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7 화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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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안동역을 다시 돌아보다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8)
2017년 09월 11일 (월) 09:35:26 이미홍(경북기록문화연구원 운영위원) lmh3377@hanmail.net

안동역(安東驛)은 1930년 10월 15일에 개통하여 현재 중앙선 및 영동선을 운행하는 모든 여객열차가 정차하는 역이다. 지역민들의 애환이 서린 안동역이 100여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현재 2020년 이전을 앞두고 있다. 1931년 안동역이 문을 열고 김천-안동간 경북선을 타고 기차가 안동역에 들어온 이래 90여년을 그 자리를 지키고 섰던 안동역이 중앙선 철로 직선화 공사와 함께 이전 준비 작업에 들어간다. 중앙선 철로 이설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안동역의 그간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작업을 통해 안동역과 함께해온 안동역을 둘러싼 지역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 안동에 들어온 증기기관차. (사진: 20세기 안동)

 

안동의 어제와 오늘을 함께한 안동역

안동역의 시작은 조선철도회사의 철길 건설을 따라서 왔다. 그리고 그 철길을 따라 새로운 문명이 왔고 그리고 일본인들도 왔다.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근대화의 바람은 철도의 굉음과 함께 안동에도 불어닥쳤고 안동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그 시작은 경북선 철도였다.

1919년 조선산업철도가 김천~안동 간 부설 면허를 취득하였다. 이후 1923년 9월 1일 조선산업철도를 포함한 6개 사설 철도 업체가 조선철도로 합병되면서, 조선철도에서 경북선 건설을 맡게 되었다. 1931년까지 전 구간 건설이 이뤄졌다.

1930년 경북선 연결에 앞서 안동역 역사가 준공되었다. 그리고 1931년 10월 15일 경북선(김천-안동) 개통과 함께 경북안동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당시 조선총독부관보 휘보에 ‘사설철도(조선철도주식회사-조철선) 안동역 운수영업개시’ 소식이 실려 있다.

   
▲ 안동-점촌간 경북선 철로가 보이고 강 너머 보이는 건물이 법룡사다. 1934년 7월. 근대 안동
   
▲ 점촌-예천간 경북선 개통. (사진: 동아일보)

1931년 안동읍소의 개청에 이어 운행을 시작한 안동역은 안동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안동역이 있는 안동읍내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찍이 석주 이상룡은 나라의 주권을 잃고 일가를 이끌고 안동역이 생기기 전 걸어서 안동을 떠나 만주로 향했지만, 1930년대 일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안동사람들과 청송, 영양, 의성, 봉화 등 인근지역의 수많은 민초들은 안동역에서 열차를 타고 그 뒤를 따라 황해도로, 간도 땅으로 향했다. 일제와 함께 들어온 철도를 따라 일제를 피해 떠난 것이다.

   
▲ 황해도로 떠나는 이주민 행렬. 1936년 안동역. (사진: 동아일보)

만주사변이 터지고 뒤이어 중일전쟁이 발발할 무렵 중앙선은 군사수송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안동의 많은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안동역에 집결하여, 자신들이 동원되어 놓았던 중앙선 열차를 타고 북해도로, 남양군도로 끌려갔다.

   
▲ 안동역을 향해 들어오는 완행열차. (사진: 안동의 어제와 오늘)

1936년 5월에 청량리, 안동, 영천으로 이어지는 중앙선 건설계획이 통과되고 8월에 중앙선안동건설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철도부설과 함께 평화동 철도관사 조성공사가 함께 진행되었다. 당시 평화동에 조성된 철도관사는 2백여 동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두어 채만 남아 옛날의 관사 동네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 옛날의 흔적이 남아있는 평화동 관사
   
▲ 평화동 철도관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
   
▲ 1930년대에 지어진 이하역 철도관사. 지금은 개인 사유지다.
   
▲ 이하역 철도관사. 20여 평이 넘는 규모로 기술관련 간부급이 살았던 관사로 보인다.

▶ 당시 안동에 있던 관사는 직급에 따라 6등급부터 8등급까지 배정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평화동 관사는 6등급에 준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하역 관사는 7등급에 준하는 규모라고 볼 수 있다.

