동부는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될 당시만 하더라도 본부(本府) 외에 임하현·풍산현·일직현·길안현·감천현·내성현·춘양현·재산현 등 8개의 속현(屬縣)과 개단부곡·소라부곡·소천부곡 등 3개의 부곡을 거느리고, 소령(所領)체제에 따라 영해·순흥의 2개 도호부와 예천·영천(영주)·영천·청송 등 4개 군 및 의성·영덕·예안·하양·기천·인동·봉화·의흥·신녕·진보·비안 등 11개 현을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종 25(1530)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속현은 변함이 없으나 소속된 부곡은 개단·소천부곡으로 소라부곡은 춘양현에 예속됨으로써 제외되었다. 이러한 안동부의 속현 및 부곡구성은 조선후기까지 그대로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신작로에 남겨진 근대의 추억

예로부터 각 마을입구와 중심지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가 있곤 했다. 안동시내 중심가 웅부공원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정무를 보던 안동도호부 관아가 있던 자리로,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되기 전까지 군청사가 있었다. 안동군청 앞 광장에는 굵고 잎이 무성한 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다. 세속에 이 나무를 ‘걱정나무’라고 일컬었다. 관아에 잡혀 오는 사람들은 죄인이든 무고한 사람이든 부사 앞에 불려가서 문초를 받을 때까지는 이 나무 밑에서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지은 죄가 있든 없든 일단은 불려서 온 입장이었기 때문에 초조함과 근심에 싸인 채 이 나무 그늘을 이용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나무를 ‘걱정나무’라고 불렀는데 훗날 광장에 초장을 할 때 흔적도 없이 베어 버려졌다.

1962년 안동 초대 민선읍장을 지낸 이상년 옹은 걱정나무를 정확히 회고했다. “당시 안동 읍내에는 걱정나무라고 불리는 회나무가 있었어요. 걱정나무 옆으로 법원이고 검찰이고 그 앞에는 경찰서고 군청이고, 또 그 옆으로는 세무서고, 전매서까지 대부분의 관공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지요. 그 회나무 아래에 바위가 있었는데, 관공서에 불려온 사람들이 그 나무 아래서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우며 걱정들을 한다고 해서 걱정나무라고 불린거죠. 나무 해 땐다고 군청 산림과에 불려왔다, 경찰서에 불려왔다, 밀조주 담가 먹다가 세무서에 불려왔다, 엽연초 피우다 전매서에 불려왔다, 사연들도 가지각색인 이들이 소환을 받고 불려 와서는 벌금도 내고 체형까지 받곤 했으니,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면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던 나무였어요.”

또, 안동군수 관사 뒤뜰에 있었던 지금의 영가헌 서쪽에는 높이 1.5m. 흉고직경 1.47m, 면적 33㎡, 수령 약 8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인 부신목(府神木)이 있다. 해마다 음력 정월 열나흘 자정에 제사를 지낸다. 옛날에는 안동부사가 제사를 모셨다하나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지금도 안동시장이 제주가 되어 매년 고유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군청사 오른쪽 지금의 대동루 서편에는 수령 약 200년 되는 회나무가 1주 있는데 이 나무를 해칠 경우에도 군청에 화가 생긴다는 전설이 있어서 청사 신축 시 건물 벽이 이 나무에 닿지 않도록 축조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안동댐 가는 길 입구 임청각 앞의 석주로 도로 한가운데 있는 수령 300년 넘은 신목 회화나무는 2008년 8월 22일 새벽에 훼손이 되면서 논란이 일었고 안동과 예천의 경계인 본리, 새랄마을에도 보호수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송천동 선어대 서북쪽 안동-영덕간 도로변에는 수령 350년의 모감주나무가 있다. 지방기념물 제50호(1983. 12. 29)로 지정된 이 모감주나무는 안동시 송천동 선어대 서북쪽 안동-영덕간 도로변에 있으며, 약 15m, 가슴높이의 지름은 약 37cm, 1974년 안동-영덕간 도로확장공사 시 2주는 제거되고 현재 1주만 남아있다. 또 안동시내에서 풍산읍을 지나 하회 가는 길목 가일마을 입구에도 풍산읍 계평리 웃절마을 입구에도 마을의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으며 예천으로 가는 길목 풍산읍의 맨 끝동네 괴정동에는 마을의 정자나무로 불리는 400년 된 보호수, 회화나무도 있다. 신도청이 들어서며 없어진 마을에도 마을 신작로 입구에는 어김없이 보호수가 있었다. 안동시 풍천면 갈전1리에는 할배나무가 오랜 세월 마을을 보호해주는 보호수 역할을 했으며 마을에서는 동신제를 지내기도 했다. 또 갈전3리 지당마을에는 안동권씨들이 그네를 맸던 회나무가, 원당에는 연안이씨들이 그네를 맨 참나무가 있었고 예천군 호명면 금능2리 비접골 입구에도 1972년에 지정된 보호수가 있었다.

