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22 화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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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따라 이야기 따라 안동댐 마을 기행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2)
2017년 05월 22일 (월) 13:41:02 이미홍(경북기록문화연구원 운영위원) lmh3377@hanmail.net
   
►댐 전경 사진. c 권영목

76년 안동댐이 완공된 지 어느덧 4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낙동강 유역의 물 공급과 전기 발전이라는 댐의 원래 목적과 기능을 넘어 안동호를 둘러싼 산과 강이 만들어내는 그림 같은 풍광은 어느새 안동이 가진 천혜의 관광자원이 되었고, 4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수몰민들의 아픔을 뒤로 하고 안동댐을 중심으로 주변에 월영교와 호반길 등 문화단지가 조성되고 물포럼센터가 들어서면서 안동은 이제 명실상부한 물의 도시, 수변도시로서 거듭나고 있으며, 안동시는 안동, 임하댐 두 개의 댐을 기반으로 물산업의 메카를 꿈꾸며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안동댐의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하고 그 기억들을 토대로 안동댐의 역사를 이어서 새롭게 써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잊고 아픈 시간들은 그냥 묻어둔 채로 가는 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안동댐의 이야기를 위해 안동댐을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작업을 함께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의 도시 안동은 안동댐 사람들의 스토리와 기록들을 베이스로 담고 갈 때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며 진정한 당위와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72년 본댐 공사현장. c 권영목
   
►1972년 임청각 앞 낙동강. c 권영목
   
►1976년10월28일 준공된 안동댐. c 권영목

 

댐, 안동의 지형을 바꾸다

정부는 1970년대부터 가뭄을 막고 낙동강 하류지역 주민들의 식수 공급과 대구, 포항, 구미, 부산, 창원, 울산 등 도시의 국가공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안동에 2개의 큰 댐, 안동댐과 임하댐을 건설했다. 그 중 1976년 먼저 만들어진 안동댐에 관한 이야기를 자료들과 인터뷰를 통해 현재 시점에서 기록하고자 한다. 댐의 건설은 안동의 지형을 바꾸고,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삶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안동 낙동강 강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강과 호흡하며 살아오던 사람들이 있었다. 안동댐이 생기면서 54개 마을의 1만 9천 6백여명이 물을 피해, 논밭 7백 33만 2천여평과 집 3000여호를 물속에 버려두고 고향을 뒤로 해야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지금 현재 시점에서 사진자료들과 인터뷰를 통해 들여다보았다.

   
►1974년 미질 앞 낙동강. c 권영목
   
►1974년도 예안향교. c 권영목
   
►1975년 예안면 소재지 전경. c 권영목
   
►월곡면 기사동 고택 철거. c 권영목
   
►대동수변마을. c 권영목
   
►와룡면 요촌. c 권영목
   
►부포리 월영대. c 권영목
   
►미질동 앞 나루터. c 권영목

 

카메라를 들고 안동댐의 역사를 기록한 권영목

권영목은 안동댐 본댐이 있는 엄달골서 태어나서 생활하다가 댐 수몰 때 집은 남았지만 농토와 조상묘가 들어가서 농사 대신 댐 공사를 하는 삼부토건 경비 일을 하면서 돈벌이를 시작했다. 문화단지가 들어서면서 남아있던 집터마저 들어가고 와이바골로 집 지어서 갔다가 댐 비상활주로 때문에 다시 민속박물관 뒤 지금의 향사골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 댐으로 인해 집을 두 차례나 옮겨지었지만, 한편으로 댐으로 인해 그는 일자리를 얻었고 사진을 배워 기록하는 작업을 해올 수 있었다.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이 댐과 연관되어 있었다.

   
►1974년 민속박물관 앞, 엄달골 입구. c 권영목
   
►1973년 측량작업. c 권영목

“댐이 71년 4월에 착공을 했는데, 68년도, 69년도에 삼부토건에 있던 기사분들이 댐 공사를 위한 실측조사를 하기 위해 왔는데 그분들이 우리 집에서 숙식을 했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밤이면 도면도 그리고 사진도 찍은 거 현상해서 보고 그랬는데, 제가 간식을 들고 들어가면 사진도 보여주고 카메라에 필름 넣어 사진 찍는 것도 가르쳐주고 그랬어요. 그게 사진과 인연을 맺게 된 시작이죠. 그런 인연으로 제가 어린 나이에 일찍부터 삼부토건 경비일도 하게 되었고, 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공부를 해서 수자원공사에도 들어가게 되었죠.”

