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봄이 즐거운 이유,
시대의 예술가 소천 권태호
우리의 봄이 즐거운 이유,
시대의 예술가 소천 권태호
  • 이희수(경북기록문화연구회 회원)
  • 승인 2017.06.13 1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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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4-1)

안동에서 활동하는 많은 문화예술인들의 오늘이 과거가 되는 날이 온다면, “그들의 오늘”이 보여주는 것은 비단 업적뿐이 아닐 것이다.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을 위한 근대기행> 그 네 번째로 만나볼 이야기는 바로 우리 지역 문화예술계 인물이다. 한 시대 안의 예술인이 남긴 문화예술적 자취를 통해 지나간 시대를 반추하는 추억의 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윤중로교장 정년퇴임식장 문구가 적힌 플랜카드. 학교 정문 안으로 학생들이 엄숙한 분위기로 서 있다. 교정 내 단상에서 퇴임사를 하는 윤중로 교장.

“에, 여러분 내가 여러분께 마지막 부탁하고 갈 말은 여러분은 장차 출세를 하지 말아달란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지위가 높아지고 권세가 높아지면은 사람이 교만해지고 방자해져서 그 아름다운 인간미가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에- 이것은 이 윤중로 아니 여러분의 칭호 와룡선생으로서 여러 제자들에게서 체험한 경험담이죠. 자기와 자기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참다운 인간이 되어달란 그 말입니다.”

위 내용은 코미디로 분류되는 조흔파 선생의 동명소설을 영화한 풍자극 <와룡선생상경기> 의 한 장면이다. 가벼우면서도 진지한 이 영화의 주인공 와룡선생의 실제 모델은 바로 음악가 소천 권태호 선생이다.

만년의 소천 권태호 선생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소천 선생을 모델로 한 영화 <와룡선생상경기>

출처 : 다음 영화

음악가를 모델로 한 영화이니 음악가 얘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다. 소천이 광성고보 시절 교사로 재직하던 때, 제자였던 조흔파는 당대 성악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소천 선생이 보여줬던 시대적 인물로서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와룡선생>을 통해 담아내고자 한 것 같다. 한국 서양음악사의 시초를 다진 선구자로서의 업적은 물론, 영화에서 비춰진 ‘아름다운 인간미’를 실천한 소천의 모습 또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남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성악, 음악교육, 작곡분야를 포괄한 음악인이자 영원한 안동의 청년, 소천 권태호의 생애를 통해 예술혼 가득한 그의 삶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음악가 소천, 안동에서 태어나다

9월 16일, 안동군(安東郡) 법석골 17번지(현 화성동 17번지 - 당시 법석골 17번지는 1947년 법상동에서 화성동으로 편입됨)에서 태어났다. 때문에 현재 화성동(법정동, 행정동으로는 서구동 일부)의 자리를 가면 선생의 생가 터 비가 세워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금명로의 낙타길을 따라 안동부설초등학교를 왼편에 끼고 화성윗길로 접어드는 길목에 이르면 선생의 생가 터가 보인다. 안동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지만 당시에는 아랫마을과 동떨어져 뒤로 산이 있고 앞에는 개울이 흘렀다고 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땅의 주인이 서울에 있어 선생의 생가 터에 작게나마 공원을 조성하고자 하는 지자체의 노력이 쉽사리 진전을 내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공터로 내버려져 쓰레기더미가 무성했던 예전에 비하면 얕으나마 돌로 축대를 쌓아 주변을 정리하고 헐린 생가의 빈자리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심겨져 허전함을 달래고 있다.

권태호 선생의 생가 터 소나무

 생가 표지석(안동시 화성동 17번지)

소천 선생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사실 그의 아버지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안동에서 그 의미가 더 깊은 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 권중한이 초대 안동교회의 1세대 신자이기 때문이다.

