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시간에 깃든 풍경과 풍속을 따라가다’
암산굴, 교복, 학교, 양조장은 각자의 시간이 있을 뿐
‘근대시간에 깃든 풍경과 풍속을 따라가다’
암산굴, 교복, 학교, 양조장은 각자의 시간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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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6.0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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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청년기자연합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10)

우리 대중들이 인식하는 근대의 배경은 무엇일까.

19세기 후반, 서양에 맞추어 근대화가 일어나야 할 시기에 우리는 일제에 나라를 강탈당했고 그 이후 미군정과 한반도전쟁을 치러야 했다. 우리는 사실상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시기에 자조적 수단은 통째로 짓밟혔고 군부독재 하에서 새마을 운동을 겪은 후 곧바로 현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부 학자들 가운데 우리나라에는 근대라는 시기가 존재하였으나 그 시간과 공간을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로 기준하기에 ‘논의의 대상조차 되기 힘들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양에서는 근대의 시작을 18세기부터 19세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산업혁명을 중요시점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서양 문물을 스스로 받아들이기 전에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주입되는 방식으로 근대를 받아들이게 됐다. 이러한 이유로 자연스러운 흡수보다 거센 저항에 부딪쳐 제대로 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것을 두고 근대를 논하기에 부족함이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나 일본의 침략으로 서양과 같은 근대시기의 산업국가와는 거리가 더욱 멀어진 원인이 되기도 해 빌미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일반적으로 논하는 근대라는 시기를 보내고 격변하는 사회와 현대를 지내면서, 흐려져 가는 과거와 근대의 것들을 잘 기억하려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경향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에 안동 예천 두 시·군이 간직하고 있는 시대적 변화의 모습 몇 가지를 일반적인 근대와 현대의 개념적 시간에 맞추어 갈무리해 보려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 역사에서 시대구분의 기준을 시간적 의미에서 보면, 고려 이전을 고대, 고려를 중세, 조선을 근세, 문호개방 이후 일제강점기를 근대, 그리고 해방 이후를 현대라고 일컫는다. 물론 이 용어는 단순한 시간의 전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 사회 발전적 측면과도 상관관계가 있다. 즉 고대는 연맹국가와 귀족국가, 중세는 귀족·관료국가, 근세는 관료국가, 근대는 산업국가, 그리고 현대는 민주국가 등의 개념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근대와 현대의 역사 일부를 들추어 보았다.

삼대를 ‘뚤버’봐라! 그게 ‘뚤피나, 이 맨잭이들아! 암산굴이...’

안동에서 대구로 가는 옛 국도 5호선을 차로 15분 쯤 가다보면 옆으로 굽이쳐 흐르는 미천(眉川)과 함께 조그만 터널을 발견할 수 있다. 안동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절경 중 한 곳이다.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 산1-1에 위치한 이 인공 터널에는 천연기념물 제252호 구리측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측백나무는 국도변 절벽에 위치하며 암벽의 높이가 약 100m, 90°에 가까운 경사도를 가진 절벽의 바위틈에 군데군데 살고 있다. 전체 약 300그루로 추산되고 높이는 20∼70cm 내외인데 측백나무의 수형으로서는 기형(畸形)에 가까우며 작은 나무에도 과실(果實)이 열린다.

이 터널은 일제 강점기에 대구와 안동을 연결하기 위해 국도를 건설하면서 터널로 뚫은 것인데 안동사람들은 그냥 암산굴이라고 부른다. 암산은 이름 그대로 돌로 이루어진 산이다. 도로 옆으로는 아름다운 미천이 흐르고 지금도 유명한 암산굴은 구리 측백나무 숲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 암산굴과 미천 옛 모습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자료에 의하면 암산굴 앞에는 매우 깊은 소(沼)가 있고 그 물 밑에 벼루에 쓰이는 질 좋은 암석이 있다. 평소에는 수심이 깊어 물속의 돌을 건질 수 없으나, 가뭄이 심할 때 바닥이 드러나면 채취하였다고 한다.

