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지의 삶이지만, 울타리는 없었다'(2)
검무산과 보문산을 잇는 곳, 교류와 인정이 넘쳤다
'경계지의 삶이지만, 울타리는 없었다'(2)
검무산과 보문산을 잇는 곳, 교류와 인정이 넘쳤다
  • 김희철/피현진
  • 승인 2016.05.30 18: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동청년기자연합 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8)

안동과 예천 두지역의 경계를 찾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삶과 문화에 대해 알아본다. 본 테마는 산과 강, 도로를 중심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리적 요소에 중점을 두었다. 지난번 학가산 중심의 안동과 예천의 경계지역을 찾아봤다면 이번에는 문수지맥을 따라 검무산과 보문산을 잇는 안동과 예천의 경계지역을 둘러보고 경계의 정확한 지리적 위치와 자연경관, 문화 그리고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안동과 예천의 경계 그리고 문수지맥

낙동강의 서쪽과 내성천(乃城川)의 동쪽을 흐르는 산줄기이다. 백두대간 박달령과 도래기재 사이에 솟은 옥돌봉(1,244m)에서 남으로 갈래친 산줄기는 문수산(文殊山 1,207.6m)으로 내려와 봉화군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명호의 만리산(791.6m), 안동시 도산면의 용두산(665m)을 거쳐 녹전의 봉수산(569.6m), 북후의 불로봉(482m)으로 이어진 뒤 안동의 조운산(朝雲山 635m)을 지나 학가산(鶴駕山 874m)에 이른다.

►문수지맥

 학가산으로 향하는 문수지맥은 조운산에 이르기 전에 다시 한 갈래를 나누어 봉정사가 있는 명산 천등산(天燈山 575.4)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문수지맥의 원 흐름은 학가산에서 보문산(641.7m)으로 이어진 뒤 풍천의 검무산(331.6m)을 거쳐 예천군 지보면의 나부산(334m)을 지나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삼강리(三江里)를 돌아 예천의 명물로 알려진 의성포(義城浦)의 맞은편 절벽인 회룡대(回龍臺)에서 끝난다.

옥돌봉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이다. 문수산까지 물야면과 춘양면 경계로 가다가 문수산에서 봉성면을 만나고 이어 동쪽은 법전면을 잠시 스치다가 명호면이 된다. 긴재에서 상운면과 명호면의 경계로 가다가 만리산을 지나 월오현에 이르면 왼쪽(남)은 안동시가 된다. 안동시 녹전면으로 들었다가 박달산에 오르면 영주시와 접한다. 영주시 평은면에 잠시 들었다가 다시 안동으로 빠져나오고, 학가산에 오르면 예천을 만난다. 이후 안동과 예천의 경계를 따르다가 지보면에 들면 온전히 예천이다. 마지막 회룡포는 예천군 용궁면이고 삼강다리 아래 내성천 건너 마을은 문경시가 된다.

이 문수지맥의 끝자락에서 안동과 예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중심엔 보문산과 검무산이 있다. 그 중 문수지맥을 따라 보문산에서 안동과 예천의 경계지역을 먼저 돌아보기로 했다.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 예천에서 영주 방향으로 내성천을 따라 가다 보면 나오는 곳이 보문면이다. 보문면은 보문산으로 부터 면의 이름을 취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학가산 서쪽으로 좀 떨어져서 위치한다.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서 봉화 쪽으로 흘러내린 지맥이 한쪽에서는 안동 온혜 쪽으로 내려서면서 영지산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태자산으로 갈라져 나와 서남행 하여 학가산 쪽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학가산을 포함하는 작은 산맥은 동서로 펼쳐져 있는데, 동쪽으로는 어름산을 만들어 낙동강과 만나고, 어름산 서쪽에서 천등산을 밀어올린다. 천등산은 아래쪽으로 뻗어내려 저수산을 지어서 안동을 끌어안고, 서쪽으로는 안동 옹천 위쪽에서 박달산과 만난다. 박달산은 서쪽으로 조골산으로 이어지고, 조골산은 서남행하면서 동쪽 날개로는 하가산, 서쪽 날개로는 보문산을 만든다. 하가산은 남행하여 하지산을 만드는데, 그 한 갈래는 하회의 병산으로 이어져 나가 낙동강을 만나 멈춰 선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현장과는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다. 김정호에 의하면 보문산은 하가산 위쪽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간 독산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지도에 의하면 학가산 아래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간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퇴계가 낙동강 동쪽으로 붙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고, 도산 역시 낙동강 동쪽에 그려져 있는데, 사실은 퇴계나 도산은 낙동강 서쪽으로 그려지는 것이 옳다. 이러한 사례들은 김정호의 작업이 위대한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서는 일정하게 한계를 갖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중대바위에서 바라본 보문산의 모습. 보문산 뒤로 학가산의 모습도 보인다.

