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시종(始終)지에 세워진 ‘대구감옥 안동분감’
독립운동 시종(始終)지에 세워진 ‘대구감옥 안동분감’
  • 권기상 기자(FMTV표준방송)
  • 승인 2017.10.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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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10)

일제강점기 초 경북북부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안동교도소가 당시 대구감옥 안동분감으로 개청했다. 올해로 96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안동교도소는 일본이 한국을 조직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설치한 시설 중 하나이다. 이후 한국전쟁시기에는 수감자들이 재판도 없이 집단으로 총살당하는 아픔이 있었고, 민주화 과정에서는 이념적 통치수단이 된 이야기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현재 도시계획으로 사라진 안동시 신세동의 구(舊)안동교도소 64년의 역사를 들추어 보았다. 보안기관의 특성상 여러 가지 제약조건이 있었지만 취재에 도움주신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독자들에게는 필요에 따라 실명을 밝히지 못함을 알려 드린다. <편집자 주>   

▲ 지금은 없어진 1985년 이전하기 전 안동교도소 서쪽 전경(사진. 안동교도소 제공).

안동분감(安東分監) 이야기를 찾아서

교도소라고 하면 법 테두리 안에서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곳이다. 특정한 용무나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절대로 가볼 일이 없어야하는 곳이며 죄를 짓지 않는 한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곳이다. 과거 독재정권에서는 민주화 운동권 다수에게 일종의 '훈장'급에 해당하는 코스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어디까지나 그 시절의 이야기다.
또한 한국의 교도소는 일단 분단국의 국가기관으로 군대와 경찰처럼 보안시설로 구분돼 일반인과 단절된 권력기관의 하나이다. 6·25 전쟁이후 반공을 앞세운 군사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엄격한 통제와 강압의 세월을 경험한 이들은 불편함이 더욱 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교도소는 학교, 빵, 큰집 등의 은어를 쓰는 사람들의 이미지와 겹쳐 부정적인 인식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교도소가 설치된 시점으로 돌아가 이어져온 역사를 조금만 엿보면 조금 달라진다. 의병활동과 독립운동, 근대의 민주화 과정의 이야기들이 현재와는 거리감이 있지만 많이 숨어 있었다.
우리가 쓰는 감옥이라는 말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형법 집행관청이었던 감옥서에서 유래됐다. 조선시대 죄수에 관한 일을 전담했던 전옥서를 폐지하고 만든 것이 감옥서이다. 형무소는 일본에서 건너온 말로 일본에서는 아직도 형무소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감옥은 재판을 받지 않은 미결수를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이때의 감옥은 비어 있는 것이 이상적인 운영이어서 규모가 크지 않았다. 전옥서의 수감 인원은 지방의 경우 50명 내·외로 보통 온돌방 2~3개 정도였고 도주를 방지하기 위한 관리시스템 외에 별도로 운영 시스템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각종 기록에 의하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감옥제도를 탄압기구로 변화시켜 나갔다. 감옥관제를 개편하고 고위직에 일본인들을 배치해 점차적으로 하위직으로까지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기존 한국인 감옥서 관리들은 하층관리로 기용돼 식민통치의 도구로 활용됐다.

▲ 1921년 안동분감사 신축설계도.(사진출처. 국가기록원)

일본은 1908년 전국의 감옥서를 폐지하고 경성감옥을 비롯한 8개의 감옥을 설치하고 본감을 두었다. 당시 제대로 시설을 갖춘 곳은 경성감옥 뿐이었다. 8개 감옥의 감방면적을 집계하면 298평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지만 수용인원은 2,000명을 넘었다. 밀려드는 수감자로 인해 누울 수가 없어 1/2내지, 1/3씩 교대로 잠을 잘 정도로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대구감옥은 감방 3개 15평에 150명이나 되는 수감자가 수용됐었다고 한다.
이렇듯 일제에 맞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감옥의 수용인원이 급격히 증가하자 점차 일본은 본감 예하로 분감을 지방 곳곳에 설치해 식민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안동교도소 역시 이때 개성, 강릉, 금산포, 서흥, 김천, 제주와 함께 전국 7개 분감이 신설될 때 생겼다. 1910년 경술국치의 한일합병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은 1921년 3월 총독부령 제41호에 의해 설치돼 같은 해 7월 11일 개소했다. 1894년 갑오의병과 3·1만세운동 이후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취급한 사건과 재감자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안동경찰서 유치장은 초만원이 되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리고 형확정자를 원거리인 대구에 도보로 후송하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 안동의 유지들이 합심해 분감설치기성회를 조직하고 진정운동을 펼쳤다는 기록도 있다.

