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놋대야에 세수해도 그리운 그 시절'자취의 추억'
한데 놋대야에 세수해도 그리운 그 시절'자취의 추억'
  • 백소애(경북기록문화연구원 운영위원)
  • 승인 2017.09.25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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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9)

프롤로그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은 문화, 풍속, 인물, 장소와 지역사를 통해 우리의 생활문화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련한 학창시절의 향수로 옛 추억을 복기하고 반추해 보고자 합니다. 고향이 영주인 강성효 씨는 안동고등학교 17회 졸업생으로 1965년 입학 때부터 1968년 1월 졸업 때까지 3년간 용상에서 자취생활을 했습니다. 율세동에서 나고 명륜동에서 자란 불알친구 김지웅 씨와 이동일 씨는 어머니들이 자취방을 운영했습니다. 1972년 쥐띠생인 두 사람은 1970년대와 80년대 안 그래도 복작거리는 집에서 자취생들과 한 마당을 함께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1995년 안동시군 통합 전이니까 가까이는 와룡, 예안, 임하, 일직, 도산 등등의 군 지역부터 예천, 의성, 영주, 청송, 봉화 등 타 지역 학생들이 교육의 도시 안동으로 유학을 오던 그때 그 시절, 사연 많고 아련했던 ‘자취의 시대’로 이번 근대기행, 떠나봅니다.

♦영남산 기슭에서 본 안동시내. 가운데 나무가 솟아 있는 곳이 구 군청(현재 웅부공원)자리다. 신축 중인 군청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사진제공: 문화모임 안동)

자취(自炊)의 자취

그날 아침, 태화동 동네 골목은 시끌벅적했다. 간밤 쌀집에 든 도둑이 잡힌 것이다. 슈퍼에서 가장자리 판두부 한 모를 사오며 뉴스를 전하던 엄마가 혀를 끌끌 찼다. 가까이에서 자취를 하던 고등학생 둘이 범인이라고 했다. 마침 쌀가마니에 구멍이 뚫려있어 쌀집에서부터 학생들의 자취방까지 쌀알은 길게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초등학생인 나의 눈에도 그 사건은 큰 사건이었다. 학생들의 부모님이 호출되고 한동안 골목길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으니까. 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주택가 태화동에도 유난히 자취방은 많았다. 화장실 하나로 온 식구를 포함 자취생까지 써야했으니 아침이면 전쟁이 따로 없었다.

도둑 방지를 위해 깨진 유리병을 시멘트 담장에 거꾸로 세우고 철조망이 담쟁이넝쿨처럼 둥글게 에워싸던 주택가엔 자취방들이 즐비했다. 안동여고 밑 법상동 골목길, 평화동 한옥촌, 율세동 언덕배기, 신세동 달동네, 용상동 일대에 이르기까지 단독주택지구에는 어김없이 사글세방이 있었다. 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아파트가 신축되고 교통편이 좋아지면서 주택형 ‘자취방’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대학가에는 기숙사가 신축되고 원룸촌이 형성됐다. 빌트인 된 원룸촌에 입성한 학생들은 그 옛날 주택 자취방의 불편함과 낭만 따위를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을 터다.

자취, 스스로 자(自)에 불 땔 취(炊) 즉, 손수 밥을 지어먹으며 생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독립된 삶에 대한 로망은 10대를 거쳐 20대까지 이어지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취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968년 안동고 17회 졸업앨범. 뒷면 졸업생 주소록을 보면 자취생들이 많았음이 짐작된다. 한반 60명 중 많게는 1/3이 자취생일 정도였다.

마뜰에서 보낸 학창시절, 강성효의 추억

영주가 고향인 강성효 씨는 1950년생으로 올해 68세다. 영주 평은초등학교, 안동 북후중학교를 졸업하고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3남 4녀 중 넷째로 동네에서 고등학교는 1~2명이나 진학했을까, 없는 살림에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닌데 가게 된 고등학교다. 중학교 3년 내내 입은 빛바랜 교복은 단체사진을 찍어도 눈에 띌 정도로 낡았었다. 위로 누나 둘은 안동성서신학원을 다녔고 형은 안동사범학교를 다녔다. 거리상 통학은 힘들었고 하니 그는 3년 내내 자취를 했다. 자취방은 총 4번 옮겼는데 아무래도 학교와 가까운 용상에서 옮겨 다녔다. 당시는 6개월 단위로 방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6개월이 지나면 방값을 올려주던지 나가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처음에 사글세 줄 돈이 없어서 안동고(지금의 길주중학교 자리) 뒷산을 넘어가면 지금은 댐으로 이전하고 없는 고성이씨 성곡동재사가 있었다. 당시 재사 관리자가 아버지가 아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하숙을 시킬 형편도 안 되고 통학도 어렵고 하여 재사의 ㄷ자 행랑채 한 칸을 빌려 방 구들장까지 놓고 수리를 해서 아들을 기거시켰다. 방의 반대쪽에 소 마구가 있었는데, 원래는 일꾼이 사는 소죽 끓이는 방에서 안동 자취생활을 시작했던 거였다. 집세 나갈 일 없어 그거 하나는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연탄 살 돈도 없었고 연탄 땔 일도 없었다. 학교 다녀와서 지게 지고 나무 땔깜을 모아 군불을 때서 지냈다. 그렇게 1학년 가을까지 그곳에서 보냈는데 재사에서 혼자 지낸 게 아니라 친구 이경광과 함께 살았던 것이다.