어쨌든 예천의 보문면은 보문산에서 이름을 가져다 쓰고 있지만, 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성천 동쪽 영역을 학가산과 보문산이 반분한다고 할 수 있다. 지도상에서 볼 때, 학가산과 보문산 사이의 갈마령이 두 산의 경계를 가르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판단이 그릇되지 않다면 보문면은 보문산 영역보다 더 넓은 지역이 학가산 영역에 속한다고 하겠다.

김진철 보문면장은 "보문면은 예천에서 6번째로 넓은 면으로 22개 행정동, 13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구는 2015년 12월 31일 기준 총 1천 799여명이 살고 있습니다. 내성천 건너, 학가산 쪽으로는 산성, 우래 등이 있지요."라고 보문면을 소개했다.

보문산은 산 북서쪽 절골마을에 의상대사가 세운 예천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보문사가 있어 더 유명하다. 보문산은 예천군 수계리에서 보문사를 지나 오르는 코스와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에서 중대바위를 거쳐 오르는 코스가 가장 대표적이다. 어느 코스를 택하던 산의 정상 부근에서 양 지역이 경계를 나누고 있다.

이곳에서 양 지역의 경계를 찾기 위해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를 찾았다. 예천쪽에서 보문산을 찾기보단 '김상헌 유허비'와 '중대바위'도 볼 겸해서 익숙한 안동에서 보문산을 오르기로 한 것이다.

서미마을 '김상헌 유허비'와 '중대바위'

서미마을은 풍산현에서 북쪽15리 오적산 남쪽에 있다. 가는 길은 풍산 읍사무소 뒤에서 오치마을을 지나 신양동과 신양못을 지나 마을어귀 은자암에 이르면 곧장 서미마을에 당도하게 된다.

이곳 서미마을은 서애 유성룡 선생과 청음 김상헌 선생 두 정승이 은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서애 유성룡 선생은 이곳 서미마을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현재 서애가 거처했던 농환재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을 뿐 더러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아 후세인들에게 아쉬움을 주고 복원을 하는데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서미마을에 사는 한 촌부는 "중대바위 넘어 '정 터(정승이 살았던 터)'가 남아 있고, 또 권씨가 살던 터 쪽에 농환재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권씨가 떠난지 오래여서 아무도 모른다."고 알려줬다. 또한, "서애가 머물렀던 서미동에 신도비를 세우려 했으나 당시 마을 어르신들의 반대로 마을에 세우지 못하고 마을입구 신양저수지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고 알려줬다.

►1710년(숙종 36년) '빗집바우' 위에 높이 171㎝, 너비 72㎝, 두께 21㎝ 정도로 만들어진 '김상헌 유허비'. 뒤로 중대바위가 솟아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김상헌의 흔적은 이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보문산과 중대바위를 병풍처럼 뒤에 두고 바위에 단칸 팔각지붕이 있는 건물이 서미리에 도착하는 순간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팔각지붕 속에 '김상헌 유허비'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김상헌 유허비'는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속칭 '빗집바우' 위에 있다. 빗집바우는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강론하던 서간사(西磵祠) 뒤쪽에 위치한다. 빗집바위 위에 세워진 단칸 팔작지붕 안에 유허비가 있다.

세워진 시기는 "崇禎紀元後 八十三年 庚寅 三月 日立(숭정기원후 팔십삼년 경인 삼월 일립)"으로 1710년(숙종 36년) 음력 3월로 추정되며, 높이 171㎝, 너비 72㎝, 두께 21㎝ 정도이다. 앞면에는 '청음선생목석거유허비(淸陰先生木石居遺墟碑)'라고 새겨져 있으나, 글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은 마모가 심하여 알 수 없다.

