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유생, 이방의 신앙 수용해 새 지평 개척’
초기 기독교인들 3·1만세로 지역사 전면 등장했다
‘혁신유생, 이방의 신앙 수용해 새 지평 개척’
초기 기독교인들 3·1만세로 지역사 전면 등장했다
  • 유경상/김용준
  • 승인 2016.07.0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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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13)

한 인간의 행동이 근대의 지역사(地域史)를 일깨웠다

1910년 8월을 기점으로 한국의 국권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완전히 피탈 당하게 된다. 그렇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짧은 듯하지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사회를 포함해 자연에 이르기까지 숱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지만 10여 년 후인 1919년 3월에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펼쳐졌다. 그런데 안동지역에서 발생한 3월 독립만세운동을 살펴보다 보면 여러 특징 중 매우 흥미로운 요소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그 대목을 살펴보자.

▲ 1916년 이후로 추정되는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은행 안동지점(현 신한은행). 1919년 3월 13일 이 은행 앞에서 1인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사진출처: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서문당)

3월 13일은 안동면의 장날이었다. 오후 5시 반쯤 홀로 자전거를 타고 공신상회(현 신한은행 앞 성결교회 입구 추정) 앞을 지나 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남자가 등장했다.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1인 시위를 한 것이다. 태극기를 모방한 종이 연에 ‘대한독립만세’라 쓰고 홀로 자전거를 탄 채 만세를 부르는 장면은 상상으로도 윤곽이 쉽게 잡힐 것이다. 그는 “상제(上帝)의 뜻과 가호에 의해 한국은 10일을 넘기지 않아 독립될 것이며, 지금은 감옥에 들어가지만 출옥은 시간문제”라고 외쳤다. 이날 단독 시위는 안동지역 독립만세가 대중적으로 분출되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만세를 부른 그의 이름은 이상동 이었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활동하게 되는 이상룡의 동생이다. 그는 유림 출신의 기독교인으로 영양 포산교회 장로였다. 이상동은 전기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을사조약 후에 형 이상룡과 대한협회안동지회를 조직해 계몽운동을 했지만, 1911년 12월 기독교인이 된 인물이었다. 이상동은 체포되었고 서울 서대문 공덕리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상동의 단독 시위가 발생한 후인 3월 17일 예안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 준비과정에 33세의 이원영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혁신유림이었다. 오후 3시 30분쯤 시작된 시위대 앞에는 이원영이 서 있었다. 오후 6시쯤 시위 군중은 1,500명으로 불어났다. 18일에 다시 수백 명의 시위대가 모여 구속자 석발을 요구하며 만세를 불렀다. 거기서 이원영 또한 체포돼 구속되었다.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 1919년 3월 안동, 예안 등 범지역적으로 전개된 3·1만세운동으로 수감된 이상동, 이원영(좌측부터). 사진출처:사진으로 보는 근대안동(안동대 박물관)

서대문형무소 안에서 이상동과 이원영의 만남이 이뤄졌다. 이렇게 모든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타인의 삶과 미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근대시기로 접어들던 그때에는 지역사를 뛰어넘어 역사의 지평을 뒤흔들 수 있는 만남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교회 장로 이상동의 전도를 받은 이원영은 기독교인으로 인생을 전환시키게 된다. 이원영의 친구들인 이중무, 이운호, 이맹호도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유생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1908년에 안동지역 기독교인이 약 1,000여 명에 육박했다. 미국 북장로회 안동 선교부가 1908년에 설치되었고 1909년 8월에 안동교회가 창립되었다. 이 시기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인 1919년에 유림을 배경으로 한 유생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3·1만세운동에 대규모로 뛰어들었다. 정말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 초창기 교회가 지역사의 전면에 새롭게 떠오른 것이다.

3·1만세로 유생출신 기독교인 대거 떠올라

안동지역 3·1만세운동의 발단을 살펴보면 준비과정에서 부터 신앙으로 얽히고 설킨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빛나고 있다.

