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토박이의 삶, 도산면 가송리 농부 권기원
'소나무집 황토방에 사이께네 아프지않고 오래산다'
안동토박이의 삶, 도산면 가송리 농부 권기원
'소나무집 황토방에 사이께네 아프지않고 오래산다'
  • 백소애(경북기록문화연구원 운영위원)
  • 승인 2017.05.08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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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1)

2017 안동근대기행은 생활, 문화, 인물, 사회분야에 걸쳐 우리의 풍속과 지역사를 다루고자 합니다. 예사사람들의 삶을 통해 지역의 발전과 변화를 다루고 수몰민의 아픔과 역사를 통해 근대안동의 감춰진 내밀한 사연을 엮어내고, 우리의 혼례와 상례를 아우르고 잊혀져가는 공간과 장소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 내고자 합니다. 또한, 전통가업을 잇고 농요로 노동의 아픔을 잊은 민중의 이야기와 잘알려지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의 숨은 사연,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흥동 기차역의 모습과 아련한 학창시절의 향수를 함께 그려낼 예정입니다. 이러한 기억의 반추로 우리는 안동인의 삶에 천착하는 근대기행을 지금, 떠나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가송리 토박이 권기원

안동산수(山水)의 압권, 가송으로 간다. 한때는 40여 호가 살았던 이곳에 현재는 여자 14명, 남자 7명 딱 21명이 산다. 윷놀이를 해도 한 명이 깍두기를 해야 한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노인들만 남았으니 나이 일흔은 노인 축에도 못 낀다. 요즘 나이 일흔은 환갑으로 친다는데, 참깨 심는다고 밭에 비닐을 덮는 그의 구리빛 건강한 얼굴이 딱 그러하다.

“장기예보 들으이 내일이랑 모레가 아직 최저 기온이 2도라서 고추는 한 며칠 있다 심어야 될씨더.”

평생 고향인 가송 아닌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농부 권기원. 아버지 권오영과 어머니 송재술의 무녀독남,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났다. 임동 위동에서 시집 온 어머니는 6.25때 남편을 잃었다. 전쟁통에 행방불명 된 것이다. 권기원 씨가 세살 때 일이다. 유복자나 다름없다.

“일정 때 도산공립국민학교 댕겼으니 요새로 치면 면장도 했을 거래요.”

똑똑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병인생(1926년)이었으니 살아계셨다면 올해로 93세가 된다. 얼굴도 기억 못하는 아버지의 학교 졸업장을 그는 아직도 서랍장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 아버지 권오영 씨의 도산공립국민학교 졸업장

일제강점기의 졸업장에는 ‘소화(昭和, 쇼와)17년’(1942년)이라 표기되어 있다.

 ►보통학교 교본

담배조리 엮다 눈 맞은 안동남자 예천여자

가송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권기원 씨, 네 명이 단출하게 살았다. 그러다 안영옥 씨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식구는 다섯 명, 그리고 애들이 하나둘 태어나면서 점점 늘어났다. 영옥 씨는 예천군 하리면 월감(月甘)마을에서 시집왔다. 지금은 마을이 없어져 보가 생기고 예천양수발전소로 변한 그곳 말이다.

►1974년 결혼식 사진. 왼쪽이 할아버지 오른쪽이 장인어른 되신다.
►예천 신부집에서 치러진 전통혼례

“그때 속아부랬지. 조금 더 참았으면 더 좋은데 장가 들 수 있었는데.”

난데없는 한탄에 안영옥 씨가 그저 웃는다. 당시만 해도 가송에서 최고 좋은 집에 살았다는 권기원 씨. 것도 그럴 것이 1958년 신축한 5칸 목재집은 동네에서 가장 넓고 큰 방을 보유한데다 상수도를 끌어다 부엌에 수도까지 있었던 집이다. 당시 동네에서 윷놀이를 하게 되면 꼭 이 집에서 모이곤 했었다. 거기다가 배곯고 보리밥 먹던 시절에도 쌀밥을 먹었으니 중매 설려는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한다.

►1958년에 신축한 현재의 집. 당시 가송에서 제일 좋은 5칸 집이었다. 입구에 비닐하우스 있는 곳이 권기원 씨가 태어난 집터다.

“옛날 보따리장수들이 옷 팔러 동네마다 댕겼는데 딸이 간호사 한다고 중신 서고 난리도 아니랬어요. 그래도 예안신씨면 지금도 뭐 알아주잖아.”

