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5 금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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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장소, 그 사람들, 기억하고 있습니까?
안동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으나 사라져 버린 기업들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3)
2017년 05월 29일 (월) 11:32:44 김용준(경북인뉴스 기자)/피현진(UGN경북뉴스 기자) mycart@ugn.kr

안동에도 근·현대 시기 지역 경제의 구심점으로 역할을 했던 주요 기업들과 규모는 작고 영세했지만 안동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공장들이 있었다. "아 저기 저 자리 아이가. 그때는 거 때문에 안동사람들이 밥 먹고 안 살았나" 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까지 안동에서 경제활동을 이어간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공장에 근무하고 그들의 근무처를 중심으로 주변에 상가가 들어서는 순환의 고리가 이어졌고, 이런 경제의 고리는 안동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빠르게 돌아가는 세계정세와 경제 트랜드의 변화에 맞춰 발전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경쟁에 밀려, 언제부턴가 공장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이제 그것들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아직도 안동 사람들은 그렇게 우리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그 공장들과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을 추억과 그리움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맞다 니가 그때 거서 그랬잖아. 그때 진짜 재미있었는데"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술자리 안주로, 혹은 오래된 앨범에서 발견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보면서 가족들 추억을 곱씹다 보면 추억의 장소는 기억 속에서 그때 그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그 건물 그때 그 사람들은 더 이상 거기에 없다는 사실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기도 한다.

안동경제를 이끌던 기업 '한국벨트'

   
►현재 M컨벤션 자리에 있던 한국벨트 안동공장 전경

누구는 폐기한 벨트를 훔쳐다? 팽이채를 만들었다고 그 당시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누구는 안동의 작은 공장에서 일해 온 식구의 생계를 책임졌던 무게와 함께 어려웠던 그 시절을 추억한다. 그들 중 때로는 주민들 민원으로 공장이 폐업했다고 생각해 아직까지 민원을 넣었던 사람들에게 섭섭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안동의 대표 기업으로 안동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기업이었으나 이제는 사진 한 장 구하기도 어려울 만큼 안동 사람들의 기억에서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는 회사. 바로 한국벨트다. 그리고 한국벨트에 대한 안동사람들의 기억은 다양하다.

   
►1977년 안동상공회의소 제1기 정기 의원총회 앞줄 가운데가 한국벨트 도한복 회장

1952년에 안동에 본사를 두고 창업 발족한 한국벨트는 안동시 신안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의 안동시 신안동 274번지인 M컨벤션에 위치하고 있던 공장이다. 안동상공회의소 회장을 7년간 연임하면서 안동경제를 이끌었으며, 대한상공회의소 감사를 7년간 재임 했던 도한복 회장이 설립한 기업이다.

한국벨트에서 청춘을 바쳐 일하다 1998년 6월 안동공장 폐업에 따라 퇴임한 당시 근로자에게서 당시 한국벨트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성이 권 씨(71)라는 그는 어렵게 구한 '한국벨트' 전경사진을 보여주자 추억에 잠기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시울도 살짝 붉어졌다.

   
►1975년 한국벨트 안동공장 직책자 신념기념회 모습

"한국벨트요! 폐업할 때 근무했던 회사지요. 청춘을 다 바친 회사였어요. 그런 회사를 내 손으로 직접 시청·세무소 등을 다니며, 폐업신고를 했지요. 참 뭐랄까 안타깝다! 아쉽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그는 도대체 광고용으로 쓰인 '한국벨트' 전경 사진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기에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을까? 이런 궁금증은 그가 말하는 한국벨트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알기로는 공장설립 부지는 현재 안동와룡 감애정미소 이재덕 사장님의 부친이 경영하던 정미소가 있던 자리였어요. 1952년 4월 설립당시 회사명은 동방벨트 중직공사로 시작했는데 1970년 1월 한국벨트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변경했지요"

"잘 나갔어요 공장이 한창 가동 중일 때는 직원들이 무려 600여 명이 넘었어요. 당시 안동뿐만 아니라 영주, 예천, 봉화, 영양, 청송, 의성 등 경북북부지역 사람들 생활의 터전이었다니까요. 다들 고생도 참 많이 했지요. 2교대로 24시간 공장을 가동해도 물량 맞추기가 어려웠으니까요. 왜 야식 먹는 시간도 아껴야 할 정도였어요. 사모님도 고생 많이 하셨지요. 그 많은 사람들 야식을 책임져야 했으니까" 그에게 한국벨트는 아직까지 자부심으로 남아 있는 듯 했다.

