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교육운동의 물길을 트다'
교육도시 안동과 예천의 근대 교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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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도시 안동과 예천의 근대 교육사
  • 백소애/정운홍
  • 승인 2016.07.0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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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15)

프롤로그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다’는 말이 있다.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이 저술한 지리서 『택리지』에는 경상도를 일컬어 “옛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이 도 안에서 장상·공경과 문장과 덕행이 있는 선비와 공을 세웠거나 절의를 세운 사람, 선도·불도·도교에 통한 사람 등이 많이 나와서, 이 도를 인재의 광이라 한다.”고 했다. 또 “예안·안동·순흥·영천(옛 영주)·예천 등의 고을은 신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다. 태백산 밑은 산이 평평하고 들이 넓어 명랑하고 수려하며, 흰 모래와 단단한 토질로 기색이 완연히 한양과 같다. 서로 가까운 이 다섯 고을에 사대부가 가장 많으며, 모두 퇴계와 서애 문하생의 자손들이다. 의리를 밝히고 도학을 중히 여겨, 비록 외딴 마을, 쇠잔한 동리라도 문득 글 읽는 소리가 들리며, 해진 옷을 입고 항아리 창을 한 집에 살아도 모두 도덕과 성명(性命)을 말한다.”고 했다.

이처럼 예로부터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고 교육을 중시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교육도시로서의 위상을 세워온 안동은 예천을 비롯해 인근 경북북부권 지역은 물론 강원도에서까지 유학을 온 교육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현재는 학생 수 감소, 진학률 저하, 우수학생의 타 지역 이탈 등 교육중심도시로서의 이미지가 퇴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지난 4월 15일, 1967년부터 시작된 대구청사 시대를 마감한 경상북도교육청이 안동시 풍천면 경북신도시 내에서 개청식을 가졌다. 새로운 도약을 통해 경북교육을 선진교육의 요람으로 만들겠다는 캐치프레이즈로 포부를 밝혔다. ‘퇴계와 서애 문하생의 자손들로 외딴 마을 쇠잔한 동리라도 문득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고장’이자 학교 수와 학생 수가 많고 높은 학구열로 ‘교육의 도시’로 불린 안동과 예천의 근대교육사를 통해 우리지역 근대교육의 시작과 변화와 발전, 시대적 상황에 따른 교육제도 등을 짚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채택했으며 성리학적 질서를 사회전반에 확신시키고자 대의적인 교육관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교육관은 다양한 교육제도와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성인군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학사상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은 국가에서 설립한 성균관, 향교 등의 관학(官學)과 개인이 설립한 서원과 사당 등의 사학(私學)으로 구분된다. 사학은 다시 서원과 서당으로 나눌 수 있다. 서원은 15세기 말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것과 함께 학문적 역량이 축적되면서 자체적으로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서 운영되다가 퇴계 이황에 의해 유생들이 몸가짐을 바로잡으며 교육을 받는 장소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러나 말기에 가면 지방사족들이 자신들의 향촌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아울러 중앙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하면서 많은 폐단을 낳기도 했다. 서당은 양반 자제의 초급 교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일반 평민의 자제들도 교육을 받는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물론 서울의 양반들은 각각 집안에 사숙을 설치하여 개인교습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서민들의 사회적, 경제적 성장과 함께 교육을 받는 대상이 양반 위주에서 일반 평민까지 확대되었다.

► 안동향교

조선시대 안동의 전통교육기관은 안동향교와 예안향교, 예천의 전통교육기관은 예천향교, 용궁향교가 있었다. 안동향교는 대설향교(大設鄕校)로서 성균관에 버금가는 광대한 규모로 지금의 안동시청 자리인 명륜동에 있었다. 명종22년(1567년) 안동부사 윤복이 중건하였으나 6․25전란 중에 불타버렸다. 그 터에 안동사범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안동교육대학과 안동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지금은 안동시청이 자리하고 있다. 1986~1988년 지금의 송천동 자리에 복설됐다. 예천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역민을 교화시키기 위해 태조 7년(1398) 현산 서본리에 창건됐다가 태종18년에 지금의 자리인 백전리로 옮겨졌다.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에 위치한 용궁향교 또한 같은 시기에 세워졌고 활발한 교육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안동에 현존하는 서원은 도산서원, 병산서원, 역동서원, 호계서원, 여강서원, 임천서원, 묵계서원 등 53개이고 예천에는 옥천서원, 도정서원, 신천서원 등 9개가 있다.

관학인 향교는 지방의 사회 교육적 기능을 담당하여 지방문화를 향상시키는 역할을 해왔으며 사학인 서원은학문연구와 교육의 기능까지 담당하였다. 조선말기부터 우리의 전통교육제도는 사회 전반적인 변화와 함께 격동기를 맞았다.

구한말, 근대학교의 형성

근대교육이 제도적으로 정비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고종31) 때였다.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 교육행정을 관장하기 위해 학무아문(學務衙門)이란 중앙관청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1895년 2월에는 “부강하고 독립된 나라는 모두 인민의 지식이 개명하였고, 지식의 개명은 교육의 선미로 되었으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라는 평등교육 실현을 선포하는 교육입국조서를 반포하였다. 서구식 공교육제도가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신학제에 의한 최초의 학교인 한성사범학교가 1895년 개교하고, 소학교령에 의해 6년 연한의 관립소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하며 교육을 위한 교과서도 편찬하였다.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는 1883년 덕원부(원산)에 설립된 사립 원산학사다. 원산개항과 더불어 들어온 왜세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읍민들이 기금을 모아 세운 것으로 문예반과 무예반을 설치하여 근대적 교과과정을 가르쳤다. 개화기의 교육제도는 국(관)·공립학교, 사립학교, 종교계 학교로 나뉜다. 국(관)공립학교에는 육영공원(1886), 한성사범학교(1895), 소학교(1895)와 중학교(1900)가 있으며 사립학교로는 원산학사(1883)를 비롯 홍화학교(1895), 서전과 서숙(1906) 등이 종교계 학교로는 광혜원(1885), 최초의 남자학교인 배재학당(1885), 최초의 여자학교인 이화학당(1886) 등이 있었다. 특히 종교계 학교는 종파의 종교적 지도자 양성의 목적도 있었지만 근대교육의 선구자 역할도 해왔다.