“내 니하고 같이 지내고 싶다.”

고생스러울 거라는데도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니던 하숙집을 정리하고 여름방학 지나고 바로 재사 행랑채로 들어와 살았다. 이경광 씨와는 같은 반 한번 되어본 적이 없었지만 둘은 이후 내내 같은 자취방에 함께 기거하며 우정을 쌓아왔다. 소죽 끓이는 구멍에 마른가지 넣어서 노란 알루미늄 선학냄비에 밥 해먹고 살았다. 예천 지보가 고향인 이경광 씨는 가정형편도 좋았던 편이라, 부모님이 더 이상 재사에서 고생하며 지내는 걸 원치 않아 이들은 두 번째 자취방으로 옮기게 된다.

소년 강성효가 기억하는 1960년대 후반의 마뜰

혼자였다면 아마 3년 내내 고성이씨 재사에서 지냈을 것을, 친구 체면도 있고 해서 그렇게 둘은 이사를 하게 된다. 방값을 반씩 부담하고 살았다. 연탄이 한 장에 7-8원 하던 시절이었다. 두 번째 자취방은 지금의 용상 새마을금고 부근이었다. 이곳에서 겨울을 나고 지금의 용상동 현대아파트 부근의 세 번째 자취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과수원을 크게 하던 장익진 씨 댁에서 세 번째 자취를 했다. 학교와 철조망 하나만 두고 있던 과수원이라 철조망 밑으로 가 사과를 따먹는 아이들도 많았다.

본채가 있고 그 옆에 떨어져 초가집이 하나 더 있었는데 장씨 댁 조카와 학생 두 명이 거기서 하숙을 하고 그들은 자취를 했다. 돈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뒷산에서 나무 베어 땔감으로 쓰곤 했는데 어느 날 주인집에서 “강군아 밤나무를 그리 비면은 내년에 밤이 안 달린데이.”하고 점잖게 야단을 치더란다.

♦안동고 교정에 선 소년 강성효. 빤한 살림이지만 공부를 곧잘 해 안동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뒤로 1960년대 신축한 안동고 교사(현재 길주중학교)가 보인다.

철든 나이라서 바로 알아차리고 이후론 밤나무를 베지 않았다고 한다. 야단을 치는 사람이나 맞는 사람이나 서로 면구스러워하고 부끄러움을 알고 수긍을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옛날에는 연탄사고도 많았다. 두 번째 집에서 자취할 때 연탄가스를 마셔서 죽다 산 기억이 있다. 다행히 옆방 아줌마가 깨워서 둘이서 김칫물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그런데 겨울에 학교에 다녀오면 어떻게 된 게 자취방 연탄불이 매번 꺼져 있곤 했다.

“노상 우리 연탄불만 꺼져. 왜 그리 잘 꺼지노 했더니 나중에 이웃에서 알려주더라고. 학교 간 새 옆방 아줌마가 전다지 우리 연탄을 가져간다는 거야.”

학교를 다녀오기만 하면 연탄이 꺼져있어 새 거 한 장 주고 불붙은 연탄 얻어오니 매번 밑지는 물물교환을 했다. 그 이유를 뒤늦게 알고서도 암말 못했다.

“그래도 어야노. 그걸 어예 말하노.”

이웃에서 얌체 짓을 해도 똑같이 대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조금 손해 봐도 그러마하고 말았다.

♦소년 강성효가 기억하는 1960년대 후반의 마뜰
♦1966년 4월 23일 봄소풍으로 간 운산역에서. 오른쪽이 강성효 씨.

그 시절 통학열차

그 시절엔 학생들을 실어 나르던 통학열차가 있었다. 영주, 옹천, 이하에 사는 학생들이 통학을 많이 했는데 통학차는 제천에서 출발해 영주를 거쳐서 안동까지 왔다. 또 영천에서 운산을 거쳐 통학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역마다 다 서는 완행열차인 셈이다. 학생들로 바글바글한 통학차에서 더러는 의성애들하고 영주애들하고 패싸움도 하고 연분도 나곤 했다. 당시는 요즘처럼 왕따문제나 학교 내 폭력문제보다는 오히려 운동 좀 하는 애들이 공부 잘하는 애들을 보호해주고 학교끼리 편싸움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우리학교 누가 다른 학교 누구한테 맞으면 우르르 달려가곤 했었다 한다.

종점인 안동 기차역에 내려 학교까지 걸어서 가기도 하고 운 좋으면 통학버스를 타고 가기도 했다. 통학버스는 흔히 봉고차라 부르던 승합차였는데 몇이만 앉고 나머지는 몸을 구겨 넣어 타고 왔다. 그거라도 타고 오면 운 좋은 거였다. 당시 차비가 5원인가 10원인가 했는데 차비도 없는 이들은 그저 걷는 수밖에 없었다.

♦1966년 11월 17일 고교시절 마지막 자취방인 변동순 씨 댁 과수원 자취방 뒷길에서 찍은 사진. 왼쪽이 이경광 오른쪽이 강성효 씨다. 왼쪽에 보이는 한옥이 닭 먹이던 곳이다.