소천 선생의 부친은 안동권씨 동정공파 32대인 권중한(1887∼1939)으로 자신보다 연상인 안동김씨 김귀행(1881∼1958)과 결혼하여 현재까지 밝혀진 바, 3남 3녀의 자녀를 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소천 선생의 형제는 3남 4녀(음악관전시기록) 2남 2녀(음악관 최근공식기록)로 그간 알려져 왔는데, 소천의 부친이 초대 학습교인으로 등록된 안동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세례명부에 이름을 올린 권중한의 자녀는 3남 3녀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안타깝게도 소천 권태호 선생 생전 가족사와 일들이 정확히 기록된 바 없고 아들, 손자 대의 유족과 그의 말년을 보았던 지인들의 전언을 통해 기록들이 정리되고 있는 과도기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렇듯 정확한 기록물 또한 발견될 수 있는 일이 있어 다행이고 소천을 기억하려하는 많은 분들의 물심양면 노력에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안동교회 세례명부_권태호 (자료제공: 안동교회 권정국 장로)

안동교회 세례명부_권중한 (자료제공: 안동교회 권정국 장로)

이렇듯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소천 선생은 노년에 들어 대구일보에 “나의 이력서” 란 연재를 통해 자신의 기록을 남겼는데, 그 중 선생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부분이 있었다.

당시 어른들의 사상은 양반이나 따지는 고루한 습속 그대로였다. 우리 집은 안동 동부의

잿집으로 불리리만치 부농이었다. 우리 집과 어깨를 겨눴던 집으론 서부의 잿집이라 불리

었던 권오종, 권오훈 씨 가문이었다. 내가 철부지 나이 때엔 안동 東‧西部의 행세깨나 하

는 어른들이 사랑방에 모여 매일 잔치를 열다시피 했다.

-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139호 ‘김원길-안동의 해학’에 실린 소천 권태호 선생 일화 중 -

소천 선생의 집안은 당시 안동에서 동부 잿집으로 이름난 부호였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적 어지러움에 얽혀 소천 선생의 집안은 그 부를 잇지 못했다. 토지조사령이 내려진 1912년부터 1918년까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토지와 재산을 잃은 많은 이들 중에 소천 권태호 선생의 집안 또한 빠질 수가 없었다. 혼란한 틈을 타 동부 잿집의 재산을 탐낸 이도 있었을 것이고 기독교인이 된 선생의 부친을 못마땅해 한 인척도 있었으리라 본다. 그 안에서 결국 재산을 지키지 못한 선생의 집안은 안막골 초가로 터전을 옮기게 된다.

이러한 시대와 가정의 어려움 안에서 아마도 선생을 지탱한 것은 음악이 아니었을까 한다. 소천 선생이 음악을 접하게 배경은 잘 알려진 것처럼 아버지를 따라 간 교회에서 서양음악을 접하면서 부터다. 사실 서양음악이 자연스레 동양문화와 어우러지게 된 데에는 단연 교회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묵상과 기도만큼이나 찬송의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때문에 교회는 소천 선생이 서양음악과 인연을 맺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매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음악의 1세대 파종자인 지금의 소천선생을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풍금소리다. 지금의 안동교회가 있기 전 광석동에 ㄱ자 형태의 열여섯 칸으로 이루어진 초가로 된 예배당에서 선생의 부친은 초대 학습교인이 된다. 어린 소천은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놀러가게 되고 우연히 풍금소리를 듣게 된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신기한 악기 소리는 개구쟁이 8살 소년 권태호의 마음에 아마도 ‘도레미파솔라시도’ 하고 말을 걸지 않았을까. 소천 선생은 그날 이후로 풍금에서 손을 놓지 않게 된다.

그 옛날은 피아노나 풍금을 보고 ‘검은통’, ‘귀신통’ 이라고 했다는데, 유입과정이야 정확하지 않지만 당시 낙동강 물류의 최대 중심지였던 대구의 사문진 나룻터가 한국 최초의 피아노 유입지로 알려져 있기는 하다.

1970년대 사문진 (자료제공:달성군청 ⓒ한삼화)

1970년대 사문진. 현장에는 피아노를 최초 들여온 곳이라 되어있는데, 아마도 시대적 정황상 풍금이 아니었을까 한다. (자료제공:달성군청 ⓒ한삼화)

여러 가지 화음을 펼치는 이 건반악기의 요염한 매력에 빠진 소년 권태호는 호기심뿐만 아니라 타고난 재능까지 겸해 당시 안동교회에 선교사로 사역 중이던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더 깊이 있는 음악교육을 배우게 된다.

소천 선생에게 풍금을 가르친 선교사 부인은 두 분이 있다고 전해진다. 한 분은 Crothers 목사 부인 Mary Ellen Bryan(한국명 권애라, 1878∼1966)또 한 분은 Winn 목사 부인 Jessie Catherine Lewis(1883∼1953)이다.

