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예천 새마을운동, 농민의 절박함이 있었다
안동 광덕교와 예천 형호교 가설공사를 찾아 가다
안동·예천 새마을운동, 농민의 절박함이 있었다
안동 광덕교와 예천 형호교 가설공사를 찾아 가다
  • 권기상(FMTV 기자)/피연화(경북와이드뉴스 기자)
  • 승인 2017.07.0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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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5)

각종 조사에서 한국의 근·현대 100년의 역사 중 비약적인 발전과정을 이야기한다면 빠지지 않은 것이 새마을운동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공·과가 있듯이 새마을운동도 논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2017년 안동·예천 상생발전을 위한 근·현대기행'에서는 평가보다는 안동·예천지역에서 호응을 얻었던 새마을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를 찾아보았다. 이를 통해 당시 우리 주위에 살았던 지역민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보았다.

경북도청을 중심으로 안동시 풍천면의 광덕교와 예천군 호명면 형호교의 사례를 짚어보았다.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이 두 곳은 전국적으로 우수한 새마을운동의 사례로 발표되기도 했고 다리로 인해 주민들의 삶이 많이 바뀐 것으로 정평이 나 있기도 하다. 두 곳 모두 당시 건설된 다리는 현재 사라지고 없지만 주민들의 기억과 다양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자료들을 찾아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지난 5월 17일, 때 이른 더위를 느끼며 취재장비를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안동시내에서 차로 20여분 정도 거리에 김영준 전 풍천단위농업협동조합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김 조합장은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꽃을 피워 한창 때인 1970년도 후반 안동시 풍천면에서 조합장을 지냈다. 필자가 찾아가 만났을 때 그는 82세 백발의 노인이었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다. 연세에도 불구하고 풍천면의 새마을운동에 관한 자료를 책자들과 함께 파워포인트로 직접 제작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젊었을 때부터 사진 찍기를 즐겨서 많은 사진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방문하기에 앞서 전화를 통해 새마을사업으로 놓여진 광덕교에 대한 이야기와 자료를 부탁했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김영준 전 풍천단위농협조합장이 풍천의 새마을사업에 대해 컴퓨터를 활용해 프리젠테이션하고 있다.

김 조합장은 “1977년도, 78년도 그 당시 안동에는 새마을운동이 상당히 미미했어요. 안동이 전국 새마을사업에서 최하위 꼴찌를 하니까 그때 박돈양 군수가 애가 탔던 거예요”라며 기억을 되짚어주기 시작했다.

광덕교는 하류의 구담교와 함께 새마을운동으로 건설된 새마을다리로 알려져 있다. 광덕교는 1976년 12월 8일, 구담교 역시 같은 해 12월 30일에 착공됐다. 1976년 이전 풍천면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다리가 없어 강북과 강남으로 갈라진 생활권이었다. 강남에는 초등학교 3개에 1,408명, 중학교 470명을 포함해 약 7,500여명이 살고 있었다. 다리가 없어서 배를 이용하거나 섶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 저녁이 되면 급한 환자가 생겨도 건너지 못하고, 홍수만 져도 섬이 되고, 얼음이 얼면 위험해 배로 왕래하는 길의 불편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경지정리와 전기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1960년 이전에 이루어져 관개수로를 이용한 농사는 지었다. 하지만 다리가 없어서 대다수의 주민들은 무게가 많이 나가는 농사는 짓지 못했다. 누에치기와 땅콩, 원예작물 등이 대다수였으며 사과농사와 묘목도 일부 했다. 농사가 저장과 운반이 용이한 것에 국한돼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이었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다리를 놓겠다는 공약이 나오고, 지나면 공약이 파기되기가 일쑤여서 4년마다 놓는 다리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1976년 12월에 착공, 가설된 풍천면의 구담교(좌)와 광덕교(우)는 새마을다리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새로운 다리가 놓여 사라지고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1974년에는 교량공사를 정부에서 설치하기 위해 추진됐으나 광덕리와 구담리, 두 곳의 팽팽한 갈등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임하면에 포진교가 놓이게 됐다. 그러던 중 1976년 11월 광덕지구 추곡공판장에 박돈양 군수가 왔을 때였다. 광덕리에서 묘포장을 운영하는 류지영 씨가 교통상의 애로를 군수에게 토로하며 트럭이 건널 수 있는 철선 건조를 건의했다. 이에 박 군수는 안동댐 준공으로 큰 홍수가 없으니 새마을협동권사업으로 자재를 군에서 부담하고 주민들이 2천만원 정도를 부담한다면 포진교와 같이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류지영 씨가 이튿날 주민부담금을 결성하기 위해 농협을 찾았다. 당시 농협에서 자기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수곡수매 하는 것을 보고 같은 방법으로 해 줄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김 조합장이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구호를 생각해내고 방법을 제안하게 됐다.