‘안동의 3·1만세운동은 동경 유학생 강대극의 귀국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재학생 김재명의 귀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대극은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일으킨 2·8독립운동 선언서를 지니고 귀국했고, 김재명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다. 김재명은 안동교회 장로 김병우 아들이었다.

당시 안동교회 목사 김영옥과 장로 이중희는 강대극으로 부터 동경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고, 장로 김병우는 아들인 김재명에게서 서울 만세소식을 전해 듣는다. 강대극은 안동군청 서기 김원진(안동교회 교인)과 만세운동을 합의하고, 목사 김영옥·장로 이중희와 3월 13일 장날(음2.12)에 거사를 논의했지만 하루전날 예비검속을 당했다. 하지만 멈출듯 했던 만세운동은 장로 이상동의 단독시위를 시발점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유림과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기폭제로 작용한 것이다.

동시에 안동의 교회 여성 지도자인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이 계명학교 여학생 30여 명과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는데 3월 18일 안동장날 만세 운동에 사용되었다.

▲ 1909년 외국인 선교사의 안동지방 시찰. 왼쪽 사람이 안동교회 초대 목사인 김영옥. 사진출처:안동교회 80년사

황해도 연백 출신인 김영옥 목사는 1909년 안동으로 와 안동교회 초대 목회자로 활동 중이었다. 3.1만세 운동을 주동한 후인 1922년에는 대구 사월교회에서 독립자금 모금운동으로 고초를 겪었고, 중강진 압송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1927년에는 포항제일교회에서 신간회 영일지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또한 이중희 장로는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환갑을 눈앞에 두고 출옥 10일 만에 목숨을 잃었다.

이렇듯이 안동지역 3·1만세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유림과 기독교(개신교) 교회가 협력·연대를 통해 시위를 준비하고 추진했다는 점을 꼽는데 대부분이 동의를 하고 있다. 유림 출신 기독교인들이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기반으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지역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크게 증폭됐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되 나라의 운명을 함께 걱정하는 신(新) 사회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 안동교회 100주년기념관 전시실을 안내 설명해 준 권정국 은퇴 장로.

안동교회 100주년기념관 전시실을 일일이 안내 설명해 준 권정국 은퇴 장로는 “설립 10여 년밖에 안 된 교회가 1919년 지역에서 발생한 3·1만세운동의 큰 주체세력이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살아있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3·1운동 이후 민족혼을 배우고자 했던 의식있는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우리나라 기독교 청년운동의 출발이자 상징이 된 청년면려회가 최초로 조직되었다. 1921년 2월 5일 이었다”고 전했다.

김희곤 교수(안동대,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는 안동 3·1운동을 열어나간 시위 주도세력의 사회적 성격은 유림과 기독교인이 축을 이루었고, 기독교인들이 앞장을 섰다고 정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동지역 만세 시위는 3월 13일 안동면 이상동의 단독 시위에서 27일 풍남면 하회 시위까지 모두 14회, 1만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였다. 안동지역 만세 시위 14회 가운데 기독교인이 크게 활약하거나 참가한 것은 6회에 이른다. 시위 주도에서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는 예안 시위, 안동면 시위, 임동 시위, 길안 시위, 풍산 시위 등이 꼽히고 있다.