소천 선생은 두 분의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청년기를 거쳐 1923년 20살이 되던 해까지 안동읍 예배당(현 안동교회)에서 보다 탄탄한 음악 교육을 받는데, 1922년 피아노 전공자인 권애라 사모가 피아노를 들여오면서 소천 선생의 음악적 세계는 한층 무르익게 된다. 이윽고 선생은 성가대의 지휘는 물론 교회의 반주자가 되어 기량을 펼치게 되는데, 찬송가의 4부 악보를 모두 외워 칠 정도였다고 한다.

안동읍 예배당(현 안동교회)의 소년 권태호. 1920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하지만 그간의 과정이 모두 무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침탈로 가세가 기울자 소천 선생은 안동보통학교(현 안동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15세가 되던 해 안동우편국 통신수로 취직을 하게 된다. 당시 숙련기능공의 하루 일당이 1원 50전 하던 때로 선생은 후일 4개월 치 봉급을 모아 일본으로 떠나기 위한 종자돈으로 삼게 된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끈기가 남달랐던 소천 선생은 도쿄의 음악학교로 유학을 갔던 유학생들의 소식을 이모저모 들으며 아마도 유학에 대한 결심을 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1923년 성년이 된 소천 선생은 1906년생 청송 처자 윤옥선 여사와 결혼을 한다. 당시 소천 선생은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는데, 안타깝게 사진은 찾을 수가 없지만 결혼증빙서는 지금까지 잘 간직되어 있다. 소천은 슬하에 3남 4녀의 자녀를 두게 된다. (장남 권영건(작고),자부 류자연(청마 유치환의 삼녀, 작고) / 장녀 권정덕, 사위 박희재 / 차녀 권정옥 / 차남 권영순, 자부 유영자(작고) / 삼녀 권정석(작고) / 사녀 권정복, 사위 임승균 / 삼남 권영완, 자부 김정한)

소천 선생과 윤옥선 여사의 당시 기독교식 결혼을 알 수 있는 결혼 서약서

음악은 한 나라를 망하게도 할 수 있고 살리기도 한다.

선생의 음악활동은 대략 20대 후반부터 40대를 전후하여 성악활동을, 광복 후부터는 작곡활동을 한 것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소천 선생을 기억하기에 우리는 작곡가로서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곡은 세대를 달리하며 계속해서 그 음악이 불리어지지만 성악은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의 생전 목소리가 공식적으로 남은 바 없어서이기도 하다.

특히나 소천 선생이 작곡한 노래 “봄나들이” 와 같은 곡은 작곡자로서 선생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소천 선생이 남긴 많은 곡들의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1949년 선생의 작곡집을 기준으로 대략 200여곡 이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 소천 선생의 성악가로서의 업적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이제 막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청년 권태호는 결혼한 지 불과 1년여가 난 1924년 홀로 일본행을 결심한다. 안동우편국의 통신수 일을 과감하게 그만두고 홀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이다. 아내를 홀로 고국에 남겨두고 떠나는 마음이야 오죽했을까마는 아들로서, 딸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아버지와 남편에 대한 가족들의 그리움과 허전함을 지난한 긴 세월이 어루만져 주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굳은 결심 끝에 일본으로 건너간 소천 선생은 음악학도로서의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한국에서 초등교육까지 마친 선생은 일본 아오야마학원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야간중학부 과정을 속성을 마치고 일본에 정착한지 3년만인 1927년 니혼음악학교에 합격한다.

도쿄 아오야마학원 재학시절, 1925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이때 실기시험에서 선생은 찬송가를 불러 합격하게 되는데 이는 꽤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이어 1930년 선생은 니혼음악학교 본과 성악부를 졸업, 이후 소천 선생은 작곡은 물론 성악가로서의 활약이 한국과 만주 그리고 일본까지 종횡무진 펼쳐지게 된다.

