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매요, 장보러 나오셨니껴"
72년 안동 중앙시시장의 변천사
"아지매요, 장보러 나오셨니껴"
72년 안동 중앙시시장의 변천사
  • 권달우(안동인터넷뉴스 기자)
  • 승인 2017.11.2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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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12)

▲짭짤하게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는 안동중앙신시장의 명물이다. 중앙신시장에 들어서면 한 손씩 포개 놓은 고등어가 어물전 좌판에 가지런히 깔려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통나무를 잘라 만든 둥근 도마 위에 고등어를 올리고, 뭉텅한 칼로 머리와 꼬리를 자르며 손질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사진출처-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안동의 모습>

"아지매요, 장보러 나오셨니껴"

72년 안동 중앙시시장의 변천사

서민들의 희로애락과 정이 서린 장터 이야기

시장에는 다양한 냄새가 있다. 부침개를 굽는 전집의 기름냄새, 좌판에 깔린 고등어 비린내, 멸치국물에 손국수가 익어가는 냄새, 깨를 볶아 기름을 짜는 방앗간 꼬신내, 신선한 채소에 묻은 젖은 흙냄새, 쉴 새 없이 물건을 나르는 짐꾼의 시큼한 땀내와 소형 오토바이가 내뿜는 매캐한 배기가스 냄새. 수많은 냄새들이 뒤섞여 시장의 냄새를 만든다.

이러한 냄새들은 주린 배를 채워주는 맛난 음식이 되기도 하고,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학비가 되기도 한다. 전통시장은 서민들의 삶과 바로 맞닿아 있는 장소이자 공간이다. 개항기 이후 우리나라의 전통시장은 단순히 재화의 거래가 이뤄지는 공간을 넘어 농촌사회의 정보교환의 장이면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번 회차에선 안동에서 가장 오래된 상설시장인 중앙신시장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호황기를 누렸던 70~80년대 장터의 모습과 추억으로 남아 있는 옛 건물의 흔적들, 시장의 시대적 변천사, 그리고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그들의 삶의 모습까지도 담아본다. <편집자 주>

▲중앙신시장은 올해로 72년째 열리고 있는 안동시 최대 상설시장이다. 1974년 시장 내 장옥이 지어진 이래, 2000년대 들어 바닥 시멘트 포장 등 시설현대화가 이뤄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사진은 비가림 시설인 아케이드가 설치된 2003년 안동성소병원에서 바로 본 중앙신시장의 모습이다. 사진 가운데 보이는 검은색 지붕 아래가 중앙신시장이다. <사진제공 - 김상진 전 중앙신시장상인회장>

안동 중앙신시장은 1946년 7월 경상북도로부터 상설재래시장으로 개설 승인을 받았다. 당시 안동시 옥야동(沃野洞) 285번지에 대부분 노점 형태로 장이 들어선 이래 72년째 열리고 있는 안동의 최대 전통시장이다. 지금은 부지 면적 16,600㎡, 건축 면적 18,040㎡ 규모로 커졌다.

1지구 포목점에는 시장 창설 때부터 지금까지 전통한복과 혼수용품이 판매되고 있다. 안동시민들 사이에선 정식 명칭으로 쓰이는 '중앙신시장' 보다, '신시장'으로 더 잘 통한다.

안동에는 풍산시장(1917)·안동구시장(1946)·중앙신시장(1946)·구담시장(1962)·용상시장(1976)·서부시장(1980) 총 6개 전통시장이 있다. 이중 중앙신시장은 상설시장으로서의 기능을 비롯해 시장 규모, 입지 조건(시내) 등 타시장에 비해 확연한 우위를 보인다.

50년대 한국전쟁, 80년대 경제개발계획기, 90년대 개방화시대를 넘어 2000년대에는 시설현대화를 추진해 원형 지붕을 얹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 313개 점포가 상설 운영 중이며, 2일과 7일에 정기 5일장이 선다. 시장 전체가 9개 지구로 나눠져, 지구별로 동일 업종이 포진돼 영업을 하고 있다. 안동간고등어를 비롯해 문어, 상어 등 제수용품으로 쓰이는 어물이 대표적인 판매 상품이다.

