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몽골 소주는 왜 안동으로 왔을까?
‘소주 한 방울에 담겨진 Culture 실크로드’
이슬람·몽골 소주는 왜 안동으로 왔을까?
‘소주 한 방울에 담겨진 Culture 실크로드’
  • 유경상 /김용준 기자
  • 승인 2016.04.05 17: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동청년기자연합 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6)

목화(木花)의 원산지는 원래 인도였다.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거쳐 유럽으로, 다시 그곳에서 서역을 거쳐 동아시아 각국으로 전래되었다고 한다. 혹자는 4세기경에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래됐다고 주장한다. 다시 그때로부터 1천년 후인 1363년(고려 공민왕 12년)에 문익점이 남방(중국)에서 목화씨를 얻어 비밀리에 필관(筆管)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고 <고려사>는 기록했다. 한국에서 목화 번식의 계기이자 시효가 되었다는 이 스토리는 초등학생 때부터 교과서를 통해 익히 들었던 바다. 당시엔 인삼과 모시 등이 고려의 수출품이었고, 면화와 비단은 원나라에서 수입했다. 이렇게 목화씨앗 몇 개 속에는 인류문명의 교류와 융합이라는 엄청난 스토리와 깊은 역사적 수수께끼가 스며들어 있다는 걸 당장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안동문화권의 특정한 음식으로 눈을 돌려보자. 때는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인 13세기이다. 말 등에 실려 드넓은 초원 실크로드를 쉼 없이 달리고 달려 마침내 고려 안동 땅에 도착한 술이 있다. 증류식 소주(燒酒,燒酎)이다. 이 소주라는 창(窓)에 비추어지는 발자취와 나이테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동양과 서양을 거치며 넘나들었던 또 하나의 역동적인 문명교류와 융합의 의미가 스며들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을 발동해 볼 수 있다.

지금은 우리의 3대 토주로 정착했기 때문에 안동문화권 증류식 소주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소주의 전래 길(road) 그 노정에는 이슬람과 몽골(원나라), 고려, 일본을 잇는 문명사적 연담형 전래길이 형성돼 있을 수 있다. 유럽에 마르코 폴로가 있고, 중국에 현장이 있었으면 우리에겐 신라의 혜초가 있었다고 대응한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여서 안동문화권에는 고려의 ‘소주’가 있다고 주장하면 너무 과한 주장일까.

전통음식은 격동의 역사를 담은 큰 그릇

안동소주, 유라시아 잇는 연담형 음식문화 교류의 표본

근대시기 이후부터 안동과 예천을 포함한 경북북부권에는 타 지역에 비해 차별성을 담고 있는 ‘음식’이 종종 주목을 끌었다. 최근 경제적 여유로 인해 웰빙에 관심이 높아지자, 사람들은 유명하거나 특정한 음식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 관심은 곧 그 음식의 역사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어떤 이들은 즐겨 먹거나 마시는 음식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뛰어넘어 역사적 맥락과 사회문화적 해석을 시도하게 된다.

<음식인문학>을 쓴 주영하 교수는 음식의 역사란 다른 의미에서 사회문화적 변화 양상을 담고 있는 역사의 그릇이라고 했다. 음식을 문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음식의 유래를 찾아 과거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머나먼 고대나 중세의 다양한 민족의 전쟁과 그로 인한 교류·융합의 단편적인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스토리가 대중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의 유행에 부응해 볼 때, 특정 음식의 유래를 찾아 과거로 가 보니 그곳은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가 휩쓸던 격동의 한 시대였고, 여러 인물과 지역의 고난과 응전이라는 더 흥미로운 소재와 얘기꺼리를 발견하는 재미도 덤으로 얻어낼 수 있다.

경북북부권에서 나름 차별화된 음식을 일일이 열거하면 꽤 많다. 주식류로는 ‘건진국수, 헛제사밥’을, 간식류는 ‘안동식혜, 묵’을, 반찬류는 ‘문어, 상어, 간고등어, 육회, 명태보프름, 콩가루음식’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한 가지 꼭 더 보태면 ‘안동소주’ 이다.