니혼음악학교 은사인 이노우에 오리코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니혼음악학교 재학시절, 1928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니혼음악학교 입학 직후 당시 시대적 정황상 한국인임에도 ‘베토벤 백년제’ 와 ‘히비야’ 의 일본 무대에 독창자로 오른 것과 후일 대구에서 한국인 최초로 국내 독창회를 개최함으로써 소천 선생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타고난 음악적 역량과 끈기 있는 노력으로 소천 선생은 성악가로서 국내외에서 당당히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소천 선생이 성악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것은 당시 언론과 음악관에 기록된 사진 자료로도 확인할 수 있다.

<1920~1940 소천선생의 음악활동을 보여주는 사진과 언론 기록들>

재일본동경조선연합교회 성탄축하회 찬양대원 기념촬영, 1929.12.27.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재학중 일본 시미즈(淸水) 독창회, 1927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독창회(평양 백선행 기념관에서), 1930.10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경성방송국에서 숭전합창단과 함께 1931,2.8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독창회(평양 광성고보 강당에서), 1931.06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경성보육학교(장곡천정공회당)에서, 1934.10.30.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사진에 홍난파, 이은상, 김원복, 권태호, 독고선)

대구제일심상소학교 (현. 대구초등학교) 대강당에서 한국인 최초 국내독창회, 1928.7.14.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권군고음독창회'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1928.7.8.

찬조출연으로 유회우, 견신희, 반주에 박태원 그리고 본보독자에 한해 할인우대한다는 내용이 있다.

'의미깁흔 권태호씨 독창회' 한국에서 두 번째 국내 독창회_서울종로기독교청년회관

동아일보 기사 1928.9.16.

'권태호씨독창회, 안동서 성황' 동아일보 기사 1936.1.9.

'음악가권태호씨 음악연구소설치' 평양

성악과, 기악과에 모집군을 두고 음악학교 입학시험준비과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확인할 수 있다. 기사에서는 아울러 음악초보자 지도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기악과의 경우 초보자에 한해 뽑았다. 동아일보 기사 1938.10.19

소천 선생은 1928년 니혼음악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에 들어와 우리나라에서 독일예술가곡을 가지고 독창회를 개최했다. 당대 주목 받은 많은 성악가들이 있었으나 한국인 최초로 국내에서 독일예술가곡으로 독창회를 연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국내외를 아울러 당대 손꼽히는 성악가였음을 일러준다. 사진 자료와 기사가 보여 주듯 선생은 성악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고 음악활동 영역을 국내 전역(특히 대구와 평양)은 물론 일본 그리고 만주까지 왕성히 넓혀나갔음을 알 수 있다.

개성 송악산 관음사 앞에서 지인과 함께한 선생 모습(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독고선, 오천석, 권태호, 홍난파, 앞줄 오른쪽은 김성남 여사(오천석 박사 부인)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음악은 나라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한다”는 생전 말씀을 남긴 소천 선생은 음악에 나라에 대한 애국심은 물론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열정을 쏟았다. 독일예술가곡을 한국에 뿌리내린 선구자로, 음악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음악가로,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청년으로, 소천 권태호 선생의 남다른 열정은 그가 남긴 곡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알려진 바로 안동과 대구 등 지역의 교가와 군가를 합쳐 114곡을 작곡하고 가곡에서 동요까지 다양한 곡을 남긴 소천 선생이다. 특히 대구를 중심으로 국민개창운동을 펼치며 『국민가요집』을 발간했다.

< 소천 선생이 남긴 악보 관련 자료 >

 안동중학교 교가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 교가(옛 안동농림고등학교)

길안초등학교 교가 원보. 출처 :소천권태호음악관 전시물

영주여자중고등학교 응원가 원보. 1960년대.

작곡출처 :소천권태호음악관 전시물

 사향가, 선생의 친필악보 (작사가 김수향은 윤복진의 필명)

소천권태호음악관 전시물

국민가요집, 1949년 발행된 선생 유일의 작곡집.

출처 :소천권태호음악관 전시물

동아일보 1931.1.3.에 실린 동요부문_눈꽃새 삼등 당선_모령(모령은 모기윤 시인의 필명)

동아일보 1933. 3.15 에 실린 눈꽃새 전면 악보

동아일보 1932.7.30. 일자에 실린 조선의 노래 악보

특히 소천 선생의 음악적 공로가 특히 빛을 발하는 것은 개인의 성취를 위한 음악적 작업이 아닌 사회적 교류는 물론 시대와 함께 상생하는 많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한 일화로, 해방 전 문화예술가로서 어지러운 시대적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 동참하려 한 것을 당시의 기록 일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대구음악학교 시절 영화 <와룡선생상경기>의 배우 김희갑과 권태호 선생의 만남. 기사내용 중 백림(베를린)올림픽 이야기가 있다. 동아일보 기사 1963.7.9.

