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안동 가릴 것 있습니까? 사무 여 사람이지”
안동에 둥지 튼 예천사람, 예천에 둥지 튼 안동사람
“예천 안동 가릴 것 있습니까? 사무 여 사람이지”
안동에 둥지 튼 예천사람, 예천에 둥지 튼 안동사람
  • 백소애/정운홍
  • 승인 2016.05.3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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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청년기자연합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9)

한 사람의 일생은 그 사람 자신의 역사요 가족의 역사이자 나고 자란 지역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그 옛날 중학교 진학을 못해 나무하고 꼴 베던 소년은 어느덧 흰머리 성성한 모습으로 신재생에너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늑대가 출몰하는 산골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할머니는 디지털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예천에서 태어나 안동에 정착한 박원구(70) 씨는 예천이 고향인 아버지, 예천에서 태어나 안동에 살고 있는 본인, 안동에서 나고 자란 아들과 손자까지 4대 모두 예천 안동과의 연이 이어져있다. 안동에서 태어나 예천에 정착한 심순노미 할머니(89)는 열여덟에 시집가 평생을 예천 땅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들은 안동사람 예천사람으로 굳이 구분 짓지 않아도 되는 ‘안동사람 예천사람’이다. 예사사람들의 삶을 통해 지역의 발전과 변화는 물론 안동과 예천을 한 생활권으로 여기고 근현대를 살아온 그들의 추억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1. 안동에 둥지 튼 예천사람>

박원구 씨의 예천살이 안동살이

유천면 매산리, 8남매 맏이로 태어난 박원구

이름은 박원구(朴元求). 밀양박씨에요. 종가 큰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예명은 크게 되라고 태룡(太龍)이고 불심이 있어 법명은 법정(法正)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태룡이라 많이 불렸죠. 1947년에 태어났으니 올해 딱 일흔입니다. 논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더라도 절대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하여 일흔을 종심(從心)이라 하지요. 이 나이에 뭔 욕심이 있을라꼬요, 순리대로 사는 거지.

►박원구 씨

고향은 예천군 유천면 매산2리 퇴치, 고향집은 지금 안 남아있어요. 비행장에 다 편입됐거든요. 지금도 한 50~60호 살아요. 고향은 떠나도 조상 산소가 다 거기 있으니까, 유천중학교 앞에 정자도 관리하고 해마다 문사일도 다 하고 있어요. 울 아부지 성함은 박기만, 어매는 이을순 여삽니다. 매산이 고향인 아부지한테 바로 옆 고산이 고향인 어매가 시집오셨어요. 어매는 ‘고동댁’으로 불리셨어요. 나는 8남매 맏이래요. 밑으로 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나니 없는 형편에 참 힘들었죠. 입 많은 식구에 아버지는 일찍이 강원도 황지로 가 광부로 일하시고 어머니 홀로 자식들 건사하시며 가난하게 살았어요. 뭐 그때는 그래도 다들 가난했으니 그걸 위로 아닌 위로로 삼곤 했지요.

유천초등학교 27회 졸업생인데 중학교 진학을 못했어요. 나중에 유천초등학교 총동창회장 할 때 한문, 일어로 된 졸업생 이름, 학교 연보, 연혁을 내 손으로 다 정리하며 만들었는데 그땐 참 뿌듯합디다. 학교 교목이 느티나문데 느티나무는 수명이 길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자나무잖아요. 굳센 의지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의미해서 그렇게 정했다고 하네요.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 진급도 못했던 졸업생이 학교에 손 하나 보탰으니 그게 작게나마 위로가 되고 그래요. 그렇게 커오면서 느티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가난하면 생각이 많다

초등학생 때 워낙 가난해서 점심 도시락도 못 싸갔어요. 딴 친구들이 보리밥이며 고구마, 김밥, 피도 안 깎은 감자 같은 것 들고 학교 갈 때 나는 줄래줄래 그냥 갔지요. 임기상 선생님이라고 4학년 5학년 2년 달아서 담임이셨던 선생님이 날 예뻐해 주셨어요. 점심때면 슬그머니 밖에 나와서 뒷산으로 가요. 수돗물을 펑펑 마셔 배를 불리고 뒷산 묘등에 거꾸로 누워 하늘을 봐요. 그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데, 참말 가난하면 생각이 많은가 봐요. 한참을 그러고서 있다가 내려오면 선생님이 애들 밥 남은 거를 챙겨다가 나를 주시곤 했어요.

