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송현동 주둔 36사단 백호부대를 기억한다
‘27년간 안동은 주요 군사주둔 도시였다’
안동 송현동 주둔 36사단 백호부대를 기억한다
‘27년간 안동은 주요 군사주둔 도시였다’
  • 김용준(경북인뉴스 기자)/피현진(UGN경북뉴스 기자)
  • 승인 2017.10.1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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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11)

대한민국 국민은 납세, 교육,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하는 3대 의무를 국가가 헌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당연히 국방의 의무를 해야 한다. 군대생활을 해본 남자들이면 누구나 신병훈련소에서 무릎에 피가 나고, 이가 갈리고, 다리에 알이 베는 이른바 PRI 사격훈련을 기억하고, 영점사격을 하며 첫 경험한 총알에서 내뿜는 화약 냄새로 인해 군대 생활을 실감한다. 부모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훈련소에 쓴 첫 편지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이 눈물 나도록 스며있는 사연으로 인해 어머니들은 통곡의 편지였다고 추억한다. 그리고 그런 남자들의 세상이 안동에도 있었다. 6.25전쟁이후 1955년 창설돼 안동에 주둔한 보병36사단. 이번 글에서는 27년 동안 안동에 주둔했던 백호부대 36사단의 연혁과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편집자 주>

36사단 백호부대의 탄생

1953년 7월 27일은 이 땅에서 3년간 치러졌던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난 날이다. 6.25전쟁은 남한과 북한을 비롯해 UN과 중국 등 참전한 국가에게 막대한 피해만 야기한 채 휴전이라는 명목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대한민국 육군은 전체 8개 사단 23개 연대와 해군, 공군 지원·특수 병력 등 총 병력 105,752명 수준이었으나, 전쟁기간 중인 1952년 11월부터 1953년 6월까지 10개 사단을 추가로 창설하고, 1954년 3, 5, 6군단 창설과 미 8군을 대신해 전선을 총 지휘할 1군 사령부를 창설하게 된다.

1953년 휴전으로 전쟁이 중단되자 미국은 한국이 자주국방 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20개 사단 편성과 유지를 위해 약 2억 달러의 무상 군수지원을 보장하는 한·미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이런 흐름 속에서 36사단은 탄생하게 된다.

1955년 강원도 인제에서 창설된 36사단

육군 제36보병사단 백호부대는 현재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하고 있는 향토방위 사단이다. 1955년 강원도 인제에서 창설된 36사단은 같은 해 6월 5일 사단 사령부가 안동으로 이동함에 따라 1군 예하의 유일한 향토방위 사단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안동, 울진, 문경 일대)을 위수지역으로, 1982년 7월1일 현 위치인 원주로 옮겨가기까지 안동에 주둔하면서 국토방위는 물론 안동 경제에도 한 몫을 담당하던 부대였다.

시간이 흘러 36사단은 원주시로 이전, 이후 송현동 36사단 군부대 자리는 지난 1977년 대구에서 창설된 육군 제70사단이 주둔하다, 2008년 12월 1일 2008년 국방개혁 2020 계획에 따라 후방지역 병력감축을 위해 공식 해체된다. 이후 대구로 이전한 보병 제50사단 예하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소유했던 안동36사단 송현동 군부대 부지

일제강점기 시절 안동시 송현동 36사단 부지 소유자는 일본인이었다. 안동시 토지정보과 토지대장 부책 편에 안동36사단 송현동 군부대 대표번지 토지소유자에 관한 이전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대정2년(1913년) 2월 15일 36사단 대표번지에 관한 최초사정조사자는 안기동 조용혁, 소유자는 소화10년(1935년) 4월 22일 안기동 375번지 안경호씨 소유로 있다가 소화19년(1944년) 3월1일 大東精一(다이또우 세이치)로 기록되어있어 일제강점기 시절에 36사단 대표부지가 일본인 소유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옥야동에 사는 임정호씨로 이전 되었다가 1956년 4월 17일 대한민국으로 소유자가 변경된 후 1970년 지금의 국방부로 소유권 이전이 완료 되었다.