이 시기는 근대교육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민교육의 기초를 다지고 민족의 자주성 확립을 부르짖던 시기였다. 개화운동은 계몽운동, 즉 민족자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계몽운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국민적 역량을 축적하고 신장하기 위한 실력양성운동이다. 이런 개화교육이 구국교육으로, 구국교육이 항일교육으로 변화한 것은 개화를 위한 개항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된 1904년 이후에는 일본어가 강조되면서 국어 수업이 감소됐다. 또한 전반적으로 이 시대 학교 대부분은 교사, 교재, 기본 시설 등의 심각한 부족 때문에 질적으로 만족할 만 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비록 1895년의 교육조서가 전통적 사회질서의 변혁과 유교일변도 교육의 철폐를 주창하며 교육입국(敎育立國)을 목표로 삼았으나, 전통적 왕정의 복구를 꾀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근대화에 있어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후 교육입국의 의지는 조정의 친일 성향과 일본에 의한 교육의 질 저하 기도에 의하여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자생적 사학은 근대화를 추구함에 있어서 강한 민족주의와 반일(反日) 의지를 드러내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됐으며,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자생적인 융합 과정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하여 와해돼버렸다.

구국계몽운동의 시작, 근대의 교육기관

『안동향토지』에는 구한말-왜정초기의 사설 교육기관 10여 곳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 거의 마을마다 근대교육을 수용하는 학교, 의숙義塾, 사숙私塾, 강습소 등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협동학교(임하면 천전리)’, ‘동흥학술강습회(법흥동 임청각)’, ‘동명학술강습회(와룡면 도곡리)’, ‘오산학술강습회(월곡면 배나들)’, ‘화산학원(목성동 구교육청 자리)’. ‘보문의숙(도산면 토계리)’, ‘용전학술강습회(북후면 옹천리 사익정)’, ‘용흥학술강습회(와룡면 지내리), ‘원흥의숙(풍천면 가곡리)’, ‘역동의숙(풍산읍 소산리)’, ‘오릉학술강습회(풍산읍 오미리), ‘풍산학술강습회(풍산읍 안교리)’, ‘동화학교(풍천면 하회리)’, ‘일직의숙(일직면 망호리)’ 등이다. 이후 1910년대에 들어서 30여곳 이상으로 늘어났다.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애국정신을 고취 시키고자 설립된 이들 사설 교육기관은 문중에서 재정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기존의 한옥건물이나 서당과 정자 등을 보수하여 교사로 활용했다. 일제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1면 1교 설립을 위해 학교를 세워나가기 이전의 사설 교육기관으로 이후 일부는 보통학교로 바뀌었다. 예로부터 지조와 절의를 숭상하는 이 고장 선비정신의 기풍은 민족의 암흑기에 처하여 사학교육을 통하여 더욱 고조되었다. 안동에서 항일운동이 특별히 치열했던 원인은 활발하게 일어난 교육운동의 성과로 볼 수 있다. 개화기를 전후해서 이 지역에서 일어난 주요한 사설학교를 몇 군데를 살펴본다.

-안동독립운동의 주축, 협동학교(協東學校)

안동출신의 독립운동가 동산(東山) 류인식(1865-1928)은 1907년 안동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세우며 안동문화권에 애국계몽운동을 일으킨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청량산에 들어가 의병항쟁에 나선 그는 1903년 성균관으로 유학길에 올라 그곳에서 신채호 등과 교유하게 된다. 의병만으로는 국권을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류인식은 이때 접한 서양의 학문을 통해, 우리의 학문이나 서양의 학문이나 그 본질에는 차이가 없음을 깨닫고 시대가 필요로 하는 학문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윽고 신학문을 통해 길러진 인재야말로 부강한 나라의 기틀이 된다는 결론을 갖고 구국계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류인식은 보수적인 안동의 유림들을 각성시키고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켜 계몽운동의 주체로 육성하려고 하였다. 그는 국권회복교육의 주최로 유림세력을 설정하고 그들에게 교육과 산업을 실력양성에 힘쓸 것을 강조했으나 아버지 류필영과 스승 김도화가 절연을 선언할 정도로 그 과정은 험난했다.

► 협동학교 교사(중간줄 왼쪽이 동산 류인식)(사진출처: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1904년 1차 시도에서 실패한 그는 다시 신학문 교육기관 설립해 도전해 김후병, 하중환 등과 학교 설립인가를 신청하고 마침내 1907년 봄에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재원은 호계서원의 재산과 내앞 의성김씨 문중을 비롯한 여러 문중의 것이 동원되었다. 의성김씨 종손 김병식이 교장을 맡아 반대세력을 막아내고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 가산서당(可山書堂)을 보수하여 학교를 세웠다. 1909년에는 백하 김대락이 계몽운동에 대한 인식을 바꾸면서 자신의 사랑채를 기꺼이 교사로 내놓기도 했다.