1937년, 안동역사와 나란히 연결될 낙동강 철교 가설이 시작됐다. 안동에서는 근로보국대를 조직해 학생들까지 동원해서 낙동강 백사장의 자갈을 줍고 기금을 조달하고 철교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안동역과 낙동강 철교, 철도 관사 등 안동역 주변개발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다보니 안동 상권도 요동쳤고, 땅값이 들썩였으며, 안동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사람들의 인심도, 사는 방식도 철도 따라 들어오는 문명의 영향을 받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1936년 12월에 조철선은 부산-서울간 특별급행열차(아까스끼)를 신설(6시간 45분)하고 지역민들의 요구로 부산-안동 간에도 급행열차를 신설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에도 돈 있는 안동사람들은 특급열차를 타고 부산까지 기차여행을 했다는 이야기다.

   
▲ 1946년 경부선에 운행되었던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 (사진: 한국철도 80년사)

1940년 3월 1일 중앙선 우보- 안동 구간이 개통되었고, 1942년 청량리와 경주를 연결하는 중앙선 전구간이 개통되면서 마침내 안동역의 중앙선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륙진출을 꿈꾸는 일본의 야욕은 철로를 끝없이 연결시켜 당시 안동역에서 기차를 타면 조선과 만주, 일본, 심지어 러시아, 미국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안동 사람들이 황해도를 넘어 간도로, 상해로, 연해주까지 간 데는 철도가 한 몫을 단단히 했던 것이었다.

   
▲ 안동댐 진모래 철교 1950년대 초. (사진: 예안면사무소 제공)

광복 후 경북선(김천 – 경북안동)은 광복 당시 보유하고 있던 충북선(조치원 - 충주), 경남선(마산 - 진주), 전남선(송정리 - 담양), 함북선, 황해선, 옹진선 등과 함께 미군정기인 1946년 5월 17일부로 모두 국유화되었다. 안동철도사무소는 안동철도국으로 바뀌었고, 안동역은 제천역에서 화산역까지 중앙선 20개 역을 관장하는 중앙선의 중심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1948년 열차 이용의 증가와 함께 경북안동역이 사무관역으로 승격된 데 이어 1949년 7월 안동역으로 역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안동역이 자리를 잡아가던 그 시기 세상은 뒤숭숭했고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6.25 동란과 안동역

1950년 6.25가 발발했다. 안동역은 낙동강 교두보 사수를 위한 군사작전의 중요 거점역이자 군수물자수송의 기지가 되었다. 7월 29일부터 8월 1일까지 벌어진 나흘간의 전투에서 안동시가지와 안동역은 폐허가 되었고, 안동철도국은 안동을 방어하던 8사단과 함께 철수를 해야 했다. 철수와 함께 국군은 안동교와 안동철교를 끊었고, 안동역에는 급수탑만 남았다.

   
▲ 끊어진 철교와 폐허가 된 안동시가지. (사진: 20세기 안동)
   
▲ 1940년에 설치, 등록문화재 49호로 지정된 안동역급수탑 1950년대. (Ⓒ김성근)
   
▲ 급수탑으로 올라가는 철제난간이 없는 현재 급수탑. (Ⓒ김성근)

 

안동역 김노한 기관사의 기억

직접 군수송작전에 참가했던 안동역 김노한 기관사의 참전 수기는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7월 27일 열차가 문수역에 도착 후, 군인 경찰 피난민 기관차 승무원 들은 팔을 걷어 부치고 피에 얼룩진 부상병들을 병원 열차에 옮겨서 후송했다. 또 군수품 1개 열차도 안동역까지 후송시키다 남은 한 량의 화차는 내가 책임지고 최전방에서 오르내리며 군수품 보급을 하기 위해 문수역에서 영주역 인근까지 열차로 최전방까지 들어가 보급하였다.

