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지만 하나같은 안동과 예천의 오래된 인연'
학맥과 혼반으로 이어진 두 지역은 지금도 협력하고 있다
'둘이지만 하나같은 안동과 예천의 오래된 인연'
학맥과 혼반으로 이어진 두 지역은 지금도 협력하고 있다
  • 김희철/피현진
  • 승인 2016.07.0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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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청년기자연합 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12)

근대까지 이어진 안동·예천 협력의 역사

안동과 예천은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오랫동안 같은 뿌리를 둔 공동체로 살아왔음은 지난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두 지역은 우선 지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낙동강과 내성천을 함께 공유하고 있으며 학가산(鶴駕山 882m)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학문적 교류와 혼반을 형성하며 오랜기간 이 터전을 일구며 살아오고 있다.

한창 건설중에 있는 신도청 지역 역시 검무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좌로는 안동의 가일마을 뒷산인 정산을, 우로는 예천의 거무산을 두고 있으며 행정구역상 예천지역과 안동지역에 동시에 걸처져 형성되고 있어 앞으로도 두 지역은 더욱 구분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연고를 이야기 할 때 주로 학연, 혈연, 지연 이 세가지 요소를 드는데 이는 같은 지역에 살며 학맥과 혼맥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문화적 동질성을 의미한다. 흔히 서울 등 타지에서 연고를 물으면 경북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안동문화권, 특히 안동과 예천의 경우 굳이 출신지역을 따로 구분하여 설명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같은 방언을 사용하고 같은 풍습을 갖고 있으며 경제활동 반경이 비슷한 동일 생활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공동체적 인식을 하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는 다양한 협력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난 역사속에서 두 지역은 공동체로서 어떻게 협력해 왔으며 이러한 협력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고 학맥과 혼맥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알아보자.

대의를 위해 함께 몸바친 운명 공동체

임진왜란, 영남만인소, 항일의병, 독립투쟁, 근대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두 지역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어김없이 협력하여 국난극복에 힘을 모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진입로인 예천 용궁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1592년 7월 초유사 학봉 김성일의 의거에 대한 격서가 전달되고 선조의 교서가 내려지자 당시 용궁현감 우복룡, 맛질 안동권씨 권욱, 학봉문인 이개립, 이유, 이일도 등 안동과 예천의 학맥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합의병이 함께 혈투를 벌인 끝에 왜군을 물리치고 예천을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협력의 사례들은 이후에 더욱 빈번하게 나타난다. 줄곧 정권에서 소외 되어오던 영남 남인들은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반역의 도당으로 몰려 노론의 극심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정조 즉위 후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봉화, 예천, 안동의 유생을 중심으로 추진된 ‘영남 만인소’(1792)가 그것이다. 그런데 잘 알려진 1,2차 영남만인소에 앞서 올려진 상소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이 있다. 이는 노론의 거짓된 남인 공격을 입증하는 상소로 이인좌의 난 당시 남인들이 난을 막기위해 안동을 비롯한 13개 고을이 함께 의병활동한 내용이다.

노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인이었던 우의정 채제공(1720-1799)을 통해 상소 무신창의록이 전달될 수 있었는데 정조는 이례적으로 소두(疏頭 상소 우두머리)를 친견하고 포상을 명한다. 이때 소두를 맡은 이가 진성이씨 과재 이진동으로 예천 호명 출신 반초당 이명익의 아들이며 퇴계의 숙부 송재 이우(1469-1517)의 후손이다.

무신창의 상소 이후 4년 뒤인 정조 16년 3월에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린 도산별시가 유생 7천2백명을 포함한 1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치러지고 그해 6월에 발생한 것이 유생 1만57명이 참여한 1차 ‘영남만인소’이며 열흘 후에 1만368명이 연명한 2차 ‘영남만인소’가 일어난다. 사도세자 사건의 재조사와 관련자 처벌을 요구한 내용으로 그동안 수백명, 또는 많아야 천여명 연명하던 상소에 비해 규모면에서 상상을 초월한 만인소는 정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철종 6년(1855)에 이휘병을 소두로 사도세자 관련 영남만인소(10,432명)가 다시 올려졌으며 이후 고종 당시에 또다시 영남만인소 사건(1881)이 발생하는데 모두 안동과 예천 등 영남 남인들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1881년 영남만인소는 격변기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안동과 예천을 비롯한 영남 남인들의 단합된 힘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일어났으며 이후 항일의병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근대화 초기 외세를 배척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일어난 항일의병. 그 서막을 알리는 것이 위정척사를 내용으로 하는 ‘영남만인소’이다. 퇴계 후손 이만손(1811-1891)을 소두로 한 만인소에는 예천 맛질 권도연, 용궁 무이 이서구, 삼강 정창호, 개포 김휘정 등 18명의 예천 유생들이 적극 가담하게 되는데 이들은 대부분 안동과 학맥, 혼반으로 이어진 가문 출신이다.