‘협동학교’의 명칭은 나라의 지향(志向)은 동국(東國)이요, 향토의 지향은 안동이며, 면의 지향은 임동(臨東)이므로 ‘동(東)’을 택하였고, ‘협(協)’은 안동군의 동쪽에 위치한 7개면이 힘을 합쳐 설립한다.”는 뜻에서 협동(協東)이라고 지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협동학교와 안동의 계몽·교육운동을 주도하던 인사들의 국외로 망명하였으며 이후 1912년 임동면 수곡동 한들에 있던 유치명의 종택으로 협동학교를 이전하였다. 1911년 3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데 이어 1915년 제2회 졸업생, 1916년 제3회 졸업생, 1917년 제4회 졸업생, 1918년 제5회 졸업생을 각각 배출하였다. 1919년 협동학교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여 시위를 주도하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현재 경북독립운동기념관 내에 협동학교 교사였던 가산서당(2007년 복원)과 기념비가 있다.

당시 일반적인 사립학교는 초등 교육 과정이었으나 협동학교의 정규 교육 과정은 3년제 중등과정이었으며, 본과 진학을 위한 예비과도 두었다. 재학생의 연령은 대개 20세가 넘었다. 전체 3년 과정 가운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2학년 교과 과정을 살펴보면 수신·국어·역사·지리·등 17개 과목으로 구성되었다. 교사들은 대개 내앞마을의 의성김씨, 임동한씨, 전주류씨 사람들과 서울 신민회와 관련된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김기수·김동삼·김병식·김형식·류동태·류연갑·류인식·류장영·류주희·류진하·박태훈·안상덕·하중환 등이 활약하였다.

► 협동학교 제1회 졸업식(사진출처:안동향토지(上)

협동학교는 경북북부지역 계몽운동의 효시이면서, 이 지역에 대한 신민회의 교두보 확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사상적으로 보수성을 가장 강하게 고집하였던 이 지역에 혁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경북북부지역으로 확신시켜 나간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 학교 출신들이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북북부지역의 독립운동사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육사의 모교, 보문의숙(普文義塾)

► 보문의숙 교과서(사진:이육사문학관)

육사가 졸업한 도산공립보통학교의 전신인 보문의숙의 교과서. 육사는 진성이씨 문중학교인 보문의숙(1909~1918)을 형 원기와 함께 다녔으며 이곳에서 근대 학문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1909년 12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도산서원 자산을 기본으로 상계파 종손 이충호, 계남고택 이상호 등 진성이씨 문중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사립교육기이다. 육사의 조부 치헌 이중직이 보문의숙 초대 교장을 지냈다고 전해오는데 이중직은 일찍부터 가학으로 다섯 손자들을 사숙하였고, 손자 원기와 원록(육사)을 보문의숙에 입학시켜 신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1918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되기까지 토계리 계남고택을 교사로 사용하였고 1916년 도산공립보통학교 자리로 이건하였다.

-농민운동의 모태, 풍산학술강습회(豊山學術講習會)

► 도산서원전답기부보문의숙성책(陶山書院田畓寄付寶文義塾成冊)(사진:한국국학진흥원) 1910년 1월 30일에 도산서원에서 보문의숙에 기부한 재산의 목록이다.

1918년 이회목, 이준태 등 풍산 우렁골 선성이씨 문중 인재들이 안교리에 세웠다. 독립운동가 권오설이 조선노동연맹회에서 활동하던 이준태·김남수 등과 함께 1923년 풍산학술강습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해 소작인의 경제적 권익 보호와 함께 당시 뿌리 깊게 남아 있던 봉건적 신분질서 철폐운동 등을 전개해 나갔다. 풍산소작인회의 당면 투쟁목표는 지세의 지주 부담, 소작료 인하, 소작권 5년 이상 보장, 부역과 마름의 중간 수탈 반대, 소작료 운반 비용의 지주 부담 등 이었다. 안동은 물론 예천에도 출장소를 두는 등 조직을 확대하면서 풍산소작인회는 중소지주와 지식층이 대거 참여한 5천여 명 규모의 전국 농민조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24년, 풍산소작인회가 소작료 인하운동을 전개하면서 농민들의 요구는 집단적 소작쟁의로 발전했다. 지주들은 일본인들의 협조 아래 소작인회 간부를 고발하고, 소작권을 박탈하는 등의 방식으로 소작인회를 탄압하였다. 열두 명이 고발되어 징역과 벌금형을 받았지만 농민들은 쟁의 과정을 통하여 식민지 수탈체제를 인식하면서 자신들의 운동을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1941년 문을 닫기 전까지 풍산학술강습회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데 힘썼고 이는 곧 풍산소작인회의 탄생에 기여하고 농민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예천의 인재가 모인 곳, 예천 영신의숙(永信義塾)

영신의숙(永信義塾)은 풍양면 우망리 낙빈정에 1922년 창설되어 1943년 문을 닫았다. 1922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 4면 사회기사면에는 ‘豐壤面永新義塾/ 醴泉郡豐壤面憂忘洞有志鄭恒謨權潤稷兩氏와 面長李尙宇氏는 有志의 同情을 得하야 永新義塾을 新說하얐는데 科目은 朝漢文算術日語等이오 敎師는 柳近永玄永華兩氏인바 生徒는 百餘名에 達한다더라(釀泉)’라고 되어 있다.