암산의 벼룻돌은 전국 최고의 석질로 그늘에서 건조한 뒤 선형을 만들어야 원하는 벼루를 만들 수 있다. 암산벼루는 먹을 갈아서 종일 두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오래도록 간다. 벼룻돌이 변성현무암으로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하며, 육중한 바위산이 누르는 중력과 오랜 시간 물속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벼루는 돌을 가공하는 형태에 따라 모양을 달리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직사각형이 많고 둥근형과 거북형 등이 있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원래 암산(巖山)이었던 이곳에 도로를 내어 차들이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력과 남포 즉,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여 뚫은 것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참 아름다운 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과 얽힌 재미있는 사연이 하나 있는데 안동 지레예술촌장 김원길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루는 조카뻘 되는 면서기가 찾아와서

“아제요, 아제요, 이 서류에 도장 좀 찍어 주소.”

고산서원 홍인당 마루에 앉아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한산 이씨 종손 아재는 되물었다.

“먼 서류로?”

“저 건너 종중(宗中)산에 굴을 뚤버 신작로를 내는데 산주 동의가 있어야 된다니더.”

“머래? 저 돌산에 굴을 뚤버?”

종손은 조카뻘을 째려보았다.

“예, 여기 이 서류에 다 쓰였니더.”

“맨잭이 같은 것들·····. 그게 어떤 돌이라꼬, 도장 여 있다.

니 찍어라. 삼대(三代)를 뚤버 봐라, 그게 뚤랬나!”

그러나 그건 그 이듬해에 다 뚫려 버렸다.

남포가 어떤 건지 몰랐던 때다.〈출처:일직면 소호리 마을〉

사진으로 본 근대 안동의 교복 변천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패션은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로 김옥균,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이다. 유희경의 <한국복식사연구>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들이 찾아간 일본은 명치유신 15년을 맞이하여 새롭고 눈부신 개화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일본은 벌써 10년 전에 복장개정령을 공포, 군경제복과 문무관복을 모두 양복으로 바꾸어 입고 있었으며 도쿄 히비야의 로쿠메이칸(鹿鳴館)에는 양복신사와 양장숙녀들이 몰려와 무도회, 독창회, 바자회를 관람하고 있었다.·····(중략)····· 이 때 김옥균은 우리나라에 선교할 꿈을 갖고 있던 주일 미국 선교부 감독인 로버트 매콜레이 박사를 만나 친교를 맺게 되었는데, 매콜레이 박사는 당시 젊은 목사로 일본에 와있던 언더우드 목사를 소개하여 친하게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어느 날 이들 중에서도 몸 맵씨가 좋은 서광범을 데리고 도쿄와 이웃하고 있는 요코하마를 구경하러 나가 거기에서 외국인이 경영하는 라다지와 로만스 양복점을 소개하였고 여기에서 서광범은 흑라사의 양복 한 벌을 사 입고 돌아와 이것을 동료들에게 권했으며, 이에 김옥균,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도 즉시 요코하마로 나가 양복을 모두 사 입었다고 한다.

한편 대한제국(1897-1910)을 선포한 고종은 무관의 복제부터 제정하여 근대화에 나섰고 1900년 문관복장규칙제정을 만들어 최상위층 고위관료들은 공식적으로 서양의 복식을 입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를 압박하고 있었던 외세와 동일한 복식을 함으로써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일제에 의한 한일 합방(1910)과 문화통치(1920), 민족말살통치(1930)를 통해 한민족 고유의 복식 문화는 도시에서 거의 사라지고 일본 특유의 변형된 서구식 양복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

사회 지도층 역시 동경제국대학, 경성제국대학 등에서 유학하던 식민지 엘리트들이 고유의 복식문화를 버리고 일제의 최신 유행에 따르게 된다. 특히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학생들의 교복 또한 망토를 걸친 변형된 군복차림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을 화면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동과 인근 학생들의 교복은 주로 어떤 형태의 복식으로 했으며 어떤 변천사를 겪고 지금의 서양식 교복으로 바뀌었을까.

▲ 협동학교 3회 졸업식(사진 제공 : 독립기념관)

<사진으로 보는 안동 근대, 안동대학교 박물관 편, 2002>에 나오는 사진을 안동대학교 의류학과 이은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서울의 남학생들은 1915년부터 양복 교복이 생기면서 겨울에는 서양식 오버코트나 망토를 입었었다고 하는데 안동의 학생들은 사정이 좀 달랐다.

