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 외면당해 끝내 잊혀진 예천-안동 경북선’
제국의 욕망과 민초의 삶 싣고 넘나들었다’
‘복원 외면당해 끝내 잊혀진 예천-안동 경북선’
제국의 욕망과 민초의 삶 싣고 넘나들었다’
  • 김용준/유경상
  • 승인 2016.05.3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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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부터 12년 달린 후 폐선된 경북선 구간을 가다
[안동청년기자연합 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7)

조선철도 개설은 식민통치 본격화의 핵심 골자였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예천역~경북안동역간 철로를 가다

안동과 예천, 예천과 안동. 이 두 지역을 확실하고도 일목요연하게 연결해 준 근대적 사건은 철도의 개설이었다. 예천~안동 구간을 이어주었던 철길을 ‘경북선’이라 지칭했는데, 이 총 노선의 시작은 김천에서부터 출발해 상주, 점촌, 예천을 거쳐 종점인 안동으로 이어져 있었다.

1931년 10월 15일, 김천~상주~점촌~예천 안동 구간 경북선 레일에 올라탄 기차가 경북안동역 플랫폼으로 진입한 이래 무심한 세월은 자그마치 85년이나 흘러갔다. 안동MBC 정윤호 기자는 <협력과 저항의 경계, 안동역> 글에서 “안동역을 출발하는 경북선 기차에는 의열단 김지섭과 김시현과 유시태와 이육사가 있었고, 안동역으로 오는 경북선 기차에는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가 있었다”고 지역 근대 인물들과 얽힌 철도의 의미를 명징하게 정리한 바 있다.

그러나 2016년 지금의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 본 ‘예천~안동 구간 경북선’은 뜯겨지고 묻힌 선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경북선의 예천~안동 구간’은 역사 속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시대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혀진 그 옛날의 이야기에 머물고 있었다.

▲ 1921년생으로 20대 초반에 안동철도국 기관사로 30년간 근무했었던 조낙추 안동교회 장로의 선친이 푸러형 증기기관차에서 동료와 찍은 사진 한 장이 80여 년 전 예천~안동간 경북선의 기억을 지켜주고 있다. (조낙추 사진제공)

원론적으로 풀어 얘기해 볼 때, 서양에서 철도의 출현은 인류의 위대한 진보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서구 열강은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강고해졌다. 이성과 과학의 시대를 맞아 역사는 끊임없이 직선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낙관성이 흘러넘치는 가운데, 이런 상징적인 사건의 하나로 철도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철도의 출현은 시민사회의 생활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큰 사변이었다. 나아가 철도는 국가와 국가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세계사를 열어주게 되었다.

철과 석탄을 결합시켜 등장한 철도는 이윽고 기계와 증기의 힘을 보여주었고, 이는 곧 근대로의 이행을 알리는 대표적인 표상이었다. 하지만 조선철도(또는 한국철도)의 시작은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적 진출이라는 역사상황과 맞물리게 되었다. 조선을 식민지화시킨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이었다. 더 큰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과 동시에 상품판매와 원료 및 식량약탈을 위해 조선철도를 신속하게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조선 지배를 위해 내디딘 첫 발자국은 조선철도의 개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인 1899년 경인선 개통은 그 시발점이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실례는 1904년 5월 31일 일본 원로회의와 각의가 작성한 <대한방침 및 대한시설강령>이라는 문서로 엿볼 수 있다.

“교통기관을 장악할 것-교통 및 통신기간의 중요한 부분을 우리 쪽이 장악하는 것은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의 여러 점에서 매우 긴요한 것으로서 그 중 교통기관인 철도사업은 한국 경영의 골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라 실행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강령에 따라 일본은 ‘경부철도’, ‘경의철도’, ‘경원 및 원산에서 웅기만에 이르는 철도’, ‘마산~삼랑진 철도’ 등을 급속히 건설하게 되었다.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에는 압록강 철도 가설공사가 완성돼 일본~조선~중국대륙이 하나의 교통·운수권으로 연결됐다. 1914년에는 호남선과 경원선이 생겨 호남의 곡창지대와 한반도 북부의 광공업지대가 수탈구조로 편입된 것이다. 이에 한일합방 직후인 1919년 말, 조선 내부의 총 철도연장이 2,197km에 이르렀다니 가히 주요한 지역들을 연결하는 간선철도망이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 예천역에서 바라본 영주방향 新경북선 철로. 舊 경북선 안동 방향 철로 또한 이 선로 어디쯤에서부터 놓여지고 이어져 나아갔을 것이다.