현금이 당장 불가능한 농촌의 현실을 감안해 1개월 기한으로 약속어음을 받고 기간이 경과된 후 부득이 현금충입이 곤란한 조합원은 조합에서 자금을 대출해 주는 방식을 착안했다. 그리고 광덕1, 2리와 기산1리를 참여시키는 방안을 세우고 그 내용을 각 동네 이장과 류지영 씨에게 설명했다. 또한 구호는 “논 10마지기 있는 농가는 1마지기 팔아 다리 놓고 나머지 9마지기 가지고 11마지기 소득을 올리자”로 정하고 부담금 기준을 결정했다.

그러자 류지영 씨가 적극적인 추진의사와 함께 어음 이백만 원을 쓰기 시작해 조합장과 동장 등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 동참하며 다리건설을 위해 적극 나서기로 했다. 1976년 11월 12일에는 광덕초등학교에 광덕1, 2동, 기산1동 주민이 모여 광덕교가설추진윈원회를 구성하고 추진위원장에 류시선 씨를 선출했다. 그리고 마을별 부담금을 결의하고 자갈과 모래 채취운반, 시멘트 운반을 노력부담으로 동원할 것을 결의했다.  김 조합장은 주민들이 모인 곳에서 “우리가 다리 없이 지금 이 땅 가지고 농사지어 봐야 평생 이 모양밖에 안 된다. 그런데 땅 열 마지기 있는 사람은 한 마지기씩, 십분의 일만 땅을 팔아 가지고 그 돈을 모아 여기에 다리를 놓으면, 수익은 아홉 마지기 가지고 열한 마지기 수익이 나온다. 땅 한 마지기 없어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수익이 늘어난다”며 설득도 했다.

▲의연금수납관리대장- 1976년 광덕교 가설을 위해 주민들이 모은 의연금을 당시 추진부위원장이었던 류계영 씨가 관리하던 대장.

김 조합장은 “그 당시는 땅 안 팔고는 그 다리를 놓을만한 자금을 조성할 방법이 없었어요. 농가에 무슨 돈이 있었겠어요. 땅을 팔아야 되는 거였어요. 근데 농민들이 땅 판다는 거는 어지간해서는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슬로건을 그렇게 정한 거예요”라며 허허 웃었다. 실제 주민부담기금을 마련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제일 처음에 어려웠던 건 자금 모으는 거, 주민들이 선듯 낼려고 하지 않거든요. 기금은 한 두 달 만에 거뒀어요. 상당히 적극적으로 추진된 건 그때 동네사람들이 그만치 절실했어요. 동네사람들이 다리가 없으면 우리가 못산다. 겨울에 배가 얼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고, 숫하게 사고도 났거든. 그리고 다리가 없으니까 소득작물을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마지기를 팔더라도 다리만 놓인다면 살길이 안 있겠냐하는 절실함이 있었던 거예요”라고 다리가설에 대한 주민들의 열망을 가늠하게 해 주었다.

또한 당시 광덕1리 동장과 광덕교가설추진부위원장을 지낸 류계영(86) 씨는 “그때는 의연금이라고 해서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모금 했지요. 의연금수납장부를 만들어서 예약금을 기록하고, 낸 이는 도장을 옆에 찍고, 예약해 놓고 안 낸 이도 있고 그랬어요.”라며 “여기 보면 외지에서도 부산, 대구에서 몇 십만 원씩......, 그 돈이면 컸지! 아무튼 의연금 모으는데 애 먹었어요. 마카 어려운 때라 눈치보고 하느라고.......”라며 그때를 회상해 주었다.