즉, 예천군 풍양면 우망동 유지 정항모, 권윤직, 면장 이상우씨가 영신의숙을 신설하였으며 과목은 한문, 산술, 일어 등이고 교사는 류근영, 현영화로 학생 수가 백여 명에 달한다는 내용이다.

일제강점기의 교육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된 1904년 이후에는 일본어가 강조되면서 국어 수업이 감소됐다. 또한 전반적으로 이 시대 학교 대부분은 교사, 교재, 기본 시설 등의 심각한 부족 때문에 질적으로 만족할 만 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비록 1895년의 교육조서가 전통적 사회질서의 변혁과 유교일변도 교육의 철폐를 주창하며 교육입국(敎育立國)을 목표로 삼았으나, 전통적 왕정의 복구를 꾀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근대화에 있어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후 교육입국의 의지는 조정의 친일 성향과 일본에 의한 교육의 질 저하 기도에 의하여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자생적 사학은 근대화를 추구함에 있어서 강한 민족주의와 반일(反日) 의지를 드러내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됐으며,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자생적인 융합 과정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하여 와해돼버렸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1차~4차 조선교육령을 중심으로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된다. 우리 국민의 학교제도와 교육내용을 자신들의 통치 목적에 맞게 운영하고 장악한다는 것인데 1차는 우민화 정책, 2차는 문화적 회유책, 3차는 침략전쟁 목적, 4차는 민족말살을 위한 황국신민화 교육정책이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자생적인 사립학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미션계 학교들을 견제했으며, 결국 조선의 교육제도 전체를 일본식으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3.1운동 등 한국인의 저항의지를 목격한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탄압적 정책을 ‘문화정책’이라는 유화정책으로 탈바꿈시켜 식민지 인구의 지지를 얻고자 꾀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접어들어 일제가 본격적인 전쟁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식민지 조선인을 일본문화와 동화시키려는 강압정책이 교육 분야에서도 실행됐으며, 따라서 공식적으로 한국어가 금지됐고, 창씨개명 및 천황숭배 등이 강압적으로 자행됐다.

1910년대 이르러 주요 읍·면지역에 우선적으로 보통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의 학교는 심상소학교라 칭하고 우리 민족이 다니는 학교는 보통학교로 칭했다가 이후 소학교라 부르고 다시 국민학교라 부르게 되었다. 또 1940년대에 이르러 여러 곳의 보통학교가 4년제에서 6년제로 바뀌게 되었다.

안동의 교육기관

일제강점기 중기인 1929년 무렵 안동에는 19개 면에 공립보통학교 10개교로, 6년제 8개교 4년제와 2년제가 각 1개교였다. 6년제는 안동공립보통학교, 예안공립보통학교, 도산공립보통학교, 풍남공립보통학교, 일직공립보통학교, 임하공립보통학교, 임동공립보통학교, 풍북공립보통학교였으며 4년제는 길안공립보통학교, 2년제는 북후공립보통학교가 있었다. 그 무렵 안동군내에 일본인은 모두 258가구로 안동읍내에 190가구, 그밖에 면소재지에 몇몇집이 있었다. 일본인 학교는 안동읍내에 하나뿐이었기에 면소재지의 일본인 아동들은 보통학교에서 함께 수업을 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안동의 학교 수는 계속 증가하여 1950년에 이르러 지역의 국민학교는 16개교에 달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새마을 운동으로 각 학교의 구식 목조건물들이 모두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되었으며, 학교교육에 주민들이 적극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양질의 풍부한 학습환경과 교수자료를 갖추게 되었다. 1985년 통계에 의하면 안동의 국민학교 수는 본교 61개교, 분교 15개장으로 해방당시의 31개교에 비하여 30개의 학교가 증가되었다.

중등학교의 경우 초등학교에 비하여 학교 설립 수가 많지 않았다. 1933년 안동공립농림고등학교가 명륜동에 문을 연 이후 1942년 당시 안동읍 옥야동에서 한 개의 학급으로 개교한 안동고등여학교가 최초의 정규 교육과정으로 운영된 공립 중등학교였다. 해방 직후에 공립 중·고등학교가 새로 많이 생겨나고 60년대 이후에는 안동 시내에 사립 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설립되었다. 2016년 3월 현재 안동의 학교 현황은 초등학교 41개, 분교장 2개, 초등학교 30개, 분교장 4개, 중학교 14개, 분교장 3개, 고등학교 13개, 특수학교 2개로 968학급에 학생 수는 21,374명이다. 대학교는 국립안동대학교와 가톨릭상지대, 안동과학대학이 있다.

올해는 초등학교 개칭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96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 이름이 일제히 변경되었다. ‘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 천황의 신하와 백성들의 학교인 ‘황국신민학교(皇國臣民學校)’의 줄인 표현으로,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잔재를 청산하고자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게 된 것이다. 안동의 교육기관 중에서도 개교 100주년을 넘어 유서가 깊거나 상징성 있는 학교를 간략히 소개한다.