7월 28일 17:00시경에 안동에서 석탄화차 2량과 화차위에 소방용 수동펌프와 호스, 기름을 보급열차 편에 보내주고, 기관차도 교환했다. 인수받은 기관차를 군용 열차에 연결해 두고 옹천역에서 대기하면서 탄수차에 석탄을 퍼 올리는 작업을 3시간 동안 계속하였다. 옹천 역사 뒤 소하천을 깊이 파내고, 지하수를 소방용 펌프로 100m 거리나 되는 기관차 물탱크에 물을 공급하느라 땀을 흘려서 지쳐 쓰러질 상태다. 지난 7월 10일 경부터 교대 한 번 못 해 보고 자고 싶으나 잠을 잘 시간조차 없다.

7월 29일 14:00시경 안동방면에서 군 병력을 승차시킨 열차가 도착하기 시작한다. 군에서 발표하기를 옹천~평은간 예고개 산맥을 중심방위선 구축을 하기 위해 한국군의 호랑이 부대인 김석원 장군 부대가 포진한다고 한다. 전쟁 발발 후 오늘날 까지 밀려 내려오기만 했다. 5개의 화차에서 내린 부대는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30일. 안동 옹천역에 ‘군인 20명과 TNT 50상자를 싣고 출동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폭발할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거부했지만 지휘관은 권총의 총구를 나의 오른쪽 가슴에 겨눴다. 옹천~평은 간 내성천 철교를 폭파하는 작전으로 북한군이 철도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철교까지는 2.75㎞의 터널 구간을 통과해야만 했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천천히 터널을 나오자 열차에서 내린 아군들이 TNT를 설치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다시 아군을 태우고 화차를 움직이자 몇 분 후 굉음과 함께 철교는 폭파됐다.

1951년 새해가 밝았다. 철도는 여전히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무너진 도로를 복구하러 떠나는 방위대를 실어 날랐고, 군인들 시신을 수습해 구덩이에 파묻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열차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몇 번이나 마음먹기도 했다. 그러나 곧 1.4 후퇴로 다시 전쟁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행정부처의 짐을 적재한 열차와 피난민, 군수품 적재차량들이 남쪽을 향해 줄을 잇고 있다.

-김노한 기관사의 참전수기 중에서-

   
▲ 피난민을 실어 나르는 열차. (사진: 한국철도 80년사)
   
1955년에 발행한 ‘한국교통동란기’에 실린 철도현황도. 군사작전자료. 김성근 제공
   
▲  ‘한국교통동란기’ 표지. 1955. 우리나라에 한 권뿐인 책으로 철도박물관에 이 책의 존재를 알린 이가 김성근 씨다.

1951년 3월에 낙동강 철교가 복구됐고 기차 운행이 재개되었다. 안동 시가지 복구는 안동역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6.25로 파괴되어 새로 건설 중인 낙동강 다리. (사진: 한국철도 80년사)

1960년 8월 25일, 안동역 역사가 준공되었다. 열차는 사람과 물자의 이동에 필수적이었기에 지역민들도 성금을 기탁하고 복구 작업에 동참하여 철로 복구와 안동역 건설에 만전을 기했다.

   
▲ 안동역사 준공식 1960.3.8. (Ⓒ김성근)
   
▲ 낙동강 교량 개통식 62.12.22 (사진: 동아일보)

1963년 안동읍이 안동시로 승격되었고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1964년 철도국이 안동에서 영주로 이전했다. 철도당국은 1944년에 태평양 전쟁 때문에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철거했던 경북선 점촌-안동 구간의 철로를 복원하는 대신 철도국의 이전에 따라 영동선과의 연결을 위해 점촌-영주 구간을 신설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안동은 경북선도 잃고 철도국도 옮겨가게 된 셈이었다. 안동 사람들의 상실감은 컸지만 그러나 우선은 먹고 사는 것이 급선무였다. 철도국이 옮겨간 자리에는 지역의 산업체들이 입주를 했고, 안동역 맞은편에도 섬유공장 등이 들어서 안동역을 통해 화물을 실어 보내면서 안동의 지역경제를 이끌어갔다. 안동역의 열차 화물 수송량이 늘어나면서 1971년 안동역은 무연탄 화물 도착역으로 지정되었다. 안동에서 만들어진 연탄이며 섬유들이 끊임없이 실려 나갔고, 시커먼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도 부지런히 안동역을 오갔다.