아래 1916년의 협동학교 제3회 졸업식 사진을 보면 학생 모자에 검은 색 두루마기를 입은 학생들은 졸업장을 말아서 깃에 꽂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치 군대 훈련소에서 사격 훈련을 마친 후 어깨에 표적을 둘둘 말아 꽂고 다녔던 기억이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학생들 중에 신식 하이칼라 머리를 한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상단 좌측의 세 번째 인물은 금테 두른 제모를 쓰고 있는데 당시 교사들이 금테 두른 제모를 쓰고 칼까지 찼다고 하니 분명 교사로 보인다.

1920년대 새로운 유행, 짧아진 두루마기 길이와 윙 칼라 셔츠가 등장했는데 1929년도의 풍남공립보통학교의 9회 졸업생 사진에서 학생들은 여전히 학생모에 흰색이나 짙은 색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그러나 모자는 예전의 것에 비해 크라운의 폭이 좁아졌고 대신 모자의 높이가 올라갔다. 새로운 유행 스타일의 모자랄까! 그리고 두루마기의 길이는 20년대 초보다 짧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래로 짙은 색 바지를 입고 대님을 쳤는데 운동화와 고무신이 눈에 띤다. 선생님 세분은 모두 짙은 색 양복에 구두를 신었다. 양복 안에는 당시 유행이던 조끼와 좁은 폭의 넥타이도 착용하였다. 당시 최고의 멋쟁이로 보인다.

우측의 한 분은 조끼 위로 회중시계의 금줄이 늘어뜨리고 있는데 금줄 시계가 당시 남성들의 고급 필수품이자 중요한 장신구였다.

▲1929년도 풍남공립보통학교 9회 졸업사진(사진제공 : 풍천초등학교)
▲1935년 임하공립보통학교 11회 졸업사진

1930년대는 치마, 저고리 차림의 여학생 등장하고 남학생의 교복이 양복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1935년 임하공립보통학교의 제11회 졸업생 사진에는 여전히 예전과 같은 학생 모자에 짙은 색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이 확인된다.

교복 사진 중 처음으로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띠는데 여자가 학교에 다니게 된 시기를 짐작하게 한다. 두 명 모두 앞 가리마를 해서 땋은 머리에 흰 저고리와 짙은 색의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 서울에서는 30년대에 이미 여학생들의 교복이 양복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남학생 교복 변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역적인 변화의 시간적 차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여학생들 옆으로 짙은 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선생님들과 짙은 색 양복을 입고 있는 선생님들이 보인다. 그들은 윙(wing) 칼라나 에로우(arrow) 칼라가 달린 셔츠를 착용하고 보우(bow) 타이나 포린핸드(four-in-hand) 넥타이 등을 다양하게 매고 있다. 그리고 금줄 두른 제모에 제복을 입고 칼을 들고 있는 인물도 보여 당시의 암울하고 억압 받던 우리 선조들의 아픔을 느끼기에 충분한 사진이다.

▲1941년 안동농림학교 군사훈련 사진.                ▲1945년 도산공립초등학교 27회 졸업사진

해방 전 전시상황의 군복형 교련복 등장하는 시기로 1941년 안동농림학교 군사훈련 후 찍은 사진에는 남학생 모두 학생모를 쓰고 교련복 상의에 무릎을 약간 내려가는 짧은 바지를 착용하고 종아리에 각반을 두르고 있다. 칼을 들고 있는 교관 역시 학생들이 입고 있는 군복류를 착용하고 있다.

해방 한 달 전인 1945년 7월에 찍은 도산공립국민학교 제27회 졸업생 사진은 이전까지의 다른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보인다. 특히 선생님들의 모습에서 당시의 유행이 확인된다. 일곱 분의 차림이 모두 다른데, 학생복 스타일부터 군복 스타일, 넥타이 차림의 모습과 넥타이 없이 셔츠 칼라를 젖힌 정장 스타일 등 다양하다.