김상헌 유허비가 세워진 빗집바위 앞면과 왼쪽 옆면에는 김상헌의 7세손 김학순(金學淳, 1767~1845)이 안동부사로 있으면서 김상헌을 추모하기 위해 새긴 바위글씨가 있다. 바위글씨 앞면에는 '목석거경진중춘선생7대손본부사학순근서(木石居庚辰仲春先生七代孫本府使學淳謹書)', 옆면에는 '만석유허백세청풍(萬石遺墟百世淸風)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상헌 유허비는 일반적인 비와 달리 커다란 자연 바위 위에 세워진 것이 특이하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후 안동 소산으로 물러나 청원루(淸遠樓)에서 생활하다가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초가집을 지어 목석거만석산방(木石居萬石山房)이라 이름 짓고 은거하였다. 김상헌은 좌의정을 지냈으며, 효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됐다고 돼 있다.

이 유허비를 지나면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게 된다. 산길에 접어들자 온통 나무들이 새까맣다. 2011년 4월 2일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에서 발생한 산불이 삽시간에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와 신양리, 서미리 등으로 번지면서 이 곳 보문산의 나무들도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서미리에서 보문산에 오르다보면 탕관과 같이 생긴 커다란 바위를 만날 수 있다. 서미마을 사람들은 '탕관바우' 또는 '중대바우'라고 부른다. 이 마을에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전쟁에 나간 동네사람들이 전사자 한명 없었던 것은 중대바위의 영험으로 여기고 마을사람들은 중대바위를 신성물로 여기고 있다.

안동시는 2015년 실시한 '중대바위 관광자원화 용역결과'를 토대로 2016년 실시설계를 거쳐 국비를 지원 받아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곳에는 주요인물, 유적, 전설, 설화 등을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해 등산로와 치성공간, 전망데크, 공원 등을 조성한다고 한다.

중대바위에 올라 땀을 식히다 보면 자연스레 보문산 정상부와 학가산을 번갈아 바라보게 된다. 학가산에서 보문산으로 이어지는 문수지맥의 기운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기운을 느끼면서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보문산 정상을 향해 간다. 중대바위는 아직 안동땅이다. 보문산 정상부 부근에 가야 양 지역의 경계를 볼 수 있다.

보문산과 보문사

 

►보문산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산이다.정상이라고 해봐야 그리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이곳 정상이 안동과 예천을 나누는 경계지역이다. 보문산 정상에서 동남쪽은 안동, 북서쪽은 예천군이 되는 곳이다.

보문산이 나름 유명해진 데에는 분명 보문사(普門寺)의 영향이 컸으리라. 보문사는 667년(신라 문무왕 7)에 의상대사가 세웠으며, 1184년(고려 명종 14)에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한 사찰이다. 산 이름과 사찰 이름이 '보문'으로 같지만 어느 것의 이름이 먼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보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지눌이 '화엄론'을 읽다가 오도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또한, 이 절은 고려왕조의 사고(史庫)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1381년(우왕 7) 7월 충주 개천사(開天寺)로 옮겼다.

1407년(태종 7) 교종(敎宗)에 예속되었고, 1569년(선조 2)에 중수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뒤 1791년(정조 15)에 중창했다. 1882년(고종 19) 강주(講主) 금해(錦海)가 이 절에 머물러 있을 때만 하여도 극락보전(極樂寶殿)을 비롯해 노전(爐殿)·선당(禪堂)·조실(祖室)·범종각·나한전·보조영당(普照影堂)·산신각·칠성각·운계암(雲溪庵) 등의 당우(堂宇)들이 있었고, 대중의 수효도 보문사에 50여 명, 운계암에 30여 명이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황폐해진 것을 1926년에 주지 최성환(崔成煥)이 불전 및 승당을 중수했고, 1967년에 주지 화운(華雲)이 보수, 단청하여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과 반학루(伴鶴樓)·선방·조실 등이 있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조선 후기 건물로서, 삼존불상과 탱화 8점이 봉안되어 있다. 탱화 중 2점은 1767년(영조 43)에 봉안한 것이고, 1점은 1830년(순조 30)에 제작한 것이다.