잊지 못할 참외서리 “강군아 엊저녁 외 따왔담서?”

2학년 늦가을부터 용상 복개천 우시장 뒤쪽에서 과수원을 하던 변동순 씨 댁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일대가 모두 과수원으로, 강까지 사과밭 복숭아밭이었다. 변씨 댁은 당시 안동에서도 큰 재력가로 통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한 며칠 할아버지가 안보여서 어디 출타하셨냐 여쭤보면 할머니한테도 얘기 안하고 어딜 다녀왔다고 하는데 그게 서울이었다. 서울 왜 갔냐고 물으면 그냥 먹고 싶은 게 있어서 한 며칠 다녀왔다고 했단다.

“양계를 했는데 아마 수천마리 했지 싶어요, 크게 했어. 변동순 씨 동생은 영남대학교 교수였고 아들 둘이 영남대 다녔지. 변동순 씨 어머니가 용상교회 집사님이었지. 우리는 할머니, 할머니 했지. 그 잘사는 집에 기와집 본채가 있고 뒤로 초가집 행랑채가 있는데 그 윗방에는 우리 동기 박시배가, 아랫방에 이경광이하고 내가 살았어. 할머니한테 방 좀 주세요, 하니 자취방은 내어주고 방값을 안 받아.”

방값을 안내고 졸업 때까지 그냥 살았다. 당시 안동교회와 용상교회를 다녔던 강성효 씨의 외할아버지가 용상교회 전도사, 안동교회 장로로 활동을 하여 변씨 댁 할머니는 ‘방 값을 어예 받노’하시며 그냥 방 한 칸 내어주셨다.

그곳에서 가장 많은 추억거리가 있었다. 1학기 시험을 다 마친 여름방학이었다. 한창 참외를 먹을 시기였다. 시험도 끝났겠다 조금은 풀어진 마음으로 윗방에 있는 친구하고 놀러온 친구와 어울려 넷이서 외서리나 하러 가자 의기투합을 했더랬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고 늘 배고픈 청춘들이었다. 저녁을 먹고 어둑어둑해졌을 때 네 사람이 흰 런닝셔츠를 벗어서 목이랑 소매 있는 데를 묶어 자루를 만들었다. 밑에는 팬티만 입고 넷이서 알차게 상당수를 땄다. 그런데 저 너머서 외밭 주인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외 딸 때는 가만 보고 있다가 다 따서 돌아가는 집 앞까지 따라와서는 어느 집인지 보고 갔다.

이튿날 아침에 변동순 씨가 이들을 불러 앉혔다.

“강군에 엊저녁 외 따왔담서?”

순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단다.

“아이구 얼마나 부끄럽던지. 한참 남사스럽더라고.”

그런데 외주인도 대단하고 변동순 씨도 대단한 것이 요새 같으면 물려내라고 하던지 무슨 특단의 조치가 있었을 것인데 변동순 씨는 “우리 집에 사는 애들이니까 내가 잘 가르치지요.”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외주인도 그 말을 듣고 그냔 돌아갔다. “담부턴 이야기하고 따먹어.” 점잖게 타이르니 어찌나 부끄럽던지 사랑방에 앉아 있기가 민망하여 급히 나오는데 마당에 서서 이 사정을 전해들은 할머니가 인자한 얼굴로 말씀하시길 “강군아 집 뒤에 복숭아밭 복숭아는 너네가 다 따먹어도 돼. 대신 남의 것은 먹지 말구.”했다.

그리하여....진짜 여름 내도록 그 집 복숭아를 실컷 따먹었다는 후문이다.

옆에서 남편의 활약상을 열심히 듣던 김경순 사모가 한마디 한다.

“당신은 회개할 게 되게 많다.”

가장 오래 살았던 변씨 댁은 그만큼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자취집이었다. 누구든 먼저 하교를 하고 집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저녁밥을 앉히곤 했다. 머슴아 둘이 그릇에 푸는 거 없이 항상 솥째 냄비째 갖다놓고 퍼먹었다. 그래야 설거지도 쉬웠다.

언제였던가 시험을 마친, 아직은 쌀쌀한 3학년 봄이었다. 연탄불에 밥 먼저 하고 노란 양은냄비에 된장을 끓인다고 얹어놓고 한 사람은 아랫묵에 또 한사람은 윗묵 벽에 기대서 된장 끓으면 언능 밥 먹자, 하고 잠시 눈을 부쳤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둘이서 동시에 눈을 번쩍 뜨고는 얼른 나가서 된장냄비 손잡이를 숟가락으로 걸쳐 들고 들어와 저녁식사를 했다.

“밥솥 뚜껑 열고 밥 한 숟가락 넣고 냄비에 숟가락 하나 넣고 먹으려고 하니 방바닥이야. 냄비밑창이 뚫려있어. 냄비 밑 빠진지도 모르고 한 숟갈 푼 거야.”

애저녁에 냄비는 밑창이 다 녹아 없어진 거다. 황당해서 웃음만 나와서 막된장 갖다놓고 그냥 먹고 말았다고 한다. 쌀은 한 번씩 집에 다녀올 때 가져와도 자취방에 어머니들이 밑반찬 부리부리 싸서 갖다주고 하는 것도 없었다. 장성한 아들 마냥 어머니들은 스스로 생활하게 그냥 두었다.