안동대 배영동 교수는 이 음식들을 ‘유교문화적 취향이 구현된 안동음식’이라고 명명하면서도 이런 음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환경적 변수보다 사회문화적 변수를 더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정 음식을 대하는 거부 내지 선호현상에는 사회문화적 요인이 광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 擧盃邀晧月, 抱甕對淸風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항아리 끌어안고 맑은 바람 대한다). 신윤복(申潤福)의 주사거배(酒肆擧盃) (1805)

그런데 ‘안동소주’ 이 말 속에는 ‘안동지역만’ 혹은 ‘안동지역에서만’ 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인근 기초지역에 비해 우월적이면서도 배타적이라는 혐의를 짙게 풍기고 있다.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이에 대해 약간의 시비를 걸어볼 수 있다.

행정단위 상 현재 우리는 시·군 단위인 안동, 예천, 영주 등 기초지역에 소속돼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현재의 기초지역이란 행정구역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단행된 근대적 지방제도개편의 산물이다. 문제는 자주 잊고 지낼 뿐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한국 지방행정 구역의 기본 틀이 되었는데, 사실 그 배경은 식민통치의 효율화를 위해 자의적으로 지방행정을 구획화한 사건이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듯, 우리사회도 격동의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잊고 살뿐이다. 약 100여 년이 넘게 지속된 근현대사 시간 속에서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상기하자.

19세기 조선후기와 이전인 중기·전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대를 ‘전근대시기’라고 하자. 그 당시 증류식 소주(燒酒, 燒酎)라는 음식은 대부분 집에서 만들어져서 집에서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조선, 고려 말 소주는 고급 가양주였다. 권력과 재산을 일정 보유한 유력가문에서 ‘자가생산 자가소비’라는 방식을 유지하며 전승됐다. 쌀이 하늘처럼 귀했던 시대에 가장 비싼 비용이 들어가는 음식인 소주와 같은 ‘술’은 일생에 몇 번 밖에 마실 수 없는 귀한 음료였다. 조상을 모시는 제사나 설날, 한가위 같은 명절에 선택받은 사람만 이 좋은 술을 음미할 수밖에 없었다.

▲ 1915년 안동 남문동에 안동주조회사를 설립해 ‘제비원소주’ 상표로 안동소주를 생산한 국담 권태연. 국담 권태연의 회갑연장면이다. (출처:경북안동, 1942년, 사진제공:권정석, “사진으로 본20세기 생활병풍”, 국립민속박물관)

전근대 양반들의 술... ‘안동소주’는 없었다?

경북북부권 공동의 음식 문화유산으로 승화돼야

1900년대 초부터 외세의 강점과 개입으로 우리사회는 근대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 돌입했다. 수탈 속에서 타율적 근대화로 접어들었고 도시화·공업화 과정을 겪게 됐다. 이는 곧 ‘상품’이 생산되며 그 상품은 ‘시장’에서 유통이 되는 단계이다.

수백 년간 가양주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안동권의 증류식 소주가 상품으로 출시되는 계기를 맞았다. 1915년 국담(菊潭) 권태연(權台淵, 1880~1947)이 안동시 남문동에 (주)안동주조회사를 설립하고, 1920년 ‘제비원표’ 소주를 출시한 그때부터 ‘안동소주’라는 브랜드는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몇 세대를 거치는 동안 국민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유명한 안동소주의 역사라는 것이 따져보면 약 100여 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100여 년 이전의 전근대사회 즈음까지 각각의 가문에서 전승돼 온 소주에 대해서 , 안동의 소주 또는 안동지역만의 소주라고 독점적으로 강변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안동의 소주이면서도, 동시에 예천·영주·영양·청송 등의 소주로도 볼 수 있다고 본다. 안동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의 가문에서도 충분히 가양주 형태로 생산·소비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억지주장은 아닐 수 있다.

비슷한 예를 하나 찾아보자. <음식디미방> 조리서에는 51종의 술이 소개돼 있다. 이 책은 조선 중기 석계 이시명과 결혼한 장계향(정부인 장씨)이 75살이 되던 1672년에 한글로 작성한 음식조리서이다. 그런데 장계향(1598~1680)이 태어난 곳은 안동 금계 땅이고 결혼 후 노년을 보낸 곳은 영양 석보 땅이며 친정은 예천 용문 땅이었다.