-안동교육기관의 상징, 안동초등학교(1909년 개교)

► 1930년대 안동초등학교(사진:안동초등학교)

안동초등학교는 1906년 개교한 대구초등학교(대구공립소학교, 대구덕산공립심상소학교)와 1907년 개교한 상주초등학교(상산제1학교)와 함께 경북의 3대 초등학교라 불릴 정도로 역사가 오래됐다. 1909년 사립영가학교와 동명학교를 병합하여 사립안동보통학교로 지금의 안동시청자리에서 개교하였다. 당시 안동향교가 있었는데 향교를 교사로 사용했다. 2년 뒤 1911년 사립안동보통학교에서 공립보통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고 1928년에 지금의 위치인 남문동으로 새건물을 지어 이전하였다. 당시 주민들이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이후 안동서부공립심상소학교, 안동서부공립초등학교, 안동중앙국민학교, 안동국민학교에서 1996년 지금의 안동초등학교로 개칭했다. 1950년 6.25 때 목조건물인 교사가 완전 소실되어 그전의 기록물과 자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해방 전의 교과서. 조선총독부 글자가 선명하다.(사진: 안동초등학교)

-항일 학생운동의 성지,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1933년 개교)

1933년 안동공립농림학교로 개교했으며 일제강점기 때 개교한 안동시내 10개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다. 당북동 지금의 복주여중 자리에 있다가 옥동으로 이전했다. 1944년 4월 일제는 다급해진 시국사정으로 학제를 변경하고 5년제에서 4년제로 바뀌었다. 1950년 안동농림고등학교로 교명이 바뀌고 2001년 지금의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로 바뀌었다.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1943년 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혹은 黎明會)를 조직하면서다. 문예써클의 성격을 띤 명성회는 <여명黎明>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역사·사상서 등을 읽으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43년 10월 조선회복연구단이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농림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안동의 지도층 인사들도 참여하였는데, 1944년 방학 무렵에는 단원이 51명에 이르렀다. 1944년 10월 연합을 이룬 두 단체는 ‘안동경찰서를 공격하고 무기를 확보하여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뒤 의성義城지역으로 진격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1945년 2월 초 일제 경찰이 이 계획을 알아내고, 관련자 검거에 나섰다. 3월에 이르러 64명이 체포되어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손성한孫聖漢은 순국하였다. 관련자 대부분이 옥고를 치르다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현재도 교내에 전시관을 만들고 기념비를 세워 선배들의 항일운동을 기리고 있다.

► 1951년 안동농림학교 졸업기념 추억록(사진: 포항 골동품 http://blog.daum.net/iazia/12859579)

-안동사범학교

► 1948년 안동사범학교 신축 현장(사진:사진으로 보는 20세기 근대안동/안동대학교 박물관)

1945년 민족해방을 계기로 급격히 증가된 초등학교 교원의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군정당국에서는 1개 도에 2개의 사범학교를 공립으로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안동사범학교는 1947년 7월 도립으로 신설되었다. 안동사범학교는 1947년 8월 안동시 명륜동 현 시청자리에 교사 2동과 당시 향교 건물 일부를 가교사로 정하고, 같은 해 9월 15일에 본과 1학급과 초급과 2학급으로 개교하였다. 초등학교 교원양성제도의 개편으로 1962년 3월에 교육대학이 각 도별로 1개교씩 신설됨에 따라 경상북도는 대구사범학교가 대구교육대학으로 승격·개편되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과정의 사범학교가 교육대학으로 승격되었지만 교원수급 관계로 1962년 2월 폐교된 뒤를 이어 안동대학교가 탄생하였다. 안동사범학교 사범본과의 경우 14회에 걸쳐 모두 3,384명의 졸업자를 배출하였다

예천의 교육기관

2016년 3월 1일 현재 예천군 학교 현황은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는 예천초등학교(1911년 개교), 용궁초등학교(1912년), 동부초등학교(1943년), 남부초등학교(1967년), 용문초등학교(1922년), 상리초등학교(1935년), 은풍초등학교(1928년), 감천초등학교(1926년), 유천초등학교(1930년), 지보초등학교(1923년), 풍양초등학교(1934년) 등 11개교 1,400여명의 학생이 있다. 그중 1911년 개교한 예천초등학교와 1912년 용궁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용궁초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넘긴 학교다. 중학교는 공립인 예천중학교(1928년 개교), 용궁중학교(1948년), 풍양중학교(1953년), 지보중학교(1954년), 감천중학교(1954년), 용문중학교(1971년), 예천여자중학교(1945년)와 사립인 대창중학교(1922)와 은풍중학교(1963년) 등 총 9개 학교 850여명의 학생이 있다. 고등학교는 공립인 풍양고등학교(1975년 개교), 감천고등학교(1954년), 예천여자고등학교(1945년)와 사립인 대창고등학교(1953년) 등 총 4개 학교 840여명의 학생이 있다. 대학교는 1996년 설립한 전문대학 경도대학이 있다.

-예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예천초등학교(1911년 개교)

► 예천초등학교 1960년대 교사(사진:예천초등학교)

예천읍 서본1리 49-16번지에 자리한 예천초등학교는 1907년 예천읍 노하리 객사(客舍) 건물에서 사립 융명학교(私立隆明學校)로 개교하였고, 1911년 7월26일 7월26일에 6년제 예천공립학교(醴泉公立普通學校)로 설립 인가되어 같은 해 9월 16일에 개교하였다.

1922년도 1학년을 모집할 당시 입학 지원자가 223명이었는데, 그 중 60명만 선발하여 나머지 163명은 입학을 못했다. 이들을 구제하고자 교원들의 후의(厚意)로 다시 69명을 모집하여 2부제로 오전 오후에 각각 60명씩 수업을 실시했다. 이마저도 부족해 속성과(速成科) 100명을 모집하여 만 10세 이하는 1학년 2부로 편입, 만 10세 이상은 속성과로 편입하여 1922년 5월 15일부터 개학하였다. 1970년도에는 졸업생이 530명에 달할 정도로 학생이 많았다. 6.25당시 학교가 소실되면서 그 전의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 개화기(1880~1910)와 일제강점기의 교과서 변천사(사진:예천초등학교)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예천초등학교는 그 역사만큼 오래된 전설이 아직도 학생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다. 학교의 현 위치에는 과거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 안에 용이 살고 있었는데 연못을 흙으로 매립하고 그 위치에 학교를 세웠다 한다. 학교를 세운 뒤 미처 메우지 못한 웅덩이를 메우려고 하자 그곳에 살고 있던 용이 땅 위로 올라왔고, 그 용을 학교 소사가 괭이로 죽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학교의 큰 잔치나 소풍·운동회 때가 되면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일이 많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경북북부 교육의 중심지 용궁초등학교(1912년 개교)

용궁초등학교는 1912년 개교해 1937년 용주공립심상소학교, 1940년 용주공립초등학교, 1946년 용궁공립초등학교, 1996년 지금의 용궁초등학교로 개칭됐다.