왕권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사회질서가 유지되던 전근대시기와 왕권이 무너지고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신분질서가 태동한 근대시기로 구분한다면 우리의 근대화는 안타깝게도 외세로 인해 얼룩지게 된다. 개화파와 같은 사회 지도층의 근대화 움직임과 더불어 동학농민항쟁과 같은 거대한 기층 민중들의 근대화 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주체역량을 통해 평등세상을 만들고 민족의 힘으로 외세에 대항하고자 한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기존 기득권세력과 일본의 개입으로 좌절하고 말았으나 근대사에 큰 의미를 주고있다.

1894년 관리들의 부패가 극에 달하고 신분차별로 핍박 받아온 농민들은 마침내 무장봉기를 하였다. 1차 갑오개혁으로 신분철폐 등을 이끌어 냈으나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며 침략야욕을 드러내자 동학농민항쟁은 반외세 운동으로 확대됐다. 탐관오리들을 벌하고 왜적과 양이를 물리치며 빈부귀천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어난 갑오년 동학농민항쟁을 감당할 수 없었던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한반도에 외세를 끌어들인 결정적 실수가 되고 말았다. 청군이 들어오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가세하면서 청일전쟁(1894년 7월 ~ 1895년 4월)의 원인이 되었으며 동학농민들을 진압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침략을 더욱 노골화했다.

근대화에 불을 지핀 세계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는 동학농민항쟁은 예천에서도 크게 일어난다. 예천에서 일어난 갑오년 동학농민항쟁은 호남을 제외하면 전국 최대규모로 그 수가 48개 접에 7만여명에 달했다. 농민군 5천명은 지주계급인 민보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치렀지만 결국 농민군의 패배로 끝이 난다. 같은 시기 안동에서는 최초 의병으로 기록되는 갑오의병을 조직해 함창 태봉에 있는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듬해 국모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안동부 14개군을 비롯해 전국에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이때 안동 권세연, 예천 박주대의진을 비롯해 영양, 진보, 청송, 문경 등 7개군의 연합의진이 결성되어 다시 태봉을 공격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예천회맹’이다. 백마를 잡아 피를 마시는 회맹의식에 필요한 술, 음식 등 모든 비용은 예천 박주상대장의 사비로 이루어졌다. 긴 시간 혈투 끝에 후퇴하긴 했으나 여러 의진이 협력해 치른 예천회맹은 의병사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안동과 예천 사람들은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 빼앗기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항일운동에 몸을 바쳤다.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던 내앞 의성김씨는 예천에서도 김병동(1858-1928), 김현동(1876-1927)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이들은 의병활동 이후에도 서로군정서 후원을 위한 조직인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활동을 계속 이어가다 일본경찰에 피체되는데 당시 경북의용단 서기가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의 13대종손이자 파락호로 알려진 김용환(1887-1946)으로 전병표, 한양리, 손영기 등 많은 예천사람들이 함께 활동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해산, 1910년 정부의 모든 통치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경술국치로 이어지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로 망명해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등 독립운동 자치구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백서농장 등을 설치해 독립군의 전투역량을 키우며 무장투쟁을 이어나간다. 이를 이끌었던 인물이 안동의 혁신유림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등 이었으며 안동과 학맥, 혼맥으로 이어진 풍양 우망 정훈모, 용문 하금곡 권원하, 지보 신풍출신 윤창하, 예천의 황하청 등 많은 예천 출신 인물들이 함께 협력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 피체되거나 순국했다.

이후 안동과 예천은 20~30년대 소작인회, 형평운동 등 대중운동이 싹틀 무렵 일제와 지주계급의 수탈에 저항하고 구시대 신분질서를 타파하여 차별을 없애고자 한 근대화 사회운동에도 긴밀한 연대활동으로 협력한다. 1923년 조직된 안동의 농민운동단체 ‘풍산소작인회’는 예천 하리에 ‘은풍출장소’ 분소를 낼 정도로 성장하였는데 3년 뒤에는 풍산소작인회에서 독립하여 활동하기에 이른다. 소작인의 생활향상과 소작조건 개선, 봉건 신분질서 철폐 등을 내세운 풍산소작인회는 창립 1년만에 회원 5천여명에 달하였으며 1925년 예천에 형평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날 당시에도 광산김씨 학산 김남수(1899-1945) 등 안동 인물들이 지원하였다.