백림올림픽때 ‘기정과 승용이 너를 보내고’(서환석 작사)를 작곡하여 유치장에까지 들어간 이야기는 유명하다. (중략) 권씨는 지금 대구에서 국민가요합창단을 만들어 국민개창운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위 <와룡선생상경기> 실재 주인공과 대역의 만남 기사 중

‘기정과 승용이 너를 보내고’는 1936년 일제치하 베를린 올림픽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았던 선수들을 위로하는 노래였을 것이다. 이 노래를 작곡한 소천 선생이 구금되었던 것이다. 삼엄한 시대였지만 선생은 굴하지 않았다. 소천권태호음악관의 이필근 관장은 선생의 음악에 깃든 정신에 대해서도 후손이 꼭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악가로서의 소천 선생의 업적이 주목받지 못한 것 또한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선생께서 남긴 많은 곡과 그 업적을 미뤄볼 때 소천 선생은 나라에 대한 사랑이 매우 남달랐어요.

나라에 대한 애국심, 민족에 대한 정신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사랑, 앞으로의 꿈은 어린이들이며 또 나라를 일으켰으면 좋겠다는 그런 심정이 그 분의 모든 음악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때문에 우리 정서 속에서 소천 권태호 선생의 음악이 살아 움직이고 그 음악을 통해서 기쁨도 얻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 음악관 또한 그런 의미에서 지켜가고자 합니다.“

안동출신으로 명성을 날린 3명의 인사들을 환영하는 행사인 삼씨 환영회(앞줄 가운데가 선생이며 좌우에는 연식정구선수 권복인, 천계근) 1935.8.13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동아일보 안동지국 주최의 삼씨 환영회 기사. 1935.8.16.

소천 선생이 국내외 활동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1935년 8월 13일 안동공립보통학교(현 안동초등학교) 강당에서 그 공로를 높이 세우고자 조선악단과 운동계에서 이름을 날린 삼씨의 환영회가 열렸다. 동아일보 안동지국 주최의 이 환영회로 보아 당시 선생의 사회적 추대 분위기와 업적을 알 수 있음직하다.

와룡선생, 모두의 음악가로 남다

평양에서 도쿄까지 선생은 국내외를 넘나드는 왕성한 활동으로 비정기적인 독창회와 합창단 조직을 통한 활동은 물론 음악 교육에까지 그 영역을 넓혔는데,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에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많은 애를 쏟기도 하였다.

광성고보 재직 시절 선생의 제자 중에는 작고한 소설가 조흔파가 있다. <얄개시대>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그는 후일 선생을 기리며 <와룡선생상경기>를 쓰게 되는데, 위에서 거론된 신문기사의 김희갑 씨와의 만남은 바로 선생이 영화화된 소설 <와룡선생상경기>에서 와룡선생의 실제 모델이기 때문이다.

스승에 대해 남달랐던 제자 조흔파는 소설뿐 아니라 후일 선생에 대해 회고한 기록 또한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에는 당대 음악가로 “서울의 현제명 평양의 권태호”가 손꼽혔다며 짤막하게 소천을 회고되기도 한다. 아버지와 동생 모두 목사였는데도 술 좋아하기로 유명했고 제자에 대한 애틋함이 남달랐으며 특히 선생의 말년을 회고하는 부분에서는 건강이 쇠약한 모습에 세월의 무상함을 탓하듯 눈물을 자아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소천선생의 일화가 담긴 조흔파의『화끈합시다』 책과 내용 일부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소천 선생의 일화에는 술과 관련된 재미난 일도 있다.

-돼지그림 술안주

술친구들은 나의 호를 소천(笑泉)이라 부른다.