유학의 고장에 기독교가 성한 까닭은 무엇인가

기독교가 전래되어 지역에 정착하던 시대적 배경은 쉽게 짐작이 될 수 있다. 봉건왕조 질서가 저물고 근대 시기가 도래했지만 아직은 전통의식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을 것이요, 나라는 외세에 침탈당해 망국이라는 시대의 어둠은 깊어져 가고만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유구하면서도 고색창연한 전통 세계관을 벗어 던지며 낯선 이국의 신앙을 과감히 받아들이게 됐을까? 이를 간단히 파악하기 위해선 유림 중심 전통의 지역사회에 기독교가 전래되는 과정과 함께 그 시기의 지역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외국인 선교사가 부산을 출발해 밀양, 청도, 대구, 상주를 거쳐 용궁, 예천, 안동, 영주에 처음 들어온 때는 1893년 4월 17에서 5월 20일까지 이다. 배위량(W.M.Baird) 선교사가 선교활동 및 여행을 위해 5월 1일 용궁읍내에 도착해 성경책을 나눠주며 전도를 했고 5월 4일 예천읍내를 지나쳐 정오에 풍산역에 도착한다. 5월 5일 안동에 도착해 많은 성경책을 팔았는데, 몰려드는 군중을 저지할 정도였다고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1902년 3월에는 안의와(J.E.Adams) 선교사가 안동에서 시장 전도를 하며 성경책을 팔기도 했다.

▲ 1914년 당시의 목조 함석지붕 안동교회 예배당. 사진출처:안동교회 80년사

안동지역에서 1902년 국곡과 풍산에 교회가 섰고, 1905년에 방잠교회가(와룡면 나소동) 세워졌다. 1906년 방잠교회에서 기독교집회가 개최됐는데 700여 명의 인원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에 미국 북장로회 대구선교부에서는 안의와 선교사를 안동으로 파견했다. 안동에서는 안의와를 중심으로 풍산교회 교인 김병우 권서인(매서, 복음서를 파는 사람)을 파송해 현 대석동 대석상회 자리 초가 5칸을 매입 서원을 열고 예배를 시작했다. 1909년 8월 둘째 주일 처음으로 예배를 연 날이 안동교회 창립일이 되었다.

이 시기 전후인 1906년엔 지역에 신자가 200여 명 이상이었고 1년 후 600여 명(1907년), 1,000여 명(1908년)으로 확산되었다. 교인들이 늘어나자 1926년에는 안기교회(서부교회)를 설립했고 1932년에는 신세교회(동부교회)를 분립했다. 1951년에는 도원교회와 용상교회를 분립하게 되었다. 농촌지역으로 길안교회 등 5개 교회를, 임하에 3개, 와룡 2개, 북후 2개, 남선에 1개 교회를 설립했다.

1997년 발간된 [안동문화의 수수께끼]에 당시 안동교회 김광현 원로목사의 글 한편이 들어있다. 제목은 ‘유학의 고장에 기독교가 성한 까닭은 무엇인가’이다.

기독교의 유입시기가 좋았고 기독교가 가져온 신문화가 민심을 끄는 힘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립학교의 병설과 병원 설립, 문맹과 미신타파, 금주와 금연 단행, 축첩 금지와 반상의 차별을 반대했다. 나아가 신앙과 애국심을 연결해 서로 일으켜 주고 굳세게 만들었다고 해석했다. 장로교회의 윤리관이 유교와 비슷한 데가 많아 초기 교회 때 설교문을 보면 유교의 강론인지 기독교의 설교인지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안동에 선교부가 서게 된 것과 노회가 조직된 것이 지역에 기독교가 성하게 된 가장 중요한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식민지배 논리를 인도주의적 변혁논리로 대체하다

임희국 교수(장로회신학대)는 1910년대 안동의 유림이 처한 고뇌에 대해 짚고 있다. 척사유림에서 혁신유림으로 입장을 바꾼 유생들이 또다시 시대 상황에 대해 고민하는 단계가 왔다는 것이다. 근대화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임을 깨닫고 혁신유림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척사유림 전통의 배타성과 봉건주의 관습을 스스로 버리게 된다. 일례로 유인식은 노비를 해방시킴으로써 반봉건의 입장을 취했다. 대중의 힘과 역량을 키우는 애국계몽운동으로 국권회복을 꾀하지만 이 운동의 기초 논리인 사회진화론 속에 제국주의 논리가 숨어 있어 여기에서 고뇌가 심화됐다고 분석했다.