1924년 10월 김천에서 출발, 1928년 예천에 닿은 경북선

1931년부터 1944년까지 김천역~경북안동역까지 118.1km 8차례 왕복

그럼 경북 중서부지역에서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경북선의 개설 목적은 무엇이었고, 개설은 언제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조선총독부는 추가로 철도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재정적 여력이 여의치 않자 민간자본이 사철을 건설하게 유도했고 이를 매수해 국유화시키게 된다. 1920년에는 조선경편철도령을 조선사설철도령으로 개편했고, 이듬해 조선사설철도보조법의 등장으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명문화되었다.

1920년대 당시 한반도에서 지역개발을 통한 수탈에 목적에 둔 철도는 보통 50-100km의 장거리 노선으로 구성되었다. 이 유형의 철도는 간선철도와 연계해 지역교통망 개선과 지역개발을 추진한다는 목적이 있었다. 수송품목은 농산품과 일용품이었고 여객 수송이 중심이었다.

1919년 조선산업철도가 김천~점촌~안동 간 철로부설 면허를 취득했다. 1923년 9월 1일 조선산업철도를 포함한 6개 사철 업체가 (주)조선철도로 합병하게 되었다.

총 연장 118.1km에 달하는 김천~안동 구간에서 첫 번째로 개통한 구간은 1924년 10월 1일 김천∼상주 사이 36㎞ 개통이었다. 같은 해인 12월 25일에 상주∼점촌 사이의 23.8㎞가 개통되었다. 이어서 1928년 11월 1일에는 점촌∼예천 사이 25.5㎞가 완공되어 영업을 개시했다. 그리고 3년 뒤인 1931년 10월 15일에는 예천∼안동 사이 32.8㎞가 개통하게 된다.

한국철도공사가 2010년 발간한 ‘철도 창설 제111주년 기념 주요연표’에도 “1931년 10월15일 조선철도의 경북선 예천~안동 간 개통으로 김천~안동 간 경북선 열차가 전통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북선 열차 건설현황’에 대한 참고자료에서도 “김천(金泉)~상주(尙州) 36㎞ 1924.10.1. 영업개시 / 상주(尙州)~점촌(店村) 23.8㎞ 1924.12.25. 영업개시 / 점촌(店村)~예천(禮泉) 25.5㎞ 1928.11.1. 영업개시 / 예천(禮泉)~안동(安東) 간 32.8㎞ 1931.10.18. 영업개시”로 나타나 있다. 단지 예천~안동 구간 영업개시일이 10월 18일로 서술돼 있어 통상적인 개통일인 10월 15일과는 3일 시간차이가 있을 뿐이다.

1931년 10월 안동지역까지 도달한 경북선 철도는 안동 시내를 변화시키게 된다. 같은 해에 안동읍소가 개청했고, 1933년에는 안동신시장 설치, 이듬해에는 낙동강 인도교가 준공되었다. 경북선의 개통에 이어 중앙선이 건설된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실제로 1936년 5월 경에 서울 청량리~안동~영천으로 이어지는 중앙선 철도노선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북선 일부 구간인 점촌~예천~안동노선(58.3km)을 달리던 기차는 채 15년에서 12년 만에 멈추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전세가 궁지에 몰리면서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1943년 가을에서부터 1944년 9월 말까지 철로를 철거하게 된다. 경북선은 김천과 점촌 구간으로 단축된 상태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후 한국정부는 경북선의 원래 구간을 복원하지 않았다. 그 대신 1962년 5월 9일 점촌~예천 구간을 복원하는 기공식을 시작으로 예천~영주 구간을 연결하는 공사를 추진했다. 태백산 지구개발로 인해 수송물량이 증가한 중앙선의 수송 부담을 개선하고, 영동선과 경부선을 직접 연결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1964년에는 안동에 있던 철도국이 영주로 이전하게 돼 안동주민들의 상실감이 컸다고 한다. 결국 안동의 입장에서는 경북선을 잃은 것에 이어 철도국까지 빼앗겼다는 차별감이 상처로 남게 되었다. 이후 영주와의 정서적 대립이라는 뒤틀린 지역감정이 발생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동하였다. 그렇게 김천~안동 구간이라는 구(舊)경북선을 대체한 김천~영주 구간의 경북선이 1966년 10월 10일부터 현재까지 운행되고 있다.

