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요를 통해 본 안동과 예천의 농업공동체 문화
농사의 고단함과 애환을 나누며 함께 해온 사람들
농요를 통해 본 안동과 예천의 농업공동체 문화
농사의 고단함과 애환을 나누며 함께 해온 사람들
  • 김희철(경북기록문화연구원 운영위원)
  • 승인 2017.08.04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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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6)

근·현대 생활문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먹고 사는 문제, 즉 노동과 경제활동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자연지리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환경적, 경제적 양상과 요인들은 수천년간 우리민족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쳐 왔으며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북부지역민들의 근현대 문화를 결정해 왔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번 ‘2017년 안동·예천 상생발전을 위한 근·현대 기행’에서는 농업문화의 한 축을 이어오고 있는 농요를 통해 농업을 기반으로 한 두 지역의 삶과 애환을 함께 해온 공동체 생활문화를 이해하고자 한다.

안동 고조선 저수지 유적 발굴로 쌀농사 기술 확인

청동기시대 경북 북부지역과 동아시아 생활상 이해

수렵생활을 하며 강과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던 인류가 약 1만년 전 정착생활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농경생활의 시작이다. 곡식의 씨앗을 심고 가꾸고 거두는 농사 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가축을 길러 수렵을 하지 않고도 육류를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곡물 가운데 밀, 옥수수, 벼는 지구상에 가장 널리 재배되고 있는 3대 곡물로 꼽히고 있다. 특히 벼는 다른 곡물에 비해 인간에 필요한 영양소가 가장 많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밥을 짓는 1차 가공 만으로도 맛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벼재배의 경우 물을 가두고 이용하기 위해 수리시설과 상시적인 물관리가 필요하며 수확하기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재배기술을 요하는 것이어서 재배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 자연을 관찰하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 시작되고, 노동을 위해 협업체계가 생겨나고, 농업기술의 발전과 삶의 질이 향상되었는데 이는 곧 인류 문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벼농사를 언제부터 짓기 시작했느냐의 문제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선조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지난 2005년 안동에서는 벼농사의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농경유적이 발굴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안동-영주간 4차선 확포장 공사 도중 발견된 기원전 8세기 청동기시대 저수지와 관개수로 유적으로 4m가 넘는 나무다리와 절굿공이, 무문토기, 도끼자루, 가래, 벼이삭을 따던 반달돌칼과 벼껍질 등 많은 농경관련 유물과 남북 길이 50m, 최대 너비 15m, 깊이 2m이상의 저수지 유구를 발굴했다.

►안동 저전 저수지 유적에서 발굴된 국내 최고 나무다리. 나무에 일정한 간격으로 홈이 파여 있는 것으로 보아 나무 두 개를 수로에 걸쳐 놓고 마루처럼 나무를 끼워 맞추어 건너 다닐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국내 최고 저수지로 익히 알려진 삼한시대 벽골제나 의림지, 수산제 이전의 저수지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으며, 함께 발굴된 목재 다리는 국내 최고 고대 다리유적인 통일신라시대 돌다리 일정교, 월정교 보다 1,000년 이상 앞선 다리유적으로 국내 건축, 토목연구사상 획기적 발견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절굿공이는 일본의 고대 야요이 농경유적에서 나온 것과 같은 모양으로 고조선 시대 이주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유물이어서 동아시아 고고학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청동기시대 절굿공이. 일본의 벼농사가 고조선시대에 우리나라를 통해 건너갔다는 학설을 확인시켜 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이번 유적발굴로 경북 북부지역에 살았던 선조들이 삼한시대 이전에 이미 수리시설을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을 지녔으며 대규모 마을을 형성하여 집단생활을 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이미 여러가지 농기구를 이용해 논농사를 짓고 수확한 쌀을 절구에 넣어 껍질을 벗긴 다음 밥을 지어먹는 풍경을 상상할 수 있게 됨으로써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사회상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류 최초 쌀농사의 기원은 한국