반면에 남학생들은 군복형 교복을 입기도 하였으나, 깍은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두루마기를 벗고 흰 저고리에 바지만을 착용한 경우가 많이 보인다. 여학생들은 30년대의 짙은 색 저고리 대신 다시 흰 저고리를 입고 있다.

3.1만세 운동 후 예천에 세워진 94년 전통의 명문 사립, 대창중고등학교 옛 校舍

예천과 안동의 근대 건축물의 옛 흔적들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특히 두 지역처럼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했던 소도시의 사정은 더욱 그렇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어쩌다 뚫려 아름다운 근대의 풍경으로 남아 아직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안동의 암산굴 같은 경우는 아주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 만큼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근대는 쉽게 생활 속에서 만나기가 힘들다. 행여 근대적 시공간을 만난다 해도 친절한 설명이 없다면 그냥 지나치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은 국권이 무너진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무자비함을 타파하고자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는 초석을 쌓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 국민이 실의에 빠졌을 때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시대적 조류에 적극 온몸으로 부딪혀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었던 예천의 한 사립 명문학교를 소개하고자 한다.

3.1운동 이후 민족 교육의 필요성이라는 시대적 조류가 예천(醴泉) 땅에도 밀어닥쳐 예천청년회(醴泉靑年會)가 주동이 되고 예천유도회(醴泉儒道會)의 후원 아래 설립 준비를 하였다. 특히 벽천 김석희(碧泉 金碩熙) 선생이 중심이 된 예천청년회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재래서숙(在來書塾)의 수업자(修業者)로서 학령(學齡)관계로 보통학교에, 혹은 보통학교의 졸업자로서 학비 관계로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자들이 방황, 탄식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던 중 1921년 8월 31일 정기총회 때 학술 강습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1일부터 소인 문예극단(素人 文藝劇團)을 조직하여 그 학술 강습회의 설치 취지를 선전하고 종래의 악풍 폐습을 고치기 위하여 각 면에 순회 공연하였는데, 많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1921년 12월 15일에 권준흥(權準興) 외 2명의 명의로 설립 인가를 받아 명칭은 대창학원(大昌學院), 위치는 예천향교(醴泉鄕校, 醴泉邑 栢田里소재) 풍영루(諷詠樓)로 정하고 개학은 1922년 2월 15일로 정하여 학생을 모집하였다. 한편 전임강사는 정수일(鄭秀日)을 초빙하고 당분간 박원석(朴元錫), 곽기종(郭琪宗)을 무보수(無報酬) 강사로 위촉하였다.

1922년 2월 9일에 예천향교 풍영루 교사의 수리가 완성되고 또 입학 지원자도 150여명에 이르렀고 강사와 그 외 준비도 완료되었으므로 같은 달 15일 오전 11시에 그 교사 내에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예천면장 정남섭(鄭南燮) 등 많은 내빈의 축하 속에 성황리에 개교식이 끝났다. 이 때 예천향교의 명륜당과 풍영루의 처마 끝에 눈 녹은 고드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며 대창학원이 개교하는 성스러운 순간이었다. 예천군민의 추앙의 행사이고 숭고한 민족 장래를 약속하는 행사였다.

개교하여 수업을 시작한 한 달 뒤인 3월 25일에는 학력차가 심한 이들을 모두 함께 수용할 수도 없고 학생 수도 늘어나서 부득이 시험을 치러 학력이 나은 이들을 2학년으로 하고, 2개 학년을 각각 갑을 조로 분반하여 4개 학급으로 편성했으며, 뒤이어 4월 1일에 중등과정인 고등과 1학급을 증설하게 되었다. 대창학원이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당에 한문을 배우러 가던 소년들, 산에 나무하러 가던 초동들, 소 먹이러 가던 목동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고, 성시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예천군을 중심으로 영주, 봉화, 안동, 문경 등 7개 군에서 배움에 불타는 12세부터 30여 세까지의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

<대창 80년사 제 1권, 대창중고등학교> <교남지(橋南誌) 37권 예천군조(醴泉郡條)>참조

예천군 향토 사학자 장병창 선생(대창고등학교 전 교장)의 《대창 80년사 제1권》의 기록에 의하면 후일 개성부윤(開城府尹), 전북지사(全北知事)를 지낸 당시 군수 김병태는 예천읍의 못을 매립하여 시가지 발전에 새 역사를 창조하였다고 한다.