경북북부권은 지역 간 연고와 학맥에 따라 통혼권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계향 또한 이 범위 안에 포함돼 있다. 음식디미방의 원천이 영양 땅이라는 것을 주지시키며 기초단체인 영양군이 이의 복원과 종가음식 산업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듯, 안동시에서는 친정인 경당종택의 손맛에 근거한 종가음식 재현에 신경을 쓰고 있다. 장계향의 본집인 친정이라는 가문에 천착한 스토리텔링을 활용한다는 꾀를 냈다. 그렇다면 음식의 제조법과 맥락이 여성을 중심으로 전승된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외가인 예천 땅에서도 스토리텔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1960년~70년 초에 생산한 제비원소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 전 안동신문, 1994년, 박희곤/박재현)

20세기 초 일제는 효율적이며 원활한 식민지통치를 위해 촌락공동체에 바탕을 둔 마을단위를 강제적으로 해체했다. 그 결과 지금의 시·군 행정단위가 굳어지는 과정에서 안동사람, 영주사람, 또는 예천사람 속에 별개의 향토애가 더 강화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어느 하나의 특정지역이 음식문화를 독점할 수 있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은 몰역사적인 소아적 지역이기주의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안동소주 또한 특정 기초행정단위 지역만의 순수한 음식이라고 당연시하게 된 것도 근대 시기 상품화 과정에서 그 기억이 너무 강렬하게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동소주는 없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진짜 안동소주는 없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안동의 소주이지만, 곧 경북북부권 공동의 문화유산이며 공통의 음식문화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 표현일 뿐이다.

이렇게 경북북부권(안동문화권)의 증류식 소주문화는 근대시기를 거치며 좁은 기초지역 안에 갇힌 하나의 상품으로 그치고 있다. 하지만 7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소주는 고려국으로 전래되는 과정을 넘어서서 전 세계적 문명교류와 융합을 불러일으킨 대전쟁사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고려에 들어와서 그것도 내륙 깊숙한 곳인 영주와 예천, 안동에 까지 흥미롭게 출연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이슬람과 몽골의 소주가 어떻게 고려로 전래되어 안동문화권 소주로 정착하게 되었는지 13세기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자.

몽골제국은 소주기술자 무슬림을 데려왔다

활짝 열린 실크로드로 동서문명 교류 신속 활발

13세기 초인 1206년, 칭기스칸은 아시아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을 단결시켜 연합체인 몽골국을 건국한다. 칭기스칸과 그 자손들은 몽골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세계정복 전쟁을 치르러 떠났다. 세계사적으로 미증유의 무력적 팽창이 추진되었는데, 그 요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남침서정(南侵西征)’이다. 남하하여 서하(西夏)와 금(金) 및 송(宋)을 침략하면서 동남아시아까지 공략했다. 서행(西行)을 하여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그리고 유럽까지를 정복한 군사적 활동이었다. 약 40년간(1219~1260) 3차에 걸쳐 대규모의 서정(西征)을 단행해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 과정 중 몽골군의 제3차 서정군(1253~1260)은 카스피해 남부에 있는 물라히다를 비롯한 이란 지역을 평정한 후 다시 서행을 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진출했다. 1258년 봄, 서정군은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의 수도 아그다드를 함락시켰다. 이들은 계속해 메카와 예루살렘을 공격해 1259년에는 디마스쿠스를 점령했다. 그리고 귀국 도중 이란을 중심으로 일 칸국을 건립했다.

이때 멸망한 이슬람 세계의 압바스왕조(750~1258)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숙부 압바스의 증손인 사파흐가 스스로를 칼리파(이슬람 공동체·국가 지도자, 최고 종교 권위자)로 선포하며 건설한 제국이다. 압바스왕조는 그리스·로마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 이집트 문화 등 주변의 선진문명을 적극 받아들여 새로운 아랍-이슬람 문명의 창조에 성공시켜 ‘사막의 아들’에서 ‘바다의 아들’이라는 전성기를 누렸었다.

