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연못에 일그러진 나를 비추어 본다'
근현대 속 유학의 속살을 솔직히 보자
'가을 연못에 일그러진 나를 비추어 본다'
근현대 속 유학의 속살을 솔직히 보자
  • 김희철(성균관청년유도회중앙회 사무부총장)
  • 승인 2016.09.2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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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인 에세이] 김희철 (성균관청년유도회중앙회 사무부총장)
♦ 김희철 (성균관청년유도회중앙회 사무부총장)

나이 오십에 접어들면서 비슷한 나이에 드는 사람들을 만나면 지금까지 살아온 저마다의 인생에 대한 평가와 전망이 화두(話頭)다. 대체로 후회와 비관적인 전망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 나이 오십 지천명(知天命)이란 말이 인생의 반환점을 지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가끔씩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나곤 한다. 할아버지는 가난으로 가족들이 힘들어 하고 그로인해 분란까지 일어나는 걸 고스란히 보고 눈을 감으셨다. 근현대 시기 세상의 변화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유학만 고집하신 할아버지는 유림활동을 하며 해방이후 향리사회를 다시 회복하고자 노력하셨고 한국전쟁 당시 읍면장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아 북한군으로 부터 목숨은 건지셨지만 당시 후유증이 깊어 오랜 기간 풍을 앓으셨다. 신식 교육은 남 등쳐먹는 기술밖에 가르치지 않는다며 자식들 교육을 거부했던 할아버지. 어린 눈에 비친 할아버지는 가난에 가족들을 방치하고 고루한 가르침이나 하신 분으로 남아있다. 당시 재물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그리하지 않았다는 어른들 말씀을 듣고 차라리 그때 재산을 챙겨 놓았더라면 자식들이 고생하며 이렇게 힘들게 살진 않았을 텐데 하며 원망했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가 강조하신 것이 대학(大學) 팔조목(八條目)의 정심(正心)이다. 철들기 전까지 ‘정심’이라는 가훈을 몹시 싫어했다. 나에게 유학이란 비극적 가족사를 있게 한 원흉(元兇),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아이들이 커가고 있는 지금 언제부턴가 먼지 쌓인 가훈을 꺼내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격물(格物)치지(致知), 성의(誠意)정심(正心). 초현실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내용이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할아버지가 그러했듯 나 역시 아이들에게 채근섞인 강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할아버지가 추구하고자 한 삶은 무엇인가.

거침없이 이어지는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를 비추어 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이상과 현실의 괴리(乖離)만을 절감하며 살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현대사회에 발맞추어 보려 애쓰지만 결과는 늘 보잘 것 없고 인간노릇 제대로 하며 살고자 하였으나 지금의 내 모습은 그리 반듯하지 못하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구현하려 했던 유학은 또 어떠한 모습인지, 더 늦기 전에 깨끗한 거울하나 마련하여 우리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설령 그 모습이 많이 일그러져 있을 지라도.

지난 역사 속에 나타난 유학의 공과(功過)를 보면서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의 본질(本質)과 한계(限界)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생의 반을 살아오면서 여전히 가난한 소시민으로 살고 있는 나는 지금 어떠한 모습인지 자문(自問)한다.

최근 현대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우리의 전통과 정신문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유교철학을 공부 하는 것 만큼이나 왜곡되고 변질된 역사와 흔적들을 알아가는 것 또한 중요하리라 본다.

►심산 김창숙선생(1879. 7. 10~ 1962. 5. 10)

일제와 독재에 항거하며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선비의 절의를 보여준 선생의 삶은 민족의 사표가 되었다.

역사를 통해 유학의 속살을 들여다 본다
권력화 된 양반계급은 언제나 반민족 반민주적 행위를 일삼아 왔다

사람들의 눈에는 유학에 대한 생각이 여전히 부정적이다. 추구하는 가치가 현대에 맞지 않다는 이유도 있겠으나 근저(根底)에는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사회에 대한 실망이 깔려있다. 봉건적이고 지나친 신분사회였던 조선은 왕도정치(王道政治) 실현이라는 이상과는 달리 불평등과 관리들의 부패(腐敗)로 끊임없이 문제를 발생시켜 왔다. 어찌하여 가장 인본적(人本的) 철학인 유학이 조선이 무너질 때 까지 이러한 비인간적 권력구조를 용인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당시 양반계급은 주자학(朱子學)을 무기삼아 법제도와 부(富)를 독점하고 윤리규범을 강조하여 하층계급을 철저하게 통제하였으며 그것이 그들의 이상사회라 여겨오지 않았던가.