   
►한국벨트는 총 생산량의 40%를 미국·일본·서독 등 세계 각지로 수출할 만큼 큰 호황을 누린 기업이었다. 사진은 한국벨트를 찾은 바이어의 모습

한국벨트는 60~70년대 연탄 시멘트 철광 등 광공업이 발전하면서 호황을 누리게 된다. 1980년대 초 한국벨트는 연간 생산량 12억 PLY를 생산 연간 매출액 220억원에 이른 회사였다. 80년대 들어 방앗간의 현대화, 직접동력전달방식의 확산, 산업구조의 고도화 등으로 국내 수요가 늘지 않은 데다 수출 신장도 저조해졌다. 또한 86년 한창그룹 계열의 '한창고무'가 설립되고, 90년 화승그룹 계열의 '화승화학'이 고무벨트 사업에 진출함에 따라 치열한 공급 경쟁을 펼치게 된다. 이때 한국벨트의 매출은 172억원으로 떨어지게 됐으며. 다시 2백억 돌파를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세우게 된다.

"잘 나갈 때는 우리 한국벨트하고 동일벨트, 대륙화학공업이 국내 시장의 80%~90%를 점령했어요. 수출도 많이 했죠. 주문량이 상당했으니까요 총 생산량의 40%이상 수출할 때도 있었고...이 물건들이 다 미국·서독·일본·호주 등지로 팔려 나갔죠. 오죽하면 안동 상공업 중 처음으로 소련이다 중국이다 당시 공산권 나라들과도 교역을 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다 보니 신제품 개발에 소홀했지요. 근데 저 회사들이 뛰어 드니까 부랴부랴 특수산업용벨트와 고무판 등 생산을 늘리고, 신제품 개발에 나섰던 것 같아요. 성과가 없지도 않았어요. 일본 요코하마 社하고 기술제휴도 하고, 아! 그때 교량용신축이음장치하고, 부두접안용 고무방충제, 준설용슬러브호스를 개발했지요. 중국 진출도 이때쯤 계획 됐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는 당시 회사가 처한 상황이나 개발한 신제품 등을 이렇게 기억했다.

   
►한국벨트 직원들

실제로 한국벨트는 1990년 중국 산동성 청도에 자본금 6백만 달러로 청도6 고무공장, 국제경제발전유한공사 등 관계사와 합작투자 및 공장설립에 대한 세부합의 계약을 체결했으며, 1990년 7월 일부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해 1991년 공장을 완공했다. 이 당시 매일경제신문에 짧게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한국벨트 중국공장 가동으로 1990년 50만 달러를 시작으로 1991년 1백만 달러, 1992년 1백5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이런 장밋빛 전망은 얼마 못가 무너지게 된다.

   
►1991년 3월 12일 한국벨트 중공 청도공장 준공식

"중국 공장을 설립하고 나서 본사에서 다른 사업에도 투자를 하고, 그러다 보니 자금이 계속 부족했죠. 공장에서 수익을 올리고는 있지만 전부 시설 투자다 뭐다 나가는 돈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그리고 뭐 그때 다른 회사들이 다 그랬지만 우리 회사 역시 부동산 투기도 하고 했지요. 그러다 보니 그렇게 된거죠. 그때 건물이나 부동산이라도 팔아서 자금 확보를 했어야 했는데 회장님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끌면서 상황이 더 악화됐어요. 그때 빨리 자금을 해결했어야 했는데......"

한국벨트의 자금난은 1992년 7월 3일에 찾아 왔다. 심한 경쟁과 91년 매출(2백43억원)이 전년보다 8.2% 줄어든 한국벨트는 1992년 가스기기 제품으로 업종다각화를 위해 무리한 시설 투자로 금융비용이 늘어나면서 자금난을 겪다 서울민사지법에 법정관리를 신청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벨트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3일 뒤인 7월 6일 상업은행 을지로 지점에 돌아온 3억 원의 회사발행 어음이 예금부족으로 부도처리 돼 7월 8일자로 은행과의 당좌거래가 중지된 것이다.