▲ 실크로드 3대 간선 약도 (출처: 정수일,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창비)

결국 몽골군의 서정 정복전쟁으로 실크로드(오아시스로와 초원로)가 개척 확대됐고 이 길을 통한 동서문명 교류도 미증유의 규모로 활발해졌다. 그런데 몽골제국을 세운 이들의 건국이념은 정치적으로는 세계대동주의, 경제적으로는 중상주의, 문화적으로는 개방주의를 표방했고, 군사적으로는 기마병 위주의 강력한 군사로 무장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첫째가 동서문명의 교류를 촉진시키는 권력구조가 창출됐다. 대제국의 중요 구성부분은 유라시아의 동서남북에 자리 잡았다. 오고타이 칸국(알타이 산맥 일대), 차가타이 칸국(중국 신장성과 아무르강 이동 지역), 킵차크 칸국(동유럽 지역), 일 칸국(페르시아와 소아시아 지역) 등 4대 칸국이 건설되었다. 통일적인 제국의 권력구조 하에서 이들 문명 간의 교류를 저해·차단하던 요인들은 제거되었다. 둘째는 4대 칸국과 몽골, 중국까지 포함하여 동서간의 교통이 전례 없이 발달했다. 실크로드 전체가 몽골인들의 관리 아래 정연하고도 신속한 교통수단인 역체제도가 설치되어 동서교통이 일사분란하게 소통되었다.

몽골 제국 아래에서 동서간의 교역품 등 문물교류는 중간 매개가 없이 직접적으로 전달이 가능해졌다. 중국 등의 문물이 서방으로 전해졌고, 아랍-이슬람문명과 서구문물이 거침없이 동방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당시 이슬람세계의 중심이었던 압바스왕조가 붕괴된 후 이런 정책이 펼쳐졌다. 색목인들은 내정의 문화교사이자 원정을 비롯한 대외관계에서는 두뇌역할을 담당하며 원나라 조정에서 특수한 입지를 마련했다. 원 제국에서 색목인은 몽골인에 버금가는 사회적 신분을 누리게 되었다.

무슬림은 몽골의 훌륭한 ‘문화교사’

압바스왕조 상인 고려로 몰려와 교역

이처럼 막강한 군대로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몽골은 고려 정벌을 빼놓지 않았다. 1231년(고종 18)에 고려는 몽골제국의 일곱 차례 침략을 받아 약 30년간 항전을 벌였다. 고려의 저항은 끈질겼지만 몽골군의 침입도 집요하게 이어져 1259년(고종 46)에 강화를 맺었다. 이때부터 90여 년을 원간섭기(元干涉期, 1259~1351)라고 부른다.

당시 고려의 왕은 고종과 원종, 충렬왕으로부터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을 거쳐 공민왕까지다. 반원운동(反元運動)이 성공하는 1356년(공민왕 5년) 까지 원의 간섭을 받았다. 그러나 원의 간섭을 슬기롭게 타개해 몽골 중심의 천하에서 자주권을 지켜낸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충렬왕의 아버지인 원종(元宗)은 태자의 신분으로 원 세조 쿠빌라이를 찾아가 원이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 약속을 받아냈다.

그렇지만 원의 끈질긴 간섭과 강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문화적 접변이 발생했다. 이를 고려-원 시대에 일어났던 ‘고려풍’과 ‘몽골풍’이라고 부른다. 원나라에는 고려식 복식과 음식, 기물이 유행했는데, 주로 어갱(漁羹, 생선국), 계육(鷄肉, 닭고기), 송자(松子, 잣), 송골병(松骨餠), 인삼주 같은 고려음식이다. 오늘날까지 몽골의 유제품이나 과자에 찍히는 문양은 이때에 받아들인 것이다. 일종의 선진 고려문물이 원으로 유입된 셈이다.