내가 있으면 웃음이 샘물처럼 솟아난다고 그렇게 부른단다. 6.25 사변 직후 서울의 술친구들이 모두 대구로 피난해 있을 때이다. 그때 직업도 없는 문인, 화가, 음악가 등 예술인들은 밤낮 모여 술만 마셨다. 주로 ‘석류나무집’이란 술집에서 모였다. 하루는 스무 명이 석류나무집에 둘러앉아 안주 없는 술을 먹고 있었다. 우리 옆 자리에 앉아 가죽 잠바를 입고 술을 먹던 서너 명이 고기 안주만 시켜 먹고 있었다. 장난기 심한 이응노(李應魯)가 돼지 한 마리를 커다랗게 종이에 그리고 “우리 안주는 이거다. 방금 통째로 구워왔으니 모두 실컷 먹어라.”고 농을 했다. 몸집이 큰 김팔봉(金八峰)은 “덩치가 내가 크니까 고기는 내가 좀 더 먹어야 된다.”면서 돼지 한 마리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맞은편에 앉은 양주동(梁柱東)이가 “나는 덩치가 적으니 빨리 많이 먹고 좀 커야겠다.”면서 돼지 한 마리를 ‘포켓트’에 집어넣어 버렸다. 좌석엔 한바탕 폭소가 터지고 “야, 이놈아, 고기 다 처먹어라.”고 고함을 질렀다. (중략)

(위 에피소드는 그의 생전 1971년 3월 13일부터 24일까지 대구일보에 게재한 「나의 이력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139호 <김원길-안동의 해학>에 실린 소천 권태호 선생 일화 중 -

사랑방 『안동』지에 위 글을 실은 김원길 시인은 소천 권태호 선생의 장남인 권영건과 인연이 있었더랬다. 소천의 장남 권영건이 안동에서 교직에 몸담던 시절 함께 안동공고에서 교사생활을 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선생의 애주는 대구 향촌동에서의 많은 문화예술인들과의 교류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아니었겠나 싶다. 피란 문화예술인들의 기항지였던 향촌동에는 구상 시인이 단골로 묵었던 화월여관이, 그 앞 백록 다방에는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던 천재화가 이중섭이 그리고 호수다방 앞 길목의 파수꾼이었던 소천 선생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아마도 이 시기를 전후해 소천 선생은 청마 유치환과도 인연이 닿아 막역한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훗날 소천의 장남 권영건과 청마의 셋째 딸 유자연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되니 말이다. 현재 두 부부는 작고하여 그 때의 상황과 증언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들 권영건이 후일 아버지를 회고하는 한 기록에서 아버지와 청마 유치환의 술자리에서 그 뒤를 봐주느라 고생했다는 대목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생전 그들의 인연을 짐작해 본다.

이후 소천 선생은 대내외 활동 중 건강이 점차 쇠약해지게 되는데 아마도 과중한 업무에 잦은 음주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6년, 보다 탄탄한 음악교육을 위해 소천 선생은 대구음악학원을 개설하게 된다.

'대구음악학원탄생,원장 권태호씨의 활동기대' 영남일보 기사 1946.5.19.

출처:국립중앙도서관

'대구음악학원생도모집' 영남일보 기사 1946.6.24 출처:국립중앙도서관. 생도모집 광고는 영남일보에 8-9월 간 주기적으로 냈다.

하지만 소천 선생의 당찬 포부와 달리 대구음악학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대구에 있던 일본의 마쯔다 별장을 허가받아 학원을 개설했는데 “대구 10월 사건”을 계기로 학원은 급작스럽게 미군정으로 흡수되고 선생은 큰 좌절을 겪게 된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선생은 경제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에 놓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음악을 통한 선생의 노력은 좌절되지 않았다. 음악으로 어지러운 시국에 놓인 국민의 마음을 위로코자 했던 선생은 국민가요집 발간, 군가 작곡 등 꾸준한 활동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그 지속된 노력으로 선생은 제1회 경북도문화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그 당시 함께 시상된 인물로 문학부분 청마 유치환 선생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기사에는 총6개의 수상부문이 있는데 그 중 “문학상에 유치환 그리고 작곡연주에 권태호” 로 쓰여 있다. 상품은 금메달과 현금 십만환이었다.

‘경북문화상수여 유치환 씨 등 육명’ 경향신문 기사 1956.3.7

이렇듯 많은 업적과 음악활동으로 공로를 인정받은 선생의 마지막 공연은 현재까지의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경주극장에서 한 것으로 되어있다.