예천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자기 명의의 토지세를 내는 소나무가 있다.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294호 천향리 석송령이 그것이다. 풍기 지방에 큰 홍수가 졌을 때 석관천을 떠내려오던 것을 지나던 과객이 건져 심었다는 전설을 지닌 600년 수령의 동신목으로, 1930년경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자기 소유의 토지 천4백평을 이 나무 앞으로 희사하고 사후에 묘지 관리와 봉제사를 부탁하고 죽었다. 이에 높이 약10m, 가슴둘레 4.2m인 이 석송령은 년간 9만 원 대의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 용문면 면사무소 앞 느티나무는 3.1운동 시위 출발장소였다. 예천권씨 문중의 권석인이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장터를 따라 시위 행진에 나선 역사 깊은 장소이다.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에 있는 석송령. 자기 명의의 토지세를 내는 소나무다.

대중교통수단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그 옛날, 말구루마도 잠시 쉬게 하고 사람의 허기를 달래주는 길 위의 사랑방이자 마을사람과 외지인들의 정보교환의 장소인 주막집. 들마루에 앉아 국밥에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합석한 이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도 듣게 되고 그렇게 들은 세상물정은 또 동네에 가서 알려주곤 했었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낙동강변에 있는 삼강나루는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던 선비나 장꾼들이 문경새재를 넘기 전 숨을 고른 곳이다. 이곳은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강이 합류하여 “한 배 타고 세 물을 건넌다.”는 말이 전해져 삼강이라 불렸다. 삼강나루터는 낙동강 하류에서 거둬들인 공물과 화물을 배에 싣고 와서 다시 수레에 실어 문경새재로 넘어가던 낙동강 물길의 마지막 나루터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낙동강 줄기를 따라 더 올라가면 안동과 강원도 내륙으로 연결된다. 강가 나루에는 한때 네 개의 주막이 영업을 했으나 점점 사라지고 삼강의 마지막 주모 유옥연 씨 홀로 주막을 지키다가 2005년 아흔 나이로 별세했다. 삼강주막은 1900년도 무렵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뱃가 할매’로도 불린 주모와 주막을 잊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추억을 갈무리할 요량으로 경상북도와 예천군은 이 주막을 문화재(민속자료 134호)로 지정하여 예천 삼강의 유명 관광지로 복원해 놓았다.

안동의 유명한 주막으로는 보릿고개를 들 수 있다. 안동에서 영주로 가는 국도 5호선을 따라 제비원미륵불을 지나 1.5㎞ 북쪽으로 올라가면 영명학교에 닿는다. 국도 5호선에서 영명학교 옆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을 따라 들어서면 오산리 고갯길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보릿고개이다. 보릿고개는 곧 맥현을 일컫는다. 맥현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주막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안동의 유흥동네로 인근에 소문난 주막거리 술 고개이다. 술집의 형태는 뱃집(일자형식)에 지붕은 대체로 초가집이었고 뒤안으로도 방을 달아내었다.

