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유산의 현재적 의의를 말하다
소리꾼의 생애, 달바우 김용락
오래된 유산의 현재적 의의를 말하다
소리꾼의 생애, 달바우 김용락
  • 이희수(경북기록문화연구원 회원)
  • 승인 2017.06.15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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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4-2)

한 사람의 인생이 한 분야의 최고로 기록되는 삶 또한 시대를 기록하는 삶으로 그 의미가 클 것이나 현재를 기록하는 삶 또한 현재진행형의 우리네 삶을 기록의 얼굴이 될 것이라 본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문화예술계 인물로는, 상여소리꾼 김용락의 삶을 통해 그들의 애환과 변방에 선 소리꾼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길한 일은 흥을 돋우고 궂은일은 위로하는 노래꾼들의 소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늘 있어온 하나의 습성과도 같다. 특히나 선창과 후창으로 나누어지는 노동요의 경우 앞소리꾼의 리드와 역량에 따라 그리고 지역에 따라 그 특색이 확실히 구분된다. 그 중 우리 삶의 시작을 맺고 끝을 여는 상여소리는 슬픔을 위로하는 동시에 상여를 메는 노동의 고됨을 달래기도 하는 흥의 여정이다. 사실 안동은 현재도 장례의 매장문화가 도시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기 때문에 상여꾼들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한 편이라고 해야겠다. 물론 예전에 비하자면 화장 문화의 발달로 많이 줄어든 편이다.
더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서비스직이 과거 마을마다 있던 상조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어 이제는 전문 소리꾼들이 팀을 이뤄 상조서비스회사의 중개로 소리가 지속되고 있다. 

장례문화의 변모에 따라 상여소리의 중심이 되는 앞소리꾼의 역할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를 함께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사례를 보여주는 인물로 안동의 상여소리꾼 김용락 씨(임동, 59)를 만나보았다. 전통의 상례문화는 이제 어느 축제장의 상여소리재연행사가 아니고서는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때문에 각 면단위로 있었던 상여꾼들의 조직을 찾는 것은 더욱이 어려운 일이었고 다만 상여소리꾼으로 산 삼십여 년의 인생이야기를 통해 점차 사라지는 상여소리꾼의 삶의 이야기에 잠시 동행해 보았다.

무속인 + 상두꾼의 삶
마을 소리꾼이라 하면 예전에는 부모 대부터 이어온 경우가 많다하는데 이제는 그러한 시절을 벗어난 지 오래니 대를 이어 소리를 하는 것보다 소리에 남다른 재능과 관심이 있어 능동적으로 소리꾼의 역할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용락 씨의 경우가 그러한 예이다.

상여소리 앞소리꾼 김용락 씨

김용락 씨는 봉화군 상운면 출신으로 12살 때 신을 받은 무속인이다. 때문에 그 삶이 평탄했을리 없다. 신내림을 받을 형편이 되지 않아 천지연 폭포에서 100일 수행을 하고 전국을 돌며 악기공장, 도자기 공장 등 여러 일을 거쳐 안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신을 받은 후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무속인으로 유명해지기로 마음을 먹고 고향 근처에서 가장 큰 도시를 선택하기로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안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한다. 가물거리는 기억으로 김용락 씨는 1980년을 전후해 안동의 보성여인숙 7호실에 ‘명환철학관’ 을 열었다. 그러다 한 손님을 받았는데 그 손님의 아픈 딸을 고쳐 주려는 인연으로 임동의 매화사라는 절로 들어오게 되었다. 후에 김용락 씨가 배사골 월성사라 절의 이름을 바꾸는데 그렇게 임동에 발을 들인 것을 시작으로 김용락 씨는 임동면 수곡리(수곡용계로)에 34년째 정착 중이다. 

1984년, 임동에 정착하여 결혼할 당시의 김용락씨와 아내 배말례

하지만 무속인으로서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그는 생업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함께 병행하게 되는데 성격이 살가운 탓인지 마을 통반장도 곧잘 도맡았더랬다. 무엇이든 적극적인 성격으로 일을 맡아 했던 그는 시에서 선정한 모범 반장에 뽑혀 거제도로 야유회를 가게 되었다. 평소에도 목소리가 좋아 노래를 잘 부른다고 얘기를 듣던 그였던지라 야유회에서도 한 곡조 잘 불러 인기스타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함께 동행했던 사람의 ‘상여소리도 잘 하는가’ 란 질문에 자극을 받고 상여소리를 본격적으로 해보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한다.