댐 실측을 위해서 온 측량기사들에게서 사진 찍는 것을 처음 배웠다는 권영목씨, 그가 손에 쥔 첫 카메라는 대구에서 당시 안동댐 사진을 찍기 위해 온 사진가 아버지 지인 이인화 선생님이 네 손으로 직접 찍어보라며 주신 펜탁스 34㎜ 카메라. 권영목 기록사진의 시작이었다.

   
►1974년 성낙교 철로전경 c 권영목

“사진을 배운 뒤로 나라도 기록하자는 생각으로 꾸준히 찍어 왔어요. 일이 있을 때마다 행사 사진은 물론이고 제가 관심이 가거나 기록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틈틈이 열심히 찍었죠. 제 휴가는 다 사진 찍으러 다니는 시간이죠. 시간이 지나 그걸 모으고 보니까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되더라고요. 안동시에서나 수자원공사에서 책을 만들거나 행사 때 사진이 필요하다며 저를 찾으면 솔직히 뿌듯하기도 하고 저로서는 보람도 느끼죠.”

물속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 기억이 역사가 되다

   
►수몰되기 전 낙동강가에서 고통마을 사람들. c 이원길

 

고통마을 이원길의 1976년 그해 여름의 기록

그해 1976년. 안동댐의 담수로 마을 사람들은 봄부터 술렁거렸다. 이태 전부터 수몰 보상금이 지급되고 뒷산에 길을 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술렁거렸다. 토건회사 직원들이 들어오고, 다이너마이트 폭음과 산을 깎는 불도저 소리가 고요하던 마을을 뒤흔들었다. 아이들은 하계댁 집 앞 넓은 밭에 쌓아놓은 콘크리트 수로관 위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장래 설계가 확실한 집들은 이미 새 터로 이주했지만, 뚜렷한 대책 없이 남은 집들은 무작정 파종을 했다. 수확에 대한 욕심보다는 객지에서 부딪쳐야 할 생소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더 고향 땅에 발붙이고 머물게 했을 것이었다.

우리 집도 강변 사래 긴 밭에 지난해처럼 땅콩 씨를 뿌렸다. 우리의 생명줄인 그 땅콩 밭은 하천부지여서 수몰 보상에서도 제외되어 우리 가족의 시름은 깊었다. 이주하는 한 사람당 얼마, 밭 가 포플러 한 그루당 얼마, 마당 가 오얏나무 세 그루에 얼마 해서 약간의 보상금을 받았다.

팔월 중순이었다. 태풍이 오는지 여느 해보다 더한 폭우가 쏟아졌다. 마을의 이야깃거리는 점점 차오르는 수위였다. 다 늙어서 낯선 객지로 떠나느니 차라리 마을과 함께 물속에 묻히겠다고 억지를 부렸다는 어느 마을 어른의 소문도 들렸다. 그해 팔월 십육 일, 마지막으로 선 예안 장날, 장터에 몰린 장꾼들이 인산인해였다고 했다. 그 며칠 후에 장터가 물에 묻히고, 기둥만 한 구렁이가 건너편 중천으로 넘어갔다는 소문도 들렸다. 횃골 앞 합수목이 묻히고, 다래나루가 묻히고, 수많은 농부의 애환을 품은 ‘남강들’이 잠기고, 선비와 지사志士의 마을 부포가 물에 묻혔다.

그런 애타는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 지, 들판의 곡식은 무성하게 자랐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물머리가 마을에서도 내다보였다. 빨라도 보름은 더 있어야 땅콩 풋바심이라도 할 수 있는데, 수마水魔는 늦어도 사흘 안에 동네에 닿을 것 같았다.