▲광덕교가설추진부위원장이며 광덕1동 동장이었던 류계영 씨

그리고 김 조합장이 참고자료로 제시한 ‘1977년 단협 종합경영 성공사례중심 현지교육교재’에서는 “주민부담기금 2천만 원을 조성하기란 가난한 농촌 3개 마을로써는 너무나 벅찬 일이어서 우선 약속어음을 받는데도 추진위원장과 위원들은 혹한 중에 밤낮없이 한집에 여러 번 간 곳은 7번까지도 찾아 다니다보니 마침내 추진위원장이 감기와 몸살로 몸져눕게되었고 객지에 있는 마을사람들에까지 원정협조를 구하였다. 노인회에서는 여행비용을 공사비로 기탁했고, 광덕1, 2동 부녀회에서는 묘포장을 직영해서 부녀회기금으로 조성 되었던 200,000원을 기탁했으며 mbc방송에서 시멘트 보내기운동을 추진해서 안동시 군민이 모금에 협조하여 주었고, 마을에서는 회갑잔치를 없애고 회갑비용을 다리공사비에 보태도록 결의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광덕교가설추진부위원장 류계영 광덕1동 전 동장의 기억

▲류계영 전 동장이 직접 작성하고 관리하던 광덕교 가설 현장작업일지.

김 조합장과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에 만난 류계영 전 동장은 당시 부위원장을 맡아 현장에서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했다. 그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의연금수납관리대장과 현장을 뛰며 직접 작성한 현장작업일지를 내놓으며 그의 말을 확인시켜 주었다.

수납장부에는 약 220여명의 이름과 총 1,830여만 원의 관리 내역이 수기로 작성돼 있었다. 그리고 일부 소실되고 낡은 현장작업일지에는 1976년 11월12일 172명이 참여해 광덕교가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진위원 28명을 선출했다는 기록에서부터 이듬해 9월 11일까지의 작업내용이 기록돼 있었다.

류 동장은 광덕교를 가설하면서 직접 주민들과 현장작업을 진행했다. “나도 땅을 서마지기 팔아가며 했어요. 지금까지 내 기조가 올바르게 살다가 올바르게 죽자래서 고등학교 마치고 향촌에 와 새마을사업, 농촌지도자사업 같은 활동을 많이 했어요”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주민들이 광덕교 가설을 위해 낙동강변에서 모래와 자갈을 모으고, 강에서는 다리기둥을 박는 작업이 한창이다.

이어서 그는 “그때 당시를 생각해 보믄 그게 참 애로도 많앴고 참 흐뭇했어요. 매일매일 일기를 써서 여기 몇 명이서 빠이루 박는데 어예(어떻게) 했고, 또 찬조는 그때 백 원, 이백 원, 제일 많이 내는 이가 천원 냈지, 그 돈을 받아가지고 딴데(다른데) 쓰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사람들 전부 다 먹는 거 다 사줬어. 그때는 술을 많이 먹으이.......”라며 당시 고단하지만 즐겁게 일한 때라고 일러주었다.

▲주민들이 리어카와 경운기를 이용해 풍천면소재지에 도착한 시멘트를 광덕리로 나르는 장면.

“다리 놓을 때 돈보다는 부역을 많이 했지. 자갈 모으고, 콘크리로 치는 것도 일부는 사람들이 와서 하기는 했지만 전부 주민들이 했어요. 그때는 사람들도 많았고 젊은 사람들도 많았어. 500명도 넘었지. 많았어.”라고 말하고 “겨울에 얼기도 많이 얼어서 세멘(시멘트) 그 많은 거를 헛간에 마구 재이고 리어카로 얼음위로 날랐지”하며 숨을 고르기도 했다. 이내 “새마을사업이 잘했고 못했고, 박대통령 대한 평가도 나오지만 하여튼 그 열의를 내는 거는 굉장했어요”라며 “하이고 내가 동네방송에 한마디만 해 놓으만 남·녀 모두 마구 다 나와요. 다 나와 가지고 마구 와와 하고....... 모래하고 자갈 모을 때는 여자들도 나와서 양동이 대야로 이고 날랐지. 한 집에 얼마큼 모다라카는(모으라고 하는)거 매로(처럼). 지금은 안 그렇지만 그 전에는 물 내려가는 데는 자갈이 한정이 없었어”라며 당시를 기억했다.

이어 “다리 총 공사비가 4천만 원이었는데 모지래는(모자라는) 거는 도에서 보탬이 됐어요. 마무리하고도 사백만 원이 남아서 그 돈으로 마을회관을 지었어. 그때 하사금으로 백오십만 원이 나오기도 했지”라고 말했다.