저녁에는 마을 앞 논에 들어가요. 물이 얼었다 녹으면 논으로 꺼먼 고무신을 들고 통과를 해요. 손으로 골부리를 잡아서 그걸 속옷도 안 입은 바지 가랑이 속에다 넣는 거야. 그땐 농약도 안칠 때니까 미꾸라지며 골부리며 뭐가 잔뜩 많았어요. 그렇게 잡은 골부리를 갖고 가서 동생들이랑 먹었어요. 골부리를 날거로도 많이 먹었어요. 뭐 배가 고픈 시절이니까. 보릿고개는 우리대로 끝이 났지만 모질게 살아 그런지 세상 사는데 마음가짐도 어려서부터 남달랐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아버지 회갑년)
►아버지, 어머니, 백부님과 함께

당시에 큰집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가서 이래저래 잡일도 하고 나무도 하고 품삯도 받았어요. 어려서부터 동네사람들이 ‘저놈은 공부만 가르치면 괜찮을텐데, 똑똑한 놈인데’하고 안타까워들 했죠. 고등학교 다니는 친척누나가 방학 때 내려와 ‘니가 여 왜 있노. 공부 안하고.’하며 강의록을 사줬어요. 당시에 4권이 한 학년 치니까 총12권, 중학교 3학년까지 과정의 강의록을 주더라고요. 신주머니 같은데 고이 넣어 나무하러 가서 읽고 집에 와서 읽고 진학을 못한 한을 그렇게 풀었어요.

►어린시절부터 손에서 놓지 않았던 고서적

한문도 동네 아저씨들이랑 형들이 배우는데 따라가서 형들은 앞에서 ‘하늘 천 따 지’ 배우고 나는 뒷문 구석에 앉아 배웠어요. 옛날에는 음이 안 달렸었는데 돌아와서 할아버지한테 있는 천자문으로 다시 복습해서 그렇게 혼자 공부했어요. 그저 악착같이 뭐든지 배우려고 했어요. 그렇게 1-2년을 큰집 허드렛일을 하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서울행을 결심했어요.

새벽 4시 경기여객, 열네 살의 상경

새벽 4시에 서울로 가는 경기여객 시외버스를 탔어요. 쪽딱이(가마니) 열장 팔아서 그걸로 차비를 마련했지요. 새벽의 상경 버스를 타고 가는 열네 살 소년의 심정이 어땠냐고요? 흔히들 ‘서울로 오입간다’고 하잖아요. 몰래 가는 거였어요. 그래도 희망을 가졌어요. 꼭 공부해서 성공하고 말겠다는. 참 맹랑했죠.

촌놈이 서울 가니 4.19혁명이 일어나고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어요. 거리는 연일 데모로 북적였고 어린 마음에도 민주주의가 어떻고 그런 것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어린 나이에 사는 건 역시나 팍팍했죠. 첨엔 넝마주이한테 붙들려서 그 소굴에 잠깐 있었어요. 넝마주이가 밤이면 뭘 훔쳐오라고 자꾸 아이들한테 시키는데, 주로 돈 되는 양은그릇이나 빨래 널어놓은 걸 걷어오라고 시켜요. 특히 당시 빨간 빤스가 유행이었는데 그걸 가져오면 사탕을 더 주곤 했어요. 하하. 그런 생활이 반복되니 내가 이럴려고 서울 왔나 싶어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싶었죠. 밤에 왜 헌책 파는 노점상 있잖아요. 육교나 길에 간드레 불(카바이드) 놓고 책 파는. 거기 아저씨가 어디 갈 때 대신 노점을 봐줬는데 거기 별의별 책이 다 있어요. 거 앉아서 소설 읽고 잡다한 책 읽다가 이래선 승산 없다 생각하고 박차고 나왔어요. 낮에는 노끈장사로 돈 벌고 밤에는 학원에 다녔어요. 뭉텅이로 노끈을 팔에 걸고 돌아다니며 팔았는데 정확하진 않지만 50환 정도 받았지 싶어요. 그때 짜장면이 15원 정도였거든요. 고학생으로 지내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었어요. 보통고시 중학교 과정, 검정고시 고등학교 과정을 치르고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예천으로 왔어요. 입대할 나이가 다 됐을 때니까요. 그렇게 스물에 고향에 다시 내려왔죠.