▲ 1928년 11월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가 1944년 10월1일 폐선으로 영업이 정지됐던 예천역. 지금의 예천역은 1965년 12월30일 준공되었다.

5.16쿠테타 이후 1966년 1월 점촌~예천 구간만 재개통

예천역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얽힌 로맨스 떠돌고

예천과 안동의 옛 경북선 구간은 끝내 복원되지 못한 체 세월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에 기자는 이 구간의 흔적을 더듬어 보기 위해 예천역을 출발점으로 삼아 고평, 호명, 풍산을 거쳐 명동과 안동역을 답사해 보았다.

현재의 경북선 예천역사는 예천군·읍 역전길 4에 위치해 있었다. 그 연혁을 보면 1928년 1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가 1944년 10월 1일 폐선이 되어 영업을 정지했다. 그러다가 1965년 12월 20일 현재의 역사(驛舍)가 준공된다.

예천역 건너 시외버스터미널 앞 시내버스 승강장 근처에 살고 있는 김동년 할머니를 만났다. “내가 올해로 84살이야. 친정이 안동 구담인데 본관은 순천이지. 6.25사변 나던 해 열일곱 살에 풍천 구담에서 가마타고 예천으로 시집을 왔는데, 그땐 기차역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 1966년 1월27일 점촌~예천 경북선 구간이 재개통되었다. 이 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20분간 기념사를 했다. (자료출처. 한국철도80년약사, 철도청, 1979)

 

▲ 1966년 1월27일 열린 점촌~예천 경북선 구간 개통식 날 몰려든 지역주민들. 장소는 예천읍에서 안동방향 34국도 삼거리(충효로) 옆 선로인 것으로 추정된다. 우측 멀리 읍내의 예천제사공장 굴뚝이 보인다.

해방 이후 약 20여 년이 흐른 1966년 1월 27일 예천역 광장에서는 예천~점촌 경북선의 재개통식이 열렸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사를 하기 위해 참석했는데 예천역과 얽힌 박 대통령의 일화가 발굴돼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다. (<실록 박정희 시대, 36편>.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1997년 11월 24일 기사)

“1966년 1월27일 오전 경북예천역 광장, 혹한에도 불구하고 시골역 광장은 장날처럼 북적 거렸다. 일제가 소위 ‘대동아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철로를 걷어간 경북선(예천~점촌)의 재개통식이 열리고 있었다. 정각10시가 되자 역 광장에 마련된 연단위로 朴 대통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짧은 머리에 검은색 겨울코트를 걸친 朴 대통령은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20여 분간 기념사를 했다. 朴 대통령이 연단 아래로 내려서자 군중 속에서 50대 초반 한복차림의 여인이 다가섰다.

이 여인은 朴 대통령의 손목을 잡고는 “정희야...” 하고 부르고는 복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누님 진정하세요.” 朴 대통령은 이 여인을 다독거리며 위로했다. 두 사람에게는 예천역이 ‘이별의 플랫폼, 만남의 플랫폼’ 이었다. 주위사람들이 朴 대통령의 친 누님으로 여긴 이 여인은 주현숙(朱賢淑.84.재미)씨. 朴 대통령 보다 네 살 연상이다.

최초로 공개되는 두 사람의 애기는 朴 대통령이 대구사범을 다니던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2년 봄 구미보통학교를 졸업(11회) 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대구사범은 경성사범. 평양사범과 더불어 지방의 수재들이나 들어가던 명문. 지방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통학열차에는 학생들의 풋사랑 애기가 깃들여 있다. 박정희가 주현숙 씨를 만난 것도 통학열차에서다. 평소 동기생사이에서도 붙임성이 없어 외톨이였던 박정희. 그는 열차에서 만난 누나(당시 대구간호학교 재학 중)에게 특별한 호감을 가졌다.