마찬가지로 몽골의 고려풍과 때가 비슷한 시기에 고려에는 몽골풍이 발생했다. 주로 복식과 음식, 언어 등 생활영역에서 일어났다. 이 전후시기에 몽골의 후광으로 소위 색목인(色目人)이라 불리는 무슬림들이 몽골인과 함께 한반도로 함께 밀려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고려 말 원간섭기에 유목민들에 의해 이슬람의 문화가 함께 유입되었다. 색목인들은 원 제국의 고려 경략과 간섭에 동참하며, 역관·근위병·시종무관·겁령구(怯怜口:사속인) 등 여러 직분으로 고려에 파견되었고 상인과 민간인도 고려를 왕래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에 아예 눌러앉아 귀화한 사람들도 등장했다.

이슬람과의 첫 만남은 통일신라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고려시대에 와서야 본격화 된 것이다. 열린 나라 고려시대 초엽, 전성기를 누리던 이슬람 압바스왕조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몰려와 교역을 시작했다.

제국대장공주 무슬림을 고려로 데려왔다

증류식 소주 제조법 누가 가르쳤을까?

한편, 한국 소주(또는 고려 소주)의 전래 기원에 대해 많은 연구자들은 원(몽골)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1275년(충렬왕 즉위년)을 전후한 시기라고 추정하고 있다. 전래된 음식문화 중 몽골을 통해 들어온 교류주가 바로 소주라는 것이다. 소주의 원류를 따질 때 토착주가 아니라 몽골을 통해 고려에 유입됐다는 설명이다.

이 시기는 몽골이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와 맞물리고 있다. 13세기 아시아 북방 초원의 몽골 전사들은 말을 타고 세계정복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춥고 황량한 초원을 달리며 밤을 지새울 때가 많았다. 이때 말린 고기인 육포와 독한 발효주인 ‘아라크’를 지니고 다녔다.

조선시대 <지봉유설>에서 이수광은 소주는 몽골에서 나왔는데 약으로나 쓸 뿐이지 함부로 마시면 감당하지 못해 세상 사람들은 작은 잔을 소주잔이라고 한다고 했고, <동의보감>에서 허준은 소주는 예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원나라 때 처음 빚는 법이 알려졌다고 전했다.

이슬람문명 학자 정수일 또한 <실크로드사전> 등 여러 저술에서 소주가 서역에서 동방으로 전래된 술이라고 말한다. 소주의 시원(始原)이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소개하며, 1258년 제3차 몽골 서정군이 압바스왕조를 공략, 붕괴시킬 때 몽골군이 아랍인들로부터 새로운 소주의 양조법을 배워 왔고, 이후 몽골에 의해 고려로 전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왜 고려의 수도 개경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안동과 제주지역까지 소주의 제조법이 전수되어 오랜 세월동안 가양주 형태로 전승·지속 되었을까 이다. 이는 충렬왕과, 동시에 충렬왕과 결혼한 원의 제국대장공주(원 세조의 딸), 이들이 혼인할 수밖에 없었던 원의 고려 간섭기 정치사회적 환경과 연관돼 있다. 또한 원나라 세조의 야망에 의해 결성된 여몽연합군(동정군)의 1274년과 1281년에 걸친 두 차례의 일본정벌이라는 역사적 사변과 1, 2차 여몽연합군에서 도독사와 고려군 대장군으로 등장한 안동 출신 김방경 장군과도 깊이 맞물려 있다.

원 제국의 네 가지 통치이념 일환으로 충렬왕(1274~1308)은 1271년 원나라에서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을 했다. 원 제국은 그때까지 황제의 딸을 다른 나라에 시집보낸 일이 없었으니 고려가 원의 첫 왕실혼인 즉 부마국이다. 부마국으로서 제후국의 대우를 받게 됐지만 다른 제후국보다는 격이 높았다.