안동 시내에서 10여 분 거리에 위치한 맥현은 광복 후 통행금지가 시행되면서 크게 번성하였는데, 술좌석이 길어지는 남자들이 통금이 가까워지면 안동읍내에서 맥현으로 옮겨와 밤새워 술을 마셨던 곳이다. 성황을 누렸던 일제강점기 때는 탁주, 안동소주, 제비원소주와 일본에서 가져온 기린맥주, 아사히맥주, 청주 등이 있었으며 그 무렵에는 쌀이 귀해 집에서는 술을 빚지 못하게 하여 밀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1970년 중반기에 재건학교(현 영명학교)가 세워지고 도로확장공사가 시작되면서 차츰 주막들이 사라졌다. 당시 희망옥, 낙양옥, 진주집 등이 있었고 이를 운영하던 이들도 대부분 외지 사람들이었다.

   

►안동시 북후면 오산동 보릿고개의 주막 애주선당’이란 현판은 1924년 김주열씨가 쓴 것으로 적혀있다. (사진제공:문화모임 안동)

34번 국도에서

국도 제34호선 (당진 ~ 영덕선)은 충남 당진시 신평면 거산리 거산2교차로에서 경북 영덕군 영덕읍 덕곡리 덕곡 교차로를 연결하는 일반 국도이다. 총연장 310.8 km로 2차로, 4차로, 6차로로 이뤄져 있으면 충남 당진시를 기점으로 충남 아산시-천안시-경기도 안성시-충북 진천군-증평군-괴산군-경북 문경시-예천군-안동시-청송군을 경유하여 영덕군을 종점으로 한다.

1975년 10월 1일 안동군 임동면 망천리에서 영덕군 지품면 신안리까지, 문경군 산양면 반곡리에서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 6.26km 구간의 개통을 시작으로 최근 2015년 12월 21일에는 안동국도대체우회도로 안동시 서후면 교리에서 수상동 간 도로 8.3km 구간을 개통하였다. 서해안과 동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간선 도로의 하나이지만 노선 주변에 대도시나 관광․위락시설이 적고 도로 폭이 좁은 구간이 많아 중·장거리 간선 통행량은 적은 편이다.

안동과 예천을 가로지르는 34번 국도는 문경 이화령터널에서 문경새재 나들목을 거쳐 용궁의 가야교차로-개포교차로-유천면의 비행장교차로-예천읍내 농공단지사거리-호명면 직산터널-풍산읍 괴정2길-서안동나들목을 지나 막곡교차로-송야사거리-안동버스터미널-호암삼거리-경안중학교-송현오거리-경북하이텍고등학교(안동공고)-KBS안동방송국입구-태화오거리-안동우체국-제일은행 사거리-천리고가교 북단-안동초등학교-안동역-법흥삼거리-용상동-선어대교-송천 안동대학교-임하댐-중평삼거리-가랫재를 거쳐 영덕까지 이어진다.

안동시 도로망의 골격은 국도가 도시내 간선도로로 형성되어 있어, 동서간 교통류를 처리하는 경동로와 남북간 교통류를 처리하는 국도 5호선(의성-안동-영주)이 주간선도로의 역할을 담당하며, 서문로, 동문로, 강변도로등이 보조간선도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도로들이 그 기능을 효율적으로 이용되기 위해서는 도로기능에 따라 구성되어야 하나, 안동시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간선도로변에 상가, 공공시설, 고층건물의 출입구가 위치하고 있어 간선도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도로는 매우 적다. 더구나 도시구조가 단핵도시로 도시기능이 한곳에 편재되어 있어 도심통과의 간선도로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최근 자동차대 수의 증가로 안동권내에서도 도로교통량이 증가함에 따라 대부분의 간선도로가 포화상태에 이르고 있어 소통난, 주차난, 승차난 등의 교통문제가 심각한 상태 놓여 있다. 한국사회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국가주도의 산업화 및 근대화를 추진해 왔고, 그에 따라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식민지 시기 안동군은 지금의 안동시와 비슷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서 20개면 203개 동이 1931년에 1읍 15개면 218개 동으로 개편되었다. 면은 줄고 인구 증가에 따라 동리는 늘어났다. 면이란 전통시대에는 행정 단위가 아니었다. 때문에 향약이 발달해도 향회를 바탕으로 한 군단위 향약이고, 아니면 이동 향약이었다. 그래서 이동계도 발달했다. 그런데 1914년에 일제가 행정 단위의 면을 설치하면서 면장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어서 이동을 통할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지방행정의 중심이 군에서 면으로 이동했다. 그에 따라 이동계도 면으로 흡수된 경우가 많았다.