경주 독창회를 마치고 경주극장 앞에서 1958.7.10.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개천예술제에서 음악대회 심사를 맡고 있는 소천 선생과 이용준, 조두남 1959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진주개천예술제 1959.11.3.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이후 소천선생은 대구에서 개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다 큰아들 내외가 있는 서울 상도동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1970년 안동으로 내려오게 된다.

현재, 안타깝게도 생전의 소천 선생을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다만 그의 유족과 지인 그리고 그 지인의 지인 등 먼 인연을 통해 소천 선생의 생애사와 업적은 끊임없이 기록의 기록을 거듭하고 있다.

선생이 안동에 내려오게 된 것은 지인의 말에 따르면 아들의 직장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역장교 출신으로 스마트하고 건실했던 장남 권영건은 유난히도 강직한 성격 탓에 당시 근무하던 관광공사의 내부 비리를 참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한다. 아마도 점차 건강이 쇠약해지는 아버지를 위해 고향으로 모시고자 한 뜻도 있었을 터 안동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아닌가 싶다.

자부인 청마 유치환의 셋째딸 유자연 또한 피아노를 배운 이력이 있기에 시아버지인 소천 선생을 모시고 안동에 내려와 ‘권태호음악연구소’를 열게 된다. 선생의 여러 가지 업적 상 그의 이름을 빌어 또 어른의 심중을 살피어 개설한 음악연구소에서는 며느리 유자연이, 지금으로 말하면 피아노 학원처럼 피아노 강습을 했다고 한다.

안익태 선생과 함께 1962.3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권태호음악연구소 _1970년 안동시 동부동 198번지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권태음악연구소에서 연주하는 소천 선생의 모습 1970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화려했던 그리고 여전히 식지 않은 열정의 젊은 음악가 권태호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소천 선생은 커피를 좋아하는 아들 내외를 위해 간혹 서울행을 한 날이면 제자와 지인들에게서 받은 커피를 가져다주었다는데, 젊은 시절 음악에 열정을 쏟느라 가족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애틋함을 수줍은 표현으로 대신하곤 한 듯하다. 덕분에 난로 위 따뜻한 물 주전자가 식을 새 없이 향긋한 커피향이 늘 권태호음악연구소를 가득 채웠다. 중풍으로 거동이 힘들었지만 생전 그를 잠시나마 기억하는 이의 단편 속의 소천 선생은 참으로 순수한 아이와 같았다 기억한다.

권태호음악연구소자리였던 동부동 198번지의 현재 모습

동신장 주차장 자리로 현재는 예전의 건물 입구가 주차장 벽으로 막혀 쓰레기분리수거대가 놓여져 있다. 안쪽의 오래된 담벼락은 아마도 그 옛날의 모습인 듯하다.

“예안 집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동구 밖 건너 낙동강이 있었는데 소가 도는 바위가 있는 곳에서 윤옥선 여사가 된장을 끓이고 소천 선생은 술 한 잔 자시면서 풍금을 치곤 했습니다. 기분이 좋으실 때는 늘 ‘옛날에 금잔디’를 즐겨 부르셨는데 아이같이 순수한 분이었어요.”

-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이사 윤종호

음악을 사랑하고 그 열정을 온 생에 전력을 다 했던 청년 권태호는 단돈 130여 원을 들고 일본으로 향하던 배 안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소천이라면 그때에도 두려움에 얼어있기보다는 아이와 같은 설렘과 순수한 열정으로 두근거리지 않았을까.

늘 아이와 같이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소천 권태호 선생은 안동으로 귀향한지 3년여 만인 1972년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흔적을 찾아보고자 수몰된 예전의 예안면 선양리 자리를 가보았다. 가물 때면 집터가 드러나기도 하고 장독이 올려져 있던 주춧돌이 있다하는데, 가문다 한들 세월에 그 자리를 기억해내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다.

소천 선생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예안면 선양리. 현재는 와룡면 오천리가 되었다.

안동군 예안읍 선양리 자택에서 선생 내외, 1970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안동출신의 유명한 작곡가 그리고 한국 서양음악사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1세대 성악가 소천 권태호.