물론 향리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덕망(德望)있는 선비를 중심으로 조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긍정적 사례들이 많았으나 문제는 그 이념과 체제의 경직성으로 인해 인간존엄이 무시되고 차별이 당연시되는 반작용이 만만치 않았으며, 더욱이 권력화되고 그 권력이 집단화된 폐단이 극에 달할 때는 국가 존망(存亡)이 위태로운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태생이 불우했던 서얼(庶孼)이나 여성, 하층민들은 관직이 원천봉쇄(源泉封鎖)되어 신분 상승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평생토록 처참한 삶을 면치 못했다. 이러한 차별적 요소는 수많은 민란(民亂)의 원인이 되었는데 그 이론적 배경이 바로 유학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를 지적하는 선비들이 많았음에도 지배구조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치유(治癒)할 수 있었던 기회를 이러한 한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임진왜란 시기로 보는 견해들이 많다. 의병을 일으켜 처절하게 싸웠던 선비들과 민초들이 있었던 반면 상당수 양반계급은 노비를 사유재산이라 여겨 국난극복(國難克復)에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서애 류성룡선생이 양반과 노비의 혼성부대인 속오군(束伍軍) 편성을 주장할 때 그들은 무도(無道)한 짓이라 공격했다. 결국 서애선생이 그토록 바라던 재조산하(再造山河)의 꿈은 좌절되었고 후기 조선사회는 더욱 문란해져 갔다.

일제시기에도 수많은 선비들이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 하였으나 부끄러운 황도유림(皇道儒林)의 역사는 고개를 들 수 없게 한다.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작업되어진 가짜유림이지만 이를 제대로 견제해 내지 못한 과오(過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친일파(親日派)를 만드는 과정에서 지난날 지배세력으로 군림(君臨)했던 유림사회에 주목하고 끊임없이 성균관을 와해(瓦解)시키고자 했다. 결국 1911년 조선총독부령으로 성균관을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하고 인적구성을 친일인사로 재편했으며 천황 은사금 25만원과 총독부 보조금으로 운영하게 했다.

지방향교까지 장악한 일제는 1941년 태평양전쟁을 전후하여 유림조직을 친일운동 단체로 앞세우기 시작했다. 총독부의 보조금과 권력이 필요했던 이들은 친일 유림단체를 경쟁적으로 결성하고 나섰다. 조선유교회, 명륜회, 유도연합회 등 이름만 그럴듯한 가짜유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유학 이념을 친일 논리로 왜곡하는데 사용했다.

►친일화가 이유태가 그린 퇴계선생 표준영정. 천원짜리 화폐에도 사용되는 이 영정은 이유태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는 의혹까지 사고있다.

왜곡된 유학은 유학이 아니다
유학이념을 친일논리로 왜곡한 황도유림의 그 부끄러운 역사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하는 것은 여기에 앞장선 사람들이 조선시대 지배세력과 관료(官僚), 매국노(賣國奴) 집단뿐만 아니라, 일본인 손에 무참히 살해당한 명성황후의 친정일가나 순종의 왕비일가, 흥선대원군 손자들, 그리고 부패한 조선을 바로세우고자 했던 연암 박지원의 손자들까지 가세(加勢)했다는 사실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들은 ‘누군들 섬기면 임금이 아닌가 백성을 위하면 그만’이라며 ‘독립운동은 일한(日韓) 병합(倂合)의 정신을 배반하니 경거망동(輕擧妄動) 하지말라’고 주장했다. 또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일본의 과업(課業)에 충군애국(忠君愛國)해야 한다며 유학의 충효사상을 이용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은 한민족이니 애국 대열에 나서라고 선동하고 나섰다.

역사학자 이이화선생에 따르면 안동유림들은 애국비행기 헌납운동을 벌여 570원을 모금해 바쳤고 경주유림은 국방비를, 진도유림은 고사포 헌납금 2,000원을, 장연의 유림들은 2,000원, 울진유림은 7,000원을 모금해 바치는 등 충성경쟁에 앞장섰으며 신사참배를 거행하고 일장기 앞에서 기미가요를 합창했다는 것이다.