이에 1917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인도주의’가 파급되는데, 이 핵심논리가 정의와 인도였고 정의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기 위한 세계개조가 사람의 길이라는 것이다. 특히 온건파 혁신유생들에게 인도주의가 식민지배 논리를 인도주의적 변혁 논리로 대처하면서도 민족 독립을 위한 실력양성론을 종전 그대로 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혁신유림의 계몽주의와 근대주의 이 양자가 3·1독립운동 속으로 합류했다고 조동걸 교수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1920년). 사진출처:안동교회 80년사

그런 가운데 전국적인 차원에서 당시 기독교가 지니고 있던 항일민족운동적 선상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한말 기독교인들은 반봉건·개혁운동과 반외세·독립구국운동의 역량을 크게 성장시켰다. 1901년 이후 기독교계는 감리교회 목사 배출과 신학교 설립(1905), 1907년 장로교 노회 설립과 목사 배출, 1912년 총회 설립 등으로 민족운동을 가능하게 한 전국적인 조직과 지도역량을 갖춰 나갔다.

일제는 기독교와 선교사에 회유정책을 쓰면서도 105인 사건과 같은 강압정책을 펼쳤고, 1915년에는 포교규칙과 사립학교법 개정 등을 통해 양심과 신앙의 자유에 대해 위협을 가했다. 사립학교규칙에 따라 당시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학교 교과과정에서 성경수업을 없애 갈등관계가 형성되었다. 기독교 또한 민족적 모순에 크게 부딪치고 신앙의 자유를 짓밟으려는 이중적 탄압에 맞서서 민족과 신앙을 결합시키는 3·1독립만세운동에 크게 동참하고 일어서게 된 것으로 보여 진다.

기독교, 두메산골에서도 신앙과 교육을 병행 발전시켜

예천 지역의 작은 농촌마을로 눈을 돌려보자. 한 마을에 기독교가 전래된 후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발생했는지를 쉽게 포착할 수 있다. [한국영남교회사]에서는 경북북부권 경안노회 내에 있는 국곡(안동), 내매(영주), 상락(예천)의 교회가 세상에 알릴만한 스토리가 있다고 전했다.

▲ 예천 지보면의 현재 상락교회 전경.

▲ 조필권 원로 장로는 1996년에 [상락교회90년사] 편찬위원장을 맡았었다.

풍천면 신도청소재지 앞 지방도로를 지나 구담, 신풍을 넘어 도착한 상락교회 뜰에는 1999년 세워진 순교와 순국기념비가 서 있다. 양재연 장로·양혜석 선생·엄주선 강도사의 기념비이다. 양 장로는 평양에서 활동을 하다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반대해 옥고를 치렀고, 6·25한국전쟁 때 순교했다. 양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당한 후 함경남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엄 강도사 또한 청송 화목교회 시무 중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납치돼 순교한 분이다.

이 교회가 두 번째로 세워졌던 자리에 위치한 100주년기념관 2층에는 상락교회 역사와 인물을 한꺼번에 관람할 수 있는 역사박물관이 오밀조밀하게 전시돼 있다. 1930년대 이후 교회 활동 관련 사진이 다수 남아 있는 것은 김주한 장로가 일찍이 사진공부를 한 덕분이다. 현재 목회중인 백승룡 담임 목사와 조필권 원로 장로로부터 전시관 안내를 받으며, 마을교회의 역사를 들었다. 조 원로 장로는 1996년에 [상락교회90년사] 편찬위원장을 맡았었다.