36사단 입대, 안동 정착의 계기

스물둘에 입대하기 전까지 예천서 2년간 4H활동이랑 새마을운동을 열심히 했어요. 집에 와보니 그전에 너댓 되던 동생이 모두 일곱이 되어 있어요, 하하. 3남 5녀 온전한 8남매가 된 거지요. 마을사람들도 동생들도 문맹자가 많으니 책임감이 많이 들었어요. 동생들을 최소한 한글은 떼게 해야지 싶어 야학을 열었어요. 옛날 누에 멕이던 잠실에서 야간학교를 만들어 농촌지도소에서 석유 한 말 얻어다가 그거 켜서 가르쳤어요. 동네 사람들이 그럽디다. “점마는 초등학교만 나오고 공부도 올케 안한 거 같은데 영어고 뭐고 다 잘 갈치네.” 책상머리에 앉아 하는 것만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퇴치는 물론 율현이고 연천이고 4km, 6km 몸 닿는 데까지는 그렇게 다니며 가르쳤지요. 칠판도 어디 있나 뭐, 베니아판 갈아서 학교서 분필 얻어서 갈쳤지요. 배움의 한이 더 깊어선지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었어요. 2년간 꼬박 고향에서 그렇게 활동했어요. 서울살이하고 내려와 고향에서 활동하는 것도 퍽 보람됐어요.

►짚신으로 불렸던 36사단 군대시절

그 뒤에 안동 송현오거리에 있는 36사단에 입대했지요. 스물둘에 했으니 1968년이네요. 뭐 워낙 가난하기도 했고 근검절약하기도 했으니 신발은 짚신을 삼아 신고 허리띠는 새끼줄로 꼬아 묶고 입대를 하니 그 모습이 얼마나 기막혔겠어요. 중대장이 절더러 ‘짚신’이라 별명을 붙였어요. 그런데 짚신한테 이런저런 일을 시켜보이 잘하거든. 글도 곧잘 쓰고 글씨고 잘 쓰고 서예도 잘하고 각종 차트도 잘 만들고, 뭐든지 주어진 일은 야무지게 해내니 신임을 얻었어요. 뭐 하나 손대도 허투루는 안 했어요. 어차피 할 일인데 대강 할 일이 뭐있어요.

임동 처녀와 결혼, 가정을 일구다

결혼은 스물일곱에 했어요. 그냥 같이 살았죠 뭐, 허허. 저 사람 친정집안 아지매 중매로 결혼했는데 그땐 참 예뻤어요. 지금 안 예쁘단 얘긴 절대 아니구요. 나랑 다섯 살 차이니까 집사람은 스물둘에 시집왔어요. 암것도 없는 나한테. 나 같음 나 같은 놈한테 딸 안 줄 것 같아요. 돈이 있길 해, 배운 것도 없어, 8남매 맏이에 아무것도 없는 나한테 와줬어요. 이 지독한 예천사람한테 확 붙들렸죠 뭐. 결혼은 해야겠는데 돈은 없고 절에 가서 스님한테 고민을 말하니 그럼 절에서 하라고 하시대요. 그래서 구농고사거리에 있는 법룡사에서 결혼했어요. 서로 돈이 없어 이 사람도 혼수로 해온 이불 보따리를 가마니기계 위에 얹어 예천 고향으로 장가갔다고 신행을 했지요. 결혼사진도 한 장 없어요. 이 사람이나 나나 뒤돌아보고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타입이 아녜요. 어려웠던 시절 자꾸 생각 안 하려고 해요. 결혼당시 시청 3층에 새마을부흥연구회를 만들어 간판을 척하니 걸고 촌에 새마을사업으로 쪽딱이 기계라고 싸리로 가마니 짜는 기계 있어요, 그걸 만들어서 농협에 납품하기도 하고 좀 별다르게 살았어요. 집사람은 임동이 고향이에요. 내가 많은 일을 거치면서 직업을 바꿀 때도 항상 옆에서 불평 없이 같이 거들고 자기 몫을 거뜬히 해내는 사람이에요.