이후 한국벨트의 법정관리를 두고 법정에서의 싸움이 시작됐다. 서울민사지법에서 열린 1심에서 한국벨트는 법정관리 및 재산보전처분 신청이 기각됐으나, 서울고법 항고심에서 '1심 법원에서 조건부 동의를 한 주거래은행이 법정관리에 동의하고, 추가 자금지원 의사를 밝혔으며, 중국 현지 공장의 수익력이 큰 것으로 판단되므로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갱생 가능성이 있다'고 선고해 한국벨트는 92년 10월 12일부터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된다.

잘 나가던 공장이 하루아침에 법정 관리에 들어가기 까지 걸린 시간은 10년 딱 10년이다. 한국벨트가 승승장구하던 1970년 말에서 80년 초 도한복 회장은 신안동에 있던 한국벨트 안동공장을 수상동으로 이전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수상동 지구단위변경, 해당부지 지목변경 승인이 나지 않아 무산되면서, 안동이 가지고 있는 열악한 지리적 조건과 교통 위치적 여건 등으로 인해 도 회장은 아예 거점을 옮겨 제2 공장을 성남에 만들게 된다. 그때 한국벨트 본사는 서울로 이전했다. 도 회장이 이처럼 공장 이전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안동의 급격한 도시화가 있었다. 한국벨트가 있던 신안동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민원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한국벨트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이 민원의 대상이었다.

"당시 민원이 많았지요. 그래서 매연 해결을 위해서 주원료인 고유황 벙커C유를 저 유황 벙커 C유로, 연도분사기를 상향식에서 하향식으로 교체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안 되니까 회장님이 공장을 옮기려고 현 수상동 안동병원과 그 인근의 토지를 매입했죠. 그 당시는 안동대교도 없었고 지금 있는 도로도 없었어요. 모두 다 한 필지였지요. 땅은 확보 했겠다 당시 수상동 지구단위변경, 해당부지 지목변경을 하려고 경북도청에 갔더니 그쪽에서 하는 말이 '도 회장님이 대한상공회의소 감사도 역임하시고, 정부에 아는 사람도 많으시니 그 쪽에 먼저 승인을 얻어 오면 우리야 그냥 통과시켜 주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회장님이 법 규정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변경절차를 승인 받기 위해 수년 간 상공부·내무부·건설부·농림부 등을 찾아다니는 노력 끝에 '공업지역으로 변경이 가능하다'는 국가기관의 승낙을 받았어요. 그런데 정작 통과시켜 주겠다던 경상북도에서 심의위원회가 열렸고, 일부 위원들이 대구 방향에서 안동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굴뚝 공장이 있으면 미관상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지목 변경을 불허했어요. 그 당시는 관공서에서 일 처리 하는 방식이 그랬어요. 그런 와중에 회사가 어려워지고 법정관리도 받게 됐죠. 그래도 회장님은 수상동 일대를 공업지역으로 승인받기 위해 계속 노력했어요." 한국벨트가 끝내 수상동으로 이전하지 못하고 성남에 또 다른 공장을 건설해야 했던 배경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 있었다.

   
►한국벨트 성남공장 조감도 당시 도회장의 뜻대로 일이 처리됐다면 저 공장은 안동시 수상동에 자리 잡았을지 모른다.

안동을 대표하는 기업체로 신안동, 안막동, 북문동 명륜동을 비롯한 안동시 일대와 경북북부지역 지역 경제와 고용인력 창출에 지대한 기여를 한 한국벨트는 한 순간에 안동을 대표하는 기업에서 신안동 사람들에게 공해의 주범으로 낙인이 찍히고,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경북도로부터 배척당하기도 하면서 공장을 운영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경쟁에서도 밀려 자금난으로 법정관리를 받는 기업으로 쇠락해 가다가 IMF시절인 1998년 6월 결국 안동공장을 폐쇄하게 된다.