신을 모시면서 생업을 이어가던 때, 현재도 상여소리꾼으로 무속인으로의 삶은 진행형이다.

어린 나이에 시집온 아내의 앳된 모습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다, 해바우의 죽음과 달바우의 삶
예전에는 면단위로 상여계를 했으니 상여소리꾼이 있었다. 임동면에는 김용락 씨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권해바우(권칠목)라 불리는 알아주는 앞소리꾼이 있었다. 현재는 김용락 씨가 해바우 어른의 뒤를 이어 활동하는데, 그의 별칭이 달바우인 것은 바로 해바우 어른의 해가 지고 다음으로 달이 떴다는 의미로 달바우라 칭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해바우와 달바우를 이을 후계자나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 알 수 없으나 만약 대를 이를 후계자가 나타난다면 아마 그는 별바우가 될 것이라 했다.

상여에 오른 권해바우(권칠목)의 생전모습

출처: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19호

해바우를 흠모하여 그의 뒤를 이은 달바우 김용락은 임동의 상여소리꾼으로 자리매김하여 이제는 세상이 전통문화의 하나로 소리의 보전과 소리꾼의 양성을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있다. 그 명맥이 이수자에서 전수자로 잘 기록되고 있지만 사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하나의 생계에 불과했을 것이기에 달바우 김용락 또한 그러한 해바우를 한 마을에서 그저 보고 들으며 자연스레 그의 소리를 잇게 된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마침 오래전 해바우에 대한 기록이 있어 옮겨 적어본다.

- 탁월한 능력을 갖춘 앞소리꾼 -
해바우는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임동면 갈전리에 식구들과 정착했다. 마을과 좀 더 떨어진 곳에 원두막과 같은 움막을 지어 놓고 세 식구가 어렵게 살았다. 그러나 장례 때 상여앞소리꾼으로 나서면 사정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아무도 그를 괄시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정중하게 기별해서 마음 상하지 않게 모셔갔다. 내로라하는 반촌의 대가집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중략)
해바우 권칠목은 앞소리꾼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노래사설을 짓는 창작력도 뛰어났고 비판의식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가 생전에 불렀던 덜구노래 중에서 흥미 있는 부분을 보면 돈은 뜯어내기 위해 상주들을 찾다가 둘째 상주가 더디 나타나자 “둘째아들 워디갔노, 워째이리 연착이로, 기관차가 고장났나, 엔진이야 탈이났다, 중국말로 하게되면, 이만해도 띵호로데이, 독일말로 함게되면, 이만하면 독토로데이” 하고 6개국어를 열거한다.
-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19호 “이웃이야기_상여앞소리꾼 해바우의 삶과 죽음”_글 류명임
 중 편집 발췌


안동댐 수몰지구에서 태어나서 임하댐 수몰지구 한 중간에서 죽음을 맞이한 해바우 권칠목은 뛰어난 창조력과 남다른 비판의식을 가졌던 안동제일의 상여 앞소리꾼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마지막 길은 상여소리 한마디 없는 쓸쓸한 것이었다고 해바우의 삶과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권해바우(권칠목)의 생전모습. 지금과는 또 다른 상여의 양식을 살필 수 있다. 출처: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19호

뒤에 가 들춰볼 이야기이지만 김용락 씨의 사설 또한 권해바우와 상당부분을 닮아있다. 그는 해바우 어른과 대면하여 소리를 배워내림한 적은 없다고 했지만 마치 그의 소리가 깃든 듯 김용락의 소리 또한 해바우의 소리와 많이 닮아 있다. 

김용락 씨의 상여 앞소리꾼의 시작은 영가초등학교 앞에 있던 명동장의사에서다. 처음부터 일을 줬던 것은 아니고 몇 번 소리를 들어보다, 쾌지나 칭칭 노래하듯 주거니 받거니를 하다 보니 절로 소리가 되었다 한다. 처음에는 레퍼토리를 만들 줄 몰라 아는 대로 회심곡도 넣고 이서 저것 두서없이 붙여 넣어 소리를 하던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때가 1984~5년도 정도 됐을 때이니, 해바우 어른 또한 임동에서 살아계시며 소리를 하던 때이다.