지독한 사람 모디라, 예천향우회 발족

처음 예천향우회 만들었을 때가 1979년이었어요. 사람들이 예천사람 자꾸 지독하다고 하는데 지독한 사람 함 모다보자 싶어서 만들었어요. 황병원 초대회장을 비롯해 30여명이 영호루에 모여 향우회를 발족했지요. 초창기에는 예천사람은 많은데 의외로 잘 안 뭉쳐지더라고요. 회비 안 내면 일부러 받으러 댕겼어요. 그렇게 자리 잡히니 회칙도 만들고 규모가 커지고 부설로 장학회도 만들었어요. 당시에 버스 2대가 움직여야할 정도로 회원이 많이 모였어요. 1년에 한 번씩은 꼭 단체로 고향나들이 하고 또 한 번은 다른 지역에도 놀러가고 그렇게 친목을 다졌더니 결집도 잘됐지요. 향우회 역사가 내 삶의 반절 정도 돼요. 강가에 체육시설 하라고 돈도 걷어주고 그랬어요. 우리가 고향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고 그걸 이루었을 때 우리가 느끼는 보람도 또 남다르고 그렇지요. 동방환경 김도현 사장, 동방안경 김옥현 사장, 안재모 종로서적 사장 등이 당시 함께 했던 멤버들이지요.

►예천향우회

 

신안동에서 법상동 거쳐 안막동에 정착

제대 후 안동에 정착하면서 여러 가지 직업을 거쳤어요. 어린 시절부터 과학박물관을 만들어서 후세들에게 기초과학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은 가득했지만 쉽지는 않았어요. 어릴 때 똘똘하단 소린 들었는데 체계적으로 공부를 배우지 못해 많이 아쉬웠죠.

►신안동에서 문구사를 했을 당시

초등학생 때 이동주 선생님이라고 계셨어요. 그분께 배웠던 붓글씨를 홀로 채본 보며 독학해서 사군자도 그렸어요. 당시로는 드물게 서예학원을 열었는데 성소병원 앞에서 ‘영남서예학원’을 운영했었거든요. 내대로 배웠지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어요. 그래도 어디 가면 글씨 쓰는 거 하나는 자신 있었어요. 그 후에 신안동 경안여상 앞에서 집사람은 신안문구를 7~8년 운영하고 나는 주산·부기·타자학원 운영하고 사무검정소장을 했어요. 지금 산업인력관리공단의 전신이기도 했어요. 또 원체 기초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과학관을 만들어서 과학기자재를 개발해서 판매하고 논문도 썼어요. 초·중·고등학교까지 과학 기자재를 납품하면서 실험실 참고서를 달달 외웠어요. 과학 선생님들이 놀랄 정도로 열성으로 했고 전국 도별로 내가 쓴 논문이며 원고를 팔기도 했어요. 기발하다고 다들 좋아했지요.

►법상동 삼보컴퓨터 대리점 개업식

그러다가 법상동에 삼보컴퓨터 대리점을 냈어요. 전국 삼보컴퓨터 판매왕을 4년 해서 해마다 자동차 한 대씩 타고 잘나갔습니다. 동시에 서울에 기상과학 기상전문장비 만드는 벤처회사를 차렸어요. 돈이 없으니 뭐든지 발 빠르게 움직였고 시류에 민감하게 대응했어요. 내가 회사를 경영하는 자기 처세가 있다면 그건 치밀한 계획 하에 폭넓게 이해하고 좋은 결론이 날 때까지 밀어붙이는 힘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서울에도 회사를 두고 안동에서는 컴퓨터 대리점을 운영 하니 새벽 5시에 봉고를 끌고 서울 갔다가 저녁 5시에 안동 내려오면 12시가 됐어요. 더군다나 전국 국공립대학에 컴퓨터 납품까지 했으니 삼성전자 사장단 회의할 때도 가서 삼보판매왕의 전략을 알려주기도 했어요.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어요. 돈 한 푼 없이 여 안동에 와서 나름 정착해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면서 남 안하는 거 하고 도전하려고 했어요.

삼보컴퓨터 부사장이 의성김씨 종가에 김종길 박사였는데, 대리점 사장 따내려고 사람들이 담보 들고 보따리 싸들고 갈 때 난 사업계획서 딱 석장 들고 갔어요. 컴퓨터에 관해 암 것도 몰랐지만 사람 두뇌와 같은 기계가 나올 거라 생각했고 그런 세상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운영체계가 그때는 ‘도스’였어요. 난 컴퓨터를 하나도 몰라도 사람들한테 기초를 설명할 수 있어요. 왜냐 컴퓨터는 첫째로 대문을 열고 두 번째 안방문을 열고 세 번째 장롱을 열고 네 번째 서랍 안에 있는 자료를 꺼내서 쓰고 도로 넣는다. 고거까지만 설명하면 그게 컴퓨터라고 이해하는 거라고 설명했기 때문이에요.