두 사람은 당시 학생사회에서 유행하던 S-B(sister-brother. 누나-동생) 관계를 맺었다. S-B는 요즘의 애인과는 다른 의미다. -중략- 朴 대통령이 문경 교사 시절 때도 ‘집보다 여기가 가깝다’ 며 토요일 마다 예천의 朱여사 댁으로 놀러오곤 했었대요. - 중략- 언젠가 (1939년 말) 朴 대통령이 놀러 와서는 ‘군인이 돼 높은 사람이 돼서 오겠다며’ 일본군가, 혁명가를 부르더랍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와 ‘누님, 내일이면 헤이다이상(군인)이 되러 갑니다. 술 좀 사 주십시오’ 해서 술을 사주었고 朴 대통령은 다음날 예천역에서 만주로 간다며 떠났대요.”

이렇듯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해온 간이역은 사람마다, 또는 시대별로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높은 사람이었든 보통 사람이었든 젊은 날의 애틋한 만남과 이별이 상존해 있었다.

▲ 점촌~예천 구간 경북선 재개통식 날 앞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열차 차량 중간 뒤로 예천성당이 보이고 있다.

고평역 옛터 흔적 없고 무심한 내성천이 흐른다

호명터널이 남아서 수박재 내달리던 기억 떠올려

이어서 도착한 곳은 고평역 근처이다. 고평역은 예천군·읍 고평리 455-1에 세워져 있었다. 1931년 10월 16일 영업을 개시한 후 1944년 10월 1일 점촌~안동 간 경북선 폐선으로 폐역이 되었다.

고평역 사연과 풍경을 기대했으나 옛터는 사라지고 이제 흔적이 없었다. 내성천 고평 다리 건너편 고평들판에 있었다는 구전만이 남아 있다. 내성천을 가로질렀던 고평철교도 완전히 철거되었고 내성천 강바람만이 백골을 향해 불어오고 있었다.

▲ 왼쪽 검은 비닐로 덮여 있는 밭에 옛 고평역이 있었던 부지로 추정되고 있다.

예천군 호명면 직산2리 황산마을에서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손두섭(79세)씨를 마을 입구에서 만나 얘기를 들어 보았다. 손씨는 “어릴 적 외가인 점촌 방향 유천을 가기 위해 어머니 손을 잡고 고평역에서 기차를 탄 기억이 있다. 그때 본 기차는 석탄을 때는 증기 기관차였다. 어릴 때 친구들과 내성천에서 목욕을 하고 심심할 때는 고평철교 밑 교각에서 놀았다”며 당시를 회상 했다.

같은 마을 권기락(80세)는 일제 때 상주시 영순면에 외가가 있었다고 한다. 고평역에서 외가인 상주를 가기 위해 기차를 타곤 했다. 손씨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에 12살이었는데, 호명역 위 수박골 기차굴에 인민군들이 땡크와 군용차량을 숨겼고 비행기가 폭격하는 장면을 목격했었다고 말했다. 또한 61년 5.16 이후 철로복구 당시 직산2리 고평역에서 안동 방면으로 재개를 요청했지만 영주 방향으로 건설되었다고 말했다.

호명역은 예천군 호명면 직산1리인데, 폐역 이후에도 민가로 활용되었지만 34번 국도 확장공사로 지금은 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호명역도 고평역과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에 영업을 개시했다가 같은 날 문을 닫았다. 옛 호명역 역사 부지 대부분이 안동-예천 간 34번 국도로 편입된 후, 기차터널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기차터널은 도로주소 상 예천군 경서로와 안동시 괴정2길이 연결되는 지점인 안동-예천 행정구역 경계선 고갯마루 지점에 남아 있다.