"막막했어요. 공장을 닫는다는데 직원인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도 회장님은 당시 안동에 있던 직원들한테 성남공장에 가서 일할 사람들은 받아 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고향도 안동이고, 가족도 안동에 있기를 원하고, 그러다 보니 떠날 수가 있어야지요. 후회가 되더라도 그냥 퇴사하기로 했지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안동 공장 폐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많은 동료들이 성남으로 떠나기도 하고, 누구는 중국 공장으로 가기도 하고 모두 먹고 살려고 혹은 정든 회사를 떠나기 아쉬워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 성남공장도 중국 공장도 차례차례 문을 닫게 됐죠. 뭐 경쟁에서 진거 아닙니까. 처음 상황이 안 좋아 졌을 때 어떻게 해서든 부도를 막았어야 했는데..."

한국벨트를 안동 최고의 기업으로 만든 도한복 회장

   
►한국벨트 도한복 회장

법정관리 상태에서 IMF로 안동 공장을 폐쇄하고, 안동을 떠나야 했던 도한복 회장. 그는 참기업인이자 근·현대 안동 경제의 중심이었고 역사였다. 자본금 40억 원 규모의 한국벨트를 88년 10월 상장기업으로 만드는 등 안동지역 고용창출에 큰 역할을 한 분이었다.

도한복 회장은 1921년 7월 4일 김천에서 태어나 1938년 경성직업학교를 졸업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 전쟁 후 김천으로 귀향하다 안동에 자리 잡으면서 한국벨트를 설립하게 된다. 이후 1964년~1985까지 안동상공회의소 회장, 1968년~1985년까지 대한상공회의소 감사, 1975년 안동시 자문위원장 등을 역임한다.

"회장님은 평소 술, 담배도 하지 않고 일만하던 분이죠. 제조업을 통해 안동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한 기업인이었어요. 안동제조업체 최초로 1988년 10월 13일 주식 상장 기업체로 등록해 당시 우리사주 주식을 6.500원에 직원들에게 배정하기도 했고, 법무부 안동시 교정위원으로 활동 하시면서 퇴소한 재소자들의 재활을 위해 노력하시던 분이었어요. 그분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도 찾아 갔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평소 도한복 회장을 존경해 왔다는 어느 이의 말이다.

실제로 한국벨트에는 유난히 퇴소한 재소자들이 많았다. 권 씨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도 회장과 관련한 법무부 안동시 교정위원 활동과 관련한 언론보도가 1991년 7월 5일 중앙일보에 게재되었다. '전과자재활 길잡이 25년/보호선도대상 수상 한국벨트 도한복 사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기사내용은 교도소부탁 출소자 특채 인연/기술 가르쳐 결혼식까지 주선/8백여명 대부… "참된삶 사는것 보면 보람"으로 시작해 재소자 출신들을 친자식같이 돌보며 갱생의 길을 열어준 사실들이 나열돼 있다. 도 회장은 "처음 이 일을 할 때는 기업경영에 흠집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세상이 서러운 전과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참되게 살겠다는 그들의 의지와 마주치면서 보람을 느꼈다"라고 당시 인터뷰에서 말했다.