▲ 상락교회 백주년 기념관 역사박물관 전시관을 설명해 주고 있는 백승룡 현재 담임목사.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상락(上洛)마을. 마을 동남쪽에는 큰마(大村)마을이 있고 북쪽에는 새마(芝圃)마을이 있다. 큰 두 마을 사이에 형성된 작은 마을이 샛마라 불리는 상락마을이다. 30여 가구도 채 못 미치는 작은 마을에 기독교 복음 씨앗이 뿌려진 때는 1906년이다. 당시 행정구역은 용궁현 내하면 상리 이었다. 원래 양(梁)씨 마을이지만 그 외손인 전씨와 김씨도 한 두 집 살고 있었다.

▲ 상락교회 설립자인 양성환 장로, 김낙진 장로, 전병원 장로.

이 마을의 양조환이 의성 다인에 살던 사돈 오이건으로 부터 전도를 받고, 외손격인 두 젊은이 전병원과 김낙진에게 전도를 하게 된다. 매주 낙동강 건너 삼분교회에 예배를 다니다가 초가목재 12칸 상락교회를 세웠다. 곧 양조환은 사립 경세학교를 설립해 신교육을 실시했고, 8촌 동생 양성환은 유교사상에 철저했지만 곧 성경을 탐독하며 교회의 세 번째 장로가 되었다. 이후 30평, 60평 예배당으로 이전 확장하다가 2003년 100주년기념관 까지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후 상락교회 신자들은 이웃지역에 8개의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1992년 기준 시점으로 약 100여 명의 교계지도자를 배출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2005년 현재에는 140여 명으로 증가했다. 두메산골 주민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문맹에서 깨어나 교육열이 높아졌고, 사설학당인 경세학교를 통해 성경, 국사, 외국어 등을 공부해 일찍부터 도시와 외국으로 진출해 나간 당연한 성과였다. 이곳은 신앙과 교육을 병진시킨 결과, 신앙과 교육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낸 하나의 성과로 파악되고 있다.

황국신민정책에 끝까지 저항한 순교자들 등장

1900년대 초기 안동·예천지역의 기독교 활동은 1930년대로 접어들며 새로운 시련을 겪게 되었다. 민족의 전체 구성원이 일본의 전일적인 식민지적 사회·정치 지배아래 놓여 있는 상황에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될 수는 없는 법이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 대륙 침략을 본격화했다. 상해사변과 중일전쟁(1937)을 거쳐 1941년 태평양전쟁을 시작했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국가를 전시체제로 바꾸게 된다. 한국인에게 전쟁 협조와 함께 한국을 일본에 완전히 동화시키려는 황국신민화정책이 추진되었다. 그 정책의 골격은 ‘조선교육령 개정’,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으로 나타났다.

1937년 9월 9일 일제는 국민정신총동원령을, 10월 2일 황국신민서사를 공포했다. 결국 교회들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을 하게 되었고 전국의 장로교회는 통폐합을 길을 걷게 되었다. 1938년 9월 이후 장로교 전국 노회들이 총동원 연맹을 결성하는데 1939년 12월 12일 경북의 경안노회도 이 연맹을 결성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하고 끝까지 저항한 소수의 교인들이 등장했다. 평남의 주기철, 평북의 이기선, 경북의 이원영, 경남의 한상동, 손양원 등 소수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끝까지 저항을 했다.

▲ 이상동 장로와 이원영 목사의 노년 모습. 사진출처:사진으로 보는 근대안동(안동대 박물관)/봉경 이원영 목사(배흥직)

임희국 교수의 [한국장로교회 130년]에 따르면 경북 안동의 이원영 목사는 신사참배 강요뿐만 아니라 일제의 황민화 정책까지 철저하게 거부했다. 하나만 거부해도 힘겨운 상황에서 세 가지를 모두 거부했던 것이다. 이 목사는 시무하던 안기교회(이후 서부교회)에서 강제로 사임을 당했고 경안노회는 목사직에서 면직시켰다.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목회자의 길을 걷던 이원영 목사는 총 4차례나 검속돼 투옥을 당하게 되었다. 1939년 5월부터 3개월간 구금당한 것을 첫 시작으로 2차 예비검속은 1940년 8월 20일부터 시작됐고, 3차는 1941년 7월 1일부터 다음해 3월 21일까지, 4차는 1945년 5월 22일부터 해방된 해인 8월 17일까지 수개월씩 투옥되었다.