►저울형평사. 최하층 계급이었던 백정들이 무게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저울. 경북 도내에서 김천 다음으로 백정이 가장 많았던 예천(약 900여명)은 안동과의 협력을 통해 형평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었다. 이 저울은 당시 인간평등을 의미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특히 1925년 7월 발생한 예천 형평분사 습격사건은 전국 사회운동계의 이슈가 되었으며 인권해방 신분철폐 요구가 거세게 일어날 수 있었던 도화선이 되었다. 또 조선노동총동맹, 경성노동연맹, 한양청년연맹, 조선여성동우회 등 전국 23개 각계 사회운동 단체들이 연대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안동 가일마을 출신 권오설(1899-1930) 등이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에서 파견되어 수습하는 역할을 하였다.

권오설은 초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안동 오미마을 김재봉(1890-1944) 다음 2대 책임비서를 맡은 인물로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인 6.10만세운동을 주동하다 피체되어 순국했다. 1926년 6월10일 순종황제 장례일을 기해 일어난 만세시위의 국내책임자였던 권오설과 함께했던 이들이 예천 풍양 와룡출신 이동규, 풍양 홍천출신 안정식을 비롯해 개포 금동출신 한일청 등 많은 예천 인물이 적극 참여했으며 이후 해방이 되기까지 안동과 예천은 함께 목숨을 건 근대화 대중운동과 독립투쟁를 이어갔다.

두 지역이 이처럼 대의를 위해 오랫동안 협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학맥과 혼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깊은 혈연관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물망처럼 연결된 안동 예천의 학맥과 혼맥

혈연관계는 크게 지리적 요인과 학맥을 중심으로 형성된 통혼관계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예천은 안동에서 서울을 가기위한 길목에 위치해 있다. 조선초 예천이 낳은 걸출한 유학자 별동 윤상(1373-1455)은 그가 남긴 객관기(客館記)에 「예천군은 동쪽과 서쪽에서 죽령과 조령 두재 사이에 끼어있어 죽령에서 상주 낙동으로 가는 자, 조령에서부터 화산으로 가는 자는 반드시 이 고을을 경유하게 된다」고 밝혀 옛부터 교통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안동과 예천의 생활문화는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에 기인한 측면이 많았으며 교통수단이 어려웠던 시기 혈연관계 또한 인접해 있는 안동 서남지역과 예천 동남지역 4개 읍면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실적으로 그동안 이루어진 통혼관계를 모두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요 문중과 인물을 중심으로 안동과 예천이 어떻게 교류해 왔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학맥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 오래된 혈연관계

두 지역은 혼반을 통해 각별한 협력과 교유가 있어왔다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표적 인물들의 학맥 혼맥을 살펴보면 안동과 예천의 혈연관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예천을 이루고 있는 주요 마을로는 금당실(대저리 큰맛질, 구계리, 죽림), 작은맛질(제곡리), 용궁 무이, 호명 고평, 풍양 우망, 개포 경지(검바우), 호명(백송, 고미, 내동)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금당실은 예천을 단연 대표하는 마을이라 할 수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문면 상금곡동으로 불리는 금당실은 아들을 낳지 못한 감천문씨 문중에 사위 둘을 맞으면서 번성하게 되는데 그 큰사위가 함양박씨 큰종가 입향조 박종린(1496-1553)이며 그 후손인 정랑공 종가, 동촌에 박손경(1713-1782)의 작은종가를 이루고 감천문씨 둘째사위인 원주변씨 변응녕(1518-1586)의 사괴당 종가가 자리하고 있다.

►예천 금당실마을 전경. 십승지중 한곳인 금당실은 안동과 오랜기간 학맥과 통혼이 있어왔으며 이러한 가문간 교유는 근대시기까지 이어졌다.