벼농사의 시작과 함께 생성된 농업 공동체 문화

고대 농경문화의 발달, 특히 벼농사 기술의 발전은 수천년 전 이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핵심일 뿐만 아니라 그 생활 모습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농촌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들의 노동은 오늘날 유구한 시간을 관통하는 농업 공동체 문화로 살아남아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또 현대까지 이어지는 농업 문화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인류의 쌀농사 기원과 관련해서는 중국과 한국이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고고학 분야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중국 호남성에서 출토된 볍씨를 근거로 인류가 벼농사를 지은 것은 BC 9000년 경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표기해 왔다. 그런데 이 학설은 한국에서 볍씨 유적이 새롭게 발굴됨에 따라 쌀농사의 기원이 한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난 1994년 충북 청주 오창과학산업단지 건설 중 고대벼 18톨, 유사벼 109톨 등 모두 127톨이 발굴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청주 소로리 볍씨’로 알려진 이 볍씨는 원시 유사벼가 고대벼 보다 훨씬 더 많이 발굴되었으며 벼의 진화과정을 규명하는 결정적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이 볍씨는 탄소연대 측정결과 중국 볍씨보다 4천년이 앞선 BC 1만3천년경 재배되었던 볍씨라는 것이 밝혀져 세계 고고학 개론서 ‘Archaeology'에 쌀의 기원은 한국이라 명시되는 한편 세계문화유산 등재 논의와 함께 전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 되기도 했다.

►청주 소로리 볍씨. 지난 1994년 청주 오창과학산업단지 건설중 발굴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 유물로 인류의 벼농사 기원은 한국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유물이다.

이로써 인류의 쌀농사 시기도 9000년 전이 아닌 1만3천년 전으로 표기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난 2017년 5월 중국은 양쯔강 하류에서 발견한 벼를 기존의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이 아닌 새로운 연대 측정법으로 실험한 결과 9천400년 전 볍씨라며 인류 최초 쌀농사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원시벼와 고대벼가 한꺼번에 출토된 ‘청주 소로리 볍씨’의 기원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이 어떻게 인류의 쌀농사 기원이 되었을까. 학계에서는 지구 나이 1만5천 년 전이면 빙하기가 지나고 기온이 올라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지는 시기로 지금의 서해에 물이 들어와 높은 지대로 이동하면서 한반도에서 광범위하게 벼농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쌀농사와 그 기술이 중국에서 들어왔을 것이라는 기존 학설은 깨어지고 한반도에서 확대되어 중국이나 고조선시대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라는 가설이 오히려 더 신빙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한국의 벼농사에 대한 최초 기록은 ‘삼국지’ 위지 변진조에 ‘변진국들은 오곡과 벼 재배에 알맞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삼한시대 ‘벽골제’ 등 저수시설에 관한 기록과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쌀농사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권농관을 두는 한편 벼 재배면적을 늘여 공양왕 3년에는 논이 51만ha에 이르렀으며 조선시대에는 ‘농사직설(세종11년)’ 등 각종 농사기술서를 발간하고 볍씨의 싹을 틔워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 보급, 보리 이모작 등 농법의 발전을 이루어 해방이후 1960년대에 논농사는 전국 123만ha에 이르게 되었다.

인류의 최대 곡물이자 한민족의 주식으로 자리잡은 쌀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재배되고 기술 또한 발전되어 왔는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원형을 간직해온 농업 공동체 문화 또한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농사일은 추수하기 까지 몹시 고된 과정을 거쳐야 하는 만큼 상부상조 기능을 하는 협업체계와 농요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힘든 모내기, 김매기 등을 마을단위 공동작업을 통해 해결했던 ‘두레’나 이웃끼리 바쁜 농사일을 서로 돌아가며 거들었던 ‘품앗이’, 공동의 이해관계로 모여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상부상조 했던 ‘계(契)’나 마을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했던 향약 등은 농사의 고단함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극복하여 즐거움과 희망의 메시지로 승화하는 농업 공통체 놀이문화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농업 공동체 놀이문화로는 농악과 농요를 들 수 있다. 농악의 경우 여러 설이 있으나 제사장이나 무당이 풍농을 기원하거나 안녕을 신에게 비는 샤머니즘(굿)에서 농악놀이가 출발했다고 보고 있다. 농요 또한 농사의 협업이 시작된 시기와 함께 하므로 악기나 농법의 변화, 그리고 당시의 사회 문화의 영향으로 조금씩 변화되어 왔으며 그 기원은 벼농사 만큼이나 오래 되었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꽹과리와 방울을 연주하며 두레농악을 즐겼다고 하는데 경상도 지방에는 꽹과리 소리를 흉내낸 ‘쾌지나칭칭나네’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에도 제천 행사때나 군사들의 열병, 그리고 농사에 농악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까지 강릉, 이리, 평택, 진주 등 전국에 농악 놀이가 전해지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농요가 전해지고 있다.