충렬왕비가 된 제국대장공주는 남편을 따라 고려로 올 때 무슬림인 삼가(三哥) 장순룡(張舜龍)을 종관으로 데려왔다. 곧 벼슬이 낭장(郎將)에서 장군을 거쳐 첨의참리(僉議參理)까지 올랐다. 충렬왕의 명으로 덕성부원군에 봉해져 덕수현(현 개성시 개풍군)을 식읍으로 삼아 장순룡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고려 여인과 결혼했다. 세 아들을 남겼고 사후엔 공숙(恭肅)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외에도 고려에 귀화하거나 망명한 무슬림이 다수 등장했고, 귀화한 무슬림은 이후 한반도에 큰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로 (출처: 이이화, “몽골의 침략과 30년 항쟁, 한길사)

한편, 원 세조 쿠빌라이는 삼별초 토벌을 끝낸 후 일본정벌을 준비했다. 1274년 10월 큰 전함 300척과 작은 배 600척 등 900척에 원과 중국연합군 2만8천명, 고려군 8천명이 승선했다. 여몽연합군 3만3천명이 쓰시마를 거쳐 이키섬과 하카타만으로 진격해 들어갔지만 때마침 불어온 엄청난 태풍으로 군선 대부분이 파괴되고 1만3천명이 귀환하지 못했다. 다시 2차 원정을 준비한 1285년에는 동로군이 1차에 비해 4배가 늘어난 4만 명에 전함 900척이었고, 강남군(중국 절강성에서 출발)이 10만 명에 전함 3,500척으로 편성됐다. 총 15만 여명의 병사와 군선 4,400척으로 침공을 시도했다.

충렬왕은 합포(마산)로 내려와 5월3일 동로군의 사열식을 받았다. 고려군 도원수는 김방경이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태평양에서 태풍이 몰아쳐 전함들을 침몰시켰다. 일본은 두 차례나 세계 제일의 대규모 침략군을 물리쳤고 원에 복속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고, 신풍(가미카제)의 도움이라고 믿었다. 원은 3차 정벌을 추진했으나 1294년 원 세조가 죽고 나서야 정벌계획이 중단되었다.

당시 합포에는 조선소와 주두군 숙소, 군영이 빼곡하게 들어차 수많은 군사들이 들끓던 번창한 항구가 되었다. 지금의 마산시 자산동에 ‘몽고정’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물맛이 좋아 술을 빚거나 간장 담는 물로 사용해 일제강점기 때 ‘몽고간장’이 제조 판매되기도 했다.

충렬왕비 힘 센 제국대장공주, 안동에 오다

700년 전 경북북부에는 각양각색 세계인이 우글거렸다

일본 2차 원정 때인 1281년(충렬왕 7)에는 안동출신 김방경 장군이 고려군 도원수를 맡았고 이때 충렬왕은 안동에 행궁을 설치해 30여 일을 머물렀다. 당시 <고려사>에는 충렬왕의 안동권역으로의 행차가 야단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걸 상세히 기록했다.

“8월 정묘일 왕이 공주와 경상도를 향해 출발했다. ....병자일에 왕이 順安縣(현재 순흥 또는 영주)에 들르니 경상도 안렴사 민훤이 신원(新院)에서 왕을 위하여 연희를 열었다. 정축일에 왕이 甫州(현재 예천)에 들르니 副使 박린이 개울 위에(건너에) 모정(茅亭)을 짓고 연희를 베풀었으므로 측근자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였으며, 다음으로 안동부에 이르니 府使 김균이 채붕(綵棚)을 가설하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왕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판관 이회는 백성들이 수고하는 것을 가엾게 여겨 부비(浮費)를 줄였다. 또 왕에게 나아가고 물러남이 졸렬하여 내료들이 모두 헐뜯었다. 이에 이회를 보주로, 박린을 안동으로 옮겼다. 기묘일에 합포에서 출발한 별장 김홍수가 행궁에 도착해 동정군이 패하였으며 원사 김방경이 합포로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 ....윤 8월 갑오일에 김방경 등이 행궁에 와서 왕을 뵈었다. ....경신일에 왕이 공주와 더불어 경상도로부터 개경으로 돌아왔다.”

왕과 공주가 들리는 영주, 예천에서 연희가 잇따라 열렸고 안동에서는 채붕(나무로 단을 만들고 오색 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장식무대)을 가설해 음악을 연주했다. 연희가 열리고 무대 위에서 음악 연주가 열린다는 건 큰 공연이 이뤄졌다는 의미를 갖는다.