“금당실 가서 옷자랑 말고 구렐(구계) 가서 집자랑 하지 말라”, “금당실 반 서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넓은 들과 비옥한 농지를 기반으로 큰 재력을 구비한 집들이 많고 인물이 많다는 곳으로 유명하며 정감록의 십승지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금당실이 안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안동의 보백당 김계행(1431-1517. 부인 예천권씨)에게 딸이 둘 있었는데 그 첫째사위는 다섯아들 모두를 문과급제 시킨 이로 유명한 금당실 입향조 박종린의 부친인 행정공 박눌이며, 둘째사위는 서애 류성룡의 조부이자 류중영의 부친인 류자온이다. 그리고 박종린은 퇴계 이황의 부친인 이식(李埴)(1463-1502)과는 처외사촌 지간이다. 즉 퇴계의 모친 춘천박씨는 예천 지보 대죽리 한대마을 출신인 박치(朴緇)의 딸인데 그는 박종린과 고종사이가 된다.

►노송정종택. 1454년에 퇴계 이황의 조부 노송정 이계양이 지은 집으로 퇴계 모친 춘천박씨의 꿈에 공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이 집에서 퇴계를 낳았다. 대문에는 성인이 들어온 문이라 하여 성림문(聖臨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또 이식의 첫째부인 의성김씨 사이에 3남1녀가 있었는데 둘째아들 훈도공 이하(李河)가 금당실 함양박씨 박심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인 금당실에 입향한다. 부인 의성김씨는 김한철의 딸로 장인 김한철이 일찍 세상을 뜨자 장모 남씨는 학문을 좋아하는 사위 이식에게 수많은 서책을 넘겨주어 진성이씨 가문의 학문을 넓히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부인 김씨는 29세 젊은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퇴계 이황은 둘째부인 춘천박씨의 넷째 아들이다.

금당실로 간 퇴계의 중형인 훈도공 이하의 둘째아들 이굉이 예천 호명 백송리에 입향하여 유명한 선몽대 우암 이열도(1538-1591) 후손 백송파 일가를 이룬다. 또 인근 호명 고미에는 퇴계 숙부 송재 이우의 후손인 송당파가 세거하는데 이곳에서 난은 이동표(1644-1700)가 출생하였으며 호명 내동에는 온계 이해의 후손 백당파가 세거한다.

예천 백송리는 마을 58가구 가운데 박사가 68명 나왔다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퇴계의 종손(從孫)이자 문하생인 우암이 내성천 강가에 누대를 세우고 퇴계가 현판을 써준 선몽대는 뛰어난 경치뿐 아니라 약포, 서애, 청음, 한음, 학봉, 다산 등 당대 명현거유들의 시작(詩作)을 나눈 곳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우암 이열도 (遇岩 李閱道)가 1563년에 세운 정자 선몽대. 건물의 이름을 짓기 전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는 꿈을 꾸고 선몽대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지며 정자 내에는 당대의 석학(碩學)인 퇴계 이황,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목판에 새겨 지금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흔히 ‘맛질’로 알려진 예천 제곡리에 있는 ‘작은맛질’은 처음 문경손씨 집안에 아들이 없어 밀양손씨 사위를 들였고 밀양손씨 마저 아들이 없어 사위를 맞았는데 그가 안동 북후 도계촌 권사빈(1449-1535)의 큰아들 야옹 권의(1475-1558)다. 권의의 둘째아들인 권심언이 외가인 맞질에 가서 살았고 이후 권의도 처가이자 둘째아들에게 가서 사는데 그런 연유로 맏이가 사는동네 ‘맛질’이라 부른다. 권의의 부친 권사빈은 봉화 닭실마을에 입향한 둘째 충재 권벌에게 가서 살게된다. 권의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야옹정(野翁亭)은 1566년 임란 전 건축물로 조선초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된다.

맛질은 19세에 재령이씨 석계 이시명의 둘째부인으로 들어가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하고 전처소생 1남1녀와 본인의 6남 2녀를 모두 훌륭하게 양육시킨 정부인안동장씨의 외가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외가가 봉화맛질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예천맛질일 가능성이 높다. 퇴계학통을 이은 경당 장흥효의 딸이며 어머니는 권사온의 딸이다.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1627-1704), 손자 밀암 이재(1657-1730)로 퇴계학통이 이어진다.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예천의 청주정씨 약포 정탁(1526~1605) 역시 그의 부친 정이충이 안동 와룡 지내 모산에 살다 처가 평산한씨 동네 금당실 버들밭으로 가면서 그곳에서 태어난다. 11살에 다시 와룡 모산 큰집에 와서 공부하다 17세에 퇴계 문하에 들어가는데 임진왜란 당시 70노구를 이끌고 서애 류성룡과 함께 국난극복에 크게 기여한다. 곽재우, 김덕령 등을 천거하고 이순신을 죽음에서 구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정탁의 셋째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명필로 인정받는 청풍자 정윤목(1571-1629)은 용궁 무이 이윤수의 딸과 결혼하여 처향인 풍양 삼강으로 이주해 400여 년간 세거하게 된다.