박태규 (전)안동시 의회의원이 추억하는 36사단

안동시 송하동 경로당 송하분회 분회장 박태규 회장은 송현동 호암마을이 고향인 호암마을 토박이다. 원래 나이는 무인생 (1938년) 범띠지만 호적에는 1940년생이며 송현동 707번지에서 태어나 군대생활 2년을 제외한 80여년을 호암마을에서 살고 있다. 초대 송현동 안동시의회의원을 역임한 그는 36사단이 안동에 주둔할 당시 군부대에 관한 여러 일화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호암마을 토박이로 36사단의 안동이전 처음과 끝을 함께한 박태규씨

박 회장은 안동36사단 주둔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먼저 국민학교 시절을 애기했다.

"초등학교 입학당시에 학군이 지금의 안동시청 자리에 있던 화산국민학교로 정해져 호암마을에서 6명의 친구들과 지금의 군부대 앞 도로를 거쳐 비포장 길 15리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는데 2학년쯤 다니다가 전쟁이 났어요. 당시에 다니던 학교가 폭격으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불타버리고 폐허가 되었어요."

전쟁 전 36사단 앞의 모습을 기억한 박 회장은 36사단이 안동으로 오기 전 송현동 모습을 자세히 기억한다.

"36사단자리는 대부분 임야 또는 논밭이었어요. 지금 군부대 옆 영주통로 신규 도로 부근 또한 임야 논밭으로 변변한 도로조차 없었어요. 성창주택 자리에는 조그마한 야산이 있었고요. 당시 송현국민학교 앞에 큰 웅덩이가 있었어요, 그곳에 주민들이 신시장 부근에서 소달구지를 이용해 짚과 인분을 운반해 거름을 섞어 지금의 비료대용인 퇴비를 만들어 공동으로 사용했어요. 도로는 비포장 길로 늘 먼지가 뽀얗게 도로에 뒤덥혀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 도로인지 웅덩이인지 몰라 주민들이 더러 웅덩이 빠져 곤혹을 치루기도 했어요."

36사단이 안동에 주둔하기 전 군부대 앞도로는 1차선 정도의 비포장도로가 형성되어 있었고 건물이라고는 지금의 송현초등학교 인근에 가옥 3-4채와 안동공고 자리에 도축장건물이 전부였다고 한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쯤 호암마을 주민들 사이에 송현동에 군부대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자리 잡더라고요. 36사단이 들어서고 난 이후에 부대 앞 도로를 기점으로 안동기차역까지 2차선 도로와 4차선 도로 확장공사도 시작됐죠."

송현동에 자리 잡은 36사단은 송현국민학교 운동회, 졸업식은 물론이고 안동시민체전 등 큰 행사가 있으면 사단 군악대를 동원해 악기를 연주했다고 한다. 일부 군부대 장병들은 송현동 소속으로 시민체육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한, 매일 아침 훈련병들이 군가를 부르며 호암마을과 노하동을 거쳐 군부대로 아침 구보를 하는 장면을 늘 볼 수 있었고, 여름철에는 호암마을 앞 냇가에서 군인들이 목욕을 했다고 한다. 농번기 때는 대민지원을 위해 군 장병 수백명이 호암마을 일대에 진을 치고 도와줬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점심시간이면 군부대 간부들이 식당 밖으로 길게 줄을선 풍경이 벌어진 곳으로 지금의 송하동주민센터 부근에 있던 진미식당 자리

"군부대 앞에 스레트 건물 여인숙이 있었어요. 주인은 36사단 중사로 근무하던 박정학 씨로 기억해요. 그리고, 사단 정문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지금의 송하동주민센터 인근에 3층 건물이 들어섰는데 1층에 진미식당이라는 해물탕 전문식당이 있었어요. 지금 한라막창 식당자리에요. 장사가 얼마나 잘되었는지 군부대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점심시간이면 식당 밖에서 30분 이상을 기다릴 정도로 영업이 잘 되었어요."