당시 예천읍은 오늘과 같은 편평한 좋은 장소가 아니었고 예천읍 서본리 삼익수도(三益수道)-1919년 서본리 굴모리에 있는 ‘임춘천’ 을 확장 수리하여 ‘삼익수도’ 라고 개칭, 예천읍의 하수도 시설- 에서 영주 통로 양편에만 집이 들어섰고, 경찰서 문전, 예천초등학교 교지 일대가 연못이었고, 남쪽도 굴모리에서 안동 통로까지 거의 다 못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음을 보여 주는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위와 같다. 다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예천읍 노상리 1번지의 흑응산(黑鷹山) 기슭에 대창학원으로 보이는 건물이 서있다.

▲예천읍 1940년대 일대(사진 제공 : 예천문화원 김상진 사무국장)

▲예천읍 1960년대 일대(사진 제공 : 예천문화원 김상진 사무국장)

단발 후 달라진 자식을 찾지 못해 “우리 아들 아무게! 학교 왔느나?”

그 당시 학생들의 모습이 참 궁금하다. <대창 80년사>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어린 이가 13세로 강원도에 살던 박수암(朴守岩)이고 최연장자는 38세로 문경군 산북면 지내동에서 다니던 이승우(李承雨)이며 평균 연령이 17.8세 였다.

당시 학생들의 모습은 상투에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썼다. 신발은 짚신, 메투리, 고무신이었는데 청복동에서 다니던 최현주(崔賢株)만이 시계를 차고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책은 책보에 싸가지고 다녔다.

또 예천읍 생천동의 장병억(張秉億) 등 고령자들 중 아버지는 대창에 다니고 아들은 보통학교에 다니느라고 책보와 도시락을 아들에게 들려 가지고 다니는 부자 학생들도 있었다.

머리는 거개가 상투를 틀었는데 개교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학생들에게 단발령이 내렸으나 혼자 이발소에 가서 상투를 끊기가 쑥스러워 2.3인씩 작반(作伴)하여 이발소를 찾았다니 이런 것을 두고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고 하나 보다. 이발소 의자에 앉았다가 상투가 가위에 잘려 나는 것을 보고 한편은 시원하고 한편은 섭섭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당시의 선배들은 술회하며, 학부형이 학교에 왔다가 아들이 공부하는 교실에 와서 아들을 곁에 두고도 상투를 자른 아들의 모습이 달라졌으므로 아들인 줄 몰라 보고 ‘우리 아들 아무게! 학교 왔는나?“ 라고 물어서 교실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대창고 옛교사

조선시대 객사(客舍)를 옮겨 교실로 사용, 동란 후 무너진 객사를 다시 흙벽돌로 짓기도

철학이란! 선생 曰 ‘두 손바닥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원리가 철학 이니라’

현재 학교 행정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 때 객사(客舍)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학교 설립 당시 예천향교 건물을 교사(校舍)로 사용했는데 교사가 너무 협소하여 1925년 흑응산(黑鷹山)아래 향교의 오른 쪽 송정(松亭)이란 산상(당시 예천읍 노상동 1번지)에

새로 기와집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예천읍 노하동에 있던 객사(1911-1924년까지는 예천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사용)를 이전 공사하여 1927년 3월 2일에 준공하였다.

이후 해방이 되고 여러 차례 학교의 명칭이 바뀌는 등 부침을 겪었고 전쟁 후 한 채 뿐이었던 객사마저 한 가운데가 파손이 되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무너진 교실을 새로 세우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흙벽돌을 만들어 가져와 교실을 10개나 짓기도 했다고 하니 예천 사람들의 공부하고자 하는 의욕이 참 대단했다.

<대창 80년사>란 책이 발간된 해가 2002년 이니 올해 들어 개교 94주년이 되는 셈이다.

이번 취재 중 만난 토박이 예천사람들에게 출신학교가 어디냐는 질문을 습관적으로 해보았다. 예상대로 대창학원을 어떤 식으로든 거치지 않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자료를 정리하다보니 당시 학교생활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참 많았다. 지면상 다 옮겨 쓰지는 못하기에 한 가지만 소개 할까 한다. 아마도 역사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던 것 같다.