♦1967년 12월 17일 친구들과 미리 찍어둔 졸업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이 강성효 씨고 앞줄 첫번째가 이경광 씨. 당시 경안고 다니던 이경광의 이종사촌(뒷줄 첫 번째, 교모가 다르다)도 함께 찍었다.

복숭아꽃 흩날리던 마뜰, 우시장 그리고 변씨 댁

그 많던 복숭아나무는 다 어디로 갔을까? 용상교회 앞 팔각정에 앉아 늦여름을 부채질하는 노인들은 과수원이 있던 변씨 댁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갓진 구 용상시장 공터 앞 전경. 40여년 됐다는 용상철공소

복개천 공영주차장으로 변해버린 옛 용상시장길에 마늘, 우산, 밀짚모자, 풍경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용상철공소가 있다. 40여년 넘게 이어온 철공소 간판에는 국번이 2국으로 시작하는 옛 번호가 있고 객을 맞이한 안주인 역시 변동순 씨 댁을 잘 모른다고 했다.

“글쎄요, 복숭아밭이 요 서쪽 편으로 있긴 했지요.”

그러더니 이곳 터줏대감인 연가식당에 가보면 아마 알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용상동 안동농협 바로 옆 연가식육식당 김일문(78) 사장은 65년을 용상에서 살았다. 이곳은 예부터 우시장이 있던 곳으로 상인들을 위한 국밥집과 간이 마방(마구간이 있는 주막집)이 번성했던 곳이다. 연세 지극한 분들은 아직도 이곳을 ‘구 소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김 사장은 변씨 댁을 바로 가리키며 옛 기억에 잠겼다.

“저기 보이는 교회가 바로 복숭아밭이 있던 자릴시더. 그리고 바로 옆 방앗간 골목으로 변씨 댁이 맞을 걸시더.”

용상주민센터 앞 지금의 동안동교회 자리가 옛날 복숭아밭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옆에 섰던 이웃이 “그 집이 자취를 했던가?”하고 갸우뚱하자 김 사장은 “맞어, 한옥집이랬거든. 했을지도 모르지.”한다.

지금은 그 집 식구들이 다 떠나고 없다고 한다. 새마을 떡방앗간 바로 뒤 철대문 집이 변동순 씨가 살았던 집으로 추측된다. 영민한 소년들과 호시절을 함께 누렸던 용상동 부잣집 변씨 댁의 현재 모습은 변해버린 세월만큼이나 조금은 낯선 모습이었다.

♦옛날 변동순 씨네 과수원이 있던 자리. 현재는 동안동 교회로 변해있다.
♦옛날 변동순 씨네 집이 있던 자리

잃어버린 공납금, 믿어주신 부모님

없이 살았던 시절이지만 부모님은 자식들을 믿었다. 대처에 나가 일찍이 독립해 공부를 하는 자식들이라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공납금이 1,500원이었는데 미처 공납금 납부를 하지 못하고 토요일에 집에 가게 된 날이었다. 마침 구정 연휴라 빈손으로 그냥 갈 수 없지 싶어 자기 돈은 하나도 없으면서도 학생 주제에 배포도 좋게 식육점에서 우족, 소 앞다리를 딱 사가지고 버스에 올랐다. 나머지 돈을 주머니에 넣고 차를 타니 그날따라 밀고 당기고 차 안이 얼마나 분잡고 소란스러운지 한참 차를 타고 중간쯤 가다보니 이미 주머니는 열려 있고 돈은 온 데 간 데 없더란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쓰리꾼한테 당한거지.”

학생이 우족을 사갖고 가니 있는 놈이라 생각이 들었던지 명절 밑이라 복잡하다 생각한 차 안에서 쓰리꾼의 표적이 된 것도 모르고 우족만 들고 섰던 소년 강성효. 그런 일을 당하고도 그는 ‘언놈이 억시 궁한 모양이따.’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집에 도착해 소다리를 건네고 연휴동안 잘 쉬고 안동에 갈 때 돼서야 “어매, 공납금 주소.”하니 이미 준 공납금을 왜 또 달라는 건가 싶어 “줬는 거는 어쨌노.”하고 아들을 자세히 보니 “소족 사고 남은 걸 쓰리 맞았어요.” 했단다.

어머니가 아들 얼굴을 빤히 보더니 “진짜 쓰리 맞았지?”하고 묻기에 “예, 진짜래요.”했다.

미리 얘기하면 분위기만 망치고 갈 시간 임박해서 말했건만 어머니는 더 이상 안 물으시고 다시 공납금을 내어줬다고 한다.

“어른들이 날 믿었어요.”

명절 앞두고 궁했던 쓰리꾼의 입장을 이해하는 고교생 아들이나, 그런 아들을 야단치지 않고 믿어주는 어머니나 학창시절 내내 말썽 없이 우등생으로 지내온 그의 이력이 새삼 놀랍지 않았다.

