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치하는 시민이다'
'우리는 정치하는 시민이다'
  • 허승규(녹색당 전국사무처)
  • 승인 2017.01.1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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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20세기 사회과학의 지성,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두 번의 강연문을 출판한 직후 급사한다. 1917년 11월에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1919년 1월에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대학생을 상대로 한 강연문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도 드물거니와 30년에 걸친 그의 사회과학적 탐구가 농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진보적 학생단체 '자유학생연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위기상황에서 시대의 지성으로부터 현실적인 해답을 원하였지만, 베버는 강연의 상당부분을 근대적 정치현상의 사회학적 속성과 역사적 전개과정을 풀어냈다. 우리가 특정 지배체제를 정당하다고 간주하고 복종하는 권위의 원천(전통적, 카리스마적, 합법적·관료적 유형)은 무엇인지, 현대의 대의민주주의 조건에서 ‘정치’를 직업, 소명으로 삼으려는 이들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며, 정치적 지도자의 윤리는 무엇인가가 강연의 중심 화두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속성에 비추어 정치가 다른 영역과 구별되는 점은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이다. 전근대에선 사적인 영역에서 물리적 강제력을 일상적 수단으로 사용했지만 근대에선 국가가 그것을 독점한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가정에서 교육적 목적으로 체벌을 하더라도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재벌이라고 해서 조선 초기와 같은 사병을 둘 수는 없다. 이러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은 정치권력과 다른 권력을 구별 짓는 점이며, ‘정치가’는 기본적으로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물리적 강제력을 다루게 되는 정치가는 특별한 자질을 요구받게 되며, 이는 국가공동체, 인류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정치가의 자질로는 열정, 책임감, 균형 감각이 있다. 대의에 대한 헌신은 열정으로 나타나며, 열정의 수단이 지닌 위험 때문에 책임감이 없으면 열정은 지극히 파괴적일 수 있다. 책임의식을 키우기 위해선 내적 집중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정치적 행위에 담긴 비극성의 뿌리는 정치와 윤리의 특수한 관계에서 비롯된다. 정치의 속성상 의도와 결과의 괴리는 악마적 파급효과를 낳을 수 있다. 신념윤리는 자신의 신념의 실현으로 인한 결과보다는 신념의 실현 자체를 중시한다. 책임윤리는 인간들의 평균적 결함들을 고려하여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한다. 정치가는 분명 자신이 지향하는 신념윤리가 있어야 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책임윤리가 보완되어야 정치적 소명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정치가를 지망하거나,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시민들이 곱씹어서 읽게 되는 정치학 고전이다. 한국 시민들의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은 민주화 이후부터 지금껏 여전한 과제이다. 그럼에도, 정치인을 물갈이(물은 그대로 두고, 인적교체에 그치는 고기갈이에 가깝다)하는 수준의 단기적이고, 일시적인 변화는 있었으나, 시민적 요구에 부응하는 근본적인 시스템과 사회문화적 변화가 이루어졌는지는 회의적이다. 정치행위가 지니는 속성을 인식하고, 정치를 하고자 하는 이들을 훈련시키고, 시민들의 정치교육을 확산하는 토양을 만들어가는 정치개혁이 있어왔는가? 입시교육과 취업교육에 매몰된 공교육에서 정치교육의 토대는 취약하며, 허약한 정당시스템은 ‘악마와 손을 잡아야 하는’ 책임 있는 정치적 인력을 충원하는데 불충분하다. 시민사회 운동은 정치의 권력적 속성을 외면하거나, 운동의 논리에 치중하였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민주화 이후의 정치적 토양을 만드는 길은 단기적인 한 판 승부가 아닌 것이다. 베버의 책을 읽다보면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민들은 정치의 변화를 갈망한다. 그렇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고민하고 한 걸음씩 내딛어 온 역사가 지금을 만들었다. 현실의 어려움을 바로 보는 것은 냉소와 절망을 넘어 변화와 가능성을 찾아가는 적극적 실천이자 도전인 것이다. 지난 30년의 성과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은(선거부정 논의는 여기서 제외한다) 대통령의 몰락 앞에서 지금의 한국 정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

수많은 이들이 지금의 정치시스템에서 배제되어 있다. 가임기 지도의 대상으로 취급받는 여성들, 투표권이 없는 청소년, 조직화되지 않은 노동자, 지방의 청년들, 농민, 집이 없는 사람들, 빈곤한 노인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탈북 주민들, 그리고 정치혐오로 자발적 배제를 선택한 수많은 시민들과 사표 방지를 위해, 지역 일당 독점 구조가 싫어서 최선이 아닌 차악을 투표한 많은 시민들까지. 투표를 통해 '누군가를 뽑는 것', '누군가를 심판하는 것' 이상을 상상하자. 우리의 언어로 정치를 이야기하자. 그렇게 하지 못 하게 하는 시스템을 바꾸자. 냄비 근성을 넘어 정당정치의 발전, 내 표가 좀 더 반영되는 선거제도 개혁, 기득권 구조를 강화하는 각종 선거법 개정, 청소년 시민권 보장과 같은 정치시스템의 혁신과 정치교육을 포함한 정치문화의 변화를 만들어가자. 이는 정치적 리더십의 축적으로 이어지며, 특정 개인뿐만 아닌 '정치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등장을 가능케한다. 박근혜 탄핵을 맞아 베버의 책이 주는 화두를 생각한다. 인간의 한계와 권력의 속성을 숙고한 좀 더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변화를 바란다. 민주화 30년, 다시 정치를 발견하자. 우리는 '정치하는 시민'이다.

*참고문헌 ‘직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나남,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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