   
►1991년 중앙일보에 실린 도한복 회장 기사

특히, 도 회장은 1970년 5월 16번이나 감옥을 드나든 출소자를 맡아 "단한번의 인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설득, 본인의 희망에 따라 목공예기술을 가르친 뒤 그해 가을 안동시내에 자그마한 목공장을 자영토록 해줘 심성 착한 사회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도 회장의 감동적인 교화활동이 전국 교도소로 알려지면서 많은 출소자들이 도 회장을 찾아왔다. 그런 출소자들을 모두 받아들이다 보니 한때 한국벨트의 근로자 2백명 중 30%에 가까운 56명이 재소자 출신이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도 회장도 70년대 오일쇼크이후 불황이 닥쳐 회사 수출고가 뚝 떨어지자 날마다 찾아오는 출소자들을 일일이 받아줄 수 없게됐다. 도 회장은 취업을 못 시켜준 이들 출소자들의 생활비도 월 3백여만 원씩 지원해 주다 못해 안동시·군을 비롯한 인근 영주·영풍·봉화등지의 지역인사들을 찾아다니면서 갱생보호활동에 동참을 호소. 마침내 1백23명의 보호위원을 확보하고 연간 1억3천4백만원의 갱생보호기금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78년부터 자활한 피보호자 10쌍의 합동결혼식을 주선하고 생계가 어려운 피보호자 73명에게 생계비를 지원하는 등 도 회장의 갱생보호사업은 눈에 띄게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그때 도 회장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는 피보호자들이 8백여명이나 됐다. 여기에다 그동안 도 회장이 경영하는 한국벨트에 취업한 전과자들만도 3백 10명.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1백70명은 최신 기술교육을 거친 1급 기능공들로 대구·경북지역 각 기업체에서 모셔갈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도 회장의 인덕과 경영 마인드는 1984년 대한상공회의소 창립 1백주년 기념식에서 상공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해 동탑산업훈장, 새마을훈장 노력장, 국민훈장 동백장 등으로 돌아오게 된다. 또한 1992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 중국 방문에 동행할 경제사절단에 포함되기도 한다.

   
►서울시 중구 수표동 한국벨트 본사

이 당시 함께 방중 한 재계 인사들은 삼성전자 강진구 회장, 현대그룹 정세영 회장,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금성일렉트론 구자학 회장,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 기아자동차 김선홍 회장 등 현재 이름만 들어도 아는 잘나가는 기업의 총수들이었다. 그 사이에 한국벨트 도한복 회장이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들은 중국 정부 및 기업인들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 대중경협 라인 형성에 주력하는 한편, 상황에 따라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라는 명을 듣게 된다.
      

한국벨트와 함께한 시절

당시 한국벨트는 공장을 다니지 않았던 안동 사람들에게도 기억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북문동에 위치한 한 종합 건설사의 업무부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오한 씨의 추억에 한국벨트는 신기한 놀이 감이 많이 있던 놀이터였다.

"어린 시절 공장에 다니던 어른들에게 야단맞고 쫓겨나기도 많이 했죠. 그래도 공장에 놀 거리가 많아서 당시 동네 친구들이랑 많이 놀러 갔죠. 사실은 공장 안에서 놀기보다 공장에서 나오는 폐기한 벨트들에 관심이 있었죠. 못 쓴다고 버린 벨트로 팽이채를 만들면 팽이에 쫙쫙 감기는 맛이 다른 팽이채는 상대도 안됐어요. 그래서 폐기한 벨트 자투리를 훔치러 많이 들락거렸죠. 뭐 어차피 못 쓰는 거니까 가져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때 어른들한테 혼도 나고 뭐 그런 기억이 아직 생생하네요"

"그리고 북문동·신안동 등 동네에 한국벨트 공장에 다니는 형·누나들도 많았어요. 다들 자취생활을 했는데 동네 빈방이 있던 곳은 거의 한국벨트 직원들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누구네 집 세들어 사는 형·누나가 된거죠. 지금도 안동에 자리 잡고 많이들 살고 계세요. 뭐 간혹 길에서 마주치기도 하는데 모습들이 많이 변했어요. 세월이 지나면서 한국벨트도 없어지고...... 그런게 세월 아니겠어요. 저도 벌써 30대를 훌쩍 지났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아니지 요새 10년이면 강산이 두 세 번은 변하는 세월이니 말이죠. 세월이 지나니 그때 동네 친구들이랑 놀던 어린 시절이 좋기도 했고, 뭐 어린 시절 추억들이 다들 있잖아요. 제 추억 중에 한국벨트가 있는 거고요. 이제는 진짜 추억 속에만 있네요"

   
►1977년 한국벨트 안동공장 직책자 신년 기념회

북문시장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아주머니의 추억 속에 한국벨트는 서러움이다. "이름은 알아서 뭐할라고. 몰따 안 가르쳐 줄란다. '한국벨트?' 나도 거서 일 했제. 근데 인자 다 까묵고 기억도 잘 안 난다. 그래도 나도 안동사람이지만 한국벨트 공장 문 닫을 때 안동사람들한테 마이 섭섭했다. 내사 거서 일해가 새끼들 입에 밥도 넣어주고, 몰래 친정에도 좀 보내고, 집에 생활비도 보태고 안 그랬나. 그 당시 누구나 겪은 신파 아이가 신파. 근데 주위에 아파트가 생기고 그카디 거기 사는 사람들이 시청에 민원을 그리 마이 냈다 카더라. 공장도 그래가 문 닫은거 아이겠나. 나는 그래 생각 한다. 아무리 그래도 거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얼매나 많았노. 신안동 그 동네 다 거서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돈으로 안 살았나! 근데 그 공장을 그래 쫓아 내뿌만 안되지 안글나?