♦1951년~4년 무렵의 초창기 안동고등학교 목조 교사 전경. (사진제공: 안동고 50년사)
♦1967년 안동고등학교 정문

교육의 도시 안동, 그 중심에 있던 안동고

안동고등학교는 1951년 10월 1일 지금의 길주중학교 자리에서 개교했다. 아버지가 안동고를 나왔고 그 자녀가 길주중학교를 다녔다면 그들은 같은 교사를 사용한 셈이다.

1967년 3학년 때는 총 5개 반에 한반에 60명 정도였다.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으며 특히 강성효 씨가 속했던 4반은 공부를 잘하는 특수반이었다. 5월까지 2학기 과정을 모두 끝내고 6월부터 졸업 때까지 매일 시험을 쳐 한 달에 한번씩 60등 이내 못 들면 딴 반으로 전출이 되곤 했다. 이 반에는 서울사대가 생긴 이후로 최고의 성적으로 수학과에 간 친구와 지금은 대학교수로 간 많은 친구들 또 한 번도 특수반에서 쫓겨난 적이 없는 강성효 씨가 있다. 아주 치열한 경쟁이었다. 당시 동기 중에는 테니스 선수 조영수에 권투 선수도 있었고 애마부인4를 연출한 석도원 감독도 있다. 또 반병목 전 문경부시장, 남문동 조기성 치과의원의 조기성 원장 등도 동기다. 또 한명, 소설가 이문열이 있다. 그는 2학년까지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쳐서 서울사대에 입학했다고 한다. 또래보다 한두 살 많았던 그도 용상동에서 자취생활을 했었다. 가끔 그의 자취방에 가보면 깔아놓은 이불 위에 드러누워서 수학책을 보고 있곤 했단다.

“우리 눈에는 참 신기하거든. 수학책을 어떻게 드러누워 그렇게 보냐? 눈으로 푸는 거잖아. 그래서 우리가 물어. 그래서 푸냐? 하고 물으면 푼대.”

그런데 수학은 늘 90점을 맞았단다. 그렇게 수학을 들여다보면서 도대체 왜 백점을 못 맞고 한 개를 틀리냐 하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다 맞으면 수학선생님이 기분 나쁘잖아.”

머리가 아주 비상했던 친구로 기억한다.

♦1967년 동부정미소를 지나며 시가행진을 하는 안동고 악대부

그렇다고 강성효 씨가 내내 또 책만 팠던 인사는 아니었다. 악대부 활동도 열심히 했다. 체육대회는 주로 안동중학교에서 열렸고 그럴 때면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는 트럼본을 불어서 제일 앞에 서서 행진을 했다. 당시 마뜰에서 안동중학교까지 법흥교 다리를 건너고 안동교도소를 지나 시내 중앙통으로 해서 목성교를 거쳐 성소병원을 지나 안동중학교까지 연주를 하며 가곤 했다. 악대부 친구들과는 용상 보트장에 놀러도 다니고 사복 입고 안동극장에 몰래 가기도 했다. 그때 봤던 영화는 당연히 19금 영화였다.

♦친구들과 한때(1967년 5월 7일 용상 보트장)
♦악대부 친구들과 함께(1967년 10월 10일 안동교)
 ♦악대부 친구들과 함께(1967년 10월 10일 충혼탑)

보고싶다 친구야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던 강성효 씨는 잠시 옛 추억에 빠져들었다. 안동교 밑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처럼 그의 가슴에 오래 새겨진 이름 하나, 이경광.

수많은 친구 중에서도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자취방 단짝 이경광 박사를 생각해서이다. 이경광 박사는 건국대 축산대 낙농학과를 졸업하고 홋카이도 대학(북해도대학 北海道大學)에 유학 뒤 카이스트 부원장을 역임했으며 우리나라 유전공학의 기초를 쌓은 인물로 유명하다.

♦안동고 제17회 졸업앨범 사진 속 강성효 씨와 친구들. 왼쪽부터 강성효, 이경광, 박시배. 3년간 함께 자취를 한 친구가 이경광, 3학년 때 옆방에서 자취하던 친구가 박시배다. 하필 졸업사진에 친구 이경광의 성이 잘못 적혀 있어 고치고 새로 표기해 두었다.

그가 홋카이도 대학(북해도대학 北海道大學)에 가던 해가 1977~8년쯤이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나름 벌이가 좋았던 강성효 씨가 친구에게 여비를 20만원 쥐어줬는데 30년이 지난 어느 날 그걸 잊지도 않았는지 그때 그 여비를 갚는다며 고스란히 돌려주더란다. 뭘 그걸 기억하고 돌려 주냐고 타박하니, 꼭 돌려주고 싶었노라고 말하더란다. 이 친구가 장가갈 때 사회도 봐주고 가족끼리도 자주 연락하며 지내곤 했는데 이젠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친구는 몇 해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강성효 씨는 현재 영주 장수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복숭아꽃 흩날리던 청소년기를 마뜰에서 보낸 초로의 시골교회 목사는 인생에서 가장 귀한 친구를 만났던 그때 그 시절, 자취의 추억을 풀어낸 그날 어쩌면 친구에게 부치지 못할 긴긴 편지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소년 강성효와 2017년의 강성효. 강성효 씨는 현재 영주 장수교회 목사로 재직 중이다.