36사단이 이동해오자 송현동의 모습도 변해갔다. 박 회장의 말처럼 부대 앞 도로는 넓어지고 군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려는 상인들도 하나둘 송현동으로 몰려오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술집과 여인숙이었다. 산과 들, 논밭이 전부였던 송현동의 경제 지도가 군인들로 인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섞이면 다툼도 있게 마련이다.

"지금의 송현초등 뒤편에 아리랑 주점식당이 있었어요. 당시 주민들과 36사단 장병들이 더러 이용했어요. 한번은 외사촌 동생이 술을 먹다가 그곳에서 장병들과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까지 갔어요. 동생이 우리 집에 와서는 전후사정을 애기하고 숨겨 달라 해서 집 마당 짚단 밑에 숨겨 줬는데, 야간에 36사단 헌병들이 어떻게 알고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그때 내가 경희대학교 경제학과에 2학년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헌병들이 와서 막무가내로 동생을 찾아내라니까 어이가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주거침입죄라는 단어가 생각났어요. 그래서 헌병들에게 우리집 안으로 한 발짝만 들어오면 야간 주거침입죄로 청와대에 신고한다고 으름장을 놓자 헌병들이 돌아갔죠."

박 회장이 소개한 아리랑 식당과 외사촌동생 간에 있었던 일화는 '역시 군 부대가 있는 동네 어디를 가더라도 군인들과 동네 총각들의 다툼은 어쩔 수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버지 혹은 삼촌, 남자들 군대 얘기를 들어 본 분들은 다들 공감할 것이다.

군부대 앞 주택단지에 사는 가정주부가 기억하는 36사단

안동에 36사단이 주둔할 당시 사단 본부에 신병교육대가 함께 있었다. 안동36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 중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이 1979년 1월 5일 경북 안동 36사단 훈련병으로 입대해 신병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고, 정세균 국회의장이 안동 36사단에 입대, 만기 제대했다.

신병교육대 앞은 훈련병들이 입소하거나 퇴소할 때마다 여러 풍경을 만들어 내고는 했다. 특히, 훈련병들이 훈련을 마치고 퇴소하는 날에는 그 일대가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한다. 송하동 성창주택 통장 김선희(74세)씨는 이들의 이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 목격자다.

36사단 신교대 훈련병들의 퇴소식 때 마다 눈물짓던 송하동 7통 통장 김선희씨

봉화가 고향인 김 씨는 1978년 태화동에 살다가 1981년 송현동 성창주택에 입주한 후 지금껏 그곳에 살고 있다. 군부대와 가까운 지역에 살다보니 부대에서 울려 퍼지는 기상나팔소리와 야간 취침 때 울리는 음악소리를 늘 듣고 살았다. 일부러 의자를 놓고 담 넘어 군인들이 생활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다들 아들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통장을 맡고 있다 보니 누가 이사오거나 하면 혹시 간첩일지도 몰라 일반인이라도 그의 신상을 모두 알고 있어야 했다고 한다. 백미는 신병들 퇴소식 때라고 그녀는 전했다.

1976년 안동36사단 훈련병들 모습(사진 다음카페-느티나무가 있든 23.17)
안동 36사단 훈련병들(사진 다음카페-느티나무가 있든 23.17)

"부대에서 신병훈련이 끝나고 자대배치를 위해 이동하는 날에는 병사들의 부모, 일가친척들이 새벽부터 부대 앞에 대기하고 있어요. 그때는 군인들이 훈련 마치면 자대로 가기 위해 안동역까지 걸어갔는데 그 시간이 새벽 4시예요. 그런데도 어떻게들 알고 오는지.... 아들 얼굴 한번 볼까 싶어서 알음알음 오는 거죠. 다들 한결같이 안절부절 하면서 기다리다가 군인들이 나오면 또 자기아들 찾는다고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면서 울음섞인 목소리로 기차역까지 따라 가면서 아들 이름을 불러요. 그런데 군인들이 자기 이름 들린다고 반가워하거나 쳐다볼 수 있어요? 조교들 서슬이 시퍼런데. 다행히 아들 얼굴 찾은 사람들은 그 얼굴 더 보겠다고 울면서 따라가고, 못 찾은 사람들은 계속 아들 이름 목 놓아 부르고, 부모님 목소리 들은 군인들도 울고, 나도 참 많이 울었다니까."