수마는 예상대로 온 마을을 집어삼켰다. 물새가 날렵하게 달리던 강변 자갈밭, 소먹이고 꼴따먹기하던 들판, 계집아이들을 놀리면서 가댁질하던 둑길, 달밤에 리어카로 거름을 내던 농로, 마을의 수수한 전설까지 삼켰다. 어머니와 나는 발싸심으로 물에 잠기는 땅콩 줄기를 뽑아 올렸지만, 함께 묻어 온 붕어만 퍼덕거릴 뿐 소용없는 짓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고향을 떠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동변상련의 눈길 한번 나누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늘 다니던 찻길은 이미 뱃길이 되어버리고, 피난 이삿짐을 싣고 솥우물을 거쳐 임동으로 돌아 나왔다. 캄캄한 밤, 흙길에서 기우뚱거리는 화물차 창밖으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2008년 5월11일 32년만에 만난 고통마을 사람들. c 이원길
   
►모습을 드러낸 고통마을 친구들 집터. c 이원길
   
►가뭄에 모습을 드러낸 이원길씨 집터. c 이원길
   
►고통들에서 32년만의 해후. c 이원길

2008년, 삼십 이년 만에 만난 고통마을 사람들

마을이 물에 잠기고 안동 시내로 이사한 며칠 후, 태풍이 지나가고 물이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원길씨는 바로 예안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고 한다. 예안장터 뒷산에 생긴 선착장에서 고통으로 가는 연락선을 타고 고통마을로 들어가는데, 달리는 뱃마루에서 물속을 내려다보니까 석빙고와 윗내앞, 벤지골, 횃골 합수목, 도산구곡의 제1 운암곡과 제2 월천곡을 잇는 그림 같은 강변길은 사라졌는데. 부포나루 부근, 친구들과 사과 서리를 했던 우찬 씨네 과수원이 물밑으로 그대로 보였다고 한다. 그날 본 물 속의 고향 마을 모습은 내내 그의 마음속에 깊게 남았고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고향의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어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록에 고통마을 사람들이 함께 기억을 보탰다고 한다.

2008년 여름, 물 빠진 고향마을 강가 그 자리에서 고통마을 사람들이 만났다. 76년 그때 , 고향을 떠난 이후로 32년 만이었다. 산과 물만 남은 고향이지만 그래도 고향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을길은 물론이고 원길씨네 집터와 나무그루터기, 우물터, 펌프가 있던 자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재산댁 살구나무는 밑둥치만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널매댁 사랑채 옆 은행나무 아래에 있던 바위도 그대로였다. 32년만에 고향마을 그 자리에서 해후한 고통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웃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기꺼이 원길씨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우리들의 고향 고통마을 이야기를 꼭 기록해서 책으로 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몰과 문화재 이야기

안동댐이 들어선 골골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었다. 사람도 집도 돌아볼 틈 없는 사정에 문화재를 논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문화의 보고들이 함께 수장되다시피 했다. 더러는 물에 잠기고 더러는 스러져가고 그리고 일부는 해체되어 민속촌이나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숱한 전설과 마을의 역사도 함께 묻혔다.

   
►1976년수몰지역 문화재를 이전하여 조성한 성곡동 안동민속촌. c 권영목

“그때는 문화재 이전비가 따로 책정되지 않고 전체 수몰 보상비 중에서 일부 금액이 책정이 돼 있었어. 그때 안동댐 수몰 예정된 전 지역에서 국보나 보물 등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것들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우선적으로 정해서 35점을 이전을 했어. 고택이나 정자, 재사 등 개인이나 문중 소유 중에서 이전비용도 없고 개인적으로 이전할 수도 없는 것들 중에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들은 그때 지방문화재로 지정해서 옮기기도 했어. 골골이 수도 없던 수많은 명승지와 유적들이 안타깝지만 대부분 잠겼지.” - 류희걸 전 안동민속박물관장

안동댐의 수위를 1미터만 낮췄다면, 개발도 좋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조금만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문화전문가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있었다면, ‘청포도’의 배경인 원촌 앞 광야도, 도산서원 주변의 수많은 문화재와 빼어난 경관도 그렇게 허무하게 묻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장의 기록사진마저도 남기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어쩌다 만나는 문화재 한 장 한 장의 사진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도곡 호계서원 전경 c 권영목
   
►수몰전 역동서원 c 권영목
   
►1974년 시사단과 낙동강.  c 동국대 이혜은교수. 사진제공 도산서원 이동구

 

고향에 남은 사람들, 댐과 마주하며 살다

도목 구미마을 권봉일 할아버지(89세)