이 밖에 문화재로는 3층 석탑을 비롯하여 광배(光背)·맷돌·범종 등이 있다. 이 중 3층 석탑은 1185년에 지눌이 중창할 때 세운 탑으로서 나한전 본존석가여래상의 표증석탑(表證石塔)이라 하며, 당시 경내의 운계암 뜰에 건립하였다. 규모가 작지만 석불을 만진 솜씨가 조밀하고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수박골과 현애리 그리고 황지리

안동과 예천의 경계를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안동과 예천을 잇는 34번 국도상에 위치해 있는 경계다. 안동시 풍산읍 괴정리와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가 34번 국도상에서 만나는 곳이 양 지역의 경계이며 34번 도로상의 경계는 도로 표지판으로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34번 국도상의 안동과 예천의 경계다. 멀리 예천군 표지판 뒤로 나무사이로 얼핏 보이는 마을이 당연히 예천군일꺼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동 수박골. 나무들 뒤로 보이는 작은 야산의 능선이 안동과 예천의 경계다.

하지만 도로를 벗어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도로상의 경계를 토대로 동·서로 선을 죽 그어서는 안 된다. 도로상의 표지판만 보고 당연히 예천 땅이겠거니 하고 들어간 마을은 안동땅 수박골(괴정2리)이라는 곳이었다. 안동과 예천의 또 다른 경계인 대봉산 초입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주민의 얘기를 빌리자면 안동·예천 경계는 도로 경계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서 수박골을 지나 서쪽 산 능선을 타고 간다는 것이다. 도로 반대쪽은 오래된 시·군 경계석이 있는 폐가 뒤쪽으로 오미리 방향으로 가다 다시 북쪽 방향으로 간다고 알려줬다.

34번 도로상의 경계에서 도로를 건너자 매우 복잡한 경계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주민이 손가락질로 '저기 저 산 골에서부터 이리로 해서 폐가 뒤쪽으로 이렇게 도로 건너 저기 보이는 산 능선'이라고 열심히 알려주지만 도무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저 폐가 뒤가 경계라고요?" 되묻기를 몇 차례 대충의 경계가 그려졌다.

►안동과 예천의 경계임을 알려주는 오래된 경계석. 34번 도로를 건너 경계석 뒤로 보이는 폐가 뒤쪽으로 안동과 예천의 경계가 나눠져 있다.

안동과 예천 양 지역은 학가산에서부터 온전히 문수지맥을 경계로 두 지역이 나뉘어져 있다. 수박골을 지나 보문산에서 이어지는 경계를 찾아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로 갔다. 현애리에서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로 넘어가는 경계를 눈에 담기 위함이다.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는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와 백봉현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백봉현 또한 문수지맥으로 높지 않은 나지막한 언덕이다. 양 지역의 경계인 백봉현 정상에는 말라죽은 신목이 하나 있는데 동네 어르신의 말에 따르면 언제부터 신목이었고 언제 죽었는지는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단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나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말라죽은 신목이지만 아직도 영험함이 있는지 신목 주변에 고사를 지낸 돼지머리가 놓여 있었고, 그밖에도 각종 주술적인 물건들이 신목임을 증명하고 있었으며 작은 농로의 도로조차 그 신목을 양 갈래로 비켜 지나가고 있었다. 작은 농로이기는 하지만 사고위험이 없지는 않을 텐데 말라죽은 신목을 그대로 두고 있는 양 지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곳 백봉현에서 황지리로 넘어가는 오른편으로 보문산의 지맥이 흐르고 있고, 그 능선에서 백봉현을 지나 직산리를 거쳐 괴정리 방향으로 경계는 이어진다.

►작은 농로 중앙에 말라죽은 신목이 있는 이곳이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와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의 경계인 백봉현이다.
►백봉현 정상 부근에서 밭일을 하던 마을 어르신이 안동과 예천의 경계 및 백봉현 정상에 있는 신목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예천군 황지리로 넘어가기 직전에 있는 풍산읍 현애리에는 한국 근현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민족운동가이며 반침략 반독재의 화신으로 평가받는 하구(何求) 김시현(金始顯) 선생이다. 경계지 산 바로 아래 위치한 후안동김씨 북애공 종택이 그의 생가이다. 선생의 고모부는 예안의병장을 지낸 이인화선생이며 매제는 추강 김지섭의 동생 김희섭이다. 또 의병장 이강년은 이인화선생과 처남매부사이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상해로 망명하여 의열단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인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1920년에 투옥됐던 그는 1922년에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대표로 참가한다. 훗날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 황옥, 김원봉과 같은 인물과 같이 무장투쟁을 이어가면서 수차례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이후에는 반독재 통일민족국가 건설에 몸을 바쳤다.