1966년 평해 대간첩침투작전에 참여했던 어느 장병의 기억

안동 주둔당시 36사단은 경상북도 북부지역(안동, 울진, 문경 일대)을 위수지역으로 대간첩작전 수행부대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1961년 6월 봉화 대간첩작전, 1966년 8월 평해 대간첩작전, 1967년 5월 봉화 대간첩작전, 1968년 11월에는 울진, 삼척 지구 대간첩작전, 원주 이전이후 1996년 강릉 대간첩작전 등 6회에 걸쳐 총 252일 대간첩작전을 수행, 무장공비 18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36사단의 긴박했던 대간첩 작전 중 안상욱 씨의 블로그 '멸공(滅共)군대 병사(兵士) 수첩'이라는 글에 안동 36사단의 대간첩 침투작전과 관련한 추억을 기록해 놓았다.

안 씨는 1964년 9월 24일 대구 50사단 신병교육대에 입대 2년 7개월(31개월)의 병역의무를 다하고 만기제대 한 그는 군 복무기간 중 부대이동과 단독 전출을 8번이나 하면서 복무하는 특이한 군 경험 후 제대했다.

안 씨는 대구 50사단, 안동 36사단 309연대, 울진 해안경비대 등에서 근무했으며, 1966년8월에 발생한 평해 대간첩작전에 투입됐다. 그 당시 긴박했던 대간첩 작전에 대해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평해 대간첩 당시 36사단에 근무했던 안상욱씨

안동 36사단 왼편 능선을 넘어 309연대에 우리부대 50여명은 독립부대로 남아 있었다. 36사단은 예비사단으로 연병장은 GMC 50여 대가 가로 세로로 도열해 즉시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리부대는 매일 야전 교육장에서 각개전투훈련을 받는데 왜 받는지는 알 수 없었다. 3개월쯤 되는 어느 날 밤 12시에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완전 군장을 하고 연병장에 가니 차량에 시동을 걸어 놓고 사단장이 실탄을 지급하고 장전해 열쇠로 채우라는 명령이다. 나는 큰 전쟁이 발생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우리부대가 선발대로 투입되고 50여 대의 GMC에도 병력이 실려 출동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전우들은 서로가 말이 없는데 차는 밤길을 달리고 있었다. 가로변에는 사과가 탐스럽게 익어 향기가 그윽한데도 서로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아침에 도착한 야영지는 어딘지 알 수 가 없었다. 작전은 영양군에 나타나 경찰 총을 탈취한 간첩을 포획이나 사살하라는 명령이다. 나의 분대는 저녁나절에 자연부락에 들어가 농민들을 귀가시켜 놓고 통행을 금지하고 검문검색에 들어갔다.

마을 이장은 군인들이 마을 외곽을 지키는 일에 놀라워하며 우리에게 닭과 돼지를 잡아 극진히 대접했다. 이튿날 우리부대는 어디론가 또 이동이다. 찻길도 없는 산속 계곡을 따라 하루를 내려간 곳이 영덕이다. 영덕에서 해안선 도로를 따라 북상하고 있었다. 우리부대가 정착한 곳은 울진군 영해면 월송정이다. 월송정은 평해황씨의 본관이다. 우리부대는 동해안 경찰 초소에 경비대로 발족해 해송 사이에 벙커를 만들어 텐트를 치고 정착했다. 경찰이 해안 초소를 지키던 것을 우리부대가 인계받았다. 당시 동해안 어선 속에 간첩선과 일월산 불빛이 교신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행정소대는 해안 부락과 백사장 초소를 맡고 경비소대는 죽변에서 후포까지 기동타격대로 임무가 주어 졌다. 행정소대는 어민들이 해안선에 접해 사는 마을은 고성방가로 제압하고, 해안으로 불빛이 세어 나오지 못하게 소등시키는 일이다. 주민들을 진정 시킨 후에 우리는 4명이 1개조로 해안가 백사장에 삽으로 둔턱을 만들어 판초우의와 담요를 깔고 덥고 바다를 향해 엎드려 사격자세로 밤을 지새웠다.