“우리 윗대 할아버지가 이 구미 마을에 자리 잡은 지가 500년이 넘어. 우리 아부지도 나도 여기서 태어났지. 우리 어매는 경주 월성 이씨인데, 저 바로 건너다보이는 동네 와룡 자곡이 친정이야. 그 덕에 나는 저기 외가서 크다시피 했지. 우리 집이 저 물든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수몰될 때 지금 자리에 집을 다시 지었어. 수몰될 때 보상금 조금 나온 거 가지고 나는 첫애 낳고 잠깐 임동에 나가 살았는데 그쪽도 댐이 생겨서 다시 이리로 들어왔지. 저기 미질로 가는 모퉁이 길로 돌아가기 전 보이는 하우스 바로 아래가 면사무소하고 도목국민학교 하고 우체국 있던 자리야. 집 앞에 있던 학교도 없어지고 면사무소도 없어져, 동네도 삼분의 일로 줄어들고 젊은 사람들은 다 나가고 없고, 우리도 애들 교육 때문에 할 수 없이 시내에 방 얻어 주고 주야로 일해서 공부시키고 나니 자식들은 다 직장 얻어 도시로 가고 세월도 다 가버리고.”

“저 건너에 우리 밭이 있어서 물들고도 배 타고 건너가서 농사짓고 그랬는데 이제는 힘에 부쳐 농사도 못 지어. 그 많던 사람들이 한 집 두 집 나가고, 세월에 장사 없다고 이 동네 살던 이도 하나 둘 가고, 요즘은 외지 사람들이 더러 들어와서 집을 새로 짓고 살지 남은 사람이 별로 없어.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여기 버스정류장에 혼자 나와 앉아있어.”

   
►도목 구미동 권봉일 할아버지.
   
►비닐하우스 저 뒤편으로 보이는 산자락에 권봉일옹의 할머니 산소가 있다.
   
►권봉일 할아버지가 앉아있는 버스정류소에서 내려다 보이는 도목나루터 전경.

권봉일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 두 차례 그렇게 버스정거장에 앉아 선착장에 배가 오나 안 오나 보기도 하고 간혹 사람들이 차타고 왔다 가면서 분명 이 동네 누구네 집 아랫대일 텐데 인사도 잘 안하고 지나가거나 하면 서운해 하기도 하면서 물에 잠긴 옛 동네와 어매 아배가 누워 있는 산비탈, 저 우묵배미 건너 산자락에 있는 할머니 산소를 눈어림해 보기도 한다.

주민들의 발이 되고 차가 된 요촌 선착장 신현호 선장

배나들, 주계, 자곡, 도목 노선을 다니는 경북 704호를 운행하는 신현호 선장은 예안초등학교, 예안중학교를 다닌 도산면 서부리 출신이다.

“서부리나 천전 같은 데는 엄청나게 사람들이 많았어요. 당시 예안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 수가 천오백명 정도 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골골이 학생들이 많았어요. 도목, 구미 쪽도 예전에는 주민들이 이 일대에서 많이 살았던 곳이에요. 원래 이 704호는 서부리에서 배나들까지만 운행 했었는데, 지금은 미질, 구미, 움터 마을 할 것 없이 하천가 마을에 주민들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노선을 통합해서 그전에 702호가 다니던 주계, 도목, 자곡까지 다니게 된 거죠. 서부리는 여기보다는 주민 수가 많아서 705호가 있어서 서부, 중천, 상천, 동부까지 운행하고요.”

동부리에서 부포 간을 운행하는 경북 706호는 차량도선, 차 실어 나르는 배인데, 동부에서 부포로, 부포에서 동부로 차로 갈 일이 있으면 부르면 와요. 지금은 수위가 낮아서 운행이 안 되고 본댐에 내려가 있어요. 수위가 147 미터 이상 되어야 배를 운행할 수 있거든요.

   
►나소리에서 본 예안 삼산리. c 권영목
   
►왼쪽부터 요촌선착장 도선사 이호기, 도선사 조형진, 선장 신현호.
   
►안동댐 가두리 양식장 허가 1호 신규원씨의 서부리 양식장 84년. c 신규원

 

요촌 선착장 701호 도선사 이호기

도목동 구미마을이 고향인 60년생 이호기씨는 열일곱에 마을에 물이 든 후 군대에 갔다 온 기간을 빼고 지금까지 안동댐에서 차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 84년도부터 지금은 없어진 701호 도선차량을 운행했다.