▲ 신세동 안동교도소 동쪽 전경(사진. 안동교도소 제공)

안동분감은 1923년 5월 대구형무소 안동지소로 개칭됐다. 그리고 1943년 1월 1일 김천소년형무소 안동지소로 소속이 바뀌었다가 1945년 11월 안동형무소 본소로 승격됐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 1961년 교정주의로 바뀌면서 기존 형무소를 교도소로, 형무관을 교도관으로 명칭을 바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동분감이 건립 될 당시 분감부지는 서쪽을 정면으로 정방향에 가깝게 위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3배로 확장됐다. 분감 내에는 감방과 공장동 2동, 취사장, 여감(女監)과 구치감, 창고 2동이 있었으며 중앙 간수소에서 3동의 감방은 방사형으로 배치됐다. 그리고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 담장과 감시탑을 콘크리트로, 정문은 벽돌로 신축됐다. 이후 1985년 12월 13일 안동교도소가 안동시 풍산읍으로 이전할 때까지 모습은 일제 때 건축된 모습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 1978년부터 안동교도소에서부터 근무했던 현 안동교도소 총무과장은 신세동 교도소를 이렇게 기억했다.
“도로 옆 서쪽 건물은 공장동으로 초·중등 책걸상을 제작해 전국적으로 목공으로 유명했다. 또 일본 장례식에 쓰고 했던 조화를 제작했고, 뒤쪽 건물에서도 양식종이를 찍는 인쇄공장과 직원 옷을 제작하는 양재, 원예, 세탁, 수선, 내부청소, 시설을 보수하는 영선 등이 있었다”며 “수감자들은 대략 300명 정도였으며 3개 파놉티콘처럼 생긴 구조여서 수감동을 다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요즘은 사기범들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절도범들이 많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진짜로 콩밥을 주었는데 밥 양에 따라 차이를 두고 주었다. 일명 ‘가다밥’이라고 해서 일정한 틀을 만들어서 힘든 일을 한 죄수는 1등식으로부터 교도소 내에서 벌을 받는 죄수(금치처분)는 4등식까지 양을 다르게 해서 콩밥을 주었는데 지금은 쌀밥에 자율배식으로 바뀌었다”고 귀띔해 주기도 했다.   

안동교도소와 한국독립운동의 발상지

안동교도소가 설치되던 시점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8·15 광복절 행사에서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을 언급하면서 안동의 독립운동사가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경축사에서 문 대통령은 석주 선생을 사회지도층으로서 항일투쟁에 앞장선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3대가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그에 대한 현 세대들의 예우는 선생의 희생만큼 크지 않은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꼬집어 주기도 했다.
안동의 독립운동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희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이 그의 저서「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에서 안동의 독립운동과 관련해 그 위상과 성격을 평가하고 정리한 것이 있다. 이를 참고해 보면 안동교도소가 생긴 시점에 사건과 재감자가 급증한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관련한 내용을 일부 간단히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안동은 한국독립운동의 발상지이다. 한국독립운동은 1894년부터 1945년까지 51년 동안 전개됐다. 이 가운데 의병항쟁은 독립운동의 첫 장을 장식한 사건으로 1894년에 시작돼 1918년 말, 3·1운동직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의병항쟁은 후에 갑오의병으로 이어졌으며 그 첫 걸음도 안동에서 내디디게 돼 독립운동의 출발지로서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안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전국 시·군단위로 대개 30여 명을 배출했지만 안동의 경우 지난 2007년 현재 310명이나 된다. 더불어 다른 도시로 본적을 옮긴이들을 포함한다면 더욱 많겠지만 미포상의 독립운동가 700명을 합친다면 무려 1,000명이 넘는다. 또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자정순국자를 배출했다. 준식민지 상태와 국권상실이라는 위기 속에서 약 70명 가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운데 10명이 안동인이거나 안동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와 함께 대개 지역마다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한다면 의병과 3·1운동을 했거나 소수 군자금 모집에 가담한 정도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의병과 계몽운동, 의열투쟁, 3·1운동, 농민운동, 사회운동, 학생운동과 대중투쟁, 만주와 중국 관내지역을 비롯한 국외독립운동 등 다양하고 끊임없이 전개됐다. 그런데 이러한 독립운동이 한 지역에서 모든 분야에서 걸쳐 나타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안동인이 펼친 독립운동은 이 모든 분야에서 골고루 펼쳤다는 것과 각 분야에서 대표적인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것을 큰 특징으로 꼽고 있다.
안동의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나 당시 세계적인 정세에 비춰 보아도 뒤지지 않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 안동에 설립된 분감은 지방에서 일어난 다양한 형태의 항일운동을 저지하고 예비검속 등으로 옥죄고 고통을 준 역할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번 취재에서는 안동의 유명 독립운동가들의 안동분감 수감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안동을 비롯한 북부지역의 항일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사항들은 많지만 대부분 안동분감에 수감됐다는 기록은 미미했다. 
이에 대해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의 강윤정 학예연구실장은 “그 부분에 전문적으로 연구한 것은 없지만 현재로써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주로 밖에서 활동하신 분들은 서대문이나 경성으로 압송되셨다.”며  “안동에서 3·1운동과 같은 항일운동을 펼치다가 수감되신 분들은 판결을 받고 그대로 안동분감에 있었던 경우와 상위법원으로 항소와 상고를 함으로써 서울의 서대문이나 경성감옥으로 많이 가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조심스럽게 견해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현 안동교도소 총무과장은 “과거 현 교도소가 이전하기 전 신세동에 자리하고 있을 때는 제1심 피의자나 피고인이나 안동, 영주, 봉화 지역 연고자와 본부 이송 지시자와 관련된 사람들이 수용됐는데 이제는 이를 포함 의성지원 제1심 여자피의자·피고인, 공안사범수형자, 일반경비시설로 수용이 구분되고 있다.”고 말해 강 실장의 생각에 일리가 있어 보였다.