이후에 IMF 터지고 미국엘 다녀왔는데 미국에는 태양광이라면서 판을 설치하더라고요. 나사에서 개발했는데 전세계에서 태양에너지를 쓰더라고요. 이제 컴퓨터며 기상과학도 사양길이라 바로 저거다 싶었지. 그래서 태양광산업을 시작해서 지금은 어느덧 이 사업을 한지 10년 가까이 됐네요. 우리나라에 신재생에너지 초창기 때 손수 설치를 하고 내 손수 허가 내고 손수 다 했어요. 지금도 와룡면 감애에 가면 내가 설치한 태양광 발전소가 제법 있어요.

아들, 옆지기와 함께 사업체 운영

►아들 영민과 함께 영호루에서

우리 김정민 여사님과 사이에 아들 하나 딸 둘 뒀어요. 요행히 야들이 공부를 잘해서 고대 법대, 건대 법대에 갔어요. 고등학교까지는 다 안동에서 다녔어요. 각자 알아서 시집 장가가고 그러더니 4대문 안에 법대생 5명 데리고 있어서 기분 좋았지요. 지금 비록 그쪽으로 풀리진 않아도 열심히 살아요. 애들 학교 들어갔을 때가 그래도 제일 좋았어요. 힘들게 돈 벌어 대학교 들어가면 그게 그렇게 좋았고 보람이었어요. 맏이가 아들 영민인데 올해 마흔넷이에요. 일찍 결혼해서 태양광사업을 같이 하고 있어요. 보통 이런 사업은 직원이 열댓명은 되야 하는데 우리는 일당 백 정신으로 하고 있어요. 집사람이랑 나랑 아들놈이 하고 있으니까. 민애, 지애 딸아이 둘도 시집가서 서울, 대구서 잘살고 있어요. 애들 셋 다 어찌된 게 아들만 하나씩 있어요. 그저 우리야 좋은 소식 더 들려오길 기대할 뿐이죠.

►가족사진

안막동에 들어온 지는 한 15년 됐어요. 자그마한 논을 처음엔 외상으로 샀었어요. 여기서 아버님 어머님 모시다가 두 분 다 6개월 터울로 87세 된 어머님 먼저, 92세 된 아버님이 이어 세상을 뜨셨어요. 오지랖이 넓은동 어쩌다 통장까지 맡게 됐어요. 요즘도 면부나 사업장하고 관계되는 데는 매년 쌀 10포씩 행사 때마다 기증하고 있어요.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란 얼마나 힘들어요. 우리 할 요량은 하고 살아야겠다 그리 생각해요.

안동사람 예천사람 다 같아요

타지에 가면 살기로는 안동사람, 나기는 예천사람이라 그카지만 안동 예천 뭐 가릴 것 있겠어요. 사무 여 사람인 거지. 안동이 제2의 고향일 것도 없이 그냥 여 사람이래요. 안동만치 자기 처세만 잘하면 편안하게 성공할 수 있는 곳이 또 없어요. 예천사람이 안동 오면 성공해도 안동사람이 예천 가면 성공 못한다는 말이 많다는 것도 알아요. 안동사람이 더 무르고 정이 많아 그런동 몰래요. 사실 예천사람은 성공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나라 교육산업이 발전하면서 제일 먼저 출세한 지역이 신문물을 받아들인 곳이거든요. 신문물 받아들이고 객지에 가서 10년 이상 가면 그래도 웬만큼은 성공해요. 신문물을 받아들이면 배워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거든. 배움에 목마른 시골사람들이 더 성공하려고 악착같이 애쓰니까요.

►매일 새벽 글을 쓰는 게 낙인 박원구 씨

지금도 현장에서 직접 뛰기 때문에 건강은 걱정 없어요. 아직 팔팔해요. 일찍이 은퇴하는 요즘 세상에 어디 나가 점심만 줘도 나갈 데 있으면 좋겠단 소리도 많이들 하잖아요. 평소에 저녁 9시에 잠들어 새벽 2시에 깨요. 모두 잠든 시간에 깨서 글을 쓰는 게 낙이래요. 난도 치고 서예도 하고 이래저래 끄적거리는 걸 좋아해요. 그러다 4시쯤에 다시 잠들어요. 시간이 허락하면 어린 시절에 교과서처럼 끼고 살았던 고서적을 풀이해서 책으로 정리하고 싶죠. 고집이 세서 목표를 정하면 이루어야 하고 집요한 면이 있어요. 그런 근성 때문에 내 좌우명도 ‘하면 된다’에요.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도 매 순간순간이 일할 수 있고 가족들이랑 함께 하니 행복하고 즐거워요. 예천 촌놈이 이 정도면 출세까지는 아니라도 제법 괜찮은 거죠?