문학 예술계를 비롯한 조선 전체가 독립에 대해 절망하고 친일 대열에 휩쓸릴 때도 대의를 위해 흔들리지 않고 기꺼이 몸 바친 분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분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반민족 행위를 절대 합리화 할 수 없다.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동산 류인식, 일송 김동삼 등 안동의 많은 혁신유림들의 활동은 당시 유림사회에 큰 반향(反響)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초기 의병과 척사운동(斥邪運動)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이고 혁신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민족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시급하다고 판단.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한다. 보수유림의 반대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91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될 때 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안동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데는 혁신유림의 선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이는 다른 유림사회에 본보기가 되었다.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선생의 행보 또한 무엇이 유학의 본질이고 의(義)를 실천하는 것인지 그 경계를 분명히 하는 기준(基準)이 되었다. 선생은 황도유학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성균관을 정비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유도회총본부를 결성하면서 황도파, 친일파 청산에 나섰다. 그러나 친일파를 등에 업은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무산되고 이승만의 지원을 받은 황도유학파들이 성균관을 다시 장악하면서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도 위상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채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친일파 청산과 역사 바로세우기를 막고 나선 이승만 정권과 그들의 논리는 궤변(詭辯)에 가깝다. 친일파를 처벌하면 민족분열이 일어나고 친일인사라 하더라도 정부수립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며 국민총화를 해친다는 논리를 내세워 오히려 민족진영과 독립운동가들을 정치음해 세력으로 몰아 탄압하기에 이른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남아있는 흥아유신기념탑(興亞維新記念塔).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찬양하고 있다.

우리의 좌표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아직도 안동향교 뜰에는 총독부에서 세운 표지석이 있고
친일화가가 그린 퇴계 이황선생의 초상화를 사용하고 있다

지난 유학의 왜곡된 족적(足跡)을 보면 나를 보는 듯 부끄러워진다. 끊임없이 현실의 유혹과 타협하고 작은 이득(利得) 앞에 나약하며 입으로는 자신의 과오를 덮고 치적(治績)을 포장하여 과시(誇示)하려는 모습으로 일관하지 않았던가.

지금이라도 자신을 정확히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 본질과 왜곡, 진실과 거짓을 가릴 줄 아는 눈. 무엇이 정의고 역사의 진실인가, 무엇이 유학의 본질이고 왜곡인가. 이러한 물음 앞에 우리는 이제라도 현재의 좌표(座標)를 다시 확인하고 기준을 삼을 사표(師表)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친일 유학파들이 설쳐대는 순간에도 이땅의 많은 선비들은 신사참배나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抗拒)하였다. 고통이 따를 줄 잘 알면서도 정의와 이웃을 위해 선비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분들을 우리는 지사(志士), 의사(義士)라 부르고 사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성찰(省察)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지나온 지금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아직 우리 주위에는 씻겨지지 않은 상흔(傷痕)들이 많이 남아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은행 앞에는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쓴 ‘정초석(머릿돌)’이 남아있고 서울역과 서울시립미술관에도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이 쓴 글씨로 제작한 정초석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 연세대 교정 안에는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내용의 ‘흥아유신기념탑(興亞維新記念塔)’이 아직 그대로 서 있으며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총독이 쓴 ‘선통물(善通物)’이라는 표지석이 지금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와 친일파들의 신민화 정책에 따라 무수히 세워졌던 기념비나 표지석들이 해방이후 일부 철거되긴 했으나 아직 전국 곳곳에 많이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이 해방후에도 주요 관공서를 그대로 장악하고 있었음을 볼때 철거할 이유를 못느꼈거나 의도적으로 보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안동향교 뜰에는 아직도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표지석이 남아있다.

안동도 예외는 아니다. 안동향교 뜰에는 지금도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표지석(標識石)이 남아있고 친일화가가 그린 퇴계 이황선생의 영정(影幀)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아픈 역사도 역사이니 남겨두어야 한다는 시각이 있을 수는 있으나 중요한 것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바라보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다. 묵은 때를 씻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부끄러운 흔적을 낙엽으로 덮어 버리려는 우리의 모습, 이것이 지금 우리의 자화상(自畵像)이 아닐까.

현재 위치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통렬한 반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곡과 거짓을 가릴 줄 아는 눈은 본질과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이를 실천할 때만 주어질 수 있다. 이(利)를 보면 의(義)로운지 먼저 생각하고 현실이 가혹 하더라도 옳은 길이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꿋꿋하게 가는 자세. 우리의 사표가 되는 분들은 이처럼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항상 느끼면서도 오로지 가야할 길을 갔던 사람들이다.

이상과 현실의 오차(誤差)를 실감하며 감히 제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공자의 지천명은 하늘이 부여한 운명(運命)을 알아챘다는 뜻이 아니다.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줄 알면서도 그 길이 바르다면 본분을 지키며 끝까지 가야한다는 것을 나이 오십에 알았다는 것이 바로 공자의 지천명이라는 어느 유학자의 해석에 나는 공감(共感)한다.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항심(恒心)을 갖고 도리(道理)를 다하는 자세. 그 길을 생각해보면 사표가 되는 우리의 선현들과 그동안 원망했던 할아버지가 그토록 고집스럽게 가고자 했던 그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앞서는 나로서는 비루한 처지이지만 지금이라도 늦가을 물결 한 점 일지 않는 연못 앞에서 석양(夕陽)에 비친 일그러진 나를 비추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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