어디서 생긴 오해였을까? 그 아주머니 생각은 확고했다. 아니 그렇게라도 그 공장에서 일하던 자신과 그 공장에 대한 애정을 담아냈던 걸까? 아주머니의 독백은 그 시절 한순간에 든든한 직장이었던 한국벨트를 떠나야 했던 많은 구성원들의 섭섭함을 대변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듯 이제는 사라진 한국벨트의 추억은 한국벨트를 기억하는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저장되어 있다. 바삐 돌아가는 기계소리와 벨트공장의 상징인 몇 개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아직 기억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한국벨트는 안동 발전의 주춧돌이었고, 안동 상공업 발전의 선두주자였으며 자부심이었다.

   
►중국공장 설립을 위해 견학차 한국벨트 공장을 방문한 중국 이창장 대표 일행 공장 견학 기념사진.

1960-1990년대 안동시 용상동 일대에 있었던 안동경제의 중심 제조업 사업체

신안동 일대에 안동 경제의 중심이었던 한국벨트가 있었다면, 용상동 일대에는 소규모 제조업 사업체가 상당수 자리하고 있었다. 안동 시내에 있던 일부 공장들이 환경문제로 인해 당시 미개발 지역이었던 용상동 일대로 이전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안동기계제작소, 안풍기계제작소, 안흥주물공업사, 섬유기계전문생산업체 한국샷틀공업사, 탈곡기 및 농기계 생산업체 영동농기구, 알루미늄 솥 제작업체 삼화공업사, 스카프지 생산업체 ㈜상경섬유 등이 용상동에서 화려한 시절을 보내다 굴뚝 산업이라는 굴레를 안고 1990년대 말경 대부분 사라졌다. 이들 기업들의 이력과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들도 한국벨트와 마찬가지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아니 더 작은 영세 공장들이다보니 잊히는 속도도 그만큼 더 빠르다.

   
►안동시 용상동에 자리잡고 있던 안풍기계 전경

현 용상동 성광자동차 옆 VIP 주유소 일대가 안풍기계가 있던 자리다. 안풍기계 역시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기업이었다. 안동기계와 함께 난방용 주철방열기, 배수용 주철관 등을 생산하던 기업이었으나, 1980년 중·후반 PVC의 보급으로 인한 주철관 수요 감소, 출혈경쟁 등으로 어려움에 놓이자 자구책으로 주철관 대신 아령·바벨 등 운동기구 생산으로 제품을 전환, 미국·일본 등에 수출을 추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저 주유소 하고 그 옆에 건물하고, 암튼 공장이 꽤 컸지. 그때 용상동에 뭐 있었나! 지금이야 아파트들이 많이 생겨서 안동서도 인구가 많은 동네지만 이게 다 그때 그 공장들이 여럿 있으면서 용상동에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가게들도 생기고 사람 사는 동네가 됐지. 옛날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근데 지금은 그 공장들 다 없어졌지 이제는 우리또래 아니면 기억하는 사람들도 없어. 일하던 사람들도 어디로 갔는지 뿔뿔이 흩어지고 동네서 공장에서 일했다는 사람 못 본거 같은데......" 용상동 성광자동차 정비공장을 운영하는 권기용 대표가 기억하는 안풍기계를 비롯한 용상동에서 호황을 누리던 공장들은 용상동 발전의 축이었다.