결정적으로 안 이어진 이유는 상대 여자가 말띠라서란다.

“우리 상할매가 말띠랬는데 고집이 시거든. 그래서 반대했지.”

인연은 따로 있었건만 뒤늦게 권기원 씨 또 기어코 한마디 거들고야 만다.

“늦게 들어보이 백말띠만 올찮지 딴 말띠는 괜찮다 카던데 말이지.”

옛날 사람들은 일거리 없는 겨울에도 놀지 않고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판잣집 하꼬방에서 잠을 자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던 시절이었다. 담배농사로 유명한 이곳 가송에는 여름에 쪄서 창고에 쌓아두고 겨울에 하나하나 정리하는 ‘담배조리’일을 멀리서 원정을 오기도 했다. 저장한 잎담배를 색상, 크기, 품위 등 품질에 따라 구분하는 그 일은 동리 사람들은 물론이고 타지 사람들까지 긴긴 겨울밤을 보내는 소일거리였다.

그러니까 예천 하리에서 스무 명의 처녀들이 우르르 같이 조를 짜서 보름에서 20일 정도 일을 하러 이곳 가송 권기윤 씨 집으로 온 것이다. 기나긴 겨울밤 20대 초반 처녀들이 일하다보면 더러는 정분도 나고 그럴 것인데, 그 많은 아가씨들 중에 그의 눈에 들어온 짙은 눈썹의 예쁜 아가씨가 바로 순흥안씨 영옥 씨였다.

“레이저를 콱 쏴뿌니 넘어오대.”

신랑 나이 스물일곱, 신부 나이 스물넷에 그렇게 둘은 혼례를 치르게 된다.

►처녀 적의 안영옥 씨. 뒤로는 예천 하리 월감마을 정경이 보인다.

사실, 서울 송파구에 시집 가 살던 영옥 씨의 언니는 촌으로 시집가지 말라고 했다. 친정어머니가 나이 마흔에 늦둥이로 낳은 막내 동생이 고생하지 말고 살길 바랬던 것이다. 언니는 당시 텔레비전에 자동차에 카메라에 전화까지 있는 부자였다. 일찍이 서울구경도 하고 세련됐던 영옥 씨는 남편의 ‘간택’너스레에도 여유 있는 웃음을 계속 띠었다.

►서울 사는 언니와 함께 한 영옥 씨(왼쪽). 뒤쪽으로 포니 자동차가 보인다.

보름달이 휘영청, 40년 묵은 자개농이 있는 방

결혼 당시만 해도 전기가 안 들어와 호롱불을 썼는데 둘의 신방만큼은 보름달이 뜰 때면 형광등을 킨 것처럼 아주 환했다고 한다. 집 가장 안쪽에 아늑하게 자리한 신방은 큰 애가 나면 할매 방으로 보내고 둘째가 나면 또 할매 방으로 건너보내고 딱 둘이 누워있기 맞춤한 그들의 보금자리였다. 그렇게 슬하에 첫째 아들 세종(43), 둘째 수은(41), 셋째 은조(39), 막내 은미(37)까지 1남 3녀를 두었다.

뜯어서 벽 치고 한 칸짜리 방으로 막상 만들라 그러니 방 애호가들이 너무 많다고. 자기들끼리 놀고 싶은 손자 손녀도, 쉬고 싶은 며느리도, 모두들 서로 들어가려고 경쟁이 치열한 방이란다. 안쪽에 짱 박혀 있는 방이라 명절이면 너도 나도 먼저 차지하려고 한다고.

►부부가 신혼생활을 시작한 방

 

►혼수로 해온 자개농이 40년 넘게 방안을 지키고 있다

병역은 면제지만 논산 구경이나 해보자

스물셋에 입영영장을 받았다. 신체는 1급 갑종인데 부존재독자라서, 아버지가 안계시니 병역이 면제된 것이다. 면 경사계에서는 일단 안가도 된다고 했는데 일단 안동중앙국민학교(현 안동초)로 집결했다. 그곳에서 논산으로 출발을 한다.

그런데 거기서도 불러내더란다. 촌에서 자라 구경도 뜨문뜨문했고 안동 안에도 뭐가 있는 줄 몰랐는데 이참에 그놈의 논산 구경이나 함 해보자 싶어 사람들 속에 계속 있었다고 한다.