▲광덕교와 구담교가 가설되기 전 주민들은 나룻배나 섶다리를 이용해 낙동강을 건넜다.

그리고 잠시 뒤 류 동장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할머니(87)가 도와주었다. “그 전에는 참 힘들게 살았어요. 내 시집 왔을 때만 해도 마카 아무것도 없었는데요 뭘!”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어 “겨울에는 맨날 얼음이 언 강으로 갔어요. 얼음이 많이 얼면 위에다가 흙을 퍼 부어요. 동네사람들이 미리 가서 흙을 퍼 부어요. 미끄래진다꼬....... 처음 오는 이는 겁이 나요, 얼음이 바짝바짝 소리가 나거든, 구담장을 다녀서 익숙한 이는 괴얀치만(괜찮지만), 나무다리는 일찍 부러져서 못써요”라고 말하고 “그때 배를 타면 집집마다 배삯으로 나락을 줬어요. 일 년에 한 말씩 줬을 거예요. 가난한 동네여서 자주 못줬어요. 얼마나 가난했는데요. 이제는 부자 다 됐지만......, 다리가 놓였을 때 이 동네는 날아가는 것 같앴지요. 차가 들어오고 하니 잔치도 하고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광덕교가설 과정에 생긴 잊지 못 할 사건

광덕교를 놓으면서 김 조합장과 류 동장이 공통으로 기억하는 사건이 있었다. 류 동장이 작성한 작업일지에도 기록이 된 사건이었다.

▲주민들이 광덕교를 가설하기 위해 불도저를 동원해 물막이공사를 하고 있다.

광덕리 앞은 강폭이 좁고 깊은 급류여서 물막이 공사가 어려웠다. 다리 가설을 위한 물막이공사에 관한 내용이다.  ‘1977년 단협 종합경영 성공사례중심 현지교육교재’의 기록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물막이공사용 모래를 강 중앙에 쌓기 위해 불도저로 120시간이나 걸려 모아 두었다. 하지만 1977년 4월 23일 장마로 모래가 말끔히 쓸려 내려가는 일이 생겨 주민들의 실망이 매우 컸다. 그리고 이후 안동댐이 준공됐지만 보조댐의 수리 때문에 계속 발전한 물을 흘러내려 보내서 교량 물막이 공사가 어려웠다.

안동댐과 연락한 결과 5월 6일부터는 물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9일에 다시 물막이 공사를 하기로 했다. 6일부터는 불도저로 모래를 강 중앙에 산을 쌓고, 7일, 8일 이틀 동안은 주민 750명이 동원돼 현장까지 자갈을 나르고, 콘크리트를 했다. 5월 8일 19시 강 중앙 모래더미 위에 크레인과 불도저를 이동시키고 퇴로를 차단해 물길을 돌려놓고 물막이공사를 시작했다. 불도저가 1삽을 밀어 넣으면 당장 수심 2m의 급류에 2/3는 쓸려가 버리고 모래 무더기만 줄어들고 하목은 줄어들지 않아 지켜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드디어 밤 12시 30분, 이 마을로써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낙동강 유심을 돌리고 강을 질러 막은 순간이었다. 지켜보지 않은 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새벽 2시, 갑자기 수위가 높아졌다. 근근이 모래둑을 막아놓고 흙을 밀어 넣는 도중이었지만 20분 만에 30cm나 높아지는 수위를 견디지 못했다. 불도저는 강 밖으로 피했지만 크레인 기사는 가슴까지 오는 물살에 휩싸여 떠내려가다 간신히 구조됐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5시에 강으로 나온 주민들은 온 동민이 막아 놓은 둑이 흔적도 없고 크레인은 물 복판에서 잠기기 직전인 안타까운 광경을 바라보고 말할 수 없는 비통에 잠겼다. 이틀 동안 750명을 동원하느라 마이크로 3시간 동안이나 안타깝게 호소한 협동회장과 추진위원장이 목이 쉬었다. 혹시 공사에 차질이 있을까봐 류지영 씨는 자기 사비로 불도저를 24시간 임대해 공사를 근근이 도와 둑을 막았지만 벌써 두 번이나 허무하게 무너져 이제는 끌어 모을 모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주민들이 물막이공사를 위해 쌓아둔 모래는 장마에 쓸려가고 교각을 세우기 위한 파일 끝만 강 중간으로 보이고 있다.