당시 김용락 씨가 산불감시원으로 일하던 때 하루 일당이 삼천얼마였는데 어찌됐든 그 날 하루 당일로 일하고 나니 일당 5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산불감시원 한 달 치 월급을 하루 만에 번 셈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시작이었을까. 해바우 어른의 뒤를 이어 안동에서 유일하게 망자의 사연에 따라 고유한 레퍼토리를 부르는 것이 이제는 그의 엄연한 ‘주특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맥락의 기술, 창조적 사설을 하는 신세대 소리꾼
상여소리에는 절차에 따른 일정한 순서가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장지를 살피기 위해 좋은 땅을 찾아 묘를 봤기 때문에 그곳까지 상여를 운반하는 지리적 과정에서 상여소리의 순서가 나오지 않았겠는가 싶다. 흔히 요령을 잡은 상두꾼을 앞소리꾼이라 하는데 이는 곧 장례의 모든 절차를 주재하는 주재관이다. 소리는 요령잡이의 주재에 따라 서창(序唱)소리·행상(行喪)소리·자진상여소리·달구소리로 나누어진다. 상여소리는 오르막과 내리막에 따라서도 소리가 다르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구성의 가락을 의미하는 듯하다.

김용락 씨의 경우 한 번은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와 앞날 한 상여소리와 뒷날 한 상여소리를 연달아 촬영해 갔는데 나중에 기자가 연락이 와 ‘왜 한사람이 낸 소리가 앞날하고 뒷날하고 다르냐며’ 다른 사람이 소릴 한 것인지 따지며 묻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소리는 그 날의 시간과 장소 분위기 그리고 고인의 생전 삶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대개 상여소리에서 망자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과 묘의 위치를 알리는 등의 내용으로 꾸며지는 데 김용락 씨 또한 기본적인 틀은 그에 따르되 철수에 따라 유동적인 덜구소리에서 그만의 독특한 레퍼토리를 넣는 것 같다. 그의 경우 당일 아침에 찾은 장례식장에서 망자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듣고 그의 가족 등에 대한 정보를 재빨리 캐치하여 묘를 다지는 철수에 맞게 이야기를 넣는다. 헌데 그 내용이 참 기묘하다. 기독교인이면 기독교 내용으로 불교인이면 불교 내용으로 망자와 유족의 종교에 맞게 하는 것은 물론 내용 또한 나무아미타불에서 천수경까지 구성에 맞게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다. 때로는 울고 웃는 스토리로 유족들을 달래기도 한다는데 즉석에서 기독교의 경우 어떤 즉흥구절을 넣는지 궁금하여 물어보니 잠시의 뜸도 없이 술술 소리를 해낸다.

하나님야 아버지야, 나를 데려가려면은, 십자가를 끌어안고, 요단강을 건너서어, 하늘에서 만납시다~ 어허야 덜구야~
 

신선한 충격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유족들의 반응이 어떠한지 물으니, 당연히 좋아한다고 한다. 망자의 영혼을 달래고 더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그들의 종교와 환경을 배려하는 맞춤형 소리이기 때문이다. 기성품에 맞춰 반복되는 것이 아닌 세상 유일의 소리이니 말이다.
마침 자리에 함께 동석한 마을 지인이자 동네 아우인 신수균(54) 씨의 말에 의하면 상가집에 따라 상주들의 기분을 살펴 노잣돈을 재미나게 풀어내는 것 또한 상여 주재꾼으로서 그만의 탁월한 부분이라 한다.

상주친구 들어보소, 애고애고 꾀도 없대이, 그말 한다 이마이주나, 막내아들 들어봐래이, 친구는야 잘뒀구나, 이만하면 따봉인데~

달바우 김용락의 소리는 현장의 장지 분위기를 타며 세대 간의 소통을 돕고 또한 죽은 자와 산자 간의 위트 있는 이별 인사를 전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의도하지 않아도 절로 염불이 외워지고 자기도 모르는 말이 나온다 하는데, 이는 무속인이자 상여소리꾼으로 자처하는 그만의 독특한 소리에 대해 그 또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그의 차별화된 소리는 절로 많은 이들이 찾게끔 한다. 세명대 권영우 총장의 장례와 퇴계 15대 종손의 장례 그리고 하회마을 입향선조인 류홍 선생의 묘를 이장하는 데에 그는 요령을 잡은 앞소리꾼으로 서게 되었다 .