각 문중의 세거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학맥과 혼반은 전 지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연결된다. 용궁 무이의 여주이씨 사인 이윤수(1545-1594)는 서애 류성룡의 부친 류중영의 사위이며 당대 의술로 유명한 그 둘째아들 이찬(李燦)(1575-1654)은 안동 오천군자리 7군자 중 한명인 광산김씨 설월당 김부륜의 사위다.

이찬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위해 독학으로 의술을 공부한 끝에 어의(御醫)도 고치지 못한 인조의 병을 고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풀어 당대 명의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또 중추부사를 지낸바 있으며 형제간 우애가 깊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제삿날만 되면 초상 때 같이 슬피 울었다는 예천 개포 검바우 예안김씨 검암 김곤(1596-1678)은 류중영의 큰아들 겸암 류운룡의 손녀사위가 된다.

용문 죽림리 초간 권문해(1534∼1591)는 퇴계 수제자 중 한명이다. 그는 약포, 서애, 학봉, 송암 권호문 등과 교유하며 안동의 수서원(首書院)인 호계서원을 건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의 인문, 지리, 역사, 문학, 예술을 망라하고 이를 현대의 사전과 같이 운자(韻字)에 따라 나눈 명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한 이름난 현학자다. 그는 전처 현풍곽씨와 29년을 살았지만 자식없이 사망하자 2년 뒤 후처 함양박씨 박명의 딸을 맞았는데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해동잡록’을 저술한 독자 권별(權鼈)을 낳아 대를 잇게 되었다. 자라를 구해주고 꿈에 용왕의 점지로 낳았다고 하여 자라별자를 쓰는 권별과 관련한 여러 설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1582년 집필을 목적으로 지은 초당. ‘초간’이라는 뜻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이 읊은 시 저주서간(滁州西澗)의 “홀로 물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 사랑하노니(獨憐幽草澗邊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초간 권문해의 누이가 시집간 곳이 안동 내앞 의성김씨 청계 김진(1500-1580)의 다섯째 아들이자 학봉 김성일의 동생인 남악 김복일(1541-1591)이다. 그는 남악파의 입향조로 처가인 금당실 구계에 가서 세거하는데 그곳에 남악종택과 증손 김빈의 반송고택이 있다. 구계의 경주이씨 구계(龜溪) 이중립(1533-1571)과 그의 동생 성오당 이개립은 퇴계 제자로 효심이 남다르고 향리에 문하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예천 호명에도 퇴계제자 연안이씨 이응, 이희, 이유 3형제가 있으며 풍양 우망의 동래정씨 석문 정영방은 청계 김진의 외손자이자 학봉 김성일의 생질인 안동 무실 전주류씨 류복기(1555-1617)의 딸과 결혼하면서 안동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후 영양으로 가 한국 인공정원의 백미라 불리는 서석지(瑞石池)를 조성하고 살게된다.

예천 풍양 우망 바로 인접해 있는 마을이 동래정씨 가문이 정착하기 시작한 별실이다. 입향조 삼수 정귀령이 안동 구담에 살다 이곳으로 이주하여 삼수정을 짓고 회화나무 세그루를 심으면서 세거가 시작되었는데 정승만 열명이 났다는 마을이다. 그 후손이자 우의정을 지낸 임당 정유길(1515-1588)은 퇴계 이황 · 하서 김인후 등과 함께 교유했으며 그 딸이 신안동김씨 김극효에게 시집을 가면서 선원 김상용(1561-1637), 청음 김상헌(1570~1652) 등을 낳아 외손들이 번창하게 된다.

오랜기간 안동과 예천을 오가며 형성된 혼반과 학맥은 근대시기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일제 강점기 강력한 연대활동이 가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초기 예천 의병장으로 추대 받아 ‘예천회맹’을 이끌었던 박주대의 외가는 진성이씨이며 누이가 안동 내앞 백하 김대락(1845-1914)의 어머니 함양박씨이다. 박주대의병장이 지병으로 의병장을 사양하면서 예천 의병장을 맡았던 박주상(1831-1908)의 외가는 풍산류씨, 부장 박주학의 처가는 의성김씨가 된다. 그리고 예천의병을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활동했던 이규홍(1851-1918)은 안동 고성이씨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매부가 된다.