안동과 예천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에서도 그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오랫동안 농악 농요가 전승 보존되고 있다. 지난 2005년 청동기시대 저수지 유적이 발굴돼 화제를 모았던 안동 저전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저전농요’, 내성천을 끼고 일찍부터 논농사가 발달했던 예천 통명마을에 전해지고 있는 ‘통명농요’, 그리고 낙동강에 인접해 넓고 비옥한 낙상평야를 일구며 전승되어온 예천 풍양의 ‘공처농요’ 등이 있다.

안동·예천지방 만의 특색있는 농요 전승

피로 덜고, 손 맞추고, 흥 내고~~인간의 희노애락 담겨

농요는 풍농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천의식과 더불어 청동기 주조기술의 발전으로 연주되는 악기가 다양해지면서 발전한 농악이 농사 현장에 도입되고 여기에 농민들의 고단함과 애환, 해학적 내용을 담아 구비 전승된 농업 노동요라 할 수 있다. 농요를 통해 일꾼들은 피로를 덜고 일손을 맞추기도 하며 인간의 희노애락이 담겨있는 가사를 통해 흥을 돋우며 공감하고 협동하는 다양한 기능을 해 왔다.

현재 제대로 전승되고 있는 농요는 안동 저전농요, 예천 통명농요, 공처농요, 서울 마들농요, 고성농요, 상주농요 등 전국 10여 개로 경북지방에 가장 많이 전승되고 있다. 이 가운데 안동 저전농요(경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는 언제부터 시작된 지는 확실치 않으나 기묘사화를 피해 저전(모시밭)에 정착한 한양조씨 일문에 의해 주로 전승되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동 저전농요. 언제부터 시작 된지는 알 수 없으나 기묘사화를 피해 안동 저전마을에 정착한 한양조씨 일문에 의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농요는 대부분 앞소리꾼이 선창으로 사설을 메기면 뒷소리꾼이 후창으로 후렴을 하는 형식을 띠며 처음에 사설을 길게 메기고 뒤에 자진가락으로 마무리 하는 비슷한 형식이지만 지방에 따라 노랫말이나 부르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저전농요는 ‘논매기 노래’, 달개 소리‘, 망깨 소리’의 가락과 부르는 방법이 다른 지방과 다르고 ‘논매기 노래’의 경우 인근 예천지역 농요와 비슷하기는 하나 구절 구절 마다 들어가는 변화음이 크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모를 찔때는 주인집 애첩이 찾아오는 모습을, 그리고 모를 심을때는 주인과 애첩이 사랑하는 장면을, 두벌 논메기때는 “어헐럴러 상사뒤야”하는 메기는 후렴과 “치야칭칭나네”하는 받는 후렴을 하면서 낭군의 장례식과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내용으로 구성하여 해학적 요소를 가미했다.

저전농요 전승에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지난 2002년 작고한 초대 예능보유자 조차기(趙且基)옹이다. 안동 저전농요보존회 조석탑 회장은 “조차기 어른의 초성은 전국에 제일”이라며 “한번 들으면 즉시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먼저 부른 사람보다 즉석에서 훨씬 잘 부르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고 장례식 때 상여소리 하면 상주들 다 울리고 정말 그 어른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고 “나도 도시에서 직장생활하다 그분 소리에 반해 전수 받으려고 고향으로 왔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막 내려오던 해 그만 조차기옹이 풍으로 언어장애가 생겨 전수받지 못하고 말았다. 조석탑 회장은 조차기 어른 작고 후 위기의 보존회를 수습하며 저전농요를 보존 전승하는데 각고의 노력 중이다.

►안동저전농요보존회 조석탑회장. 보존회 사무실에 조차기옹의 대형 액자사진이 걸려있다. 조석탑회장은 조차기옹의 소리에 반해 노래를 전수받고자 고향에 내려왔지만 풍으로 언어장애가 생겨 현재 독학을 하며 보존회를 어렵게 이어가고 있다.

저전농요는 현재 3명의 전수조교와 2명의 이수자를 비롯해 38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6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인기상, 73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교부장관상, 05년에 경북향토민요경창대회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매년 민속축제와 6월 정기공연을 실시하고 있다.