"뭐 굴뚝산업이다 뭐다 해도 그래도 제조업이 있어야 사람들도 모이고 도시가 살지. 그때 그 공장들 있을 때 생각해봐라, 인구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지. 그 공장들 다 없어지고 나니까 전부 외지로 일자리 찾아 떠나고 인구도 많이 줄었지. 인제는 제조업 하고 싶어도 안동서는 규제가 많아서 하고 싶어도 못한다. 수상동 공업단지도 다 이전해야 한다는 마당에 가당키나 하나"

권 씨의 말처럼 1990년대 용상동 일대에 있던 공장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안동의 발전 축이 옥동 등 서쪽으로 이동하고, 2008년 경북 도청이 안동시 풍천면과 예천군 호명면 일대로 이전이 확정되자 용상동 일대는 차츰 낙후지역으로 변한다. 공장이 있던 당시,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이라 아직 안동에서 동 단위로는 인구가 많은 지역이지만 발전축이 없어진 것이다.

   
►안동기계 제작소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 모습

용상동에는 안풍기계의 경쟁업체로 비슷한 물품들을 생산하던 안동기계도 있었다. 안동기계가 있던 동네를 돌아다니며 안동기계에 대한 수소문을 하자 동네 터줏대감으로 보이는 한 어른이 손가락으로 위치를 알려준다. "저기래 저~짜" 어르신이 알려준 곳은 현재 경북북부보훈지청과 안동시선거관리위원회가 있는 곳이다. 이곳이 안동기계가 있던 자리다.

   
►안동기계 제작소 옛 모습

"근데 그거는 왜 찾노. 거 일하던 사람들도 인차는 암도 없을 낀데 혹시나 여즉 여 사는 사람이 있을동 몰따만 내는 모리겠다. 울 동네는 없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까지 치신다. "그때 공장에 일하는 사람들 많았니껴?" 재차 물어 보았다. "하믄 마내찌. 근데 공장 문 닫고 나서 다 어디로 가뿌랬는지 내도 몰따." 한 때 ㉿표시허가공장 겸 수출품 생산지정 업체로 난방용 주철 방열기로 KS마크를 획득하고, 무재해 기업으로 선정되는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1972년 기업은행으로부터 중소기업 경영합리화 우량업체로 인정받던 안동기계의 처참한 말로다.

용상동에 자리잡고 호황을 누리던 공장들이 하나 같이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근·현대를 지나면서 기록의 보관과 유지를 위해 일시적이나마 5-10년간 유지 되어 왔던 안동시청 등 관공서의 사서나 문서도 보존기한이라는 유예기간이 지나면서 이들 기업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그저 70~80년대 안동시에서 하는 행사에 협찬하면서 광고로 올린 사진 몇 점 정도가 일부 어르신들의 기억과 함께 남아 있을 뿐이다.

강원도의 경우 1900년대 초부터 70년대 무렵 건립된 건축물로, 도시개발 내지는 생활양식의 변화로 사라져가고 있는 건축물들을 대상으로 기록 작업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초등학교 분교는 물론 관공서, 공장, 이발소, 성당과 교회, 방앗간 등을 비롯해 함석집, 슬레이트집 등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가옥들을 찾아 렌즈에 담고 있다. 시대가 변해가도 그 곳에 대한 이력이나 변해가는 과정 등 역사를 보존하겠다는 취지다.

누군가는 이미 흔적조차 희미한 사라져버린 작은 공장들에 대해 자료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아무런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공장에서 청춘을 보내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았던, 혹은 그 공간과 그때 그 사람들을 기억하는 누군가에게는 그 공장의 의미가 그 어떤 가치보다 클 수 있다. 시대가 변했다고, 시간이 흘렀다고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혹은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이라도 세월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을 렌즈에, 데이터베이스에 하나하나 남기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 기록이 아닐까?

하나 둘 떠나고 남은 텅 빈 공간이나 변해버린 모습은 크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지나왔던 시간들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만든다. 아마도 다시는 떠올리지 못하게 될 시간을 붙잡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그 때 그 사람들, 공간들을 하나씩 돌이켜 생각하게 한다. 같은 장소 같은 사람이라도 저마다 다르게 기억되지만,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도, 기쁘고 즐거웠던 시간도, 결국 추억이라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세월 속에서 회상의 울림으로 남게 한다.

 

김용준(경북인뉴스 기자) / 피현진(UGN경북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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