   
▲ 화물을 싣고 안동역을 오르내리던 산업철. 중앙선 건설호 1966년. (사진: 한국철도 80년사)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차역은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서부리 강석수 이발사는 스무 살 무렵에 안동역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가 객지 설움에 돌아왔다가, 동네 친구 둘과 함께 기차 타고 다시 청량리로 가서 페인트공이 되어 건물에 페인트칠하는 일도 하고 성남시장에서 장사도 해서 돈을 벌었다고 했다. 한 친구는 양복점에서 일을 하고 또 한 친구는 중앙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고 했다.

   
▲ 화물수송 컨테이너 열차. (사진: 한국철도 80년사)

또 다른 한편으로 안동역은 학업을 위해 대처로 나간 학생들이 꼭 거쳐 가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도시의 학교로 떠나는 자식들을 위해 짐을 보따리보따리 실어주고도 연신 기차 밖에서 당부의 말을 잊지 않던 부모님의 모습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 대입예비고사를 보러가기 위해 열차를 기다리는 고등학생들 안동역 1971년. (사진: 안동의 어제와 오늘)
   
▲ 1960~70년대 열차 안 풍경.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사진: 한국철도 80년사)

1970년대 안동역에는 하루 평균 5천 3백여 명이 이용했고, 80년에는 하루 7500여 명으로 이용객이 늘었다. 1980년대는 안동역의 전성기였다.

1980년대에 안동역은 쌀값 보장, 고추값 보장, 담배값 보상을 외치는 농민들의 집결지이기도 했고, 도시에서 농촌으로 봉사활동을 오는 농활 학생들이 첫 인증사진을 찍는 관문이 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로 서서히 이용객이 감소하기 시작하여 2000년도에는 4천여 명으로 줄었는데, 중앙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급감해서 2010년에는 하루 이용객이 천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안동역도 열차를 연계한 다양한 관광 상품들을 만들어내고 젊은 층을 위한 ‘내일로’ 등 다양한 시도로 역의 풍경을 바꾸어가고 있다.

 

실버넷 기자 김성근 역장의 기록

   
▲ 안동역장 시절 직원대상 교육중인 모습. 73년 안동역. 김성근 제공


김성근씨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안동역 역장을 지냈다. 부모님이 화본역 앞에서 식당을 운영했는데 덕분에 기관사가 되는 꿈을 꾸게 되었고 철도에서 근무하는 분을 통해 56년에 개교한 교통고등학교에 가게 되었고 졸업 후 화본역에 첫 발령을 받았다.

“고향역이기도 한 화본역을 직원들이 지게로 돌을 나르고 꽃을 심고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으로 그때 지정을 받았죠. 1년 차에 철도청에서 주최한 주산대회에 나가서 1등상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천역(의림지 사진)으로 옮겨 근무를 하다가 입대를 했지요. 군대는 비밀을 요하는 1군사령부 산하 특수부대에서 근무를 했어요. 제대하고 65년도에 다시 철도에 재취업을 했지요. 당시에는 군대 가도 자동으로 퇴직이 되고 복직이 아니라 다시 취업을 해서 재교육을 받아야 되는 제도였지요.” 그는 재교육기간을 거쳐 68년 복직해서 황지역에서 다시 근무를 시작했다.

   
▲ 54년 교통고등학교 1기 수료. 67년 철도고등학교로 개교. 김성근 제공
   
▲ 제천의림지역 근무당시 59년. 김성근 제공

군대 갔다 와서 다시 황지역을 시작으로 강원도 정선, 영월역을 거쳐 봉화, 의성, 안동역 등 경북선과 중앙선, 영동선 따라 수많은 역을 거쳤죠. 80년대에 안동역 역장으로 근무를 했지요. 당시에는 안동역을 거쳐 가는 열차의 수도 많고 승객도 많아서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해서 직원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썼어요. 직원들 모아 놓고 안전교육을 많이 했지요.”

철도에서 근무하면서 기획과 자료 정리에 뛰어나 철도홍보지도 만들고 철도청장상 등 각종 상을 받기도 했던 김성근 역장은 자신이 근무한 모든 역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안동역의 급수탑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업그레이드 되어온 기차의 모습, 철로의 신호기의 변천사까지 기록해 온 실버넷 기자 김성근씨는 1960년 개통해서 2015년 영주댐이 생기면서 영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평은역의 모습도 찍어두었다. 안동역의 이전을 앞두고 사라지게 되는 역사의 사진도 다시 찍고 있다고 한다.