북에 간첩선이 어선으로 위장해 해안선으로 침투하면 생사를 걸고 교전을 해야 했다. 간첩선은 해안 100여m에서 고무보트에 기관총을 걸어 놓고 육지에 투입된 간첩이 백사장에 도착하면 로프로 보트를 간첩선으로 당겨서 북으로 간다. 이때 교전이 발생하면 M1 소총 4정과 기관총의 접전이 발생 할 수 있다. 우리부대 보급품은 36사단에서 지원을 받는데 나는 월 2회 3종 보급수령을 갔다. 평해에서 청송군 진보면을 통과해 안동시로 가는 길에 졸병은 적재함에 타고가도 즐거웠다.

안 씨의 글을 보면 당시 동해안 쪽에서는 고정 및 침투 간첩들과 그 간첩들을 복귀 및 침투시키는 간첩선이 빈번히 출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에 사단 사령부를 둔 36사단은 울진을 위수구역으로 두고 있었기에 대간첩작전에도 번번히 출동했다. 그러다 보니 육군 중 대간첩작전에 가장 많은 인력을 동원한 사단으로 남아 있다.

울진, 삼척에 침투해 사살된 무장공비들(사진: 한국학 중앙연구원)

제36보병사단은 현재 사단 내 백호충혼탑에서 울진·삼척 대간첩작전 도중 산화한 12명의 선배 전우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되새기기 위해 매년 11월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36사단, 대간첩작전서 전사한 호국영령 추모식(사진: 뉴스타운)

우경 장경석 장군이 말하는 안동36사단 사단장 시절

장경석 장군은 1920년 7월 24일, 함경북도 청진시 서자작동에서 태어났고 올해 98세다. 본관은 울진이며 19세 때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 해방 전까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월남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5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안동36사단시절 사단장을 역임한 우경 장경석 장군(사진: 실버넷뉴스)

53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20사단 포병사령관으로 명을 받아 부임했고, 그 뒤 군단 포병 사령관도 두어 군데 지냈다. 1야전군 포병부장 보직 후 5개월 만에 준장 진급, 야전군 기획참모부장과 육군대학 부총장을 거친 뒤 보병 36사단장과 보병 8사단장 등을 역임한 후 1965년 예편했다.

장 장군은 36사단 사단장 시절 주민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각종 대민지원과 민원 해결에 앞장섰다고 재임 시절을 회상했다.

"나는 소통이 일상에서 얼마나 소중하다는 걸 그 시절(사단장)에 절실히 깨달았어요. 안동에 주둔한 36사단장으로 부임하는 나에게서 보직 신고를 받고는 당시 김종오 참모총장이 '장 장군 안동 민심이 고약하단 소릴 들었소. 역대 사단장들이 푸대접 받은 곳이야'라고 말하는 거야.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저 조심하는 차원에서라도 대원군처럼 차라리 부대 문을 폐쇄하고 지낼 생각이었지. 그래야 말이 없으리란 심산이었어. 그런데 그게 아니야. 어쩌다 민간인을 만나면 그들은 정말 순수하고 인정스러웠고, 국방의 중요성도 이해하고 있었던 거야."