▲ 예천-안동간 34번 4차선 국도를 따라 가다가 고평다리를 건너 직산리를 지나면 옛 호명역이 있었다. 현재는 도로부지로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천군 호명면 직산1리 박순서 이장은 “풍산으로 올라가는 고갯길을 수박재 고개로 불렀었다. 어르신들로부터 역사(驛舍)가 있었다고 들었다. 역사 자리는 신설된 국도로 편입돼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전했고, 안동시 풍산읍 괴정리 박서종 이장도 “고갯길을 옛날부터 동네에서는 수박재 넘어가는 길로 불러왔다”고 부언해 주었다.

직산1리 박 이장은 당시의 기억들을 증언해 줄 동네어른들이 거의 작고했고 여든 살이 넘은 분들도 기억이 희미하다고 안타까움을 전해주었다. 취재 도중 갑자기 가수 남인수의 무정열차 노래가사를 개사해 불러보고 싶어졌다.

▲ 경북선 호명터널. 예천군과 안동시의 경계지역 고갯마루 지점에 남아 있다.

‘경북선은 가자고 소리소리 우는데, 옷소매 잡고서 사랑님은 몸부림을 치는구나. 어머니 두고 어이 가리 애처로운 시집길, 내성천 굽이굽이 물새만 운다 눈물어린 호명역.’ 내친김에 풍산역까지 달려보자며 3절을 개사해가며 흥얼거려 본다. ‘아득한 수박골 넘어넘어 고개고개 눈물고개 넘을 때 희미한 차창에 그님이 떠오르네 비치네. 경북선 애처로이 허겁지겁 달릴 때 한맺힌 어머님 모정 가슴에 젖네, 비 내리는 풍산역.’

공출된 쌀, 배추, 무우 등 농산물 싣고 떠나간 기찻길

단속 걸린 삼베장수 아버지가 갇혀있던 풍산역에는....

답사 길은 벌써 풍산으로 들어섰다. 풍산읍 괴정리에 살고 있는 박영하(82세)씨는 “풍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호명 쪽으로, 안동역으로 갔던 적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풍산역에는 안동시내처럼 철도관사는 없었고 역사만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엔 풍산면이었지만 지금의 풍산읍 안교리에 위치했던 풍산역 부지는 현재 개인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가 있던 자리엔 철도부지 콘크리트 구조물 흔적이 남아 있다. 풍산역 또한 고평역, 호명역과 같은 시간대에 문을 열었다가 닫히게 되었다.

▲ 옛 풍산역은 안교리에 위치했지만 부지는 개인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박영하씨의 추억은 계속 이어졌다. “증기기관차가 달려오기 전에 빙판에서 타던 썰매(일명 시게또) 손잡이 창을 만들려고 레일 위에 못을 얹어 두었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가 삼베장사를 했는데 일본관리들 단속이 심해서 삼베를 허리에 감고 열차를 타고 장사를 다녔다. 아버지는 만주까지 가 장사를 했지만 발각이 되어 기차역사 유치장에 감금된 적이 있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풍산읍 상리에 사는 박정학(74세)씨는 풍산역과 관련된 어른들의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풍산에서 생산되었던 쌀, 배추, 무우 등 농산물을 일본인들이 공출해 풍산역에 야적했다가 경북선 열차를 통해 이북 원산까지 수송해 갔다”는 것이다. 또한 철거된 철로가 신설되는 강원도 철로 개설에 사용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도 말했다.

▲ 옛 풍산역 인근에서 만난 두 분은 모녀 지간이다. 김철암(99세) 할머니는 풍산 소산이 고향인데 어릴 때 친구들끼리 기차를 보고 뺑차 또는 기동차로 불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옛적 풍산역사 주변을 돌아다니던 중 산나물을 채집하던 할머니와 아주머니를 우연히 만났다. 두 분은 모녀 지간이었다. 안교리에 살고 있는 김철암(99세) 할머니는 풍산 소산이 고향인데 어릴 때 친구들끼리 기차를 보고 뺑차 또는 기동차로 불렀다고 기억했다. 그는 “1940년 경 시댁인 남후면 단호에서 안동역까지 걸어가 부산행 열차를 탔었다. 당시 남편이 운수사업을 하게 돼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가마타에서 살았다.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해 풍산에 와보니 그때는 이미 열차가 운행 중단이 되었는지 기차가 보이질 않았다”고 말했다.