▲장마로 인해 물막이공사가 두 번이나 물거품이 되는 안타까운 일을 겪었지만 주민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모래와 흙을 모아 공사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모래 속에 섞였던 자갈 때문에 어느 정도 모래는 씻겨 내려갔으나 완전히 유실된 건 아니어서 온 주민이 용기를 얻어 가마니에 돌을 넣고 둑을 막는 작업을 이어갔다. 불도저는 흙이 없어 바위산을 깎아 6시간 만에 둑을 막았고 크레인도 다시 파일을 박기 시작해 주민들은 다시 한 번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1977년 1년여 동안 주민들이 완공한 광덕교

이 사건에 대해 김 조합장은 “그때 당시 다리를 놓을 때 불도저 한 대 가지고 다 한 거예요. 이 모래를 쌓아서 강을 메꾼 거지요. 새벽 2시까지인가 강을 모래로 막아놓고 파일을 두들겨서 박을 판이었어요. 그런데 새벽에 나가보니까 둑에 물이 찰랑찰랑 차서 다 넘어버리는 거예요. 가장 어려웠던 기억인데 다 글렀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주민들이 다 나와 가지고 대야로, 온갖 그릇을 다 가지고 나와서 자갈을 나르고 했지요. 그런 사진도 있어요”라며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류 동장은 “맨발로 뛰다니면서 자갈을 모아 놓았단 말이지. 그런데 댐 준공 시험한다고 물을 내려 보내 가지고 수북하게 쌓아 놓은 것을 지키고 있었는데 고만(그만) 밤에 마카 떠내려갔어. 그래가지고 새로 전부 모으려고 땅을 살라고 카이 안 돼가지고 우리 큰집 산에 있는 돌을 마구 밀어 넣었지. 그래 해가지고 다리를 완공을 하기는 했는데... 나중에 새마을훈장을 탔어. 하하하!”

이후 주민들의 수고로 건설된 광덕교는 가장 먼저 농사를 바뀌게 했다. 김 조합장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소득증대사업을 계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농협에서 주도적으로 사업을 진행했다고 했다.

▲광덕교 가설 이후 농협이 주도해 실시한 농가소득사업으로 조성된 500ha 대단위 특용작물재배단지

김 조합장은 “여기는 다리를 놨으니까 소득작물을 넣자고 해서, 그 당시에 대구 근방에 비닐하우스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농민들을 데려가서 비닐하우스 하는 것을 배워왔어요. 처음에는 비닐하우스 세우는 쇠파이프도 없었어요. 대나무로 하고, 아니면 세멘(시멘트) 지주를 세워가지고 그 위에 나무를 걸쳐서 하고....... 그런 식으로 시작해가지고 지금은 온 들이 비닐하우스로 다 찼지요. 뭐”하며 씨익 웃어보였다.

류 동장은 “나도 사과나무를 27년간 하다가 치우고 그 다음에 하우스를 했어. 구담하고 다리가 있어서 했지 안 그러면 힘들어 모했어요. 그리고 수박, 김장배추 같은 거는 어마어마하게 했고, 또 신립광산도 다리 놓은 후에 생겨서 포철로 저 다리로 다 날랐어” 했다.

예천 형호리, 육지의 낙도를 벗어나다

안동 광덕교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예천군 호명면의 형호교 역시 새마을운동으로 완공된 대표적인 다리로 손꼽혔다. 1978년에 정부에서 발간한 「영광의 발자취」 마을단위 새마을운동 추진사 제1집에 담긴 내용 중 예천의 새마을운동을 소개한 글이 있다. 「영광의 발자취」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모범사례들을 모아 기록한 책이다. 당시 동네 동장을 지내고 새마을지도자였던 박원환(77) 씨의 이야기와 함께 형호리에 다리를 건설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참고로 형호교는 광덕교처럼 새마을사업으로 건설된 다리여서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 건설했지만 다리공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공사는 예천군에서 발주해 완공했다. 형호리는 마을 뒤를 가로막고 있는 소백산 줄기가 저울대와 같고 내성천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3면이 호수와 같은 형상이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예천군내에서는 교통 오지로 가장 낙후된 지역 중에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다.

1960년대만 해도 60여 호가 살았으나 1977년 당시에는 39호에 210명이 살고 있었다. 마을에는 기와집이 2채 뿐이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초가집이었다. 농사는 벼와 보리를 지었으며 식생활에 필요한 채소, 고추 등 몇몇 부산물 정도만을 경작했다.