안동의 마지막 항일투쟁 조선독립회복연구단

취재 중 안동교도소와 관련된 독립운동사에서 눈에 띄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안동농림학교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김희곤 관장은 그의 저서에서 안동이 한국의 독립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지만 항일투쟁기를 마무리 짓는 독립운동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안동농림학교의 투쟁은 그 어느 지역보다 먼저 항일의 깃발을 올린 안동에서 가장 오랫동안 줄기차게 지속해온 민족운동의 줄기를 계승하여 마지막 단계까지 항일독립투쟁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고 말했다.

▲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 역사전시관 사진.

안동농림학교는 1933년 4월에 문을 연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군사교육기관으로 변했다. 만주군 출신의 일본군인이 배치돼 군사교육과 근로봉사를 강행하고 소년비행대, 전차대 지원을 강요하고 낙동강도강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일본의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한 근로노동에 동원됐다. 또한 농산물 증산이라고 하여 황무지 개간에 나서 낙동강 백사장을 개간, 좌안농장이라고 하여 인근 의성과 예천 등지에서도 농사실습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학도병 지원을 더욱 강요하게 된다. 이에 1943년 7월, 방학임에도 근로에 동원된 권영동, 고제하, 서정인 등은 일본의 소년병으로 끌려가 죽기보다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기를 결의하며 조선회복연구단을 결성한다. 이들의 목적은 “구국의 일념으로 일본인 기관을 파괴하며, 적의후방을 교란하여 일본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연합군을 유리하게 하여 조국의 조속한 독립회복을 기함”이었다. 조선회복연구단에는 학생뿐 아니라 안동사회의 지도층 인사들도 참여했다. 특히 석주 이상룡 선생의 아들 이대용은 조직의 방향정립에 큰 도움을 주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43년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이정선이 일본 동경에 유학을 갔다가 돌아왔다. 그는 귀국해 9회 동기들과 면학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문예써클 명성회를 조직하고 조선회복연구단과 연대활동을 펼치게 된다.

▲ 사진.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술총서「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에서 발췌.


이들은 규모가 점차 확대되자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계획하게 된다. 안동농림학교 무기고의 총으로 안동경찰서와 안동헌병파견대를 기습 공격으로 점령하고 나아가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뒤 의성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거사는 8회생 졸업일을 전후하여 실행계획을 잡았다. 그러나 무산되고 1945년 2월 27일로 잡았다가 다시 3월 10일로 연기됐다.
결국 이 거사는 사전에 일본에 발각되고 4월까지 83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돼 안동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들은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이중 손성한은 고문 후유증으로 6월에 숨지는 일도 발생했다. 이들은 약 6개월 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으며 8월 17일 석방됐다.
현재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꾼 안동농림학교는 지난 80년사에서 “계획된 거사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일제의 방패가 되어 전쟁터에 가서 뜻 없이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우리민족을 위해 싸워 우리의 얼을 만방에 과시하고자 했던 학생들, 그들의 용기와 당참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며 일제 부당함에 맞섰던 당당한 학생들을 기억하자고 전했다.  