삼국시대부터 신라에 중앙아시아 서역의 노래와 춤이 전파되는데 호악(서역음악)과 호가(서역노래), 호무(서역춤)이 인기가 있었다. 14세기 후반 고려 우왕은 무슬림 자녀들을 시종으로 삼아 대동강 부벽루에서 호악을 직접 연주하고 화원에서 호가를 즐기며 호무까지 추었다.

그렇다면 당시 충렬왕의 행차가 지나는 순흥, 예천, 안동지역 곳곳에서 연희와 연주가 빈번하게 열렸고, 음주가무(飮酒歌舞)에 능숙한 민족답게 흥겹게 놀았을 것이 분명해진다. 여기에 술이 빠질 순 없을 것이고 술 중에는 증류식 소주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고려 수도인 개경은 몽골군의 본거지가 됐을 것이며 안동은 병참기지였고 제주도는 전초기지였다고 전한다.

배영동 교수는 이 시기에 ‘충렬왕의 안동 체류와 원군의 안동 경유가 안동으로의 소주 전래에 결정적 계기’로 이해된다고 했다. 충렬왕 일행이 30일 동안 안동 행궁에 체류할 때 소주 양조법이 안동에 전래되었을 가능성과 안동을 경유했던 원나라 군사를 통하여 소주 제조법이 전수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여기에 제국대장공주 일행과 이를 따라온 무슬림 문화교사들의 역할에 대한 연구까지 진행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여 본다.

그럼 700년 전 안동에는 몽골군과 고려군이 득실거릴 정도로 진주한 후 경유했을 것이고, 여기에 고려의 왕실과 원나라 왕비, 왕비를 따라온 무슬림 시종들까지 대거 몰려와 장기간 머물렀을 개연성이 높다. 다양한 민족이 넘쳐 섞이었으면 그 문화적 침투와 교류, 융합은 지역사회에 엄청난 파급력을 일으켰을 것이며, 그 영향은 매우 컸을 것이다. 여기에 1361년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일행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문화권으로 70일간 몽진을 왔으니 그 여파는 더 결정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고려에서 근대까지의 安東圈은 오래된 미래의 나침반

역사상 최초 세계와의 전면적 교류, 재창조할 수 있어야

▲ 신도청시대를 맞이한 안동·예천을 비롯한 북부권은 지금부터라도 상생의 목표를 갖고 열린 나라였던 고려문화와 북부권의 역사적 교류를 재해석해 내어 상대적 독창성과 차별성의 비전으로 재창조해 내야 할 것이다. (출처: 팍스몽골리카와 고려, 혜안출판사)

중국인들은 옛날부터 우리 조상에 대해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기는 민족’이라고 일컬었다. 700년 전 그 ‘음주’의 품목에 희한하면서도 새로운 고급술인 증류식 소주가 등장했으니 우리민족에겐 금상첨화이었을 것이다.

기존에는 소주가 몽골(원나라)로부터 전래됐다는 단선적인 해석에 머무른 경향이 높았다. 지금부터라도 이를 넘어서서 이슬람~몽골~고려~일본이라는 선순환적 문명 간의 만남과 교류로 시야의 폭을 넓혀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고려소주는 기마유목민인 몽골인을 매개로 만나게 되어 세 개 이상의 문명권의 교류이자 융합의 산물로 지평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 역설적으로 고려와 몽골, 고려와 이슬람의 교류는 침략과 간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성격이 깊지만, 문명의 생성과 공존 그리고 독특한 수용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13세기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던 고려사 전개과정에서 지역과 지역문화는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폭풍우와 같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을 것이다. 또한 고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김방경 장군 등 인물의 등장과 몽골, 무슬림 등 민족이 안동권 문화에 지대한 충격파를 제공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문화적 전래와 수용과정을 씨줄과 날줄의 의미로 재해석하고 창조적인 컨텐츠로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제대로 계승해 더욱 새롭게 벼리고 갈고 닦는 재창조업에 소홀했었다.