당시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시골오지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동네에는 마을을 가로막고 있는 내성천으로 인해 우마차나 차량이 들어가질 못했다. 모두가 지게나 소 등에 농작물을 실어 날랐다. 전기도 없어 등잔불로 밤을 밝혔고 담장과 화장실은 수수대나 가마니로 짐승들이 넘어오지 못할 정도만 막았다.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던 주민들은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며 오랜 세월을 지내다보니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고, 체념 속에서 술과 도박으로 세월을 보냈다. 가옥들은 손질하지 않아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으로 비만 오면 비좁은 골목길이 수렁이 돼 발을 옮기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생활이 이렇다보니 다리건설은 그 어느 곳 못지않게 절실했다. 그래서 형호리 주민들은 마을에 다리를 놓기 위해 예천군에서 지시하는 새마을운동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그래서인지  1976년 새마을운동으로 인한 자립마을로 승격되었고, 1977년에는 마을을 가로막고 있는 내성천에 길이 294m의 교량을 가설했다. 이로써 농산물 유통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와 영농시범교육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 우수새마을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적도 있다.

▲육지의 오지를 벗어나기 위해 형호교 가설을 위해 노력한 박원환 전 동장은 후일 형호교가 완성되고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박 동장은 “집 담을 냉가, 브록쿠(시멘트블록)로 쌓아라. 초가지붕을 벗기고 스렛뜨나 기와로 이어라. 다 하고 나면 지붕 도색해라. 76년도쯤에는 1농가 1퇴비사를 지어라. 퇴비사를 짓고 나니 퇴비를 해 넣어라. 좌우지간 군수님이 시키는대로 다했어요. 퇴비할 때는 동네사람들이 열심히 했어요”라고 했다.

이어 “토지보상도 없었어요. 그냥 내 땅, 네 땅 안 따지고 현재 다니던 길 좌우로 치워가지고 도로 폭을 5m로 했어요. 그리고 퇴비를 해 넣었지요. 그러고 나니 퇴비증산으로 도내에서 1등도 했어요, 우리는 5m 다리를 놓기 위해 군수님이 하라는대로 다 했어요.”라는 동장의 눈빛에는 그때의 기억이 아련히 비치는 듯 했다. 이어서 “다리 놓기 전에는 외나무 다리였죠. 겨울에 외나무다리를 놓고 다니다가 봄이 되면 뜯어야 했어요. 큰물 지면 막 떠내려가니까”라며 형호교가 없던 시절 학생들은 강폭 300m를 마주하고 있는 강 건너 월포리에 있는 학교를 가기 위해 인근 마을인 직산리로 약 5km를 돌아 등·하교를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형호교 놓을 때는 형호리 주민들만 6백만 원을 부담했어요. 요새 같으면 혼자 내라면 아름한데, 그때 사는 세상은 사람들이 돈이 없는 세상이었어요. 보릿고개 넘는 것도 대단했고요”라며 힘들었던 지난 세월을 되새겼다. “그때 6백만 원이면 농우 1마리에 3, 40만원 할 때에요. 아주 떡대소라야 40만 원, 보통은 30만 원, 땅값이고 뭐 있었니껴? 나도 땅 한때기 팔아서 넣었어요”라며 씽긋 웃었다.

형호리에 다리를 놓기 전에도 오지를 면하기 위해 주민들의 노력이 있었다. 한번은 박 동장의 새마을지도자 후임인 박민홍 씨가 주도한 일이 있었다. 하루하루 실의에 빠져 있는 주민들에게 내성천에 다리를 놓을 수는 없지만 마을 뒷산을 뚫어 낙도를 면해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자의반타의반으로 사업을 시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가파르고 험한 돌투성이 산을 뚫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중단해야만 했다. 그리고 박 동장 제안으로 호명면소와 잇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애쓴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주민들과 교량가설을 위해 주민총회만도 수십 번을 열어 문중 땅과 객지에서 고생하며 번 돈을 보태달라 호소하기도 했다.