윤창근(尹昌根)선생이 역사 시간에 중국 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동양 철학에 언급되었을 때 한광수(韓光洙, 龍門 上金谷洞에서 유학하였고 졸업 후 용문면에 근무하였다.)군이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 철학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십시오.” 하니 선생 대답이 “철학이란 것은 대단히 의미가 심장하여 제군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하여도 잘 모를 듯하니 가까운 예를 들어 설명할 터이니 기억하여 두어라. 그 구체적 예는 손바닥을 한 짝으로 공중을 쳐서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바닥을 맞부딛히면 소리가 난다. 이 신비성을 알아내는 것이 철학이다.”라고 하셨다. (이에) 한 군이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알려 주십시오.”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안 나는데 두 손바닥을 마주 치면 소리가 나는 원리가 철학이니라. 이렇게 외워두고 차차 공부를 더 많이 하면 저절로 알 때가 있으리라.” 라고 하였다.

당시 한 군이 잘 자라서 용문면에서 공직 생활을 하셨다고 하니 아마도 선생님의 철학적 가르침이 한 몫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단기 4291년 중년의 건물이 드라마 세트장처럼 변해버린 용궁양조장

근대란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이 흐르는 기억의 숲

방송사 TV 프로그램 1박 2일 예천 편에서 출연자들이 용궁양조장을 찾아 막걸리를 맛보는 장면이 방영되어 화제가 되었다. 유명한 방송에 소개가 되었다고 하니 주변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 생각하고 찾았는데 의외로 참 조용했다.

붉은 벽돌 외양에 푸른색 양철 지붕을 얹고 정면으로 4개의 창이 나있는 2층짜리 건물로 약간의 보수만 한다면 근대 건물로는 꽤 괜찮다는 느낌이었다.

방송에 여러 번 나와서 그런지 양조장 주인 권순만(남.70) 씨가 일행을 먼저 맞는다. 원래 주인은 권오덕이란 사람으로 3대를 이어 술을 빚어왔었는데 그 밑에서 직원으로 일하다가 50년 전부터 인수하여 술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의 이력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했더니 가타부타 없이 우선 안으로 들어오란다.

들어서자마자 막걸리 특유의 향과 오래된 건물의 다소 음산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막걸리를 빚는 공간을 왼쪽으로 지나면 곧바로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보인다. 현대와 근대적 공간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이 두 공간을 이어주는 계단은 다름 아닌 나무로 만든 사다리다. 주위를 둘러 봐도 이 나무 사다리 외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을 수 없었다.

담쟁이 넝쿨로 뒤덮여있는 건물의 외양과는 달리 안쪽은 대들보가 그대로 노출 되어있고 들보 중간 중간에는 누룩 균을 배양하기 위한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바닥은 긴 나무판을 서로 이어 붙여 만든 마루였고 이미 지붕으로서 역할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듯 양철 지붕을 안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 건물이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있는 상량 글도 보이는데 단기 4921년이라고 한문으로 써져 있었다. 서기로 바꾸면 1958년이 된다. 시멘트로 처리된 벽면에는 이러 저리 휘날리다 켜켜이 쌓인 먼지들로 가득 했는데 1973년 10월 30일 이라고 음각되어 있는 숫자가 인상적이다.

“동네 영감들이 소주만 먹고 헛일이야, 술집이 있어야 배달을 가지”

요즘엔 주문이 들어와야 술을 빚는 다면서 방문한 그날은 간간히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개 사료를 팔고 있었다.

결국 이 건물의 자세한 이력에 대해서는 양조장 주인도 주변의 상인들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드라마 세트장처럼 방치되어 있는 건물을 보면서 왠지 아쉬움이 남는 건 기대가 컸던 까닭일까!

영화「건축학 개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사람이 살지 않는 어느 한옥에서 서연과 승민 두 주인공이 나란히 앉았던 그 마루는 그들을 잇는 시간과 공간적 아지트였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은 존재하지만 텅빈 건축물은 필자의 속을 채워주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근대는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이 흐르는 기억의 숲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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