►백하구려(白下舊廬). 안동 혁신유림 백하 김대락이 1885년 지은 집으로 협동학교가 협소하여 임시교사로 사용되었으며 보수유림과 혁신유림간의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또 1919년 3.1운동을 이끌었던 예천 인물이 초간 권문해의 11대 종손 권석인(1898-1970)과 권석호, 권석효, 권세원 등 초간 후손들을 비롯해 박태원, 박규수, 박래창, 변용구, 변두구, 광산김씨 김형식 등으로 이들은 4월3일 예천장날을 이용해 수백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투옥된다. 이 가운데 권석호(1879-1961)는 1925년 일본 황성에 폭탄을 던져 순국한 안동 오미마을의 독립지사 풍산김씨 추강 김지섭(1885-1928)의 손위 처남이다.

이처럼 안동과 예천은 격동의 근대시기 고통을 함께 이겨내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태동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협력하며 주도해 갔다.

희망을 건 협력, 상생 발전을 위해 다시 하나로

근대까지 이어진 교류와 협력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가장 가깝게는 경북도청을 공동으로 유치하여 낙후된 경북 북부지역을 함께 일으켜 세우고 바야흐로 300만 도민의 생활과 미래를 책임지는 웅도 경북의 중심지로 거듭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경북 남부에 비해 북부지역은 지난 50여 년간 소외되어 왔다. 포항, 구미권의 경우 산업화로 비약적 발전을 이룬 반면 안동권인 북부지역은 극심한 침체를 면치 못한 가운데 지난 2008년 6월8일 도청 이전지가 안동․예천으로 전격 결정되었다. 인구 수, 교통여건 등 여러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안동으로 결정된 데에는 정신문화적 가치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경합을 벌인 상주, 영천, 경주, 구미, 포항 등 여타 지역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예천 안동 협력을 통한 공동유치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경북도청 공동유치에 합의한 김휘동 안동시장과 김수남 예천군수. 두 지역의 협력으로 경북도청을 유치함으로써 낙후된 북부지역을 다시 일으켜 세울 전기를 마련했다.

지난 2016년 2월 도청 본청이 이전 완료한데 이어 안동시 풍천면 일대에는 도청 산하 기관들이 속속 입주하고 있으며 예천 호명면 일대에는 아파트 등 주거시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경북도는 2027년까지 인구10만 자족도시를 목표로 건설 중에 있다.

그러나 향후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천과 안동이 공동유치의 정신을 다시금 상기하고 상생 협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예천과 안동은 도청이전 결정 4년뒤인 지난 2012년 6월 정부로부터 ‘지방행정체제개편 기본계획안’에따라 행정구역 통합대상지역으로 선정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지역은 행정구역 통합에 대해 미온적으로 접근하고 있는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신도시를 조기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현재 양분되어 있는 신도시 행정구역을 통합하고 교통, 행정서비스 등 주민불편을 해소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 신도시로 인구와 경제권이 쏠리면서 안동과 예천의 도시 경제구조가 바뀌어 발생하는 도심 공동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따라서 안동과 예천의 구도심이 소외되지 않고 신도시와 더불어 서로 상생하기 위해 통합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기회는 항상 위기를 동반한다. 2020년 인구 10만도시를 목표로 했던 충남 내포신도시의 경우 목표연도 4년을 앞둔 지금 인구는 1만 6천여명에 그치고 있다. 게다가 신도시 인구의 대부분은 인접한 홍성군 등지에서 빠져나간 충남 인구여서 기존 도심의 공동화가 심각한 실정이다. 이전 11년째를 맞고 있는 전남 남악 신도시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8만명인 신도시 인구 가운데 전입인구의 73.9%가 전남지역에서 이주했으며, 광주에서 이사한 주민은 8.6%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주변 도시의 쇠락으로 인해 신도시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실정이다.

►도청 공동유치의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 안동과 예천, 신도시가 함께 상생할 수 있도록 두 지역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도청 이전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면밀히 분석하여 지난 오류를 미연에 방지하고 두 지역이 서로 상생 발전하기 위해서는 예천과 안동이 오랫동안 협력의 역사를 보여 주었듯이 다시한번 두 지역이 상호 배려와 양보를 통해 서로 협력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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