심산 김창숙선생과 조선독립운동사 발간에 참여하고 김규식, 여운형 등과 좌우합작운동을 하였으며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다. 또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6월 25일 부산에서 개최된 전쟁2주기 기념식에서 의열단 동지 류시태와 이승만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미수에 그쳤는데 그는 이승만의 실정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민중이 도탄에 빠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북애공 종택

예천군 황지리는 약포 정탁의 읍호정(挹湖亭)과 도정서원(道正書院)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약포 선생이 만년을 보낸 읍호정은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의 내성천 변의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입덕루(入德樓)와 도정서원이 근처에 있다. 여기가 바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요 경세제국(經世濟國)의 우뚝한 명제상인 약포가 정자를 짓고, 생을 정리한 곳이다. 본래는 76세 무렵 고평의 거처하는 집 서재를 망호재(望湖齋)라 했고, 동쪽 호반에 초당을 엮어 정자를 앉힌 것이 읍호정 이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건했다.

도정서원은 이런 약포 선생을 기리기 위해 1604년에 건립됐으며, 1679년 유림과 후손들의 성금으로 강당을 건립한 후 도정서원으로 승격됐다. 또한, 정탁의 셋째아들 청풍자 정윤목을 추가 배향했다. 이후 1866년 서원철폐령으로 일부가 철폐되었다가 1997년 국비보조 사업으로 동재·서재·진사청·누각 등 5동의 건물을 복원했다.

►약포 정탁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도정서원(사진 위)과 약포 선생이 만년을 보낸 읍호정(사진 아래)

신도청 소재지의 주산 검무산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를 지나 안동과 예천 경계지의 마지막 여정인 검무산으로 향했다. 검무산 자체가 안동과 예천의 경계를 나누지는 않지만 검무산을 중심으로 안동과 예천이 공동으로 이전을 추진한 경북도청이 들어서면서 안동과 예천의 경계를 찾아가는 곳으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됐다.

검무산 역시 문수지맥에 속해 있으며, 해발 331.6m로 높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이곳 정상에 오르면 안동시 풍천면의 신도청과 예천군 호명면의 신도시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안상학 시인은 "산 이름을 두고 이렇게 말 많은 산은 본 적이 없다. 거물산(巨勿山), 흑운산(黑雲山), 검무산(劍無山. 劍舞山), 검모산(劍帽山) 등이다. 여기에 최근 김휘동 전안동시장이 주창한 문학산(文鶴山)까지 가세하고 보니 점입가경."이라고 했다.

안 시인의 말처럼 '영가지'(권기. 1601.)에는 거물산과 흑운산을 같이 쓰고 있다. '경상북도지명유래총람'(경상북도교육원회. 1984.)에는 검모산(劍帽山)으로 나온다. 근방에서 지관으로 활동하는 어떤 사람은 이 산을 승전한 장수가 칼을 놓고 투구를 쓰고 앉아 있는 형상으로 풀이하고 있다. 인근 가일마을의 뒷산인 정산은 포로로 잡은 왜군을 형상한다고 말한다. 구담을 비롯한 이 지역은 왜군들이 퇴각하며 약탈을 일삼다 패퇴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민담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경북마을지'에는 검모산은 자취가 없고 대신 검무산(劍舞山)이 자리 잡고 있다. 거물산, 흑운산은 괄호 안에 넣어 놓았다. 유사 기관에서 하는 일인데 십여 년 만에 이름이 바뀐 것이다.