▲ 일본작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여몽연합군의 1,2차 일본원정을 소설화한 <풍도(風濤)>

1964년 일본의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는 여몽연합군의 1,2차 일본원정을 소설 <풍도(風濤)>로 출간했다. 몽골제국에 의해 정벌에 나선 고려의 비애와 압제와 고난 아래에서도 고려왕실과 백성을 보호하며 역사의 격랑 속으로 걸어갔던 고려장군 김방경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풍도>를 접한 고(故) 신영복 교수는 “이노우에 야스시가 몽골제국의 지배라는 그 모멸적인 상황을 인내하는 김방경 장군의 고뇌를 잘 포착해냈고, 그 고뇌를 통해 고려 민중의 고난과 저항을 그려내고 그러한 고려 민중의 대몽 항쟁이 몽골의 일본 침략을 저지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고 감상글을 썼다. 몽골의 일본 침략이 좌절된 것은 신풍의 도움때문이라는 일본 역사교사서의 시각과는 매우 대조적이라고 첨언했다.

또한 위에서 잠깐 언급한 국담(菊潭) 권태연(權台淵, 1880~1947)에 대한 재조명도 시급해 보인다. 20세기 근대 초엽인 1915년 안동시 남문동에 (주)안동주조회사를 설립, ‘제비원표’ 소주를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최대 부호로서 지역사회 공익사업에서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증언이 있다. 지역사에서 근대인물에 대한 콘텐츠화도 너무 미약하다. 전근대 전통사회와 인물에 관한 연구와 콘텐츠화는 일정부분 성과를 이루고 있지만 유독 근대의 여러 영역에 대한 다양성과 역동성을 재조명해는 것엔 관심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근대시기 항일독립운동의 굵직한 영웅적 실천들에 대한 규명과 복원, 재창조에 관심을 쏟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근대문명을 체화하고 있던 지역사회의 다양한 영역 주체들에 대한 재조명이 너무 얕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교육과 문화, 종교,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근대의 꿈을 일구어 낸 인물들에 대해 일회용 터치(Touch)식 관심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근대 시기 여러 공간 분야에서 문화를 수용·창조·공유해 냈던 발자취는 우리지역의 로컬리티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또한 안동을 포함한 경북북부지역은 민속문화와 불교문화, 유교문화가 고루 분포되어 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문화까지 다양한 역사적 지층을 이루고 있다. 시대별 문화의 역사적 켜와 다양성의 결이 겹겹이 풍부하게 쌓여있다. 특히 문화적 전통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지층 중에서 고려와의 연관성이 풍부해 문화자본의 확장성이 근대시기까지 연결돼 있다. 21세기 지방화와 세계화를 더 깊고 넓게 획득낼 수 있는 전략적 가치가 높다고 보여 진다.

고려 말, 유라시아에 걸친 몽골대제국의 원간섭기는 수난의 역사였지만, 동시에 고려에 밀어닥친 사회변동은 내륙 깊숙한 경북북부권에 다종다양한 인물 교류와 새로운 문화를 발생시켰다. 이는 고려사회에 새로운 문물과 활력을 불어넣어 고려인과 경북북부인들의 세계관을 확장시켰다고 판단된다.

2천여 년 동안 우리가 경영해 온 세계와의 관계형식이 자주와 개방, 즉 두 개의 축이라는 견해가 있다. 자주와 개방이라는 두 개의 축을 지혜롭게 구사해 왔기에 대륙의 변방에서 국가를 지탱했다는 것이다.

마침 경상북도가 지난 2013년부터 ‘코리아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경주지역의 신라문화를 재조명해 경북을 신(新)실크로드의 중심지이자 세계 속의 경북으로 재도약한다는 취지이다. 그렇다면 신도청시대를 맞이한 안동·예천을 비롯한 북부권은 지금부터라도 상생의 목표를 갖고 열린 나라였던 고려문화와 북부권의 역사적 교류를 재해석해 내어 상대적 독창성과 차별성의 비전으로 재창조해 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최초로 세계제국의 문명과 전면적인 만남이 있었고, 세계와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근현대를 포함한 모든 과거는 오래된 미래의 나침반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유경상/김용준 (경북인뉴스)

[안동청년기자연합/안동아카이브연구회 공동기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