   
▲ 68년 황지역. 김성근 제공
   
▲ 봉화현동역장 시절. 김성근 제공
   
▲ 봉화 춘양역 시절 안전교육시범중인 김성근 역장

1970년대는 전국적으로 경제개발과 더불어 새마을운동이 전 분야에서 추진이 되던 시대였다. 철도에도 새마을의 바람은 불어왔다.

“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과 관련해서 철도 부분 환경정비부터 시작해서 대민정신 교육, 관리자 교육도 많이 시켰던 시기였죠. 용산 철도국에서 관리자교육 받고 와서 다시 직원들 재교육시키고 그랬죠. 제가 73년도 무렵에 안동역에서 근무를 하다가 80년대 초에 다시 안동역에서 3여년을 근무를 했어요. 그때 바뀌는 철도 정책 따라 역사 정비와 시설 교체도 새로 많이 했는데, 당시에는 철로 수선부터 장부 작성까지 다 일일이 사람들 손으로 했지요. 승객도 많았고 일도 많았죠. 그러다가 영주 철도청으로 가게 되었죠.”

   
▲ 역내 선로사이 사무실에서 중요한 열차 운행 지령을 내릴 때 사용한 전화기. 김성근 제공

김성근 역장은 열차문화의 변화를 함께 이끌어온 사람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철도의 현대화 고비마다 현장에 있었고, 철도를 이용한 관광객 증가에도 한몫을 했다.“80년대 중반에 열차영업을 담당하면서 ‘신혼열차’라는 걸 제가 개발을 했습니다. 열차를 타고 전국을 돌며 답사를 하고 신혼부부들을 위한 여행코스를 만들었죠. 86년 독립기념관이 개관하고 독립기념관관광열차 상품도 제가 개발을 했지요. 단체관광열차 사업을 처음으로 열차에 시도를 한 거죠. 안동역에서 수백 명이 기차를 타고 천안역에 내리면 관광버스가 13대가 대기하고 있다가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태우고 독립기념관으로 가는데 그런 일이 처음이다 보니 앞에서 천안경찰서 경찰차가 인도를 하고 천안 사람들이 다 나와서 보고 그랬지요. 그게 호응이 좋아서 관광열차 사업이 확대가 되고 덕분에 철도청장(최기덕)에게서 대상도 받았죠.”

   
▲ 천안독립기념관 관광열차 개발로 수상하는 김성근  

부모님이 잘 아시던 안동철도국 높은 직급에 계신 분께 부모님하고 평화동 철도관사로 인사를 간 기억이 있다는 김성근씨는 지금도 실버넷 기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자신이 지나온 철도 자료들과 경북의 간이역들에 대한 사진들과 자료들을 따로 정리해서 실버넷에 연재를 하고 있기도 하다.

 

권오진 역장의 기차표가 말해주는 철도의 변천사

권오진은 안동 무릉이 고향이다. 그는 안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본고사를 보러간 세대이다. 고향인 무릉역을 통과하던 기차를 보고 자라면서 철길을 따라 먼 곳으로 달려가는 열차를 보며 철도에 관한 꿈을 키웠고 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에 들어갔다.

“내가 59년도에 안동고등학교 졸업을 했는데, 그때는 예비고사도 없었고 희망하는 그 대학에 가서 시험 쳐서 들어갔어. 안동역에서 기차 타고 시험 치러 갔지. 요즘 학생들은 대학 가기도 힘들고 시험도 너무 복잡한 게 마음에 안 들어. 자기 가고 싶은 대학에 시험 봐서 들어가게 하면 좋을 텐데.”

   
▲ 권오진의 근무기록일지 수첩과 기차표1. 열차의 종류에 따라 다른 기차표.