“2열중대로 출발하는데 찡게 있으니 또 빼내. 그래갖고 어예어예 대구에 가부랬지. 대구 동촌 비행장에. 내가 그때 뭐 미국놈 구경이나 해봤나, 머리 노랗게 뭐 쏼라쏼라 그러는데 말이나 통하나 한국 사람하고 둘이 정문 지키대. 여 뭐하러 들어오나길래 비행기 구경하러 간다 그랬지.”

민간인은 못 들어간다고 막아서니 그냥 멀리서 비행기 뜨고 내리는 걸 실컷 구경하다 왔다고 한다. 군에 간다니 주머니에 돈은 몇푼 있고, 여인숙에서 하룻밤 자고 돌아다니다가 2군 사령부, 요즘으로 치면 헌병대에 또 슬금슬금 들어가 구경하려다 입구에서 저지당하고 평생 농사짓고 안동을 벗어나지 않은 촌놈이 대구 구경 실컷 하고 왔다며 껄껄 웃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부지 같았는데 고추농사, 콩농사, 담배농사에 청춘을 다 바쳤으니 그 정도 일탈은 애교라면 애교다.

 ►스물넷의 권기원 씨

대처에 나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지

지금도 고문서들과 아버지의 옛 서적들이 비닐에 묶여 책꽂이에 있다. 어릴 때 한문선생한테 한학공부를 잠깐 배우기도 했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도 공부한다고 몇 권 챙겨갈 정도로 고문서가 많았었다. 동몽선습에 논어랑 소학은 구경하다가 말았고 명심보감도 몇 번 읽다가 말았다. 머리 아프고 취미에도 안 맞아 그만두었다고 한다.

8~10킬로 거리의 도산국민학교는 지각해도 학교에는 오전에 들어오기만 해도 됐을 정도였다. 버스가 들어오기 전이라 산길로 다니던 시절이다. 당시 한반에 63명이 공부했던 걸로 기억한다.

►“고향 지키며 농사짓고 사는 게 효도였지요.”
►언제 씨 뿌리고 언제 약 치는지 농사일에 서툴던 시절에 적어놓은 메모장

한참 혈기왕성하던 시절 밖으로 나가는 걸 꿈꿔본 적이 없었냐고 묻자 그는 딱 잘라 말한다.

“꿈꿔봐야 머리만 아프지. 실현될 일이 만고에 없지. 나가면 죽는 줄 알았지, 죽을 거 같았지 뭐.”

초등학교 나와서 소 먹이고 남의 집살이 2-3년만 살았어도 어쩌면 여기 안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일찍 나갔으면 고향에서 안 살았겠지만 당시만 해도 나갈 줄을 몰랐다고 한다.

어머니 혼자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 어른들이 층층 있으니 나갈 형편도 못됐다.

“자슥 낳고 식전에 풀 베고 안 굶고 안전하게 사는 거 그게 효자랬어.”

공부해서 학교 선생 되고 면서기 되고 그런 게 아니고 그저 밥 안굶고 성실히 농사일 하는 게 효도였다는 거다.

아버지가 전쟁통에 그렇게 되신 후 어른들은 그가 대처로 안 나가게 더 단속을 했을 터이다. 또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도 눈앞에서 실감했던 터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가송마을 당나무. 이곳 공터에서 김신조 사건 때 1개 중대가 한뎃잠을 잤다고 한다.

“1968년 김신조 사건 때 일월산에서 김신조 나왔다 해서 여 동네가 번쩍번쩍 했는데, 밤중에 불이 막 벌벌 그랬는데- 1개 중대가 요기 당나무 공터에서 잤잖아.”

►가송마을 산신각

아, 어머니

온가족 다 모이면 식구는 모두 열아홉이다. 한꺼번에 다 모이기 힘든 숫자다.

어린이날에 모이면 두 집씩 나눠 와야 한다고. 아들은 구미, 딸 셋은 모두 대전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 같은 촌사람들은 입구에서부터 비밀번호 눌러라 뭐 하라는 것도 많아. 우리매이들은 큰도시 못살아.”

넷 모두 학교 보내느라 고생이었다. 더구나 다들 두 살 터울에다 휴학 한번 재수 한번 안하고 똑바로 그대로 다 보냈으니, 식겁을 먹었다고 한다.