제30주년 국군의 날 안동시가지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36사단

장 장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안동 사람들에 대한 오해가 풀어졌다고 한다. 역대 사단장들이 푸대접을 받았던 이유가 그 사단장에게 있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장 장군은 주민들 대민지원 사업을 위해 헌신하게 된다.

"어느 날, 정보참모와 특무부대장을 불러 사단에 출입할 만한 인사에게 출입증을 만들어 주라고 지시했어요. 사단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찾아오는 거야. 당시 내 차가 지금의 벤츠보다 비싼 하드탑인데, 시골길을 달리다가 갓 쓴 촌로들을 보면 세우고 태워드렸지. 이야기도 나누고. 헤어질 때는 명함과 아리랑 담배를 건네줬어요. 그런 인간관계가 민과 군의 장벽을 깨뜨리는 계기가 된 셈이지. 찾아오는 사람들의 민원도 잘 해결해 주고 했어요.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은? 예로부터 안동은 양반들의 고장이고, 특히 견훤의 난을 치른 삼태사(三太師) 후예인 권, 김, 장 씨 들이 많이 사는 곳이야. 그 중 하나인 장 씨인 내가 사당에 찾아가 참배를 하기도 했어요. 정말 보람을 느낀 1년 6개월이었어. 지금도 나는 군 후배들을 만나면 강조해요. '군의 대민 지원 사업은 전투력 증강 요체다'라고."

 어린이날 36사단을 방문한 동부교회 중앙유치원 원생들(사진 안동 동부교회 70년사)

이후 장 장군은 안보회의 비상 기획위원과 코오롱 감사, 교육부 정책 자문위원도 지냈다. 특히, 군인이 되기 전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기 때문에 교육에 대한 사랑, 소신과 철학이 있다는 걸 숨기지 않고 용인대학교에서 요가 학과를 창설하고 12년 동안 후학을 가르쳤다.

전쟁 때 함경북도 청진에서 월남, 안동처녀와 결혼한 고성욱 주임원사

안동시 송현동 삼성명가에 사는 고성욱(76세)씨는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이다. 그는 6.25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난 오다 도중에 폭격으로 부모님과 생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나이 9세 때였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그는 함께 피난 나온 이모님과 춘천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이모님도 피난 도중 폭격을 맞아 다리가 절단되는 등 불편했기에 가정형편은 넉넉지 못했고, 돈을 벌기 위해 자연스레 군인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월남, 36사단에서 안동처녀와 결혼한 고성욱 주임원사

"그러니까 1961년초에 군에 입대해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 받고 6월 36사단으로 자대배치를 받았어요. 처음에는 사병으로 군에 갔는데 바로 하사관 지원을 했죠. 그러니까 사병 생활을 20개월하고 1963년 1월에 하사관으로 임용돼 36사단 병기중대에서 하사관 생활을 시작했죠. 그러다가 1966년 8월 미8군 왜관부대(캠프캐럴)로 전출 가서 1년6개월 근무하기도 했죠. 당시 미군부대 근무했다고 하면 다들 알아줬어요. 이후 베트남도 갔다 오고, 다른 사단에서도 근무했지만 안동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죠. 36사단이 원주로 가고도 50사단 창설 요원으로 안동에 계속 남아있었으니까."

고 씨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 했다. 이북에서 월남하다 부모를 잃고 어렵게 장성해 군에서 인생을 다 보냈다. 그는 자신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사단장을 비롯한 전우들과 주위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아마 그 도움이 없었다면 34년간 군 생활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군 생활 하던 중에 송현동에 아들 없이 딸 셋 가진 집으로 장가들었죠. 1962년도 일거예요. 뭐 데릴사위죠. 신혼살림도 처갓집에 방 하나 얻어서 시작했고, 계속 장인장모 모시고 살았으니까. 부모님을 여의고 가진 것도 없는데 딸을 내준 장인장모님에게는 아직도 고마움이 남아 있어요. 처음에 결혼한다고 했을 때 장모는 허락했는데 장인은 완강하게 반대했죠. 처고모들도 다 반대하고. 처가는 그 당시 부자였거든요. 장인이 일제강점기 때 훈장도 하고 땅이 많았어요."