명동역은 안동시 서후면 명리에 위치해 있었다. 명동역도 앞서 언급한 간이역과 마찬가지로 영업 개업과 폐업 시기가 동일하다. 열차는 안동에서 출발하면 현재의 안동시 태화동 태화오거리를 지나 50사단 방향으로 운행되었다. 50사단 담벼락을 지나 송현오거리에서 송현초등학교 뒤편 송현1길, 노하4길, 노하길, 노하1길, 황토마을2길, 소빰다리 서후면 방향 200M 지점에서 현재의 학가산 온천 방면으로 내달렸다.

▲ 안동시 서후면 명리 명동역이 지났던 선로는 서선초등학교 부지로 사용되고 있다.

송야천 부근에는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설치했던 철교 교각구조물이 남아 있다. 송야천을 건너 학가산 온천 옛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학가산 온천길이 나온다. 서후면 명동노인회관 건물 앞에는 작은 교량을 건너기 위해 시공되었던 철도교량 구조물 흔적이 남아 있다. 명동역사 부지는 대부분 안동-예천 간 34번 국도상에 편입되었다. 건물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당시의 일부 철로부지는 서선초등학교 앞 도로부지와 도로건너편 풍산읍 수곡1리 노인정 부지로 사용되고 있다.

풍산읍 수곡1리 산음리에 사는 정태영(87세)씨는 “당시 경북선 열차를 타고 풍산초등학교로 통학했다. 열차가 없어지고 난 뒤에는 산음리에서 풍산 초등학교를 도보로 1년간 다닌 후 졸업했다”고 말했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 바라본 명동역은 굉장히 큰 건물이었다고 기억했다. 역사 신축공사를 할 때 일본인들이 벽체는 대나무로 막고 흙으로 벽체를 마감하는 작업 장면을 본적이 있다고 말했다. 증기기관차가 지나갈 때면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고 회상했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김태윤씨가 당시 안동역에 근무했는데 몇 해 전 작고했다며 생존해 있으면 또 다른 기억과 증언을 해 줄 수 있는데 라며 아쉬워했다.

▲ 안동시내로 들어가는 송야천 철교의 잔존물이 구조물 형태로 남아 있다.

끝내 복원하지 못한 철길이 이 곳 뿐이었을까?

있던 철길도 남북이 가로막혀 70여 년간 멈췄으니

1941년 즈음에 경북선은 김천~아천~옥산~청리~상주~백원~양정~함창~점촌(59.8㎞)~용궁~개포~유천~예천~고평~호명~풍산~명동~안동(118.1㎞) 구간을 하루 8편 운행하였다. 이렇게 명동역을 지난 열차는 종착역인 안동역을 향해 출발했다. 안동시 서후면 송야천을 건너 지금의 송현동 군부대, 당북동 일원을 거쳐 종착지인 안동역에 도착했다. 2시간의 긴 여정을 마무리한 철마는 안동역에서 머무른 뒤 다시 김천을 향해 출발했다고 한다.

▲ 현재의 안동역사 전경. 예천발 안동역에 도착한 경북선은 1941년 경 하루 8편이 운행되었다. 안동역에 잠시 머무른 열차는 다시 김천을 향해 출발했었다.

안동역 역무실에는 일본 사또회사가 제작해 역무원이 사용했던 금고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금고제작 연호가 소화로 표기되어 있어 아마도 구 경북선 운행과 비슷한 시기에 안동역 금고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역대 안동역장 이름이 기록된 안동역 역사(安東驛 驛史) 서류가 남아있다. 1940년 3월1일-1942년 2월1일 村上卓雄 (촌산 탁웅, 무라카미 타쿠오), 1942년2월1일-1943년3월31일 田端又三郞(전단 우삼랑, 다바타 마타사부로), 1943년3월31일-1944년3월29일 鍋島 銵 (과도 갱, 나베지마, 코우), 1944년 3월29일-1945년12월30일 滿多 末吉 (만다 말길, 미츠타 스에키치), 1945년12월3일-1948년5월17일 金照一로 기록돼 있다.