 

<2. 예천에 둥지 튼 안동사람>

월애댁 심순노미 할머니의 일생

고향은 하회마을 건너편 월애

‘혀 밑에 죽을 말이 있다’, ‘말 단 집 장맛이 쓰다’ 말 많아 탈인 세상에 우리는 말 들으러 가는 중이다. 안동시 풍천면 구담을 지나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 말무덤(言塚)을 지난다. 옛날 각성바지들이 많은 마을에 말 한마디로 오해와 갈등이 생기자 사발에 말을 뱉어 마을을 둘러싼 주둥개산에 재갈바위를 박어 만들었다는 말무덤. 하 많은 말들 중에서 이제는 사라져 안타까울 윗대의 말과 삶은 말무덤에 갈 일이 없으니 우리는 대죽을 지나 신풍으로 들어선다. 올해 나이 여든아홉, 1928년 무진생 월애댁을 만나기 위해.

►심순노미 할머니와 큰딸 위란 씨

열여덟에 가마 타고 배 타고 예천군 신풍리 파평윤씨 집성촌으로 시집온 할머니의 이름은 심순노미. 신랑 이름은 윤형우, 아들 형제집의 기차(其次)였다. 신랑은 용띠 할머니보다 7살 많은 닭띠로 1921년 신유년생이다.

►남편 윤형우(맨 오른쪽). 뒤로는 유천초등학교가 보인다.

하회마을 건너편, 안동시 풍천면 인금2리 월애(月涯)에서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로 시집온 할머니는 청송심씨 집안의 귀한 딸로 곱게 컸다. 할머니의 아버지가 50년 넘게 남의 땅을 안 밟아봤을 정도로 부잣집 2남 4녀 중 셋째로 났다.

►인금2리에 있는 친정집
►할머니의 친정마을 부근의 옛 모습

“내가 무진생에 났어, 참말 귀하게 컸어. 천석꾼 집안이랬는데 지금으로 치면 천석이 뭐야 만석도 넘지. 차가 없을 시절이니 말 타고 댕겼어. 클 때 종들이 떠다주는 물로 세수하고 명주실로 수를 놓으면 나비가 앉을 정도로 솜씨도 제법 괜찮았어.”

►낙동강에서 뱃놀이는 즐기는 할머니

중신어미가 양반집에 훤칠하고 똑똑한 신랑이라 부추겨 결혼했는데, 결혼한 지 3년 만에 세상 떠난 부인이 있어 상처한 전력이 있었던 터, 아흔 앞둔 노인은 지금도 분하다. 옆에서 그 모습 지켜보던 첫째 딸 위란 씨가 걸걸한 목소리를 보탠다. “어매, 화낼 일이 아이따, 우리 아부지같이 멋쟁이한테 시집 와놓고는 왜그케. 더군다나 아빠한테 시집을 왔으이 어매가 딸을 여섯이나 낳고 이쿠 놀러 댕기며 호강하는 거 아이라!”

풍남초등학교 졸업생

►풍남초등학교 시절(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인금2리 월애는 하회마을과 낙동강을 마주한 동네다. 지나던 과객이 동네가 반달같이 생겼다 하여 월애(月涯)라고 일컫게 되었다. 상인금(上仁今), 하인금(下仁今)을 지나면 월애마을이 나온다. 남자들도 초등학교 다니기 힘들었던 시절, 할머니는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풍남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에 개교한 풍남초등학교는 1991년 폐교됐다. 할머니가 졸업할 즈음은 해방 전으로 재학생이 400명이 넘었고 하회 인근 지역은 물론이고 강 건너 인금, 어담, 신성, 구담, 광덕과 예천의 풍양, 신평에 사는 학생들까지 다녔다고 한다.