그는 태백에서 첫 근무를 시작하여 무릉역장으로 퇴직을 했다. 철도 근무 첫날부터 수첩에 근무일지를 기록했다. 근무수칙이나 업무지시사항부터 복장 규정, 승객을 대하는 자세까지 조목조목 기록을 했다. 역장이 되고부터는 직원들에게 교육할 내용이나 시기별로 중요한 내용들을 기록했다. 개인적인 기록이라고 내용 공개는 굳이 할 필요가 있겠느냐던 그가 이런 것들이 무슨 기록에 자료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다며 조심스레 내보인 것은 자신이 수집한 기차표들이었다. 자신이 근무하던 동안 운행했던 열차들의 승객차표를 기회가 되는 대로 모아둔 것이었다. 기차에서 내리는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얻은 것들도 있고, 역무관으로 근무할 당시 도착역의 차표 담당 역무원에게 부탁을 해서 얻은 것들도 있었다. 철도종사원인 그가 차표를 살 일은 없으니 차표 수집을 하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부탁을 해서 직접 사용했던 차표를 수집했다고 한다. 퇴직 후에는 타지로 갈 때는 꼭 기차를 타고 다니고 자신이 직접 끊은 차표를 보관해오고 있다고 하며 한 달 전에 서울 갔다 온 차표를 내보인다. 분홍색 비둘기호 차표부터 군인용 차표에 특급열차표, 그리고 최신 발권차표까지, 권오진씨는 차표를 통해 기차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 권오진의 기차표2. '후'자가 찍힌 군인용 표도 보인다.
   
▲ 권오진의 기차표3. 부산까지 가는 특급좌석권표
   
▲ 권오진의 기차표4.보통침대권표.
   
▲ 권오진의 기차표5. 가장 최근에 본인이 사용한 기차표도 수집목록으로.

“가장 최근의 차표는 얼마 전인 5월 달에 서울 애들 집에 갔다 온 차표지. 나는 차는 안동 떠나면 안 가져가고 기차 타고 가지.”

수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함께 싣고 달리는 열차였기에 철도원들은 늘 사고에 대한 염려를 놓을 수가 없는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사고와 마주할 때도 있었다. 그가 근무하던 73년에도 안동역에 큰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73년 여름이었을 거야 아마. 그날 마침 휴무라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후배한테서 다급한 전화가 왔어. 안동역 북쪽 법흥교 부근에서 영주에서 안동으로 내려오던 동차하고 안동역사 구내 입항기하고 정면충돌을 한 사건이 난 거였어. 그때 사고가 크게 나서 당시 담당직원들이 형무소도 가고 했지.”

그가 기억하기로 올림픽을 전후한 1980년대가 철도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그때 안동역 하루 수입이 천만 원이 넘었어. 당시 차비가 요즘 반값도 안 되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이용했는지 알 수 있지. 우리 직원이 퇴근하라고 하면 ‘아직 천만 원에서 조금 모자랍니다. 그러면서 천만 원 목표 넘어가는 거 보고 퇴근하고 그랬어.”

그때 특급열차는 좌석이 있었고, 비둘기호 같은 일반열차는 지정 좌석이 없었는데, 차표를 안 끊고 타서 적발이 되어 요금의 세 배를 물린 기억도 있다. 그때는 당시 차표 검사를 할 때 기관승무원 한 명하고 여자 검표원 세 명이 같이 한 조로 열차를 타고 검사를 했다. 그때는 검표를 위해 열차를 돌면 홍익회 사람들이 계란이며 사이다를 파는 모습도 열차 안의 당연한 풍경이었다고 회상한다.

   
▲ 중앙선 청량리-안동 우등열차 운행 1979.7.14. (사진: 한국철도 80년사)
   
▲ 7~80년대 우등열차 안 여승무원. 권오진 역장에 의하면 남승무원과 3인 1조로 열차에 탑승했다고 한다. (사진: 한국철도 80년사)

 

안동역의 이전과 함께 다가온 역사부지 활용에 대한 고민

중앙선 복선화계획에 따라 안동역 관내의 철로가 송현으로 이전됨에 따라 자연적으로 안동역도 송현으로 옮겨가게 된다. 중앙선 안동시 구간 직선화 계획도에 따르면 마사역에서 봉화 운산역 일원이 폐선되고 마사역, 이하역, 서지역, 무릉역 역사가 없어지게 되고, 직선화 구간에 옹천역에서 저전역(신설), 안동역(송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 안동역 이전에 따른 예정 폐선 현황. 중앙선 안동시구간 직선화 계획도. 권기창 제공

역이 생긴 이래로 안동역은 안동의 상권 형성과 인구 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한편으로는 안동시가지와 낙동강 사이에 약 6만여 평의 규모로 위치하고 있어서 시민생활 불편 및 도시발전의 저해요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안동역 부지를 활용한 개발에 대해 시민 모두가 함께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 아닌가 한다.