등록금 다 내고는 못 다녔고 그래도 장학금 받고 학교 다녀줘서 고마웠다고 한다. 대학 때는 대전에서 보증금 400만원에 월 30만원주고 자취시켰고 안동서 고등학교 시킬 때는 법상동에서 자취시켰는데 그땐 20만원에 연탄보일러집에서 자취를 시켰다

“그때 어머니가 가서 밥해주고 했으이, 애들이 좀 수월했지.”

여느 자취집 아이들과 비슷하게 고등학교 때까지는 아이들 할머니가 밥을 해줬다.

“다들 그래요 보통 밥 다해주고 촌에 들어오면 몇 해 지내다가들 다들 돌아가셔.”

손자손녀 밥해주러 시내 나갔던 할머니들이 아이들 크고 이제야 들어와서 좀 편하게 지내려고 하면 몇 해 안 있다가 돌아가시는 일이 많았다. 기원 씨의 어머니도 시내서 애들 밥해주고 들어와서 한 3년 있다 돌아가셨다 한다. 아이들은 자라고 어머니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임동 위동이 고향인 어머니 송재술

농사짓는 요량하면 애들 밥치다꺼리가 더 편킨 편했을 거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한다. 큰 아들 세종 씨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원 씨의 할머니가 76세로 먼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5년 후 돌아가셨다하니 상할머니가 있는 집에서 4대가 복작이면서 살았다.

일찍이 혼자 된 어머니는 송씨들이 소복이 사는 임동 위동에서 시집을 왔다.

“어매가 은진송씬데 울 며느리도 은진송씨래. 며늘 안사돈은 또 권가고.”

특별한 인연인 것 같다고 말하는 기원 씨. 며느리는 지리산 끄트머리 꿀벌 많은 산청이 고향인데 아들이랑 구미서 만나 연애해 결혼했다.

영옥 씨는 5남매 중 늦둥이 막내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올해로 백수를 넘긴 106세라고 한다. 예천 고향은 물에 잠겼고 어른들은 다들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프다.

돈 될 건 없지만 고추농사 댓마지기와 나락, 콩 댓마지기, 깨농사 지으면서 사는 부부.

 ►약혼 사진 속의 어머니(왼쪽)와 장모님(오른쪽)
►1974년 도산서원에서

심심할 틈이 있나, 할 일이 지천인데

마당에는 십년 묵은 땔감이 가득하다. 시간나면 얹어놓고 또 지나다가 나무 해다가 얹어놓은 권기원 씨 덕이다. 그래서 올 겨울에는 묵은 나무 때고 새로 하자고 마나님이 미리 얘기를 해둔 터이다.

“저거 한 줄만 때면 겨울 나는 걸 뭐.”

십년 묵은 나무부터 차례로 땔 참이다. 벽을 틀까 고민했던 그들의 신방도 그대로 두고 그저 앞으로도 평생보금자리로 쓸란다.

“둘이 자기에는 희한하지? 요새 커다란 방에서 자면 할마이 어디서 자는지 찾을 수 있나? 저래 조그만 데서 둘이 꼭 붙어 자야지.”

문지방 문지방 넘어 5칸 커다란 집이 이제는 골방이 됐다. 스물넷 스물일곱 처녀 총각이 어느덧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500년 넘은 당나무가 지키는 아름다운 마을에서 묵은 나무 땔깜으로 겨울나기를 기다리는 부부는 오늘도 보름달 휘영청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성실한 하루를 풀었다 묶었다를 반복하고 있으리라.

 

<토박이의 삶2>

                                 “고치 할바이 됐다가, 서숙 할바이 됐다가”

                                            대사리 한밤들 농부 권기창

길안면 대사리 토박이 권기창

길안면 대사리 토일. 작은 하회마을 같이 물이 도는 이 물 좋고 공기 좋은 한밤들에 안동권씨 웃대 6대손 할배가 터를 잡았다. 아침해가 마을 뒷산에서 토하는 것 같다고 하여 토일(吐日)이라 부르는 이 마을은 안동권씨가 세거하고 있다. 올해 일흔여섯의 권기창 씨는 중학교를 잠깐 부산에서 다닌 것을 빼면 줄곧 이곳 토일마을에서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재 넘어 새재에서 기와공장을 운영했다. 아버지가 장사를 한다고 부산에 왔다갔다하여 그곳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됐다. 길안 송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보수동 부근 영주동에 위치한 덕원중학교(1953년 개교)를 다녔다. 학교를 다니다가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세상이 시끄러우니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중학교 학업을 마치고 그는 당시 여느 시골 아이들처럼 농사를 짓고 지내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와공장을 도와 초판 뜨고 일 시키는 것 적고 품값 치르는 일도 맡게 된다.