►풍남초등학교 21회 졸업사진(1941년). 앞줄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가 할머니. 당시 여학생 졸업자 수가 13명이었던 것을 정확히 기억하는 할머니 (사진제공:풍천초등학교)

어느 핸가는 물난리가 났는데도 학교를 가다 그만 물에 휩쓸려 큰일이 날 뻔했다. 처음엔 무릎 아래 오던 물이 갑자기 불어나 단번에 가슴팍까지 찼다. 떠내려가는 할머니가 다행히 섬에 걸리게 되면서 사람들이 구해줬다. 그 정도로 애성이 많아 하루도 빠짐없이 6년을 꼬박 다녀 개근을 했다. 원거리 통학에 학생들의 결석일수가 많아 심지어 할머니 동생들도 모두 졸업까지는 못했다고 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여자를 학교에 많이 시키면 집구석 망한다고 하던 시절에도 가만가만히 숨어서 숙제하고 악착같이 다녔다. 할머니는 학창시절 달리기 선수, 씨름 선수로도 활동했다. 만송정 솔밭을 뛰어다니고 부용대 앞 화천에서 멱을 감았다.

동지섣달 초여드레 가마타고 예천으로 시집 온 할머니

동지섣달 초여드레에 시집 온 할머니. 신랑 얼굴도 못보고 혼인하던 시절에 동네 어귀에서 혹은 문틈으로 빼꼼 할머니는 미리 할아버지의 얼굴을 봤던 터다. 물론 할머니가 다른 곳을 볼 때 할아버지도 그렇게 몰래 훔쳐봤던 터. 서로의 얼굴 정도는 알고 결혼을 했다.

세간살이 나오면서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집터만 덩그라니 있으니 친정에서 고급 춘양목에 서까래를 배에 잔뜩 실어다 주어 그걸로 집을 지었다. 그 춘양목이 얼마나 튼튼한지 몇 번의 개조에도 아직도 서까래 떠받치고 든든히 선,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집이다. 혼수도 얼마나 정성껏 부리부리 싸서 챙겨 보냈던지 소랑 말에 짐을 잔뜩 실었다. 귀한 딸 고생 덜게 하려는 친정 부모님의 정성이 남달랐다. 지금도 시집올 때 가져온 고리와 상자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시집올 때 광목이며 명주, 이불호청을 담아온 상자(아래)와 받짓그릇, 소지품을 담아온 고리(위)

슬하에 딸 여섯을 낳은 할머니는 아들 셋을 일찍이 잃었다. 하나는 유산으로 하나는 개부정으로 하나는 삼신부정으로 잃었다. 할머니가 아들 낳은 지 한 칠도 안됐을 때 집에서 키우던 개가 마루 밑에서 새끼를 낳았다. 임산부가 있는 집에서는 절대 새끼를 못 낳게 해야 하는데 고만에 그런 사달이 났단다. 어린 아들이 입에 거품을 뽁짝뽁짝 냈다. 알았다면 미리 개부정을 물렸을텐데 그러질 못했다고 한다. 물리는 방법은 “나는 여기서 낳을테니 니는 나가서 낳아라.”고 미리 말하면 짐승이 알아듣고 나가서 낳는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개가 새끼 낳는 것만 봐도 부정 탄다고 믿던 시대이다. 또 하나는 삼신부정으로 잃었다. 엄마 젖이 흔하던 시절이었는데 어찌된 게 젖이 말라 동네 상숙이네 어매한테 젖을 물렸는데 상중이던 집안이라 삼신부정으로 아들을 잃었다고 한다.

그렇게 딸만 여섯이 남았는데 첫째 위란(66), 계란(64), 경란(61), 현주(59), 혜정(54), 막내 혜영(47)이다. 그리고 보너스 딸 현희(55)가 있다. 할머니가 하도 딸만 낳으니 아들을 보기 위해 들여온 여자에게서 본 딸이다. 딸을 낳고 그 길로 여자는 돌려보냈다. 보너스 딸, 이라고 하지만 다행히 딸 여섯과 사이가 나쁘거나 하지는 않단다. 담배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대부분 일꾼을 시켜서 했다. 담배 한 따래 엮으면 2원씩 주곤 했다. 남편은 지방 유지들하고 어울려 다니며 주로 건설일을 했다. 물 빼고 도랑 설치도 했지만 아코디언 들고 놀러다니고 한량처럼 마작도 즐기고 했다. 사진 속 양복 입은 테가 남다른 모습을 보니 당시 패션니스트가 틀림없다. 큰딸 위란 씨가 그런 아버지를 회상한다. “아부지가 잘 노신다는 얘기는 내가 들어서 알고 있어요. 옛날에도 손풍금 가지고 놀러 다니고 그러셨거든. 울 큰아부지 칠순 때 노래하시는 거 보이 이가 빠져도 신명이 보통이 아니시더라고.”