안동에서 학가산을 넘고 내성천을 건너면 이르는 마을이 예천읍 통명리다. 통명농요(중요 무형문화재 제84-나호)는 모심기 소리와 ‘도움소 소리’, 논을 매면서 부르는 ‘애벌매기 소리’와 ‘상사듸여’, 그리고 ‘방애 소리’, ‘에이용 소리’와 논을 매고 집으로 오면서 부르는 ‘캥마쿵쿵 노세’, 타작할 때 ‘봉헤이’, 부녀자들이 부르는 ‘삼삼기 노래’, ‘베틀노래’, ‘도해따기’ 등이 전한다.

►1977년 10월25일 제1회 예천군 문화제 당시 예천극장에서 통명농요 중 논매기 소리를 처음으로 공연했다.

이 가운데 타지역 농요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은 한쌍이 된다는 뜻의 ‘어부랑세이’와 같은 ‘아부레이 수나’하는 후렴 사설이 나오고 그 뒤에 ‘이이여도 수여’를 부른다는 것이다. 안승규 예천 통명농요보존회 회장은 “아부레수나는 아물다, 하늘 땅이 붙다, 쌍그네처럼 하나된다는 뜻인데 이와 비슷한 말이 몽골에 신께 제사 지낼때 하는 소리로 남아 있다”며 “이곳에 몽고 말장터가 있는것을 보면 몽고와 관계가 있는게 아닌가”라며 몽고와의 관련을 주장했다.

통명농요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올 때 상머슴이 소등에 거꾸로 올라 앉아 하늘의 만복을 받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의미로 삿갓을 뒤집어 쓰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같은 예천농요지만 공처농요의 경우 사람들이 걸채를 매고 그 위에 상머슴이 타고 들어오고 홍성지방은 지게를 타기도 하는데 비하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논매기 소리때 후렴을 ‘헤, 헤헤이요, 호호호호하, 에아에헤아오’며 길게 하는데 중간에 ‘붐붐붐붐’하며 입방귀를 넣어 흥을 돋우는 특징이 있다.

►예천통명농요보존회 안승규회장과 안영모사무국장. 8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통명농요는 해외 초청공연과 지역 축제에 참가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50년대 말까지 전승되다 사라졌던 통명농요는 74년 함봉춘 옹과 강원희 전 보존회장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전수조교 3명, 이수자 13명 전수생 17명 등 35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79년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93년 중국, 08년 미국 LA, 09년 브라질, 일본 초청공연을 비롯해 매년 5월 삼강주막 축제 공연과 정기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통명농요 대통령상 수상 환영식. 1979년 제20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통명농요가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낙동강을 따라 예천 서남쪽 상주 문경 방향으로 가다보면 예천군 풍양면이 나온다. 풍양에서 전해지는 공처농요(경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는 내성천과 낙동강이 막혀 저전농요와 풍양농요, 그리고 낙동강을 건너 바로 인접해 있는 상주 사벌면 초산민요와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모심는 소리때 나오는 “아오~, 에 이여송아~, 아오~”하는 후렴구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처농요 만의 특징이다. 임진왜란 이후 전국에 명나라 지원군 수장이었던 이여송에 대한 이야기가 설화 형태로 많이 전해지지만 농요에 실존인물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공처농요가 유일하다.

►예천 공처농요. 1930년대 들에서 사라졌던 농요를 각고의 노력 끝에 복원하여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상머슴이 집으로 들어갈 때 사람들이 들채에 태워 간다. 갓을 거꾸로 쓰는 것은 하늘의 복을 받아 일꾼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의미이다.

예천 공처농요보존회 양주석회장은 “이여송 이름은 여러 노래 가운데 모심기 소리에서만 나오고 있다”고 말하고 “옛날 이 지역민들은 이여송 장군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준 은인으로 생각해서 언제 부터인가 농요에 넣은것 같은데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혹은 세상에 모르는게 없는 박사라는 존재의 의미로 전해지고 있다”며 “이는 공처농요가 500년 이상 다른 지역과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전승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또 논매기때는 ‘에해~ 에해해해해애~ 아~ 하아~, 아아아 오~우, 우우우~ 워잇(오웨이)우우워, 워훠~ 우에이이, 애라보자~ 하이~ 아아~ 오워~(오우~)’하는 후렴구가 매우 길뿐만 아니라 여러번 반복하기도 하는데 약 3분의1정도 남았을때 바로 짜른사대로 이어져 ‘에해에해 에해이이~얼사아아 이하이~오오호’로 맺음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밖에 어루사대, 진햇소리, 짜른햇소리 등의 논매기 소리가 있고 상머슴이 걸채를 타고 집으로 들어올때 부르는 ‘걸채소리’, 벼이삭을 떨때 부르는 ‘잘개질 소리’, 모두가 흥겹게 부르는 ‘치나칭칭’ 등이 전하고 있다.