선생이 작고하고 후손들의 시대에 새로이 자리매김하는 데에 그의 업적과 명성에 비하여 그 공백이 너무 길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그에 대한 글을 준비하며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기록되어있는, 그러나 조각처럼 흩어져 일련의 단편들로 그 시간을 훑어가다보니 너무나도 조심스러워 그의 업적에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작업을 훨씬 이전에 선행하여 지금의 소천권태호음악관을 자리하게 한 데에는 향토사학자 故정진호 씨와 소천권태호음악관 이사인 대륙사장의 윤종호 대표 그리고 소천권태호음악관 이필근 관장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음악관에서 각자의 역할로 소천 선생의 기록과 업적을 훑는데 여전히 많은 애를 쓰고 있는 이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선생의 생전 마지막 모습_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등나무 지팡이를 짚고. ⓒ사)소천권태호기념사업회

사실 이 이야기 뒤에 소천의 장남 권영건에 대한 일화도 덧붙여 보고자 했으나 하나로 따로 묶어야 할 이야기 분량이라 여기서 마감하고 다만 아들 또한 생전 돌아가진 아버지의 업적을 기려보고자 노력했던 흔적의 일부를 발견해 간단히 실어본다.

나리나리개나리 작가 권태호씨 생애 동아일보 1981.1.15

위 기사는 동아일보에서 “한국근대문화의 뿌리” 라는 기획기사로 다뤘던 “최초의 독창회” 에 소개된 소천 선생의 생애와 음악활동에 대한 기사를 접한 아들 권영건이 기자에게 편지를 보낸데 대한 내용이다. 아들 권영건이 편지를 보내게 된 원인은 본래 기사에서 소천의 한창 활동내용은 있으나 이후 행적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어 아버지의 말년 기록이 기사에 제대로 기술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사에는 아들 영건 씨의 제보대로 간략한 소천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작고 소식, 유족의 간략 근황이 실려 있다.

할아버지 음악이 손자의 음악으로

지난 5월 27일 소천권태호음악관에서 피아니스트 권준의 공연이 있었다.(앞줄 왼쪽부터 권준의 아내 이지원, 권준의 둘째아들 진형, 권준의 첫째아들 진송, 권준(권영건의 삼남), 권영건의 장녀 권오순, 자형 한영록 / 뒷줄 왼쪽부터 권영건의 차남 권혁, 권혁의 두 딸, 소천의 차남 권영순의 장남인 권익, 소천의 사녀 권정복, 장녀 권오순의 아들 한방상)

어린 시절 소천이 교회를 통해 서양 음악을 접했으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없었다면 그 길을 걷는 것 또한 불가능했으리라. 더욱이 그러한 인자는 타고나는 것이 분명한가 보다.

소천 선생의 손자, 그러니까 청마의 셋째 딸과 결혼한 장남 권영건은 슬하에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막내인 소천의 손자 권준이 바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피아니스트로 활발히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음악관이 문을 열고 꾸준히 안동을 찾아 “권태호 손자가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음악이야기” 란 테마로 공연을 하고 있다. 지난 5월 27일 행사에서는 막내의 공연을 함께 보러온 가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 권준 역시 만 3살이 되던 해 권태호음악연구소에서 피아노 개인교습을 하던 어머니가 그의 재능을 발견한 후로 음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한다. 사실 권준 씨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아주 잠시 뵈었기에 뚜렷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억보다 더 진한 음악에 대한 열정은 세대를 거쳐서도 뚜렷이 각인된 듯하다.

소천의 생전 육성이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현재 음악관에서는 여러 방면을 통해 일본에 남았을 소천의 육성 기록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비록 그의 생전 육성은 아니지만 소천의 손자인 권준의 피아노 선율 밖으로 왠지 소천의 노래가 들릴 것만 같은 것이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다.

마지막으로 권준 피아니스트의 메시지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지은 동요나 교가를 듣고 부르며 자란 경험은 흔치 않은 일이겠지요. 그때 느꼈던 감정이 막연한 긍지였다면, 중년이 된 지금은 오히려 묵직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 양질의 음악교육의 혜택을 받아온 저에 비해 사회적, 문화적으로 불안하고 낙후한 시대에 활동하셨던 조부님을 생각하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조부님을 비롯해 당시의 많은 음악가들이 민족의 계몽을 위해, 예쁜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또 교육현장의 활성화를 위해 활발히 활동하셨던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음악인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개인적인 음악적 재능과 열정, 그리고 자아실현을 넘어서 제가 속한 사회와 주변의 이웃들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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