최근 도청 이전 문제가 한창 진행중일 때 당시 안동시장이었던 김휘동 시장은 산 이름을 문학산으로 바꾸자는 의견을 내놓았던 적이 있다. 문학산은 문수산(文殊山. 1206m)과 학가산(鶴駕山. 882m)에서 따온 것이다. 백두대간의 소백산 북동부에 자리 잡은 옥돌봉(玉乭峯. 1242m)에서 곁가지 친 용이 문수산을 낳고 문수산은 학가산을 낳고 학가산이 검무산을 낳은 것이다. 이 지맥은 화산을 낳고 화산의 기운은 하회마을에서 맺혀 낙동강에 잦아든다. 검무산을 문학산으로 바꾸자는 의견은 문수기맥의 족보를 따져 윗대의 의미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오미리마을 방향에서 바라본 검무산

 안상학 시인은 검무산의 첫인상은 남성적이라고 했다. 정상 부분에 노출된 거대한 바위는 학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 거대한 투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산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은 자못 검푸르다. 검과 투구와 친한 장수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칼이 없는 장수의 이미지에서는 무과 급제를 한 엘리트 장군보다는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 걸고 나선 의병장 형상이 우선 떠오른다고도 했다.

검무산은 평지돌출 형상이다. 기개가 서릿발 같은 이미지는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이 지역의 정서와도 닮았다. 이 산을 안산으로 둔 풍산 오미 출신의 근전 김재봉(槿田 金在鳳)과 추강 김지섭(秋岡 金祉燮.), 검무산을 배산한 가일 출신의 권오설(權五卨) 등 이곳에서 배출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기개를 닮았다.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던 추강 김지섭은 1924년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천황을 비롯한 요인암살을 위해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진 의사이며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이며 독립운동가인 근전 김재봉과 2대 책임비서를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옥중에서 산화해 간 권오설.

그들의 비타협적인 큰 뜻의 굳고 거침없음은 이 산의 기운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본다. 평화의 시기에는 자신을 갈고 닦고, 위기의 시대에는 맨주먹으로 떨쳐 일어나는 선비정신의 기운이 느껴지는 산이 검무산(劍無山)이 아닐까. 손에는 검이 없으나 마음에는 검이 있는, 평시에는 검이 없다가 전시에는 비수를 뽑아 견위치명을 다하는 정신이 훨씬 가까울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공사 구별 없이 대체로 이 산을 검무산(儉舞山)으로 부르고 있다. 오랜 굴곡의 역사를 씨줄로 삼고 수많은 인물들을 날줄로 엮어 짠 영욕의 옷을 철마다 갈아입으며 우뚝하다. 이름을 바꾸는 일보다 여기에 싱싱하고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더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검무산이면 충분하다고 어느 글에서 밝혔다.

경북 도청이 완전히 이전되고 나서 검무산에는 새로운 등산로가 생겼다. 새로운 등산로를 따라 오르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원래의 등산로를 찾아 오르기로 했다. 그런데 찾기가 쉽지가 않다. 분명 경북교육청(예전 마을이 있던 자리)뒤로 길이 있어야 하건만 찾기가 쉽지 않다. 5월 마구 자란 풀들을 헤치고 나서야 겨우 자그마한 길을 발견했다.

그 길을 30분 남짓 오르면 검무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예전에는 갈전, 도양 들판과 시루봉, 낙동강 건너 광덕, 기산, 신성리로 이어진 강남평야를 끼고 앉은 봉화산(400.6m)이, 왼쪽으로는 풍천 가일마을의 주산인 정산(232m) 너머 멀리 낙동강이 풍산평야를 끼고 화산(328m)으로 숨어들고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산합리(예천군 호명면) 주산인 거무산(227m) 너머로 모래펄도 좋은 내성천이 넉넉하게 꼬리를 감추며 호명면 소재지를 돌아나가고 있었다면 이제는 정면으로 경상북도 도청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새로 생긴 도로들이며, 신도시 조성을 위해 짓고 있는 아파트 단지들이 높이 올라가고 있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잠시 땀을 훔친 후 검무산 정상에 서서 경계지역을 눈으로 찬찬히 살펴봤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도청이 자리 잡은 곳은 안동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저 높이 올라가고 있는 아파트 단지들은 예천일 것이다.

이제 이곳은 지리적 경계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안동과 예천이 그 영광과 번영을 함께 공유하는 땅이 되었다. 나아가 경북의 300만 도민이 함께 미래 천년을 설계하는 도민의 터전이 될 것이다.