밤적골소년 김지웅, 이동일의 추억

1972년생 불알친구 김지웅과 이동일. 율세동에 태어나 자라면서 북문동 시장통과 명륜동으로 이사를 가도 그 동네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친구들이다. 지금도 가끔 30년 단골 북문시장 임동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은 그 시절 기억하자면 참말 할 말이 많다.

“모친, 고등어 크다한 거 꾸주세이~”

얼마 전 다리수술을 하고 복귀한 임동식당 아지매 대하는 것만 봐도 그 동네 사람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대학생 때는 하드보드지로 메뉴판을 만들어주고 소주도 얻어 마셨던 임동집이다.

♦1977년 무렵 여섯째 누나와 김지웅 씨. 뒤에 보이는 건물이 안동사범대학이다.

10남매 중 막내인 김지웅 씨와 2남 1녀중 장남인 이동일 씨. 둘의 가족만 해도 북적이는데 자취방까지 내어주다니. 김지웅 씨의 큰누나가 이동일 씨의 모친과 자매처럼 지냈다. 것도 그럴 것이 김지웅 씨의 아버지가 이동일 씨의 할아버지랑 형님 아우처럼 지냈고 나이대도 10년 안짝이었다. 그러다보니 얽힌 족보는 쉬 풀어지지 않았는데 급기야는 이동일 씨 아버지한테 김지웅 씨가 형님이라 부르는 사달이 벌어져 둘의 멱살잡이가 있었다나 어쨌다나.

“우리 집엔 엄마 아부지까지 열둘에서 일곱째 누나가 할매 할배랑 예천서 살았으니 하나 빼고 자취생까지 합치면 모두 열다섯 명이 복작대며 살았죠.”

김지웅 씨의 입이 떡 벌어지는 가족 수에 이동일 씨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열명 이상 사는 집엔 했는 밥에 숟가락 하나 얹으면 되는데 뭐.”

이동일 씨 또한 자취, 하숙생까지 모두 합쳐 열 명이 살았다.

“당시엔 자취생을 두는 기준이 있었어요. 어매가 대부분 학생을 선호했거든. 직장인한테 자취방 주는 건 학생들에 비해선 아무래도 인색했어요.”

그 이유인즉슨 사글세가 대부분이고 열달 치 세를 한꺼번에 받아야했으니 당시 공무원을 제외하곤 직장인의 신원을 확실히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학생들의 경우 자식들을 키우는 마음이다보니 내 자식 생각하는 마음으로 방 한 칸 내어주기도 했다. 또 당시엔 가정주부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으니 집안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집에 방 한 칸이라도 안 놀리고 자취방으로 내어주곤 했던 것이다.

♦김지웅 씨와 이동일 씨가 기억하는 율세동 약도. 김지웅 씨가 직접 그렸다.

1970년대, 이들이 율세동 언덕에 살 당시엔 오밀조밀 약 30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지웅이네 집, 동일이네 집을 위시해 복구네, 현우네, 상희네, 노씨네, 경태네, 성준이네, 지씨네 등등 어느덧 추억에 잠긴 두 친구는 니 기억이 맞네 내 기억이 맞네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현장일을 했던 지웅이 아부지와 동일이 할아버지가 인부들의 십장(오야)이었는데 밑에 달린 인부들과 아침이면 꺽달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으러 모이곤 했다는 거다. 꺽달이네 집은 그 집 할매 키가 유난히 커서 ‘꺽달이네 집’으로 불렸다고 한다.

“당시엔 공동수도를 썼거든요. 울 집이 위쪽이라 공동수도를 관할하는 파이프 즉 계량기 역할을 하는 수도가 있었어. 못된 아줌마 오면 일부러 수도를 잠궈버리곤 했죠. 아지매가 어 왜 물이 안 나오노? 하면 어야노, 고장났나보다, 하고 안틀어 줘버렸지.”

장난이 심했던 김지웅 씨 때문에 자취방 누나가 하소연을 한 적도 있다.

“아주머니, 제가 지웅이 땜에 공부를 못했어요.”

그 누나의 교과서로 딱지를 접었기 때문이라고.

아침이면 마당의 뻘건 고무 대야에 수돗물을 받아놓고 바가지로 세숫대야에 물을 퍼다 우르르 세수를 하곤 했다. 더러는 세수도 안하고 눈꼽만 떼는 일명 고양이 세수를 하고 그냥 학교로 가는 형아들도 있었다. 겨울에는 뜨거운 찜통을 내다놓으면 뜨거운 물 반 바가지에 찬물 두세 바가지로 세수를 하곤 했다. 반 바가지 이상 가져가는 것은 암묵의 룰을 깨뜨리는 것이다. 푸세식 화장실은 하나고 사람은 많으니 초등학교 1~2학년 때까지만 해도 담벼락에 그냥 다 싸면 그 똥은 동네 똥개들이 다 쳤다.

안방, 마루방, 작은방, 부엌, 건너방 대략 5~6개의 방이 있고 김장을 하자 치면 동네사람 불러 500~600포기를 품앗이하며 거뜬히 하곤 했다. 김장날이면 구멍 3개난 벽돌 브로꾸(보로꾸)를 놓고 뒷고기 수육을 삶아 동네사람들이 둘러앉아 먹곤 했다.