지금의 안동시내 웅부공원(구 시청) 앞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 이남은 옛날에는 가옥이 드물고 논밭이거나 늪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말엽 제방을 쌓고는 집들이 더러 들어서고, 일제강점기에 제방을 쌓으면서 강물이 범람하지 않았다. 그 전에는 낙동강이 자주 넘쳤고, 여기저기에 물을 피하는 사장뚝이 있었다. 사장뚝은 구한말 군대 연병장으로 이름이 났던 곳이다. 일제는 1922년 안동과 김천을 잇는 철길을 만들기 시작해 1931년 10월에 경북선을 개통했다. 그러다 1944년 9월 안동과 점촌간 철도를 철거하면서 예천과 안동 구간은 폐지됐다. 경북선은 김천에서 점촌을 잇는 구간으로 단축되었으니 안동과 예천간의 철도 운행기간은 불과 13년이 되는 셈이다. 철의 수급이 극도로 필요했던 태평양전쟁 말기, 이 구간은 선로가 뜯겨져 경의선 복선화를 위해 전용되었으나 해방 이후에도 부활되지 않고, 오히려 영동지방의 석탄과 시멘트 반출을 위해 영주 쪽으로 선로 방향이 바뀌었다고 한다.

   
 
 

►풍산장을 보고 오미동으로 가는 주민들.

국도 34호선이 관통하고 있는 풍산은 중앙고속도로 서안동나들목이 있어 외부와 안동을 연결하는 관문 역할을 한다. 이 지역은 중앙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해 수백 년간 지켜오던 자연마을들이 도로용지에 편임됨으로 자연마을이 붕괴되고 동서남북으로 뚫린 도로망으로 인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995년 8월 중앙고속도로 1단계 구간으로 대구와 안동 구간이 준공되어 2시간 거리의 대구가 1시간여로 단축되었다.

풍산은 항일 순국지사 권오설(1897~1930) 선생을 중심으로 마을 주민들이 맹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곳이다. 당시 고리사채를 이용한 일본인들의 농민 수탈이 극심해지자 권오설은 1924년 ‘풍산 소작쟁의’를 이끌며 전국적인 농민조직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항거한다. 풍산은 34번 국도를 중심으로 읍내 중심가가 형성되어 있고 예천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호명 사람들은 예천장을 보기도 했지만 풍산장을 보기도 했고 구담장을 보기도 했다.

종점에서 –안동과 예천을 잇는 42번 버스기행

안동시내버스는 경계를 넘는 지역들도 일반 시내요금만 지불하면 된다. 예천군과의 버스체계 통합으로 인해 요금 단일화가 이루어져 안동 예천 간은 무료환승이 적용된다. 물론 한 시간 이내 번호가 다른 버스에 한해서다. 안동에서 서쪽으로 예천군과 경계를 이루는 구담을 관통하는 76번 버스, 풍산 오미마을을 거쳐 예천군 호명면까지 움직이는 42번 버스, 풍산을 지나 구담, 갈전, 경북도청, 운골까지 가는 44번 버스가 있고, 예천에는 농어촌버스가 풍산으로 하루 10여회 운행된다. 구담을 순환하는 76번은 올 3월 개편되어 76-1, 2, 3번 마을버스로 세분화되었다. 76-2, 3번은구담-도교육청-금릉리를 순환한다.

안동과 예천 양 지역을 오갔던 대중교통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어떻게 연결되고 안동과 예천간 교류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사람들은 경계 없이 시군을 오갔고 그 경계의 중심에는 이제 경북도청이 들어섰다. 오전11시 50분, 안동시내에서 42번 버스를 타고 예천으로 향한다. 예천군 호명면 송곡이 종점이다. 하루에 배차가 다섯 대, 예전보다 오히려 줄어들었다. 송곡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42번 버스는 안동기차역 맞은편에서 출발해 도심을 가로질러 달린다. 태화오거리, 송현오거리를 거쳐 버스터미널-송야사거리-안동과학대학교-학가산온천-노리-서안동 나들목-농산물공판장입구-풍산정류소-풍산종점에서 풍산농공단지가 들어선 괴정리를 지나 오미1리와 시군경계지역인 오미2리를 거쳐 밭마을에 들렀다 호명면소재지를 거쳐 송곡을 종점으로 한다.