“도목 선착장 있는 바로 그 동네가 구미인데 제가 그 동네서 났어요. 물들기 전에는 아래 윗동네 합해서 1000여 호가 넘게 살았던 큰 동네였어요. 수몰이 되고 가장 불편한 게 길이 막힌 거였죠. 당장 길이 끊기니까 배로 사람들을 날랐죠. 잠깐 도선에서 일을 하다가 군대를 갔어요. 군대 갔다 오고 부모님 두고 혼자 돈벌이하러 나가기도 그래서 그때부터 도선 일을 계속하게 된 게 오늘날까지 선착장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동네 사람들이 배 타고 반대편 자곡에 있는 밭에 쟁기나 트랙터 같은 농기구도 싣고 건너가서 농사짓고 그랬어요. 작은 배를 타고 가기도 하고, 우리가 702호배로 실어 날라주기도 하고 그랬죠.”

기사교회 있는 데서 미질로 들어가는 표지판이 있는 길목은 댐 수위가 만수선까지 차면 바로 그 앞까지 물이 차오르는 곳이다. 그곳 밭에는 올해도 곡식들이 심겼고 주민들은 올해도 땅을 놀릴 수 없어 밭에 나가 곡식을 가꾼다. 요즘은 수자원공사에서 방류를 미리미리 하고 수위 조절을 하니까 60% 선 이상까지는 잘 안 차지만 그래도 물이 차면 그 아래쪽 논밭 농사는 그냥 버려야 한다. 하천가 빈 밭에 다행히 물이 들지 않으면 추수를 하고 물이 들면 그만이라는 각오로 이말무지로 짓는 농사다.

스물아홉의 도선사 조형진씨는 수몰의 기억이 없는 세대다. 신현호 선장과 2인1조로 704호를 운행하는 데 몇 년 되지 않았지만 배나들에서 도목까지 동네 사정이랑 어르신들 이야기를 자연스레 하나 둘 알아가게 된다고 한다. 704호를 제일 많이 애용하는 단골이 누구시냐 묻는데 배나들의 39년생 박춘자 할머니라고 금방 답이 돌아오는 것만 봐도 알만하다.

 49년생 신규원의 서부리 기록

“대학교를 졸업하고 여기 서부리에 74년도에 내려왔는데, 솔직히 젊을 때라 꿈도 많고 의욕도 넘쳤어.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가두리양식하고 내 일로도 바빴지만 그래도 내 고향마을이고 수몰되고 이곳 서부리 이주단지에 터 잡고 먹고 살려는 사람들보니까 나도 뭐라도 하고 싶더라고. 여기 안동댐 수몰될 때는 보상도 정말 조금밖에 못 받았으니까. 그때 사람들은 다들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까 집 비우고 나가라고 하니까 나간 거지. 임하댐 건설 때만 해도 도로나 우회도로도 그렇고 보상금 책정 과정에서 정부와 협상도 하고 항의도 하고 해서 보상금도 제대로 받고 했지.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한 번 데모도 못 해보고 주는 대로 받고, 길도 끊기고 남은 밭농사도 멀리 돌아가거나 배 타고 건너가서 지어야 할 판이야. 그래서 여기 수몰마을 사람들 뜻을 모아서 우리가 가서 한 번 우리 목소리를 낸 거지.”

   
►수몰직후 새로 생긴 서부리 선착장 모습. c 신규원
   
►안동댐수몰피해생계대책위원회 글자가 선명하다 93년 예안 서부리. c 신규원

“93년에 우리가 건설부 찾아가서 항의하고 데모를 했어. 여기 서부리 사람들도 그렇고 안동댐 수몰민들이 하나같이 농사지을 땅도 잠기고 농촌에 일거리도 별로 없고 보니까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든 거야. 그래서 시장님한테도 여러 차례 찾아가 이야기를 하고 지역에 뜻 있는 사람들하고 시의원들하고 같이 건설부도 쳐들어가고 그랬지. 그래도 그렇게 여기 사람들도 항의하고 노력하고 수자원공사나 정부에서도 정책에 반영을 하고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조금씩 도로나 교통도 나아지고 도선도 더 다니게 되고 그런 거지. 지금 이곳 서부리 마을 살리기 사업도 그때 그렇게 노력한 덕분에 지금 이만큼이라도 이루어지게 된 거라고 생각하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서부리가 고향인 49년생 신규원은 카메라와 사진에도 관심이 많아 자신이 아끼는 카메라로 예안면 일대와 서부리 사진을 많이 찍었다. 6년 전에 암수술을 하고 자신의 시대를 정리하면서 사진과 앨범들을 많이 태워 없앴다고 한다.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하고 남은 신규원이 찍은 예안면 서부리 사진들.