►1984년 막내딸 결혼식이 있었던 신라예식장

큰사위 등에 업혀 막내딸 결혼식장에 들어서 혼주석에 앉았던 할아버지는 자식들 혼사는 다 보고 세상을 떠났다. 75세 되던 해, 1995년에 돌아가셨다.

큰딸 위란 씨의 외가 추억

올해 예순여섯인 큰딸 위란 씨는 외(위)가 고방에서 태어나서 이름이 ‘위란’이다. 태어나서 2년 정도 외가서 자랐고 그 후에도 외가에 왕래가 많았다.

“외가 가면 종으로 부리던 사람이 있어요. 배도 많고 김(고욤)도 많이 달렸어. 그 주먹만한 게 주렁주렁 달렸는데 종들이 다 따놨어. 항아리에 물김, 밭김이 가득가득 있었지.”

외손 친손이 모이면 열 몇 명은 됐다. 저녁에 둘러앉아 편을 짜 화투쳐서 지는 사람이 고방에 몰래 건너가 집안 음식을 훔쳐왔다. “옛날 고방에 나무문이잖아. 내보다 한 살 적은 울산 병연이는 문에다가 소리 난다고 오줌을 싸. 그럼 문 소리가 안 나거든. 그렇게 적셔놓고 문 열고 들어가 먹을 거 훔쳐왔어. 내가 그건 생전 안 잊어. 고방에 가서 감주 해놓은 거 버지 째로 들고 와서 퍼먹고 놀고 배도 한 구디, 고구마도 장석같이 있었지요.” 옛날엔 일꾼방인 고방에 멍석을 해놓고 고구마를 한가득 재놓곤 했단다. 할머니 때에는 부부 3쌍 6명의 종을 부렸고 위란 씨가 외가서 지낼 때는 한 쌍이 집안에 남아 있었다.

►친정인 월매마을 입구의 회화나무

중리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 십리 길을 걸어가면 마을 입구 회나무가 보이는 외가집에 당도했던 어린 시절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한 위란 씨다. 지금은 굽이굽이 76-1번 버스가 앞개, 권잣을 거쳐 월애를 지난다. 외가에는 지금도 큰외삼촌이 계신다. 백수를 넘겨 101세 되시는 심규익(아명 심구원) 옹이 아직도 정정하게 집을 지키고 있다. 오래됐지만 튼튼한 집 마당에는 양배추, 케일, 상추가 자라고 있다. 큰외삼촌은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이고 전화통화도 곧잘 하신다. 위란 씨 아들이 결혼해 중학생 아이가 있으니 함께 모이면 4대가 북적이는 집안이다.

내 집만큼 편한 데가 없다

약밥을 잘 만들고 수를 잘 놓는 심순노미 할머니. 아들 없어도 여섯 딸이 돌아가며 할머니를 모신다. 서울이며 대전이며 구미며 딸네 집에 며칠씩 묵고 딸네들이 그렇게 잘해줘도 할머니는 곧장 향수병에 걸려 다시 예천 신풍리 노인정으로 돌아오곤 한다. 꼬부래진 노인들만 남아 농사짓는 촌동네지만 내 집만큼 편한 데가 없기 때문이리라. 큰딸 위란 씨가 오늘도 텃밭에 땅콩이며 참깨를 마저 심고 소일하며 할머니 건사를 하고 있다. 노인회 부녀회장도 10년 넘게 하고 경로당 총무도 9년 할 정도로 총기가 넘치던 할머니는 십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후 기억력이 가물가물해졌다. 그땐 딱 죽는 줄만 알았다. 그 고비를 잘 넘기고 다행히 건강이 많이 회복됐다.

►신풍리 집

다른 지역을 안 벗어나고 시집 와 평생을 예천서 산 할머니. 구담에 큰 장이 서니 매번 장은 구담장으로 다녔다. 모서리만 넘어서면 안동이고 또 예천인 곳에서 일평생 경계 없이 살아온 심순노미 할머니. 말 타고 동리를 누비고 씨름도 곧잘 하던 옥같이 키웠던 딸로, 여섯 자매 바라지하며 야무지게 살림했던 아내로, 시어머니가 갱시 먹고 싶다고 하면 콩나물에 김치랑 밥 넣어 푹 끓여 냈던 참하고 다정했던 며느리로, 딸부잣집 어머니로서 할머니는 한평생 살아왔다. 좋은 때 태어났으면 마음껏 공부하고 재능을 펼쳤을텐데, 고단한 여자로서의 삶이 그래도 후회스럽지 않다. 격변의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건강하고 품위 있게 늙어갈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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