심지어 동생 이원세는 교회 직분을 사면 당했고, 동생 이원식은 강제퇴직을 당했다. 또한 안기교회 집사 이수영·이수원 형제는 고문으로 후유증과 불구의 몸이 되었다. 동료인 영주제일교회 김진호 목사와 박충락 장로는 구속되었고 또한 동료인 전계원, 권수영, 임학수 등 여러 교역자가 함께 고난을 당했다고 한다.

예천 전원교회 이교남 목사는 2014년 [초기 예천지역교회 전래사연구] 논문을 통해 안동지역에서 신세교회 배영문 장로, 방하교회 최상락 장로가 신사참배 거부로 고초를 겪었다고 발굴·발표하였다.

또한 예천지역 교회에서의 고초와 탄압사례를 소개했다. 예천읍교회에서는 권수도 장로와 강석문 집사가 고초를 겪었으며, 금곡교회의 변재구 영수와 김상진 집사가 고초를 당하며 이때 교회가 철거되고 종각을 몰수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상락교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성탄절에 십자가를 게양해 김낙진, 양조환 장로가 연행되었다고 밝혔다.

▲ 안동교회에서는 지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매년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을 통해 지역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재조명하며 지역선교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교회 내의 인물과 교회사에 국한시킨 포럼 활동을 추진하고 있지만, 우리지역 근대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파악하는데 큰 의미로 축적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근대 기독신앙과 문화, 이젠 소중한 지역역사로 재정립해야

신앙을 야망의 도구로 삼는 작금에 큰 교훈으로 남아

작금의 시대에 신앙을 자기 야망의 도구로 삼는다는 비판이 종종 들리고 있다. 하지만 혼란함과 암울함이 혼재했던 근대 시기 즈음에 소수 청년유생들은 낯선 이방의 신앙인 기독교(개신교)를 만나며 결단했다. 그리고 새 삶을 열었고 지역사의 지평을 개척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들은 새 문화와 지식을 과감히 수용하는 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통해 주어진 삶을 더욱 풍성하게 창조한 것이다. 동시에 나라의 고난을 개인의 삶과 신앙에 일치시킨 훌륭한 모범으로 다가오고 있다.

와룡교회 강정구 목사는 [근대기독교와 신문화의 요람, 목성산 자락] 기고문에서 이원영 목사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며 석주 이상룡의 동생 이상동 장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석주 이상룡이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된 나라를 위해서 일했다면, 이상동은 일평생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했다. 정부도 종교도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소망이 되지 않을 때와 시대를 만났고, 이때와 이 시대를 해결하고 넘어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근대시기는 구시대의 종말과 함께 식민지의 암울한 백성으로 전락했었다. 그 고통의 웅덩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 했지만, 깨어있는 한 인격을 통해 많은 삶과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 영향은 지역사회의 근대적 특성을 배양케 하는 필요조건이 되기도 했다.

마침 안동교회에서는 지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매년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을 통해 지역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재조명하며 지역선교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예천 출신으로 안동교회 2대 목사를 역임한 이대영은 중국 산동성에서 33년간 선교활동을 했는데 올해 초부터 신앙·선교활동에 대한 재조명을 시작했다. 비록 교회 안의 인물과 교회사에 국한시킨 포럼 활동을 추진하고 있지만, 우리지역 근대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파악하는데 큰 의미로 축적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당시 암흑 같던 식민지 사회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며 근대 문명을 체화해 낸 사회적 주체들의 다양성과 역동성까지 역사적 조명을 해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 국민주권은 부재했지만 실질적으로 근대를 학습하고 민족을 발견했던 여러 영역 속의 식민지 근대주체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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