►검무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상북도 도청 모습 비록 경북도청은 안동에 있지만 안동과 예천이 이 도청을 유치하기 위해 단합했다. 안동과 예천은 도청을 중심으로 앞으로도 늘 상생하며 서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도청에서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보이는 신도시 조성 모습 이곳은 예천땅이다. 경북 도청이전으로 안동이 도청이전지라는 명분을 챙겼다면 예천은 신도시라는 실리를 챙겼다. 하지만 양 지역이 반목한다면 그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을 수도 있다.
►검무산 정상에서 안동과 예천의 경계를 눈으로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 검무산을 중심으로 경북도청과 신도시를 가르는 경계(붉은 선)를 지도상에서 확인했다.

안동과 예천 그 경계의 끝에서 이웃 공동체를 확인하다

검무산을 내려와 나지막한 산 능선과 새로생긴 도로를 경계로 펼쳐진 신도시 조성 구역에는 이미 지리적 경계를 찾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지형이 많이 변해 있었다. 안동은 주로 학교와 관공서 및 상권으로 형성되어 있고 예천은 바로 인접해서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다는 것뿐이다. 최근 이사해 온 현지 주민들 조차 정확한 경계지점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안동과 예천의 경계는 이미 이곳 주민들에게는 의미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반응이다.

신도시 지역에서 경계를 따라 풍천 구담으로 들어가면서 만난 할머니들에게서 겨우 그 경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기 도로 왼쪽이 안동이고 도랑을 끼고 도는 오른쪽이 예천이래"하신다. 반가움에 짓궂은 질문을 툭 던져본다. "할매요 여기는 예천인데 저기 안동 땅으로는 안넘어 갔지요?"하니 "무신소리고 옛날에는 이동네에서 풍산, 풍천으로 시집장가도 마이가고 머슴들 왕래도 많았지 저기 길옆에 안동땅도 우리가 붙혀 먹었제 달부 한동네래"말한다. 한참 놀다가 다시 발걸음을 풍천 구담과 예천 지보의 경계를 확인하고 그 경계의 끝을 향해 내달린다.

►지보면 금능마을 주민들.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 ‘경계’란 가르고 나누는 의미가 아니라 교류를 시작하고 문화를 함께하며 서로의 이웃 공동체를 연결해 주는 소중한 ‘이음새’다.

구담과 지보의 경계는 도로에서 예천 지보 방향으로 약간 치우쳐져 있다. 구담교로 이어지는 도로를 경계로 하는것이 아니라 구담 서쪽 능선을 경계로 하고있기 있기 때문이다. 4대강 자전거 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작은 표지판이 그 경계임을 말해준다.

낙동강까지 뻗어간 경계는 강둑을 따라 구담과 신성리를 이어주는 구담교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구담교 가운데가 예천과 안동을 나누는 지점이고 다리를 건너자 마자 바로 강둑을 내려가면서 그 경계가 형성되어 있다.

이 도로를 10여 킬로 이어 내려가다 보면 드디어 예천과 안동 경계의 끝이 나타난다. 이곳은 공교롭게도 안동 신성리와 의성 안사면, 예천 지보면 신풍리가 나뉘어지는 지점이다.

►안동과 예천, 의성이 만나는 지점. 의성 안사면 오선정 오른쪽에 안동시 표지판이 있고 좌측 낙동강 옆이 예천 지보면 신풍리다.

경계를 걷기 시작하면서 북으로는 학가산과 내성천이 만나는 지점에 영주, 안동, 예천이 만나는 시작점이 있었듯이 남쪽 끝에는 안동과 예천, 의성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강과 산, 길을 넘나들며 삶을 서로 공유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경계'란 가르고 나누는 의미가 아니라 교류를 시작하고 문화를 함께하며 서로의 이웃 공동체를 연결해 주는 소중한 '이음새'이다.

►경계의 끝에서 바라본 북쪽 전경. 낙동강 우측에 신성리 들판이 보이고 좌측에는 예천 지보면, 오른쪽 마을이 풍천 구담, 가운데 신도청의 주산 검무산이 보이고 검무산 뒤에 학가산이 어렴풋이 보인다.

지금까지 여정에 만난 많은 분들께 협조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리며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경계지의 삶이지만 울타리는 없었다'를 마친다.

 

[안동청년기자연합·안동아카이브연구회 공동 기획연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