안동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해방을 맞고 찾아온 미군정 기간 동안 남한에서는 수많은 정치 단체들이 조직되어 이합집산이 많았고, 제주 4·3 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 등 좌·우익이 심각한 대립을 이루었다. 이에 따른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던 시기였으며 전국의 형무소는 죄수들로 넘쳐나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붐볐다고 한다.
해방되던 해 11월 지소에서 안동형무소 본소로 승격된 안동교도소는 6·25전쟁을 맞으며 또 한 번의 비극을 맞게 된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49년 8월 안동형무소 재소자는 872명이었다. 그러나 1950년 전쟁 이전에는 1,200여 명으로 늘었다. 그 중 일반재소자는 100여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직후 북한군 8사단이 7월 5일 제천을, 7월 8일에는 단양을 점령했다. 급박해진 전황 속에 안동이 점령 위기에 처하자 안동형무소는 7월 15일 이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징역 5년 이상의 장기수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일부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대구형무소와 부산형무소로 이송시켰다. 대구형무소로는 279명, 부산형무소로는 492명이 이송됐다. 그리고 이송되지 않은 5년 이상 좌익재소들과 일반재소자 중 장기수들은 처형됐으며 이는 당시 형무관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확보한 진술 중 당시 형무관이었던 정 모 씨는 “형무소에 좌익 재소자 중에는 국가보안법, 내란, 포고령 위반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모두 군인들이 트럭에 싣고 데려가 총살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진술자 이 모 씨도 “헌병대가 데려간 죄수들은 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며 “무기수, 장기수들은 헌병들이 데려가 총살시켰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안동형무소에 있던 일반사범 60~70명은 석방하고 200~250여 명의 장기수들은 헌병대에 의해 총살됐다.
또 대구로 이송된 재소자 279명 중 116명은 1950년 7월 30일 대구재소자와 함께 군 헌병대로 인계되어 처형됐다. 부산으로 이송된 492명 중 323명은 부산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이와 함께 1950년 7월 초순부터 하순까지 안동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소집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형무관이었던 이 모 씨의 진술에 의하면 “대구로 후퇴하기 전인 7월 14일 형무소에 사복 입은 민간인들이 경찰에 의해 예비검속돼 들어왔는데 이들은 인원이 너무 많아 작업 창고에 수감됐으며 며칠 있다가 재판도 없이 트럭에 실려 나가 군인들의 의해 총살됐다.”고 말했다.
결국 진실화해위원회는 1950년 7월 안동지역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이 안동경찰서 경찰과 국군에 의해 안동경찰서 유치장 등에 소집·구금됐으며, 이들은 7월 하순경 안동시 서후면 성곡동 뒷산, 와룡면 태리 기름땅고개, 안동시 한티재 계곡 일대에서 살해된 사실을 확인했다. 안동형무소에 있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한꺼번에 헌병들에 의해 총살된 것이다. 안동형무소에 수감된 보도연맹원들은 안동시내뿐 아니라 영양지역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때에 안동형무소에 있던 재소자 중 최소 639명 이상이 희생됐으며 보도연맹원으로 희생된 인원은 400여 명인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 2009년 12월 19일 제주도의 한 신문사 기사에는 제주 4·3사건 관련자와 단체가 안동교도소를 찾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주관하는 '2009 전국 4·3유적지 순례'를 위해 42명의 사람들이 옛 신세동의 안동형무소 터를 순례하고 형무소에 수감됐던 4·3희생자를 위해 진혼제를 봉행한 기사였다.
기사에서는 안동형무소에는 4·3 수형인 중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60여 명이 이감됐던 곳으로 이곳에서 1년간 수형생활을 했던 송순희 할머니(당시 85세)도 동행해 당시의 참혹했던 기억을 전했다.
기사에서 송 할머니는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서 태어나 2살 연상 남편과 결혼해 시댁인 남원읍 의귀리에서 생활했다. 결혼 6년째인 1948년 12월 그는 끔찍한 일을 당해야 했다.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남편이 출장나간 뒤 두 달이 다되도록 소식이 없어지자 경찰에 붙잡혀 모진 폭행과 치욕스런 행위로 빨갱이들한테 쌀 50가마니를 주었다는 진술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서귀포경찰서에서 제주시로 옮겨져 군사재판에서 1년형을 선고 받았다.