기와공장 터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다 묵은 과수원이 되어 있다.

►총각시절 나무하러 가던 길

된장 한 단지, 나락 몇 가마니

여덟살 때 6.25가 터졌다. 오지마을은 인민군들로 꽉 들어찼다. 마을주민들이 잘 데가 없을 정도였다.

“빨갱이들이 우리 집에도 와서 정지, 마루 심지어 마구에까지 꽉 찼었지.”

인민군이 한 열흘 머물다 간 당시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후퇴 막바지 무렵이었다. 인천이 막아지자 산 골골이 숨어 있던 인민군들이 못 올라가고 보급마저 딱 막혀버린 것이다. 동네로 들어와서 농사지은 거 싹 다 먹고 누울 수 있는 곳, 몸이 들어가는 곳에는 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마을사람들도 모두 살얼음판 걷듯 조심조심했을 턴데, 암 것도 모르던 8살 꼬맹이는 뭐가 뭔지도 무서운 것도 몰랐다고 한다.

“큰방에서 내가 인민군들이랑 섞여서 같이 잤거든. 근데 그놈들이 얼라니껜 귀타고 내 불알을 만졌어. 그래 가지고 막 울고불고 난리를 치니까, 상방에 자던 높은 계급자가 ‘저 방에 아가 왜 저리 우냐’물어 자초지종을 말하니 ‘이 방으로 보내라’ 그래서 그 상방에서 자게 됐지.”

사람들 득시글하는 곳에서 다리도 떠걸고 불편하게 자다가 이후 넓은 곳에서 편하게 잤다. 마구에서도 자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래도 9월 중순이라 밤으로는 조금 추울 때였다.

“그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자고 식량이고 뭐고 몽땅 다 떨어먹고 가는데 글쎄 갈 적에 그걸 전부 다 적대. 된장 한 단지, 나락 몇 가마니…….”

당시 경상북도만 남았더랬는데 통일이 되면 다 갚아준다, 그런 꿈을 안고 북으로 갔다는 것이다.

“아마도 올라가면서 다 죽었겠지.”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된장 한 단지 갚겠다고 그걸 적어갔다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 현대사의 슬픔을 보여준다.

►첫째와 둘째 아들

아들 삼형제 키우기

길안에서 아들 삼형제를 학교 보낼 때는 벽지학교라 공납금도 없었는데 맏이가 길안중학교 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갈 입장이 되니 가는 김에 다 같이 안동시내로 자취를 내보내게 되었다. 그때 보낼 적에만 해도 더 잘 시켜보려고 보냈는데 학비며 방값이며 공납금이며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당시에는 형편이 필 줄을 몰랐다.

►돌전에 걸으며 닭모이도 주곤 했던 막내아들

고추 따고, 담배가 돈 된다고 해서 담배도 하고, 수박도 하고 무, 배추도 하고, 배추가 안 팔리니 급한 마음에 울산에 채소 파는 시장에 갔는데 운임도 안 나온 적도 있다. 돈 빌려서 메밀도 해보고 오죽 했으면 ‘고치 할바이, 서숙 할바이’라 불렀을까.

한번은 막내가 “엄마 엄마 우리 토지 다 팔아뿌라.”했다.

토지가 없어야 공납금이라도 면제해준다는 거다.

“3천평 알로는 공납금이 면제니까, 우리 막내가 그렇게 말을 해”

어지중간하게 사니 세금은 세금대로, 땅은 있는데 돈은 안 되고, 농사는 농사대로 세가 빠지게 하는데 수중에 돈은 없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도 토지는 붙들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버텨왔는데 요즘 생각하면 잘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맏이 준구(46)씨한테 농사를 다 넘겨주고 텃밭 소일거리하며 지내는 부부다. 둘째 준기(44) 셋째 준태(42) 씨 모두 경기도에서 대기업에 다니며 지 요량 하면서 살아가니 이제 부부는 건강 관리 잘하며 지내는 것만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또 맘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제는 또 맏이가 농사를 지으니 한편으론 든든하면서도 농작물이 앞으로 어예 될라는 동 또 그 걱정이 앞선다.