► 용궁초등학교 1943년 교사(사진:용궁초등학교)

구한말 용궁의 한학자였던 권영우 선생은 일제에 항거하며 한양에서 하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국권회복과 고향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을 고민하던 중 국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당시 용궁군수인 유봉환 군수와 의논해 1907년 사립 용범학교를 설립한다. 바로 용궁공립보통학교의 전신이다.

용궁공립보통학교 연혁지에 의하면 학교는 1912년 4월 5일 개교하여 열흘 뒤인 4월 15일 개교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때 사립 용범학교에서 인수 받은 생도와 신입생을 합하여 4학년 4개 학급으로 편성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용궁공립보통학교는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는데, 조선인 학생들은 지금의 중학교 자리에서 공부를 하고, 일본인 학생들은 지금의 초등학교 자리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예천과 점촌 사이에 있던 용궁은 학생들이 집중되는 교육 중심지로 개포, 유천, 지보, 풍양, 산양, 영순, 산북 등지의 많은 학생들이 용궁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2009년 용궁초등학교로 통폐합된 용궁초등학교 장평분교는 1934년 개교한 용궁공립보통학교 부설 덕계간이학교가 그 전신이다. 또 향석초등학교 역시 1955년 용궁초등학교 향석분교로 개교했다가 농촌공동화 현상으로 학생 수가 줄어 2003년 통폐합됐다.

나의 학창시절 회고

등하교를 위해 몇 마장, 몇 리 길을 오갔다는 말은 이제 고릿적 얘기가 되버렸다. 안동군에서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에서 안동 시내로 유학 온 학생들이 많았던 시절이다. 교육에 대한 열의가 가득하고 배워야한다는 의지가 강했을 때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게 가능했고 가난한 농촌에서 내 자식만큼은 힘든 농사 안 시키고 성공하는 유일한 방법이 교육이라는 희망이 있던 시절이었다. 해방 전 학교를 다녔던 세대는 전쟁수행을 위한 자원인 유류의 대체연료로 소나무공이를 따서 기름을 얻어 쓰는 송탄유자재(松炭油資材) 채취에 동원되기도 하는 등 침략전쟁 수행의 수단이 되곤했다. 반마다 콩나물시루처럼 한참 학생 수가 많았던 때 까까머리로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의 그 시절 이야기 한 토막을 전해 들어 본다.

-“장차 큰 사람이 되라. 곧 새 세상이 온다.”

<안동초등학교 36회 졸업생 김인구(한림대 명예교수)>

안동 내앞에 영남 초유의 중등 교육기관인 협동학교가 세워지고 2년 뒤 1909년 모교인 안동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협동학교나 나의 모교나 교육구국의 기치를 내세운 민족사학이고 모교는 이미 주권을 상실한 상태였지만 조선왕조가 최후에 인가한 안동 최초의 정규학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모교는 영세하여 경영이 어려웠던 비정규 초등학교인 영가학교와 동명학교를 해체하여 그 두 학교를 통합, 발전적으로 창립된 학교다. 일제가 안동에 인문계 중등학교 인가를 불허하였는데 그것은 안동이 독립운동의 본거지란 점에 연유한다. 1930년대 초에야 실업계 일제 관학인 안동농림학교, 1940년대 초에 안동여자중학교를 인가하였다. 내가 모교에 입학한 1941년에는 협동학교가 일제의 박해로 소멸된 지 근 20년이 지난 뒤였다. 위의 두 학교와 모교 외에 옥동국민학교(현 서부초등학교), 일본인 자녀만이 입학이 가능하였던 학교인 안동국민학교(현 동부초등학교), 권현섭(權賢燮) 선생이 경영하던 민간사학 화산학원(현 화성동) 등 안동시내에 모두 6개 학교가 있었으니 대학만 4개교가 있는 지금의 교육규모의 양과 질에 비교해 보면 실로 금석지감이 있다.