►예천 공처농요보존회 양주석회장. 공처농요는 후렴이 매우 길어 공처농요 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30년대 까지 들에서 불려지던 공처농요는 사라졌다가 81년부터 손의원 면장과 선소리꾼인 양삼억, 이용식씨 등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조교 6명, 이수자 11명, 전수생 5명을 포함 모두 4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8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공부장관상, 93년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오는 10월 22회 정기공연을 앞두고 있다.

이처럼 현재까지 안동과 예천에 보존 전승되고 있는 농요는 타 지역에 비해 그 수도 많을 뿐 아니라 오래도록 구비 전승되면서 당시의 시대상이나 사람들의 생각이 노래에 반영되고 힘든 농사일과 삶의 애환을 해학적 요소를 통해 흥겨운 가락으로 풀어내며 안동과 예천을 중심으로 한 경북북부지역만의 특색 있는 농업 공동체 놀이문화로 전승되어 왔다.

쌀의 중요함 만큼 농요의 전승에 관심을

보존회원 대부분 70대 후반, 열악한 보존환경 개선 시급

쌀농사의 기원과 함께해 온 농요는 그 유구한 역사와 농민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문화적 가치는 물론 농업을 중심으로 발전한 협업체계와 당시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존 전승하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 산업사회가 되면서 논농사의 비중이 급격히 낮아지고 80년대 이후 보급된 기계화영농으로 인해 농사짓는 방법이 바뀐데다 고령화와 농업인구 감소로 더 이상 전승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70년대 초부터 농촌에 경운기가 보급됨으로 탈곡 방법이 바뀌고 80년대 콤바인과 이앙기가 보급되어 손모내기를 하며 부르던 모내기 소리며 김매기 소리 등 쌀농사 과정에서 불렀던 농요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또 현재 농촌에는 평균연령이 65세 이상으로 이미 심각한 초고령 사회가 된데다 70년대 초 국민 70%가 농업인구이던 것이 현재 250만 명 이하로 떨어져 이제는 농요를 부를 사람도 없는 실정이다.

►예천 공처농요보존회 양주석회장. 공처농요는 후렴이 매우 길어 공처농요 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공처농요 양주석회장은 “보존회 나이 제한이 80세까지인데 현재 보존회원 나이가 대부분 77세, 78세여서 3년 앞을 알 수 없다”며 우려했다. 이는 타지역 보존회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존회측은 회원 범위를 마을사람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인근 마을사람이나 시군민까지로 확대 모집하고 있다.

또 농업소득 저하로 마을 사람들조차 농요와 보존회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통명농요 안승규 회장은 “촌에 노인들이 생계가 어려운데 돈 안되는 보존회 하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고 말하고 “군에서 일년에 500만원 정도 지원하는데 운영비에 턱없이 모자라 공연을 할 수 없는 실정”이라며 행정기관의 관심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공처농요 양주석회장도 “일본도 우리나라와 같이 농업인구 감소와 고령화를 겪고 있는데 기능보유자의 경우 생계를 충분히 보장해주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권위도 대단하다”며 처우개선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류의 쌀농사 기원지로서 쌀의 의미는 특별하다. 국제 곡물시장 개방과 더불어 먹거리의 다양화로 경작지 감소가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 쌀문제 만큼은 식량안보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인식아래 정부에서는 유휴농지를 방지하고 쌀농사 직불금 제도를 시행하는 등 쌀지키기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렇듯 쌀농사 과정에 생성된 농민들의 노동요 또한 쌀과 그 연원을 함께해온 만큼 안동과 예천에 어렵게나마 보존되고 있는 농요를 소중한 인류 문화로 바라보고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들은 하고 있는 것이다.

►해외에서의 농요 시연(통명농요). 보존회원이 대부분 70대 후반으로 농요를 보존 전승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이들은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을 알린다는 사명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누대를 걸쳐 전승되어온 협업체계와 농업 공동체 문화를 보존 전승하는 것은 인류의 쌀농사 기원지로서의 자긍심과 더불어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으로 아끼고 보존하는데 지역사회의 관심이 더욱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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