▲ 안동역 역무실에는 일본 사또회사가 제작해 역무원이 사용했던 금고가 아직도 남아 있다. 금고제작 연호가 소화로 표기되어 있다.

해방 직후에 약 27일 간에 걸쳐 일본인 역장에서 한국인 역장으로 안동역사 인수인계가 이루어 졌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 연혁에는 1931년 10월 15일 조선철도주식회사 안동역 창설 (영업개시), 1949년 5월 1일 ‘경북안동역’을 ‘안동역’으로 개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노한(91세, 6.25참전기관사희생자모임 회장)씨는 6.25전쟁 발발 당시 교통부 안동철도국 안동기관차 사무소 기관사 신분이었다. 전쟁의 포화를 뚫고 열차를 운행하며 중앙선 옹천-평은간 내성천 철교 폭파현장을 직접 체험했다. 그는 경북선 열차 운행 당시 기관차 조사로 열차운행을 경험했다며 당시 열차는 푸러형 증기기관차로 기억하고 있었다.

▲ 김노한(91세, 6.25참전기관사희생자모임 회장)씨는 6.25전쟁 발발 당시 교통부 안동철도국 안동기관차 사무소 기관사 신분이었다. 전쟁의 포화를 뚫고 열차를 운행하며 중앙선 옹천~평은간 내성천 철교 폭파현장을 직접 체험했다. 그는 경북선 열차 운행 당시 기관차 조사로 열차운행을 경험했다. 당시 열차는 푸러형 증기기관차로 기억하고 있었다.

조낙추(안동교회 장로)씨는 “선친이 1921년생으로 20대 초반에 철도에 입사해 안동철도국 소속 기관사로 30여 년간 근무했었다. 근무 당시 안동철도역과 관련한 여러 사진이 있었는데 10년 전 아버지 장례 때 모두 없어졌다. 다행히 증기기관차에서 직장 동료와 찍은 사진 한 장을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예천~안동지역 舊 경북선에 얽힌 주민들의 추억은 연로한 분들의 기억에 의존되어 있었을 뿐이다. 구 경북선은 일제 식민시절 한 때인 12여 년에 걸쳐 주민들의 주요 대중교통이었고, 역사(驛舍)는 만남과 떠남의 장소이었을 뿐이다. 지금도 인근 노선의 간이역은 고즈넉한 추억의 장소이자 한적한 낭만의 공간으로 종종 우리들의 삶에 다가올 정도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철길과 기차역은 냉정한 역사의 흐름위에서 한때 수탈의 공간이었으며, 동시에 근대문물과 생활의 상징이었다.

▲ 안동역 철도 부지에는 끊어진 예천방향 옛 경북선 철로가 80년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식민지 한반도 변방의 두 지역을 달렸던 경북선 예천~안동 구간에는 일제의 제국적 욕망과 민초의 고달픈 삶이 실려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8.15해방을 맞았고 60년대 근대재건 시기 경북선의 일부 구간은 복원되었지만, 두 지역의 구간은 망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해방 후 무릇 이 지역만 끝내 철길을 복원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철도의 역사에서 우리는 1945년 9월 11일 남북간 철도 운행이 중단된 체험을 가지고 살았다. 삼팔선에 가로막혀 경의선, 경원선, 동해북부선, 금강산전기철도 등이 끊겨버렸다. 레일이 있어도 국토의 분단으로 끊어진 채 달리지 못하는 철마가 다시 움직이는 그날이 온다면, 아예 통째로 레일이 사라져버린 우리지역 철도의 비애를 작게나마 기억해 주길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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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시청 2016-06-16 17:27:07
본부장님
바쁘신 일정속에서도 주옥같은 지역의 문화유산을 더 이상 잊혀지기전에 반추해
주셔서 감동! 감동입니다
훌륭하십니다 ........
향도사학자도 아니요 그져 지역언론의 고유 의무인가요......
소시절 와룡이상에 살면서 이하역에서 기차타고 중고등학교를 기차통학했던
저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까맣게 잊고 지내왔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 납니다.
기차...곧없어질 중앙선 일부구간도..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