「영광의 발자취」에 전하는 형호교가설을 위한 과정을 일부 소개하면 1976년 1월 7일, 새마을지도자였던 박성춘 씨 집에서 주민 30명이 참석한 가운데 마을총회가 열렸다. 여기에서는 그동안 열심히 진행한 새마을운동 덕분으로 정부에서 우선 지원한다는 방침이 전해지게 된다. 그래서 주민 대대의 숙원사업인 교량을 가설하기 위해 진정서를 내고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자고 결정하게 된다. 회의에서 이견들이 있었으나 교량건설은 마을의 역사라는 막중함에 결론에 쉽게 다다른다. 이에 새마을지도자와 동장, 각 반장과 각 반에서 1명씩 선출돼 8명을 추진위원으로 정하고 위원장에는 새마을지도자로 정해 본격적인 교량가설을 위한 작업이 추진됐다.

이후 같은 해 1월 19일 열린 총회에서는 예천군에 제출한 진정서를 부군수와 새마을계장이 보고 약 2천만 원의 공사비가 드는데 마을 규모가 39호에 지나지 않아 그만한 사업비를 투자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하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으로 주민들이 자부담으로 600만 원을 마련한다면 2년에 걸쳐 150m씩 교량을 완성할 수 있다고 제안됐다.

▲오지 농촌에서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 완공된 형호교.

 (사진출처:영광의 발자취)

당시 마을에는 박 씨 문중에서 140만 원, 신 씨 문중에서 60만 원, 총 200만 원의 자금이 마련된 상태였다. 하지만 부족한 400만 원을 조성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의논이 오고갔다. 결국 39가구에 평균분배방식으로 각 20만 원이 호별로 배정됐다. 그리고 3월 5일에 열린 총회에서는 새마을지도자인 박성춘 씨가 전날 주민부담금 600만 원을 군수에게 전달하고 사업추진을 진행하게 됐다고 주민들에게 통보하며 주민들의 성원과 노력을 자축했다.

주민부담금 마련에 대해 박 동장은 “영세한 농가는 돈이 없어서 못 내잖아요. 그래서 군 농협에 가가지고 사정이야기를 하고 돈 좀 대출 좀 해다오 하니 대출 내는 사람들만 한 곳으로 묶어서 대출되는 만큼만 했어요. 말이 쉽지 아무것도 없는 맨 마당이랬어요. 요즘 같이 있는 사람 같으면 1억인들 겁을 내겠어요?”라며 헛웃음을 보였다.

“다리 총 길이가 294m인데 76년도에 반을 했어요. 77년도에 반 했고요. 참! 이 동네로 봐서는 기적이었지....... 동네 호수나 많고 이 길을 통해 면소로 가는 길이 있으면 그래도 다리 놓기가 좀 쉬웠는데, 단순히 여기만 들어왔다가 나가는 거거든. 그래서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해서 생생해요”라고 했다.

그리고 “77년도 5월28일 날 다리 준공식 될 때 참 뭔가 새로운 세상에 태어난 기분이더라고요. 저는 동네이장을 총 18년을 했는데, 하면서 여기서 호명면소로 통하는 길이 없었어요. 그래서 오천교에서 산내들로 해서 임도를 닦고 했는데 난공사가 많았어요”라며 도로사업 이야기를 잠시 들려주었다. 이후 2002년 큰 홍수로 인해 제방이 무너지자 건설부에 직접 찾아가 예산을 생떼 쓰듯이 부탁해 제방을 수리한 일화도 말해 주었다.

형호교로 인해 형호리는 농토의 이용률이 좋아졌다. 겨울이면 비닐하우스가 온 들판을 덮어 장관을 이루고 소득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예천군 새마을소득시범교육장으로 선정돼 유실수조림원지와 양봉, 한우, 원예작물 등을 재배하며 선진마을이 됐다고 전해졌다.

한국 경제발전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말 중에 한강의 기적에는 산업화와 농촌의 기적을 이야기 한다. 초근목피, 춘궁기 쌀 자급자족 등 이런 단어는 이젠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지도 오래다. 일반적으로 새마을운동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국민들의 욕구와 농촌근대화를 추진했던 정부의 의지가 이루어낸 잘살기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다른 평가도 있지만 위의 두 교량가설의 과정만 본다면 1970년대 농촌생활 환경과 농업기반 시설을 개선해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했다는 점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로 기억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일제식민시대를 겪고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근·현대를 보낸 국민들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 환경적으로 힘든 세월과 시대를 관통하며 지내온 것이다. 여기에는 안동과 예천 두 지역에도 예외 없이 근·현대의 힘든 삶이 똑같이 녹아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었다.

 

권기상(FMTV표준방송기자)/피연화(경북와이드뉴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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