고추는 한 500폭, 깨 좀 하고, 땅콩 좀 하고, 들깨하고 고구마 하고...먹을 것만 하고. 농사 지으면서 쌀 받아먹기 그렇다고 논농사에 나락까지. 사과농사는 큰아들한테 넘기고 텃밭 정도 한다더니 누가 농사꾼 부부 아니랄까봐.

1988년 고추파동 때는 부부도 데모하러 다니곤 했다.

“대구도 가고 서울도 가고...농민회 데모할 때 우리도 같이 갔어. 뒤에 가서 그렁지(그늘)라도 지어줘야지. 지금 만약에 여기 동에 동장이 나서는데 동민들이 한나도 안도와주면 동장이 싱겁잖아. 우리 간다꼬 안될게 되나만은 그렁지라도 지어주는 거야.”

 ►열아홉 처녀적의 태연 씨(왼쪽). 재종질녀하고 의성 춘산 장터 솔밭에서

소도 흥정하고 혼사도 흥정하고

둘은 1971년 결혼했다. 중매는 작은 아버지하고 장인, 둘이 얘기가 돼서 성사가 되었다. 30리 길인 청송 현서 화목 우시장에서 권기창 씨의 작은 아버지는 소를 사러, 장인은 소를 팔러 오면서 인연은 시작된다. 작은 아버지가 소를 사겠다고 하니 그럼 우시장서 사고팔면 구전 즉 수수료 떼줘야 하니. 작은 아버지 왈 “그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가서 직접 흥정하자”이렇게 얘기가 됐다. 그래서 소를 몰고 집으로 와서 둘이서 거래를 하게 된다. 당시엔 우전 주위에 산적도 많았던 터, 장인이 소 판 돈을 밤길에 들고갈 수가 없으니 하룻밤을 작은 아버지 집에서 묵으면서 방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게 된다.

서로 간에 나이 찬 조카와 딸이 있음에 선 보러 의성 춘산에 가보라 해서 그 길로 권기창 씨는 선을 보고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1971년 혼례 사진

당시 결혼한 나이 치고 꽉 찬 서른에 한 그는 애초에 장가갈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옆에서 듣던 평생지기 박태연(68) 씨가 한마디 거든다.

“내가 이야길 바로하지. 우리 아주바님이 옛날에 동장 했으니 동무 본다고 맨날 바쁘게 댕기니 동생은 결혼이 늦어졌지. 어른들도 있고 동생들도 있고 농사일 하다보니, 조카 질녀 9남매에 동생 있고 식구가 많아 놓으니 결혼할 마음도 없고 그랬던 모양이야. 그때 동장은 돈 쓰면서 당겼어. 길안까지 차가 있나 걸어댕기고, 내가 시집 오니까 지금 농협유통센터에 있는 우리 맏조카가 중학교 2학년이고 그 밑에 조카가 지금 안동시청에 근무하는 권석순이라고 있어, 거가 연년생으로 중학교1학년 다녔어. 의성서 중학교 다니고 안동서 고등학교 다니면서 전부 성실하게 잘 컸지.”

►1960년초 무렵 의성춘산국민학교에서 운동회 때.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박태연 씨.

그렇게 결혼하면서 지금 집으로 분가를 했다. 네칸 접집으로 옛날에 제법 괜찮게 살던 큰집 은 지금도 여전히 식구가 복작복작, 추석이나 설 명절이면 50명은 넘기 여사라고 한다.

“설날 세뱃돈도 한창 나갈 적에는 50만원 넣어 갖고는 계산도 안 나와. 애들 저그가 주는 돈도 물론이거니와 내 생돈도 어디로 나가부고 없고 어떨 때 보면 식당집 같애.”

며칠 전에는 재종 남매계를 길안 천지식당서 하는데 다 안와도 60명이 모였다니 말 다 했다.

“큰 질부가 애를 많이 먹지. 그러이 같이 도와서 해야지.”

명절 추석에는 나물 한 대야 무치고 묵은 몇 통 쑤고, 냉장고는 언제나 열렸다 닫혔다 잠깐 돌아보면 다 뒤져서 먹고 없고, 뻑하면 유리창도 깨먹고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살아왔다.

►1982년, 큰집에서 재종간에 모여 있을 때. 왼쪽에서 네 번째 뒷모습을 보이는 이가 권기창 씨다.