내가 입학한 1941년부터 일제는 조선어를 말살하는 법을 선포하고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였다. 심심산곡 임동면 지례, 속칭 국란(菊蘭)마을에서 촌티를 벗지 못한 산골 놈이 난생 처음 자동차를 구경하고 그것을 타고 안동부성으로 입성하여 모교에 입학하였으니 그야말로 가재가 한강물 한가운데를 떠내려가듯 경이로움과 감격이 내 가슴을 치고 있었다. ‘가재는 일평생 바다가 있는 줄을 모른다’고 한 옛말이 있으니 집채만 한 자동차가 뻥 뚫린 신작로를 번개처럼 질주하는 새로운 문명에 압도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란마을에는 학교가 없었다. 자전거도 자동차도 없었다. 지게와 쟁기와 호미와 낫, 괭이와 수근포(삽)와 바소가리와 삼태기, 다래끼와 망태기와 오재기, 가마니 같은 것을 집집마다 갖추고 사람들이 법 없이도 오순도순 살아가는 두메산골이었다. 물버지기를 인 새댁 뒤를 삽살개가 졸랑졸랑 따르고 소를 모는 남정네들 노랫소리가 흥겨운 마을이었다. 밭 갈고 씨 뿌리고 김 메고 거두어서 겨울을 맞고 설을 맞았다. 아침이면 산꿩이 울고 낮에도 소쩍새가 울고, 저녁이면 초가집 처마에 참새가 날아들고 군불이 타닥거리다 사그라지면 앞산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국란은 열 집이 채 안 되는 초가집 마을이었다. 다 소농인데 그 가운데 중농인 세 채의 기와집이 있었다. 우리 집이 그 가운데 하나였다. 산길 험로라 여간해서 낯선 사람을 보기 힘들었고 사방 삼십리 큰 재를 넘어가야 신작로에 닿을 수 있는 마을이었다.

1941년 이른 봄, 초등학교 입학을 할 나를 위해 우리 집은 안동시내로 이사를 갔다. 다른 집 아이들은 꿈도 못 꾸는데 내가 학교에 가게 된 것은 그나마 우리 집이 중농이었기 때문이다. 숙부님 손을 잡고 안동서부국민학교(현 모교)로 갔다. 입학시험을 쳐서 용케도 합격했다. 달포 병아리 신입생으로 학교 길을 익히고 반 아이들과 어울려 나날이 새로운 질서에 길들여져 갔다.

태평양전쟁이 일본군의 힘겨운 싸움으로 기울기 시작할 때인 1944년에 4학년이 되었다. 일제는 전국민 전시 동원령을 내려 초등학교 어린이까지 강제노력에 동원하였다. 우리들은 그해 봄과 가을 담임선생의 인솔 하에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이틀이 멀다하고 산으로 가서 솔관지와 솔방울 따는 일을 했다. 솔관지는 정제하여 기름을 빼내 군용차 유류로 사용하고 솔방울은 관공서와 학교의 겨울 난방연료로 쓰기 위한 것이라 했다. 참으로 잔혹한 일제 최후의 발악이었다. 동토와 같은 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다. 개학을 하자 우리들 앞에 키가 크고 잘 생긴 선생님이 나타났다. 그해 학교에 처음 부임하신 20대 초반의 담임 김충섭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장차 큰 사람이 되라. 곧 새 세상이 온다.”

그 말씀은 흔히 첫 만남의 훈계쯤으로 무덤덤하게 지나쳤지만 왠지 그 한마디 말씀에 유난히 힘이 실려 있었고 여운이 있었다. 5학년이 된 우리들은 솔관지나 솔방울 따는 일에서 송현동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학교에서 송현동까지 걸어서 1시간쯤 소요되는 그 길을 걸으며 선생님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드디어 8월 15일, 산간벽촌에도 일본의 패망소식이 날아들어왔다. 8월 17일 지례로 다 모이라는 전갈이 돌았다. 어린이도 오라고 해 우리 종반 형제 숙질들이 지례로 갔다. 잠시 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호길(전 포항공대 총장)의 선친 김용대翁이 왜놈의 압박에서 벗어나 해방되었음을 연설한 후 우리는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우리 조무래기들도 어른들이 하는 대로 따라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우리도 어른들 틈에 기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푸짐한 쇠고기국을 배불리 먹었으니 독립이라는 것이 참 좋기는 좋다,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을 했다.

-心如水 ‘물과 같은 마음으로 지나온 삶을 돌아본다’

<안동사범학교 10회 졸업생 손재하(전 안동서부초등학교 교장)>

* 1953년 예천군 감천서부초등학교(후 삼천초등으로 교명 변경) 4회 졸업.

► 1952 감천초등학교 재학시절, 축구경기를 마치고(사진:손재하)

1939년 예천군 감천면 관현동에서 태어났고 호는 유수(流水)다. 1945년 감천국민학교에 입학하던 첫날 생전 처음 검정고무신을 사서 신고(그전에는 짚신, 나막신 등만 신었음) 하교 길에 물을 건너다 한 짝을 잃어버리고 속이 상해서 학교를 그만 두었다. 할아버지에게 10살까지 한문을 배우다가 곧 바로 2학년에 입학하였다. 6.25전쟁이 났을 때 4학년이었다. 9월에 수복이 되어 개학을 했는데 피난을 못 가고 남아있었던 터라 김일성 노래를 익혔었다. 수업을 마치고 청소를 하면서 그 노래 중 김일성 장군을 이승만 박사로 가사만 바꾸어 신나게 불렀는데 피난 갔던 선생님에게 들켜 밤늦도록 벌을 받았다. 담임선생님은 피난을 못 가셨기 때문에 말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 1956년 예천군 감천중학교 2회 졸업.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에 갈 수가 없어 집에 놀고 있었는데 감천중학교(당시는 고등공민학교) 엄대일 교장선생님이 성적이 우수하면 학비 전액을 감면한다고 하여 운이 좋아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2학년 때 중학교로 승격이 되었는데 대구사대부고 교장선생님이 향리 출신이라 한 명을 추천하면 입학을 허가하겠다고 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에 대구 유학은 언감생심. 가난한 사람이 갈 수 있는 학교는 졸업 후 직장이 보장되는 사범학교 뿐. 엄 교장선생님의 권유로 안동사범학교에 입학시험을 쳤다.

* 1959년 안동사범학교 본과 10회 졸업.