   
 
 

►호명면소재지에 도착한 42번 버스.

안동초등학교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촌로는 예천장 청양고추 물가에 분통을 터뜨렸다. 천원에 사 삼천원에 파는 중간상에 대한 흉을 보고 있자니 42번 버스가 도착했다. 비포장도로일 때부터 버스를 이용했다는 오미2리 사는 김씨 할머니는 아련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우리 아-가 지금 마흔둘인데 초등학교 1~2학년 때부터 다녔으니 꽤 됐지 싶어요.”

처음엔 차가 없어 걸어 다니다가 그때쯤 차가 다녔다고 한다. 오미2리에서 풍북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한다. 주로 안동시내는 장 보러 혹은 병원에 다니느라 오간다고 한다. 버스 안의 할아버지들의 주요 관심사는 백내장 수술이다. 요즘 유행처럼 백내장 수술들을 하는데 안과에서 백내장 수술을 권하더란다. 그래서 할아버지 왈 “여보쇼. 내가 아직도 밤12시에도 바늘귀에 실 꿰는 사람인데!”하고 큰소리는 쳤는데, 눈물이 나고 눈꼽이 끼고 앞이 침침하여 고민이 많다고 한다. 시골에선 이웃끼리 가족보다 더 가까이 지내니 유행에 더 민감하다. 어느 집이 김치냉장고를 사면 우르르 사게 되고 누가 백내장 수술로 눈이 환해졌다 싶으면 또 백내장 수술에도 귀가 솔깃하기 마련이다.

   
 
 

►호명면 오천리에 사는 최상년(89) 할머니. 정확히 몇 년간인지는 기억이 가물하지만 근15년 정도 막차타고 들어온 안동버스 기사들의 하숙을 쳤다.

단촐하게 타고 가던 버스는 풍산장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주민들로 풍산농협 앞에 이르자 발디딜 틈 없이 꽉 찼다. ‘왜 하필 이쿠로 볕 좋은 날 내복을 입고 버스를 타서 고생인지 모르겠다’고, 크로스백을 야무지게 걸쳐 맨 할머니가 볼멘소리를 한다. 버스바닥에 그냥 퍼질러 앉는 할매부터 일가를 만나 인사를 나누는 할배까지 버스는 그야말로 왁자지껄 장터나 다름없었다. 버스는 풍산종점을 벗어나 종자관리소와 새로 조성된 풍산농공단지를 경유해 오미1리까지 한참을 달렸다. 본리 표지석이 있는 시군경계지역에서 버스는 한숨 돌려 새랄마을로 들어갔다가 호명으로 향했다. 오미1리와 오미2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리고 호명에는 3명의 승객이 내렸다. 문 앞에 버스 시간표가 적힌 오천면내의 오성상회에 들어섰다. 주인장 내외에게 42번 버스가 언제부터 다녔는지를 묻자 고개를 갸우뚱한다.

“글쎄요. 한 30년은 넘었지 싶어요. 요새는 아침 6시 50분 나가는 첫차부터 해서 다섯 번 댕기죠. 예전엔 여섯 번 댕겼어요.”

그전에는 안동 가려면 예천 가서 시외버스를 타거나 진천, 구담 가는 44번 버스를 탔다고 한다.

“우리 아-가 아플 때 오도바이타고 그까지 가서 버스타고 댕겼으이 진천으로 해서 운골 왔다갔었지. 거는 버스가 댕긴지 40년이 넘었지요.”

100여 호가 사는 호명면소재지에는 이른 봄볕이 내리쬐고 있을 뿐 거리는 조용했다. 주로 벼농사를 하는 호명에는 별다른 특황작물이 없다. 농사일에서 손을 뗀 군번의 어르신들이 제일 북적이는 마을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할머니들 스무여명이 옹기종기 앉아 화투도 치고 대화도 나누고 있었다. 그중 안동버스기사들에게 하숙을 쳤다는 최상년(89)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는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었는데 사공이 많아 그런지 주위 할머니들까지 모두 언성을 높여 본인의 기억이 맞다고들 했다.