▲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진혼제를 지내고 있다.(사진. 시사제주 제공)

이 과정에서 업고 끌려왔던 첫째 딸이 경찰 폭행에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전주형무소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뱃속에 있던 둘째딸은 이듬해 10월쯤 안동형무소에서 낳아 차가운 교도소 바닥에서 키우며 출소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둘째도 잃는 슬픔을 맞게 된다.
송 할머니는 진혼제를 올리는 곳에서 “제를 지내는걸 보면서 형무소에서 같이 생활하던 죄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억울하게 먼저 간 영혼들이 오늘 여기 차린 제삿밥이라도 잘 먹고 갔으면 하는 바램이고 그동안 가슴에 맺히고 막혔던 이야기를 이렇게 하고 나니 좀 마음이 편안해 진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런 비극적인 역사와 억울하게 숨진 희생자들이 많다는 것을 나라와 국민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 뿐"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국가기록원에는 지난 4·3당시 형무소에 수감된 인원들은 2,530명이었지만 전문가들은 공식적인 기록 외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수형됐던 것으로 보고 있다.

형무소가 교도소로 바뀌고

우리나라 형무소는 6·25 전쟁을 지나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을 계기로 대폭적인 개혁이 이루어진다. 형무소는 단순히 형을 집행하는 소극적이고 해악을 가한다는 의미가 있어서 1961년 12월, 형무소를 교도소로 개칭한다. 교도소 안에 각종 교육시설을 두고 재소자들을 교화하는데 목적을 두는 교화, 교정주의 이념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1962년 2월 27일 교도소 직제가 새로 재정되면서 종전의 형무소 직제를 폐지했다. 또한 공무원 임용령의 개정에 따라 종전의 전옥·전옥보·간수장·간수장보·간수부장·간수의 직을 교정관·교정관보·교감·교감보·교도·교도보의 6개 직급으로 정했다. 1970년에는 전국 구치소에 서무·보안·출정·명적·접견영치·용도와 의무과를 설치했으며, 교도소에는 서무·보안·작업·용도·의무와 교무과를 두었다.
이후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1980년, 보호감호법 제정으로 공식적으로는 흉악범이나 강력범을 사회에서 격리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하나 실제 삼청교육대 교육대상자를 격리하기 위해 경북북부지역에는 청송 제 1, 2, 3보호감호소가 생겼다. 이 감호소는 1983년 청송교도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지난 2010년 8월 2일 경북북부 제1, 2, 3교도소, 경북직업훈련교도소로 바뀌었다. 이 시설은 현재 흉악범들만 전문적으로 수감시키는 교도소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구 교도소 제설작업 모습-1973년 겨울, 당시 영남지방에 내린 눈은 27년만의 대설로, 재소자들이 교도소 정문 밖에서 제설작업을 하고 있다. '10월유신 제1차년도', '반공, 방첩'이라는 표어에서 그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사진. 안동교도소 제공)

암울했던 군부시절, 유신체제를 겪으면서 안동교도소는 1985년 12월 13일 안동시 신세동에서 현재 안동시 풍산읍으로 이전했다. 안동교도소는 이전하기 전 1980년에 이해찬 전 총리가 1년 10개월을 복역했으며 1993년에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대사면으로 문익환 목사가 출소해 언론에 이슈가 되기도 했다.

▲1972년 재소자 운동 장면 - 운동하는 재소자들의 맨발과 판자를 이어 만든 농구대가 어려웠던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계호하는 교도관의 근무복을 통해 당시 교도관 복제를 엿볼 수 있다.(사진. 안동교도소 제공)