► 1958년 안동사범학교 교사 앞에서(사진:손재하)

1956년 2월 입학시험을 치기 위하여 안동으로 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안동으로 유학 간 친한 친구가 있어 그 친구 집에서 이틀간 묵으면서 시험 준비를 하였다. 친구는 사범병설중학교 졸업반이어서 출제의 방향을 소상히 알고 있었는데 그가 내게 묻는 문제에 대하여 나는 거의 답을 못했다. 그랬더니 이런 실력으로 북부지역의 수재들이 다 모인다는 이 학교에 오려느냐는 눈치였다. 어찌 되었든 원서를 내었으니 시험을 치르고 발표가 나거든 연락을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합격자 발표 날짜가 넘었는데도 연락이 없기에 떨어진 줄 알고 예천 대창고등학교에 시험을 쳤다. 한참 뒤 학교로부터 사범학교에 합격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뒤에 사연을 알아보니 그 친구는 내 실력을 아는지라 합격자 명단을 끝에서부터 찾아 내려가다 100번 50번까지 살펴도 이름이 없으니 떨어진 줄 알고 연락하기가 민망하여 연락을 안 했던 것이다.

대창고등학교에도 특대생으로 합격이 되었다며 선생님이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입학을 권유했지만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나는 안동사범학교로 가고 말았다. 이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

2학년 때인가. 신세동 골짜기 영남산 중턱에 안동시내에서는 제일 높은 곳에 할머니 혼자 사는 오두막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친구와 자취를 할 때다. 워낙 높은 곳이라 식수가 제일 귀했다. 집에서 30여 미터 아래 조그만 옹달샘이 그 동네의 식수원이었다. 물이 조금씩 나오기 때문에 한 양동이 받는데 5~10분은 족히 걸렸다. 아침에 밥을 짓기 위하여 옹달샘에 가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줄을 서서 물을 받곤 했는데 우리가 갈 때마다 “학생이 빨리 학교에 가야지” 하면서 자기들이 받아놓은 귀한 물을 퍼담아 주는 것이었다. 참으로 훈훈한 인심이었다. 몇 번을 그러고 나니 염치가 없어서 그 뒤부터는 밤중에 물을 긷곤 하였다.

기말고사나 학년말 시험 같은 중요한 시험 때는 서무과 아저씨들이 교실에 들어와 공납금(당시는 월사금이라 했음)을 내지 못한 사람은 시험을 못 보게 하였다. 나는 공납금을 제 때에 거의 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무과 직원이 오기 전에 재빨리 답안지를 작성하여 감독 선생님께 제출하고는 교실을 빠져 나가곤 했다. 내 뒤에 마음씨 좋은 친구가 있었는데 가끔씩 답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지만 그럴 겨를이 없어 청을 들어주지 못 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친구를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하며 웃곤 한다.

2학년까지 나는 가장 농띠 학생이었다. 지각이 한 학기에 46번이나 기록될 정도로 느지막이 등교하여 첫 시간 수업이 끝나면 바로 도서관 뒷산에 올라가 드러누워 소설책을 읽다가 하교 시간이 되어야 내려오곤 했다.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불러 마룻바닥에 못이 튀어 나오는데 박아 놓으면 튀어나오고 박아놓으면 또 튀어나오는데 어쩌면 되겠느냐고 물으시기에 “빼어버려야지요” 할 정도로 불량학생이었다. 부적응 하는 이유를 물으시기에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대학 진학은 못할 형편이고 공부는 잘 못해도 교사로 발령이 나니까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졸업성적이 우수하면 대도시로 발령이 날 수 있고 거기에 가면 야간 대학도 있으니 진학 할 수도 있다고 일러주셨다.

► 1957 재안예천향우회(안동사범학교, 사진:손재하)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대구시내 발령도 받았고 졸업은 못했지만 청구대학(현 영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참으로 고마운 선생님이셨다. 황병욱 선생님이시다. 30여 년 전 그 선생님이 작고 하셨을 때 하룻밤 꼬박 빈소를 지키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딸 7자매에 아들이 없어 걱정하다 늦게 아들을 낳고 걱정이 없게 되었는데 돌아가셨으니 너무하다고 안타까워했다.

에필로그

개화기의 근대학교 성립의 교육사적 의미를 찾자면 국민교육의 기초를 마련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자주성 확립,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양성,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의 지도자 양성, 교육의 균등 및 민주화에 공헌한 점이다. 안동지역은 특히 구국계몽운동을 위한 학교설립운동이 큰 흐름이었다. 외세 특히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학교설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무력항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움으로써 대중적인 독립운동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한국독립운동사의 시작을 연 역사 깊은 이곳 안동과 예천은 근대교육의 시작이 곧 독립운동과 연계되어 있다. 국가에 의한 형식적인 교육이 있기 전에 지역민에 의한 교육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곳, 바로 안동과 예천의 자발적 교육의지가 지금의 ‘교육도시’라는 이름을 갖추게 한 요소일 것이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마을의 학교가 농어촌 인구감소로 인한 통폐합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학교는 그 지역 마을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마을 잔치를 여는 날이고 학교 행사가 곧 마을의 행사가 다름없었다. 주민들이 자녀에게 바친 교육적 정열은 안동과 예천을 인재배출의 요람지 역할을 하게 하였다. 구한말 개화기에 안동지역에서 설립된 신교육기관들은 모두 지방의 재력가나 문중의 지원으로 설립되어 민족정신을 발휘하는 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남다른 교학정신으로 안동과 예천의 근대 교육을 이끌어온 윗세대의 열정이 신도청시대에도 그 빛을 발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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