♦김장 500~600포기를 거뜬히 담갔었던 김지웅 씨의 모친인 여장부 정입봉 여사.(앞줄 정중앙)
새마을교육 부녀지도자반 교육을 마친 1977년 6월.

산동네니까 각 집은 모두 흙계단으로 연결되어 있고 모두들 푸세식 화장실을 쓰던 시절이다. 화장실은 호스가 없던 시절이니 똥지게꾼이 와서 퍼날랐다. 옛날 군인들이 썼던 철모가 거기에 맞춤했다. 못을 박으면 돌아가지도 않고 삭지도 않고 똥바가지로 딱이었다. 어느 해인가 요즘으로 치면 정화조에 해당하는 똥항아리가 갈라진 집 때문에 한바탕 싸움이 일었다. 산기슭 일대가 냄새로 진동해서 서로 언성을 높이게 됐다. 요즘은 아이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이 되지만 예전에는 그 반대였다. 어른들이 싸우면 아이들에게까지 싸움이 이어졌다. 어른이 힘들면 그 힘듦이 애들한테까지 이어져서였다. 냄새나는 뒤안 도랑을 더 파라던지 이런 잡다한 일들이 흘러흘러 아이들에게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번은 동네 힘 좀 쓴다는 형이 자기네 집 고치는데 시멘트를 져서 그 높은 데를 올라가야 하니 동네 애들한테 어차피 집에 올라가는 김에 한 푸대씩 져 올라가라고 시킨 적이 있었다. 3살 많은 형 때문에 꼼짝없이 시멘트를 나르던 지웅 씨와 동일 씨가 투덜대자 지웅 씨의 여덟째 누나가 나섰다. 누나는 지금 개명을 했지만 집안에서 딸 좀 그만 낳으라고 처음엔 이름이 ‘말분’이었다.

“난 우리 말분이가 그만큼 센 줄 몰랐는데 그 왈가닥이 그 형을 확 잡아부대.”

힘 좀 쓴다는 그 형이 누나 앞에서 꼼짝을 못하고 있더란다. 한번만 더 내 동생 시멘트 지게 만들면 가만 안둔다고 호통 치는 모습을 보며 말분이를 그만 괴롭혀야겠다고 다짐을 했다나 뭐라나. 하여튼 집안을 위해 동네 아이들에게 강제노역(?)을 시킨 그 형을 지금에 와서 김지웅와 이동일 씨가 평가하기를 “그러고 보니 거는 효자다. 다 자기 엄마 아빠 고생하지 말라고 그런 거 아니라.”한다.

♦1977년무렵 김지웅 씨의 여섯째 누나. 오른쪽 뒤로 보이는 건물은 경안여상이다. 현재의 금탑맨션 자리.

안녕, 유년의 골목길

어느 해인가 김지웅 씨의 아버지가 10개월 동안 밖에 나가 일하더니 집에 돈을 안 갖고 온 적이 있었다. 자식이 열이고 살림살이도 팍팍한데 근 1년 일한 돈을 가져오지 않으니 어머니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그날부터 동네 흙계단을 시멘트로 바르는 작업을 시작했다. 비가 오면 미끄러지고 엉덩이에 흙도장을 찍어 다시 집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위해 아버지가 사비를 털어 계단을 만들었다. 길을 닦는 아버지 덕에 동네 사람들은 입이 마르게 칭찬을 했고 어머니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우리 아-가 열이 학교를 다닌다. 내가 남의 길은 그쿠 닦아주는데 그 길 하나 못 닦아주나.”

호기롭게 길을 닦았지만 어머니는 내내 속상해했다. 그래도 철모르는 김지웅 씨는 “이거 우리 아부지가 낸 길이래.”하고 좋아라 했다. 남들한테만 호인이 되는 그 시대 아버지들 때문에 뒤치다꺼리 했던 어머니들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으리라.

지금은 새길이 닦이고 당시의 집이 없어진 율세동 풍경을 뒤로 하고 김지웅 씨는 북문동을 거쳐 명륜동으로 이사를 간다. 동부초등학교를 다녔고 성인이 되면서도 그 일대를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

♦현재 율세동 전경. 김지웅 씨와 이동일 씨의 집은 모두 도로로 편입됐다.

라일락향이 바람에 날리는 봄이면

명륜동 시청 옆으로 이사를 온 게 김지웅 씨가 중학생 때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2칸의 방을 자취방으로 내어주고 살았다. 등록금이 100만원이 안 되는 시절 12달에 40~50만원의 사글세를 받았다. 지금은 집이 헐리고 그 자리엔 대우건재상이 들어섰다. 어머니가 살아계시면 올해 여든셋 되신다.

♦명륜동에서 자취를 줬던 1980년대 시절. 왼쪽 미닫이문이 있는 쪽이 자취방이다. 김지웅 씨 어머니(왼쪽)의 젊은 시절 모습으로 그니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라일락 향이 바람에 살랑살랑 불던 봄이면 어머니는 포도나무가 더 높게 자랄 수 있도록 버팀목을 세웠다. 아름다웠던 기억도 있지만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들었던 슬펐던 기억도 늘 함께였다.