▲1960년대 안동장날(2·5일)이면 장터 난전에선 갓을 전문으로 수리하는 갓전이 열렸다. 당시만 해도 어르신들은 집안 대소사나 중요한 만남이 있을 때 두루마기를 걸치고 갓을 썼다고 한다. 갓은 머리를 덮는 부분인 모자와 얼굴을 가리는 차양부분인 양태로 이뤄지는데, 모자와 양태의 이음새 부분이 잘 떨어져 장날 시장에 나와 갓 수리를 맡기곤 했다. 70년대 의복이 대부분 현대화 되면서 시장에서 갓전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사진출처-안동시 승격 50주년 기념 화보집 '안동의 어제와 오늘'>

안동 중앙신시장은 6.25 전쟁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옥야동 일대에 노점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서 시장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953년 당시 시장에는 전쟁으로 오갈 데가 없어진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양철지붕을 얹어 만든 판자집 형태의 하꼬방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상점 대부분이 먹거리와 생필품을 팔았었다.

1950년대 후반 소규모 점포들이 비좁은 건물 내에 좀 더 많은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땅 밑으로 구덩이를 깊게 파서 채소 등 식료품을 저장해 두었다고 한다. 1960년대 들어서 신식 콘크리트건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안동 북부지역에서 생산되는 고추를 취급하는 상회가 들어서 시장이 번성했다.

1960년대에는 '시골에서 고추를 한 근 짊어지고 신시장에 나오면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도 돈이 남았다'고 했다.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 신시장에서 장사를 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등겨 한 가마니로 장사 시작해 자수성가

중앙신시장 유곡상회 김주년 옹의 인생유정

가게 앞마당 선뜻 내주고, 건물 계약금 빌려주는 장터 인심

▲중앙신시장과 반세기를 함께 해 온 곡물판매점 유성상회. 1960년대부터 쓰였던 나무문과 추저울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곡식으로 가득 찼던 곳간에는 이제 먼지만 가득하다. 유성상회 김주년 씨는 당시 시장사람들의 후덕한 인심과 도움 덕에 무일푼으로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젊은 패기 하나로 가게를 연지 어느새 50년. 이젠 백발이 성성해진 노인이 돼 손님의 발길이 끊긴 곡물상을 쓸쓸히 지키고 있다.

중앙신시장에서 잡곡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김주년씨(유성상회)는 올해 86세다. 1967년 신시장 장옥에서 등겨 한 가마니로 장사를 첫 시작해 올해로 50년째 시장을 지키고 있는 신시장 터줏대감이다. 젊은 시절 주로 충북 제천과 단양 지역에서 생산된 콩을 매입해 안동과 예천지역을 자전거로 돌며 팔았다.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가 고향인 그는 전쟁의 막바지인 1952년 열아홉의 나이에 육군 제주도 제1훈련소에 자진 입대했고, 5년간의 하사관 생활을 마치고 1957년 전역했다.

유씨는 "먹을 것이 너무나도 없어, 삼시세끼라도 해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지. 그땐 다들 그랬어. 나라가 군인들은 굶기지 않으니 말이야"라고 했다.

▲김주년 씨가 평생 기록해 둔 자신의 일기를 펼쳐 보이며, 장사를 처음 시작했던 당시의 시장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인심이 넉넉한 때여서 가게 매입금을 차용증으로 먼저 끊고, 장사를 하며 차차 돈을 벌어 수년에 걸쳐 갚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유씨는 "대안극장 소유주였던 남춘섭 씨가 가게 주인이었는데, '중도금을 차용증으로 쓰는 사람은 있어도, 계약금을 차용증으로 주는 사람은 자네가 처음일세.'라며 인심 좋게 가게를 얻어줬지"라고 회고했다. 당시 시장은 젊은이의 선한 얼굴과 다부진 성격만을 보고 가게를 내어주는 인심이 통했다. 

가장 먼저 금성계기사에서 나온 추(錘)저울을 장만했다. 없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겨우 값을 치렀다. 곡식의 무게를 다는 저울은 가게에서 가장 값비싼 장비였다.

▲60년대 당시 금성계기사에서 나온 추저울. 50년 세월을 무색케 하듯 곡식의 무게를 다는 저울추의 눈금은 여전히 정확하다.

유씨에 따르면, 당시 법석골 입구에 권기대 씨가 운영하던 대창정미소가 있었다. 유씨는 대창정미소에서 왕겨를 받아와 신시장에서 내다 팔다가, 얼마 후 가마니장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당시 정미 1가마가 4천원, 보리쌀 1가마가 2천500원 하던 때였다. 연탄은 한 장 10원쯤 했다.

6평 남짓한 점포에서 장사도 하고 살림도 살아야 하는 마당에 가마니를 쌓아 둘 장소가 없어 애를 태웠는데, 딱한 사정을 안 옆집 양품점에서 "내 집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장사하라"며 제 앞마당을 선뜻 내어주었다 했다.