그렇게 고 씨는 군에 입대했다가 안동 처녀를 만나 평생의 배필로 삼았다.

"결혼은 전통방식으로 했어요. 그때 36사단 참모들도 많이 참석하고 그랬죠, 군 생활 하고 얼마 안됐으니까 돈도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장농도 사단 공병대에서 짜서 저한테 주고, 당시 사단장님은 금성라디오를 선물하기도 했죠. 당시 금성라디오가 처음 나와서 굉장히 귀했는데 결혼 선물이라고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안동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된 거죠."

고 씨는 안동에서 장가들 당시 36사단 참모들을 비롯해 부대 내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며 그 고마움을 아직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긴 가족들을 위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군 생활과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데릴사위 격으로 장가를 갔으니 이게 또 힘들어요. 물론 장인장모가 많이 챙겨줬는데 그런데도 나름 힘든거죠. 군 생활 하면서 농사도 지어야 했으니까... 매일 새벽 3~4시면 일어나서 논밭일을 먼저하고 출근했죠. 그리고 군에서 받은 월급은 다 장인 드렸고요. 군 생활과 농사를 병행하다보니 당시 사단장, 보안부대장 등이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군에서 대민지원 계획이 잡히면 부대장이 우리 논밭은 우선적으로 지원해 줬죠. 그랬으니 그 일 다 했지 아니면 못했어요."

고 씨는 결혼과 군 생활, 농사까지 그야말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애들이 하나둘 태어나면서 경제적으로는 늘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 왜관 미군부대 근무 후 안동 36사단으로 복귀하자 장인이 제대를 권유했다. 농사만 짓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 씨는 그럴 수 없었다.

"장인은 내가 전역하기를 바랐어요. 근데 농사만 짓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역을 할 수 없었죠. 애들 키우는데도 문제고. 그래서 결국 돈 벌려고 월남에도 다녀왔죠. 순전히 돈 벌려고. 그래서 1969년 백마부대 소속으로 월남에 파병을 갔다 왔어요. 월남 갈 때 못 가게 할까봐 장인·장모 모르게 갔어요. 장인도 나중에는 자기 때문에 내가 고생 많이 했다고 얘기하곤 했어요."

 36사단이 원주로 이동한 후 50사단 창설요원으로 군 생활을 이어갔던 고성욱 씨

그렇게 고 씨는 두 번째 전쟁터로 나갔다. 월남에서 고 씨는 꽤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월남이나 한국이나 월급은 십여만원으로 같았어요. 그런데 전투수당이라고 해서 월 60달러 정도를 받았는데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60만원 정도였어요. 나라에서 60불 중 20불은 저를 주고 40불은 집으로 보냈어요. 월급도 집에서 받았고, 지금이야 60달러가 생각하기에 따라 큰돈이 아니지만 당시는 월급의 4~5배나 되는 큰돈이었죠."

고 씨는 월남에서 14개월을 근무했다. 71년 2월 경 귀국, 양평 20사단포병대에서 2년간 근무하다 36사단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1982년 50사단 창설요원으로 참여했고, 주임원사로 근무하다 지난 1995년 34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전역 했다.

 2작전 사령관이 안동 50사단을 방문했을 때 2작전 사령부 및 50사단 간부들과 함께

"작전이 바뀌었어요. 원래는 원주로 50사단이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36사단이 가는 걸로 변경 됐죠. 당시 36사단 안에는 70사단도 같이 위치해 있었는데 36사단은 예비사단이라 소장이 사단장이었고, 70사단은 동원사단이라 준장이 사단장 이었어요. 당시 안동에 36사단과 70사단이 같이 있으니까 36사단이 원주로 가라 이렇게 해서 36사단이 원주로 가게 된 거죠. 70사단은 36사단이 원주로 간 이후 완전히 자리 잡은 거고. 원래 저도 원주로 갔어야 됐는데 당시 사단장이 저를 배려해 줬어요. 안동에 있으라고."