문익환 목사는 밀입북사건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90년 10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으나 그 이후 각종 반정부집회와 시위참여, 발언 등이 문제가 돼 1991년 6월 6일 재수감됐으며 같은 달 15일 안동교도소로 이감됐다. 3월 6일 문 목사가 출감하는 안동교도소 주변에는 석방 2시간 전부터 재야단체 인사와 전국총학생회연합회 소속 학생 등 1백여 명이 정문 앞에서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문 목사는 수형생할 중에 단식투쟁과 서신발송불허처분 취소 소송을 대구고법에 내기도 해 세간에 관심을 더욱 받기도 했다.
지난 2010년 안동교도소에서 명예퇴직하고 제2의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조 모 씨는 실명을 밝히기를 거부했지만 근무시절을 들려주었다. 그가 교도관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78년부터이지만 신세동으로 출근한 1985년 12월까지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서거일이잖아요. 그때 근무했었는데 총대 메고 초소 근무하는 졸병이었지요. 그때는 국가비상사태라고 공무원들이 일주일을 집엘 못 갔어요. 군대생활하고 똑 같았어요. 어쩌면 군대보다 더 엄한 문화가 있었다”며 고생만 했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곤 “지금은 완전 상전벽해로 달라졌다. 격동의 세월을 겪으면서 70년대에서 지금까지 박 대통령,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까지 대통령이 30년 동안 6번 바뀌었는데 많은 변화가 없었겠어요?”라며 “민주화가 노태우 대통령 때 됐잖아요. 6·10항쟁으로 직선제 도입되고....... 그래도 군사정권 있을 때는 경찰, 국가공안직 공무원들이 근무하기 좋았어요. 대통령이 군부출신이었으니까. 강화된 공권력이 먹어줬다 이거지, 국민들한테....... 그때는 경찰 그러면 겁을 냈어요. 그런데 요새 경찰하며는 안 그렇잖아요. 그때는 권위시대였다고, 권위주의시대 요즘은 민주화 그죠?”하며 허허 웃어보였다.
 이어 “민주화가 되면서 공권력이 무너진 건 김영삼 정부였지. 김대중, 노무현 정부 그때는 완전 민주화 그래가지고 수용자들이 교도관 말을 우습게 알고 적반하장이었지. 인권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강조했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1985년 안동교도소가 이전할 때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교도소가 지금 해동사 자리 인근으로 있었는데 노하동 도살장 뒤에 야산, 거기에 가느냐? 현재의 자리에 가느냐? 두 군데 후보지가 있었다꼬. 근데 우리 직원들은 가까운데 하자했는데 예산문제로 고만 싼 데로 하자해서 풍산으로 갔지. 지금 어예 보믄 안동발전을 위해 그리로 간 게 잘된 거지. 지금 터미널하고 기차역 있는 데로 왔으면 국가보안시설인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고 안 좋지. 안 그래요?” 했다.

▲1972년 재소자 조례행사 장면 - 재소자들의 정서교육을 위한 행사로 공휴일과 우천을 제외하고는 운동장에서 아침 개방 즉시 15분 간을 국기게양으로 시작해 애국가 봉창, 국민교육헌장 암송, 재소자 준수사항, 새마을 노래, 건전가요 합창으로 끝났다고 한다. 재소자들 뒤에 있는 건물에 싸인 담쟁이가 눈에 띈다.(사진. 안동교도소 제공)

현 총무과장은 “85년 이전할 당시에는 도시가 확장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전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당시 풍산읍에서는 지역 활성화를 위해 안동교도소유치위원회까지 결성해 유치활동을 펼치기도 했다.”고 알려주며 구 교도소와 관련된 사진을 몇 장 건네며 설명을 잊지 않았다.
안동교도소에서 전·현직으로 근무했던 분들을 인터뷰하면서 공통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안동의 구 교도소가 역사 자료로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건물 한 동만이라도 남겨 두었다면 현재 재조명 받고 있는 임청각과 함께 귀중한 사료로 쓰였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퇴직해 재소자들과 옷만 바꾸어 입었지 그 속에서는 수형자, 교도관이 똑같이 징역 사는 것이었다고 하던 조 모 씨는 “개인적으로 서울에 일제 때 구치소가 박물관으로 남아 있잖아요. 아쉬운 거는 안동도 100년 된 것을 잘 보존해 박물관으로 해놨으면 관광객들이 많이 올낀데. 근데 그거는 보존할 자료가 됐어. 그런데 싸악 다 뜯었단 말이지.......”하며 안동의 근대식 건물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총무과장 역시 “그때 교회당담쟁이가 너무 멋있었다. 밑동이 양손으로 쥘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오랜 건물인데 철거된 것을 정말 아깝게 생각한다. 임청각과 연장선으로 멋진 역사자료가 됐을 텐데. 지금은 역사를 지우니 볼 것도, 배우는 것도 없잖아요.”라며 아쉬워했다.
지금은 안동교도소가 한적한 곳으로 옮겨 갔지만 안동분감이 안동시내에 있을 때만해도 요지와 가까웠다. 현재 웅부공원을 중심으로 군청과 법원, 경찰서, 세무서 그리고 기차역 등이 모여 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그래서인지 안동에서 오래 사신 분들은 교도소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이나마 남아 있었다. 그러나 교도소의 높은 담장과 교도소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행사의 애국가나 함성소리 정도만 기억할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한 세기를 맞는 안동교도소,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먼 기관이었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시기의 암울하고 안타까운 비극적인 역사를 그렇게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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