아파서 고생하니 이래저래 살아온 게 허프드라

2015년 8월, 권기창 씨는 갑자기 쓰러졌다.

소화도 안 되고 가슴도 답답하고 병원에 가니 처음엔 병명도 모른다 했다가 그다음엔 변이형 협심증, 위축성 위염, 어혈이 맺혔다, 역류성 식도염이다 뭐다 온갖 병명이 다 나오는데 그 과정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서울로 왔다갔다 병원 진료를 받으며 불안감이 커져서 병을 더 키웠다. 그래저래 지금은 좀 괜찮아졌다.

“애들도 고생 많았지. 서울에 큰 병원에 예약해놓으니 20일 기다리라캐. 그래서 “야야 내 죽으면 병원 갈라나.”그러면서 닦달도 막 하고 그랬지. 아는 사람 통해 통해 자꾸 날짜를 당기면서 갔지. 아-들이 직장 다니면서 애 많이 먹었어. 아부지땜에 혼이 났다캐. 아부지가 하도 불같이 급하게 화를 내서.”

예민해진 남편 때문에 자식들 보기도 미안했던 태연 씨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권기창 씨도 어지간히 속앓이를 했다.

“아프면서 이래 내가 살아온 걸 생각해보니 참 허프드라니깐.”

밥 먹고 살만하니, 편하게 쉬면서 먹고 싶은 것도 맘껏 먹고 놀러가고 싶은 데도 가고 남은 인생 그렇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데 뭐 하나 맘대로 못해보고 죽는구나 생각이 드니까 허탈하고 억울하고 쓸쓸한 생각뿐이었다고.

►강변 화전놀이

도둑맞았던 영가지 책판, 살포시 도로 갖다놨다네

마을에 장판각을 새로 지어놓으면서 영가지 책판을 넣어놨는데 지난 2002년에 도둑을 맞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 웃대에 용자 만자, 13대 조부 용만 권기(權紀) 할배가 영가지를 편찬했지. 학자로서 안동에서는 알아주는 어른이지.”

책판지도가 없어져서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경찰서 담벼락 밑에 누군가가 갖다놓고 갔더란다. 아마 수사가 시작되자 부담을 느껴 갖다놓은 모양이라 추측할 따름이다.

“경찰이 전화 왔길래 언놈이 도둑켰도? 하니 그건 알 수가 없다 이캐.”

비 오는 날 방티만한 놋양푼이 하고 책판을 잃었었는데 놋양푼은 못 찾고 책판은 찾았다고 한다. 송사초등학교 2년 후배인 김휘동 시장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증하면 ‘도둑맞을 일도 썩을 일도 없다’고 조언 하길래 문중에서 국학진흥원에 기증을 했다고 한다.

“CCTV 있어도 자물통을 잠궈도 소용이 없더라고. 우리 문중 자랑거리도 되고 시민들도 다같이 보고 보관도 더 쉽고 하이 집안에서 기증을 했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시절

아들 셋이 평화동, 안기동, 금곡동에서 자취를 했다. 하숙을 시키니 늦게 들어가면 배가 고파 밥을 굶으니 다시 자취한대서, 살림 다 떨었다가 늘궜다가 했더랬다. 그나마 자취를 하면 밤중에 와 식은 밥이라도 먹는데 하숙은 그럴 수가 없으니.

금곡동 용마아파트 뒤로 예전에 막내 준태 친구 수학이라고, 그 친구네 집에서 자취를 시킨 적이 있다.

►첫째와 둘째 아들

“수학이 아빠가 술을 잘해. 난도 술을 좋아하거든. 내가 갈 때면 내 새끼 잘 봐돌라고 소주하고 순대 썰어가지고 가서 대작을 했지. 수학이 아빠가 내가 오면 좋아했어. 좋은 안주도 내놓고 술친구가 되부랬거든. 내 아들같이 잘 봐달라고 하면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막내는 체육부에도 있었고 성격도 급했던 터라 한번은 수학이 아빠한테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준태가 수학이랑 쑥덕쑥덕 거리더니 운동화끈 조여매고 나갔는데 싸움이 날라는동.”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서 수소문해보니 의성공고 애들하고 싸움나기 일보 직전이라, 택시를 급히 맞춰 타고 의성까지 간 적도 있다한다. 온 사방 인맥 다 동원해서 출동하는데, 막내 체육부 선배 하나가 중간에 개입해서 ‘준태는 나랑 같은 체육분데 건드리면 안 된다’하고 호통을 쳐서 일단락되기도 했다.