풍산류씨 하회마을 입향선조 사정공 류홍 선생의 묘 이장, 2014
사진제공: 하회마을보존회
풍산류씨 하회마을 입향선조 사정공 류홍 선생의 묘 이장, 2014
사진제공: 하회마을보존회

김용락 씨의 경우 한창 소리를 많이 할 때는 한 달에 25-6일 씩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가 좋은들 장례문화가 바뀜에 따라 이제는 한 달에 10번 내외도 나가기 힘들다고 한다. 점차 화장 문화로의 추세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 낌새에 그는 본래 그가 걸었던 무속인으로서의 일도 겸하고 있다. 불과 4-5년 전만 해도 전국구로 일을 했기 때문에 전라도 빼고는 전부 다가봤더랬다. 그러다 보니 한 달에 25일을 상가 집에 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게다. 가장 애를 먹었던 것은 감정이 이입되는 애상의 경우란다. 그럴 때는 그 또한 상주와 함께 눈물을 쏟는다고 한다. 


  

                        김용락 씨의 메모_사정공 어른의 이장을 앞두고 연습한 당시의 흔적

1980년대 중반부터 상여소리를 해 온지도 삼십여 년이 훌쩍 넘었다. 그간의 변화된 장례 절차가 없는지 물으니, 매장을 해도 예전처럼 30여명 메야했던 큰 상여 보다 이제는 8명에서 4명도 멜 수 있는 작은 상여로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그런데도 예를 갖춰 메지 않고 편의를 위해 목도에 상여를 얹어 간다고 하니 그의 표정에서 씁쓸함을 읽을 수 있었다.

풍산류씨 하회마을 입향선조 사정공 류홍 선생의 묘 이장, 2014

김용락 씨가 손수 가지고 다니는 스피커 장비

김용락 씨가 손수 가지고 다니는 스피커 장비를 허리춤에 차고 있는 모습.

2010년도 초반, 영양읍 ⓒ장오용

2012년 영양군 입암면 서석지 영양정씨 문중 ⓒ장오용

철수도 많이 밟을 때는 7번까지 하지만 요즘은 대체로 3번의 철을 하는 추세란다. 그마저도 사람을 쓰지 않고 포크레인으로 하는 경우도 있는데 포크레인의 경우 유압처리를 해도 사람 발 같지 않아 흙이 갈라지기 때문에 비가 오면 물이 들어갈 염려가 크다. 사람의 발로 야물게 밟아놓으면 괭이로 파도 땅에 박히지 않는다고 하니 비단 상두꾼들의 역할이 정신적인 위로 뿐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도 장인의 역할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산자와 죽은 자 간의 메신져
앞소리꾼 김용락 씨는 임동에 들어온 해 12살 아래의 아내를 만났다, 좀처럼 소리꾼으로서의 애환에 “있었다면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 이라는 그의 철벽대답에 아내 배말례(47) 씨에게
상여소리꾼의 가족으로서의 애환을 대신 물었다. 대번 우리 사회의 이중적인 시선에 대해 아내는 어려움이 있었음을 슬며시 내비쳤다. 평소에는 상여소리 꾼의 아내라 하면 은근 무시도 하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 하나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언젠가부터 주위에서 점차 관심을 갖고 인정해 주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상여소리라는 하나의 행위가 예전처럼 ‘누군가는 치러야 하는 일’ 이 아닌 전문적인 직업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전통민요를 전승하는 수행자로 예술자로 그 위치가 격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안동을 떠나 외지에서 살고 있는 아들과 함께

도산서원에서 김용락 씨의 젊은 시절 한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 크게 한번은 울게 된다. 세상을 살아야겠다는 강렬한 외침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울음은 죽을 때에도 터뜨리게 된다. 망자를 떠나 보내야하는 이생의 산자들로부터 말이다. 결국 산자들은 울음이라는 진혼으로 죽은 자의 사후 평안을 비는 것이 아닐까. 망자의 태어났던 순간의 울음과 망자를 배웅하는 산자의 울음은 마치 이별에 대한 서로간의 화답과도 같다.  

상여 앞소리꾼 김용락 씨의 현재 모습

때문에 앞소리꾼의 역할은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는 있겠지만 그 상징적인 역할 만큼은, ‘슬픔은 달래야하는 우리의 민족적 얼’이 지워지지 않는 한 꽤 오래 지속되리라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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