“그때는 차장, 안내양, 운전수 그렇게 3명이 같이 댕겼거든. 나중에는 운전수 혼자였지만. 막차로 들어와 저녁 먹고 아침 일찍 아침 먹고는 다시 나갔어. 내가 군불 때서 밥 해먹였거든.”

집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세 칸으로 된 방이 있었고 거기가 버스기사들의 숙소였던 셈이다. 삼남매를 둔 최 할머니는 친정이 용문 선동이다. 열아홉에 온가족이 만주에 갔다가 돌아와 스물여섯 늦은 나이에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 슬하에 삼남매를 둔 할머니는 올해 63세인 큰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도 버스기사들에게 밥을 해줬으니 50년까지는 안 돼도 40년은 훌쩍 안동에서 예천까지 시내버스 왕래가 있었노라 회상 한다. 젊어 식모살이부터 안 해본 고생이 없었는데 자식농사를 잘 지어 근심은 없다고 한다. 지금은 큰아들 내외와 함께 지낸다. 할머니들은 예천장을 보거나 안동장을 보는 사람들로 나뉘는데, 근력이 예전만 못하니 한 번씩 안동에 나가는 것도 고되지만 예천장에 갈라치면 한참을 걸어야하니 차라리 신시장이나 구시장 장 보고 42번 버스타고 호명에 바로 내리는 것이 편해 선호하는 할머니들도 많았다. 물론 병원에 들르는 것도 잊지 않는다고.

안동과 예천, 함께 걸어온 길 함께 걸어갈 길

   
 
 

►본리 새랄마을로 들어가기 전 안동과 예천의 경계에 선 42번 버스.

우리의 삶이 어느 곳으로 가는 여정의 연속이라면, 길은 그 여정을 함께 하는 곳이다. 새 길이 닦이고 생기는 삶의 변화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그리고 옛 사람들의 지난한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 현대에 이르게 되었는지. 우리는 어느덧 도로의 감식가가 되어 있다. 근심이 없어도 근심인 현재에.

안동의 시인 故 임병호 씨는 생전 집 앞 난전에서 장사를 했으면 좋겠노라고 고백을 했다고 한다.

“그곳서 장사를 했으면 좋겠어. 솜사탕장수나 목마쟁이 말이야.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을 못 봤거든. 손님들도 하나같이 환하고 말이야.”

‘길’은 사람들이 개인생활 공간인 집에서 막 발을 내딛는 사회생활 공간이다. 마당에서 연 회갑연 잔치 끄트머리에 보이는 흙길,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랑에 빠지기도 했던 옛길, 돌부리에 채이기도 했던 마을길, 혹은 어느 누구는 야반도주하며 눈물을 삼키기도 했던 밤길, 흙먼지 날리며 몇 리길 학교를 매일 오갔던 아이들이 다녔던 비포장 길, 큰형 대학등록금으로 쓰일 소를 몰고 돌아오던 길, 마을 누구집 할배가 경운기를 몰고 다녔던 농로, 그러다 마을 누가 어찌 큰일이라도 하면 현수막이 내걸리던 신작로 입구, 서울로 대구로 혹은 안동시내로, 밑반찬이며 짐을 부리부리 싸매고 유학길에 오른 자식들을 신작로까지 배웅 나갔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이 모든 것들이 예전 시골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시인이 솜사탕을 팔고 싶은 낭만의 그 길.

이 길의 역사에 안동사람 예천 사람들의 삶도 함께 변화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이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먼지 날리는 이 비포장길의 소로를 거쳐, 넓게 닦여 차가 지나는 길, 쭉 뻗은 아스팔트까지 이들의 고단했던 삶과 근현대화의 바람을 바로 온몸으로 받아내 살아왔던 바로 이 땅의 예사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백소애(전 격월간 안동지 편집실장)/정운홍(경북와이드뉴스 기자)

[안동청년기자연합·안동아카이브연구회 공동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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