아들 키우는 게 요즘 생각해보면 옛날 어른들이 한 얘기 스쳐듣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옛날 어른들이 괜히 하는 소리가 없어. 거랑에 피리가 많이 뜨면 비 오겠구나. 하는 게 산소가 부족하면 뛰거든. 그게 다 이유가 있어. 우리도 맏이가 딸이면 살림밑천이었겠구나 싶어. 우리 학교 다닐 때도 자취하는 애들 있는데, 자는 엄마 있는 아다. 자는 누나 있는 애다, 자는 혼자 다니는 애다, 금방 표 났어. 제일 깔끔하게 해서 오는 아들이 누나 있는 애들이야. 누나들은 잘 챙기거든.”

일주일 먹을거리 쪼름반찬 해주면 한 사나흘 먹으면 없어져도 저끼리 두부 사먹고 콩나물 사먹고 하면서 잘해줬다. 엄마가 한 번씩 신시장에서 장 보고 54번 타서 가서 반찬해주고 갈 때면 막내는 엄마 태연 씨를 버스터미널까지 바래다주고 지는 운동하러 시민운동장까지 뛰가고, 아주 당찼다고 한다. 머스마 셋이 저끼리 수틀리면 형이 동생을 남의 아 때리듯이 때리기도 하지만 시꺼먼 남자형제 그렇게 큰다고 생각했다.

►1996년 지금의 집을 완공했다.

그저 순리대로 산다

“옛날에는 이 마실만 해도 35~40호 가차이 됐었는데 이젠 18가구만 살아. 글고 옛날엔 일가만 살았는데 이젠 각성받이도 몇 집 돼. 우리 대소가만 살았는데 이제는 우리 아랫대 나갔던 사람들도 농사지으러 토지 있으니 고향으로 들어오고 그래.”

►동네 도로 닦인 날, 달기약수터 울진 성류굴 단체관광(1980년)
►동네 도로 닦인 날, 달기약수터 울진 성류굴 단체관광(1980년)

흉년 오고 6.25겪고 못 먹고 나물죽 끓여먹는 사람들은 산에 송구껍데기도 끓여먹기도 하고 그렇게 살았던 세대다. 쌀 담그고 콩 담그고 거기에다 취나물 한줌 넣고 소금 넣고 그렇게 끓여먹고 살다가 새마을 운동도 겪으면서 여기 샛골에도 다 길을 넓혔다.

그래도 다른 마을보다 토지가 있어 그나마 부촌인 편인 이곳이 물 맑고 벼농사가 잘된다 하여 송사며 이웃 마을 사람들이 쌀 사러 동네에 많이 들어오곤 했단다.

“한 이십년 됐지. 80-90년대까지만 해도 한밤들 쌀 좋다고 많이들 사러 왔으니.”

그때 한가마니에 20만원 넘던 쌀이 요새는 12만원이다. 농사라는 게 부지런히 일군만큼 꼭 성과가 나오는 일이 안된지 오래되니 일흔 중반을 넘어선 농부는 아직도 인생 공부가 부족한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한마을에 북적이며 살던 가족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나누고 함께 했다. 남은 삶도 그저 살방살방 마실 다니고 탁배기 한잔 받아도 기분 좋게 마시고 싶은 권기창 씨. 명절날 우르르 오는 자식들 보는 기쁨에 사는 이 평범한 농부의 삶이 이 고즈넉한 동네를 휘감아도는 물줄기처럼 순리대로 흐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권기원, 권기창. 공교롭게도 둘은 이름도 비슷하고 살아온 이력도 비슷하다. 도산면 가송리 농부 권기원과 길안면 대사리 농부 권기창. 안동토박이로 살아와 예천여자 의성여자와 각각 결혼해 가정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자식들은 모두 성가했고 고향집에서 터전을 일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두 농부의 삶은 한 사람의 일생이 그 사람 자신의 역사이자 가족의 역사이고 나고 자란 지역의 역사가 된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예사사람들의 삶을 통해 지역의 발전과 변화는 물론 안동의 근현대를 살아온 그들의 추억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그들의 삶의 기쁨과 아픔을 통해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신산한 삶의 궤적을 따라 그려볼 수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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