안동에 남아 50사단 창설요원으로 군 생활을 이어가게 된 고 씨는 안동에 자리 잡았던 36사단과 70사단, 50사단을 군 생활 내내 경험했다. 고 씨는 현재 50사단 그러니까 36사단 부지에 있던 담장을 본인이 주관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50사단 창설요원으로 안동에서 군 생활을 이어간 고성욱 씨

"처음 36사단에서 군 생활 할 때는 담장이 없었어요. 그래서 부대 경계가 모호한거죠. 그냥 아무것도 없이 나무만 서있거나 간간히 철조망이 있거나 그랬어요. 그래서 당시 36사단 부대원과 방위병들을 동원해서 할당을 주는 방식으로 담장을 만들었어요. 당시 지금 송현동 자리에 108연대, 109연대, 포병연대 등이 주둔해 있었는데, 그들 구역은 그들이 직접 공사를 하도록 지시하고, 시멘트는 공병대에서 받아썼고, 하다못해 부대 내에서 직접 블록 벽돌을 제작해 가면서 만든 담장이죠."

고 씨는 군 생활에서 그래도 부대에 담장 하나는 남기고 나왔다고 자랑했다. 그렇게 일평생을 군에 몸담았던 고 씨는 1995년 34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전역 해 지금도 안동 송현동에서 그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안동인들의 기억속의 그때 그 시절 안동 36사단

안동에 36사단 있을 때 만들어진 하사관 주택.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36사단 후문과 군사 도로가 있고 초소도 있었다, 산꼭대기 오른쪽 아래 안기동 성창여고가 있다, 폭포가 있던 당시 이곳은 밭이었고 오른쪽 산 밑으로 개울이 있었다, 길 중앙에 차가 주차된 곳 오른쪽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

과거 안동36사단 시절에는 부대주변에 하사관 주택이 많이 있었다. 운안동 하사관주택단지, 송현초등학교 뒤편, 사단 후문 등에 있었다. 또한 군부대 내의 생활용품과 건물유지, 보수 등을 위해 군인들이 주로 신시장을 많이 이용했다. 신시장에서 30년 이상 영업을 했던 상인들 중에는 36사단 주둔당시 군부대내의 건물보수와 수리 등을 위해 중대급 부대에 매월 격별유지비가 지급 되었다. 각 예하부대의 인사계, 군수장교 등이 수시로 물건구입을 위해 신시장등에서 전기재료, 철물재료, 도배, 장판재료, 스레트 등을 구입했다. 때로는 외상장부를 기재하면서 활발한 거래를 했다고 기억하는 분들도 남아 있다.

36사단, 현 50사단 123연대 정문

구시장일대의 여관, 식당, 안동역. 운흥동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는 외박, 외출, 휴가, 면회, 출장 등으로 36사단 군 장병들을 늘 볼 수 있었다. 기차역 TMO부근과 역사 대합실 인근에는 36사단 헌병들이 짚차를 타고 내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검문검색을 하던 모습들을 안동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1955년부터 27년 동안 안동의 역사와 함께한 36사단은 송현동 군부대 근처에 있었던 아리랑주점의 추억, 버스터미널 부근 학다방, 포진리 유격장, 호암마을 송야천 냇가의 추억과 애환을 남긴 채 1982년 강원도로 이전하면서 안동과의 인연이 다하게 된다.

박태규 회장은 36사단이 사라진 것에 대해 상당히 아쉬워했다. 36사단 안동주둔 시절에는 1만 여명의 병력이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군 장병들이 외출, 외박, 휴가, 면회 시 군인들이 안동시내에서 밥도 사먹고, 영화도 보고, 선물을 사는 등 안동서민경제 활성화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에는 가게만 있으면 무슨 장사를 해도 다 잘 되었을 정도로 안동경제가 호황을 누렸던 시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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