   
▲ 안동역 현재 위치와 철도 역사부지 현황. 권기창 제공

이와 관련하여 안동대학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권기창 교수는 광주 푸른 길이나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 정선 레일바이크 같은 폐선을 활용한 지역의 사례들이나, 폐선구간을 미술관, 영화관, 콘서트, 와인창고 등 문화공간으로 조성한 파리지구나 고가철로를 활용한 도심공원으로 조성한 뉴욕, 기차의 방향을 바꾸는 전차대를 활용한 카페와 정원으로 바꾼 핀란드 헬싱키 등 다양한 철도역사 활용방안의 사례들을 참고하여 그 속에서 우리 지역에 맞는 답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 통일호 객차를 이용한 안동역의 퇴계학당. 내일로 승객들을 위한 숙소로 활용하고 있다. 폐선활용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안동은 안동에 맞게 안동역을 활용하여 안동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개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도역사 부지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개발주체, 개발효과, 재원조달, 개발방법 등 다양한 평가지표와 안동시의 개발계획과 재정을 고려하여 다각도로 충분한 논의와 공감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져야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현재 그와 관련한 준비가 미비한 상태인데, 이전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어 2020년 안동역이 완전히 이전되는 시점을 앞두고 지금부터 실제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6만여 평의 안동역사 철로 부지를 주거환경 복합시설 공간, 문화관광 공간, 자연공간, 공공 인프라 구축 등의 분야로 구분하여 철도시설공단, 안동시, 민간이 공동으로 개발과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활용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 1954년 안동역 전차대 위성사진. 김성근 제공
   
▲ 안동역 전차대 운영 모습
   
▲ 핀란드의 전차대를 이용한 온실카페. 권기창 제공

앞으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안동역 철도 역사 부지는 안동시민의 휴식공간이자 안동관광의 허브역할을 하며 지역경제 활성화의 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시장이 활기를 띠었던 시기에는 안동역을 중심으로 안동상권에 50만 명이 움직였어요. 안동 인구 27만에 영주, 영양, 예천, 청송, 봉화, 의성 등 인근 지역민들까지 다 구시장과 신시장으로 몰려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동 인구가 17만이 안되고, 주변 지역도 인구들이 많이 줄어서 다 합해도 그 반도 안되는 게 현실이죠. 그리고 그분들이 안동의 구시장, 신시장을 전처럼 이용하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아파트를 짓는다고 해도 이 지역 사람들로 상권을 살린다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 거죠. 기존의 철로나 안동역 부지를 잘 활용해서 외부 사람들이, 젊은이들이 안동으로 올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안동역 개발이 그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보러오게 만드는 문화관광타운을 만들어서 이곳에 백만 명이 찾아오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 임청각의 철로를 사진에서처럼 주변 지형과 동일하게 낮추어 복원하는 방법도 하나의 대안의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권기창 제공

한편으로 안동역 중앙선 철로를 처음 건설할 당시 일제가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아홉 명의 독립운동가를 낸 임청각의 마당을 가로지르게 설계한 것은 민족정기를 끊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에서 중앙선 이전과 맞물려 임청각 복원이 가지는 의미가 한층 더 커지고 있다. 안동역에서 임청각으로 이어지는 구간에 대한 의미 있는 복원이 될 수 있도록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개발계획 단계에서부터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 안동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열차. (Ⓒ김성근)

안동역의 이전이 이야기된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아직도 철도부지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이나 실행계획이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안동역 철도역사부지 활용 문제는 이제 우리 눈앞으로 다가온 안동시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안동역은 앞으로 다가올 송현동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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