어느 해인가 동네 친구들과 낙동강변에서 천렵을 하던 때였다. 자기 고모집에 놀러온 또래 아이가 없어져 모두들 물속으로 다시 들어갔더랬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이 어머니가 하염없이 우는 와중에 수영 좀 한다는 아이들은 어른들을 도와 물속으로 들락날락 열심히 아이를 찾고 있었다. 김지웅 씨의 다리 밑으로 갑자기 무언가 물컹하고 닿여 구조대에게 얘기하고 급히 건져 올리니 아이는 이미 시퍼런 얼굴로 죽어있었다.

고향집이 있던 곳은 지척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톨릭상지대 부근 도로에 편입되었다. 누구네 어머니는 요양병원엘 갔다더라 누구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더라, 기쁜 소식보다 아픈 소식이 더 많은 현실에 두 친구의 술맛은 쓸 수밖에. 그럼에도 북문시장을 지나다보면 명륜동을 그리고 율세동을 지나다보면 여전히 라일락은 피어나고 그 그리운 고향의 향이 문득문득 생각나곤 한다.

친구들의 자취생활

율세동에서 열 달에 100만원에 자취를 했던 친구 녀석은 볼일을 볼 때마다 튀던 푸세식 화장실의 똥물 때문에 힘들어하더니 어느새 적응을 했다.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한 것인데, 필요 없어진 교양서적을 들고 들어가 한 장 한 장 찢어 똥물위에 깔아놓은 후에 볼일을 보곤 했다. 자기 한 몸 겨우 누울 방 하나 얻어 글도 모르던 주인집 여자와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가끔씩 그 집 초등학생 딸래미 받아쓰기 봐주는 대가로 김치며 옥수수를 얻어먹기도 했다. 더러는 마당에 묻어둔 장독대 속 김장김치를 훔쳐 먹기도 했지만 주인집은 알고도 모른 척 해주기도 했다.

아무래도 부모의 손길이 덜 닿고 일찌감치 독립하여 살다보니 감정의 독립이 이루어져인지 자취를 했던 친구들은 시내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낸 친구들보다 더 일찍 철이 들고 어른스러웠다.

또 다른 친구는 언니, 오빠, 동생과 함께 방 두 개로 자취를 했었다. 밥이며 뒷바라지를 위해 촌에서 나온 할머니도 함께였다. 할머니의 말을 오지게도 안 듣곤 했지만 할머니는 존재 자체가, 자취방에 어른과 함께 있다는 자체가 아이들에겐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도 했다. 공병을 모아 슈퍼집에서 부식거리로 바꾸고 수돗가에서 언 손으로 빨래를 하던 할머니는 손자 손녀 자취 뒤치다꺼리를 마치고 마치 소임을 다한 것처럼 아득히 먼 길을 떠나버렸다.

‘자취’는 단독주택에서 여럿이 아웅다웅하며 살아갔던, 무지렁이 농사꾼 부모가 내 자식은 공부시켜 성공시키겠노라 다짐하며 땡볕 농사를 쉼 없이 짓게 했던 원동력이다. 어쩌다 자취방에 한 번씩 들릴 때면 내 새끼 잘 봐달라 주인집에 부리부리 농산물을 가져다주고 뜨신 밥 차려놓고 탄불에 찌개 졸이며 아이들 얼굴 한번 보고 가려고 막차를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이 남아있는 그런 잊혀져가는 우리의 추억의 공간 ‘자취방’. 이웃 아주머니가 연탄불을 훔쳐가도 생활밀착형 항의에 서툴고 체면 차렸던 의젓한 학생들이 지금은 누군가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있다. 플라타너스가 날리는 교정을 지나 하교 후 자취방에 와 식은 밥에 짠지 하나, 된장을 먹고 빨간기본영어, 성문기초영어, 수학의 정석이 꽂혀있는 책상에 앉아 공부했던 청춘들이 중년이 된 것이다. 자취의 시대가 저물었다.

♦반변천에 지는 노을 ⓒ김복영

에필로그

태화동 주택가에 살던 1980년대, 아버지는 때때로 슬레이트 지붕 하나를 떼내 옥상에서 삼겹살을 구워내곤 했다. 반주 드시길 즐겨한 아버지는 삼겹살을 굽거나 냉장 로스구이를 구울 때면 우리 집에 세 든 사람을 불러내 함께 먹곤 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언제나 그랬다.

마루 끝 자취방에는 중앙고(예전엔 안동상업고등학교, 종합고등학교)에 다니던 고등학생 형제와 안동mbc에서 카메라 보조를 하다 군에 입대했던 아저씨와 중국집을 운영했던 친척언니 부부가 자취를 하기도 했다. 세 들었던 이발관에서 머리손질을 받던 손님이 얼굴에 거품을 가득 묻히고 화장실로 향하기도 했고 그들은 언제나 화장실 옆 욕실문을 한번 열어 본 후에 화장실이 아님을 알고 옆에 화장실로 향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옥상에 널어놓은 빨래가 이웃집으로 날아가도 챙겨다주고 ‘하다 보니 많이 했다’고 대접에다 음식이 오가는 그런 정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이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은 독재와 부조리로 점철된 시대의 향수가 아니라 어렵고 힘든 살림살이에도 사람의 정이 묻어났던 아날로그 시대, 그 공동체의 삶이 어우러졌던 시절의 착하고 맑았던 사람들이 그리워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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