   
►서부리 이주단지 79년. c 신규원
   
►물빠지고 모습을 드러낸 예안국민학교운동장에 있던 선성현유허비. c 신규원
   
►첫번째 물이 빠진 후 드러난 서부리의 방아고리. c 신규원
   
►예안면부원장을 지낸 부친 신정희씨. c 신규원
   
►도산면 경찰지서 옛터. c 신규원
   
►서부리선착장. 학생들과 주민들을 실어나르던 배들. c 신규원
   
►수몰전 예안 서부리. c 신규원

 

안동댐의 추석 풍경

전국에서 유일하게 2개의 다목적 댐을 갖고 있는 안동지역은 댐 건설로 인해 매년 추석이면 귀성객들이 배를 타고 성묘를 가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안동댐과 임하댐 조성으로 섬이 된 야산에는 1천 여기의 묘가 산재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선착장 주차장은 물론이고 성묘를 가는 배 안은 그야말로 수몰민들의 만남의 장소이다. 못 뵌 지 오래된 동네 어른이나 상대방의 안부도 묻고 고향 동창들의 동정도 나눈다. 같은 고향이거나 이웃마을 사람들이 같은 방향의 배를 타기도 하지만 매년 추석 성묘 때마다 만나다보니 다들 아는 얼굴들이 많을 뿐 아니라 동향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저 반갑기만 하다. 차례차례 산소가 가까운 곳부터 내리고 되돌아 올 때는 먼 곳부터 타다보니 때로 산소 풀을 내리느라 배 시간을 맞추지 못할 때도 있다. 가을이라 버섯이나 도토리 줍느라 배 시간을 놓치기라도 하면 다음 배가 올 때까지 두 시간여를 기다려야 될 때도 있다. 이래저래 불편도 하지만 그렇게라도 고향 땅을 밟고 조상 산소에 다녀가야 또 한 해가 편한 것이 수몰민들의 마음이라고 한다.

안동댐수운관리사업소는 추석을 맞아 댐 주변에 아예 길이 없거나 댐 수위가 높아 육로로 갈 수 없는 곳에 성묘를 가거나 고향을 가는 귀성객들을 위해 배를 띄우고 있다.

수몰되고 한참 동안은 유람선을 타고 벌초를 하러 가기도 했으나 지난 95년부터는 매년 추석을 전후해 한 달간을 성묘객 선박특별수송 기간으로 정하여 관공선을 이용해 연평균 5천여 명의 성묘객들을 수송하고 있다. 평소에도 관공선을 이용해서 산소나 고향을 찾는 수몰민들이 있어 상시 운행을 하지만 특히 추석에는 모든 관공선에 행정선까지 동원해 많을 때는 4천여 명에서 적게는 2천여 명까지 성묘객을 수송하고 있다.

수몰 42년,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고 1세대 수몰 실향민인 부모님 세대는 객지에서 자식 키우고 자리 잡고 살기 위해 애쓰고 때 되면 고향을 찾으며 부초처럼 지내다가 죽어서야 고향뒷산에 묻히신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도 남은 이들은 지금도 해마다 기일이나 추석이면 고단한 몸으로 아들딸을 앞세워 할배, 아배, 어매 산소를 찾아 절을 한다. 그런데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4천명에서 많게는 5천여 명에 달하던 추석 성묘객이 요즘은 2천여 명 내외로 많이 줄었다고 한다. 이 수치가 말해주는 것은 자명하다. 1세대 분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있고 그분들의 이야기도 같이 묻혀가고 있다.

   
►안동댐선착장 추석날 아침풍경. 성묘를 온 수몰민들의 승선대기장이자 만남의 장소. 수운관리소.
   
►성묘객을 싣고 달리는 쾌속선. c 권영목

사람도 가고 낡은 배도 가고 안동댐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변해가고 있다. 물속에 잠긴 마을과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기억마저도 희미해지고 아름다운 호수만이 남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살아갈 것이다. 배를 타고 부모님을, 산소를, 친구를, 추억 속의 고향을 잊지 않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삶이 이어지는 안동호이기를 바란다. 그전 마을은 저 물 속에 묻었지만 그 기억과 함께 현재, 그리고 미래의 안동호의 이야기가 안동사람들에 의해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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