감사하는 마음에 모아둔 양곡을 조금 담아 사례라도 할라치면, "이웃끼리 이러는 거 아니다"라며 손사레를 치며 마다했다고 했다.

당시 신시장 내 식료품으로 제일 돈을 많이 번 문일슈퍼 문병수 사장이 당시 신시장번영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일직 용각이 고향이던 상인이 서기를 봤다고 했다.

문 회장은 시장 내 지저분한 화장실을 직접 청소할 정도로 부지런했고, 시장발전에도 헌신을 바쳤다고 유씨는 회상했다. 신시장번영회는 현재 중앙신시장상인회의 전신이다.

▲안동시청 기록물관리실 DB구축관보관 자료실에서 발견한 1975년 당시 중앙신시장(옥야시장) 면적도이다. 당시 장옥 건물이 완공된 때로, 안동시가 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점포 매각을 추진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매각 건물(점포)은 총 586칸으로 당시 건물 219칸이 아직 매각이 안 된 시기다. 면적도에는 각 칸마다 점포주, 평수, 매각금액 등이 적혀 있다.<자료제공-안동시>

유성상회는 국산 곡식만을 취급한다. 아침이 되면 예천 용궁산 현미와 찹쌀, 안동 예안산 청녹두와 차좁쌀, 진도산 찰흑미 등 수십 가지의 국내산 곡식들을 빨간 플라스틱 대야에 수북이 담아 내놓는다. 그러다 날이 어둑해지면 다시 곳간에 넣고, 함석 철판이 붙은 나무문을 가게 외벽으로 둘러 문을 잠근다. 이런 일상은 50년째 반복됐다. 현재 앞집에는 동종 업종인 대신쌀상회가 있다. 거의 같은 종류의 곡식을 팔고 있지만, 경쟁업체라기보다 긴 세월을 함께 한 동반자와도 같은 존재로 사이가 돈독하다.

70년대는 유기상의 호황기

'놋쇠'에서 '스뎅'으로..그릇의 변천사

▲스테인리스가 대중화 된 1970년대에 앞서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대도시를 중심으로 스테인리스 공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스테인리스를 프레스기계로 찍어 내는 제작방식이 아닌, 스테인리스 강판을 바퀴가 빠르게 돌아가는 선반에 밀착시켜 도자기를 빗 듯 그릇을 만들었다. 사진은 중앙신시장 내 덕신상회 박덕환 씨가 60년대 초반 대구의 한 그릇 공장에서 스테인리스를 가공하고 있는 모습이다.<사진제공-덕신상회 박근배>

일본식 표현으로 소위 '스뎅'이라 불리는 '스테인리스강'은 70년대 우리의 전통 그릇 문화를 확 바꿔놓았다. 스테인리스는 철에 크롬을 결합한 내식용 강(鋼)을 일컫는데, 철에 비해 단단하면서 녹이 덜 슬고 가벼웠다. 원래 총신으로 개발됐던 소재라고 한다.

1975년 당시 각 가정에서 사용되던 무거운 놋쇠 그릇 대부분이 스테인리스 그릇으로 대체됐다. 제기, 수저, 앉은뱅이소반 등의 주방용품들도 시기의 차이를 두고 스테인리스 소재로 속속 출시돼 나왔다. 이 시기 놋쇠로 된 식기와 제기, 부서진 풍물(징), 포탄, 구리선 등의 고철이 각 가정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해 중앙신시장에는 밤낮으로 '스뎅 그릇'을 찾는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당시 시장 내 유기상회는 1지구 내 금강유기, 오유기상회, 덕신상회 총 3곳이었다.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아 현재까지 덕신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박근배(53) 씨는 당시 유기업계의 호황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유기(鍮器):놋그릇

"놋쇠 한 관(3.75㎏)을 5천원에 쳐서 스테인리스 그릇으로 죄다 바꿔 팔았어요. 숟가락, 식기, 제기, 대야가 모두 가벼운 스테인리스 소재로 나오니까 물건을 떼 오기 바쁘게 팔렸지요. 당시에는 시골에서 할머니들이 무거운 놋쇠 그릇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와 영업전부터 가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유기상의 전성기는 80년대 중반까지 10년간 이어졌습니다"

▲추억의 양철도시락. 그릇의 소재가 놋쇠에서 스테인리스로 넘어가는 시기 양철이 반짝 유행한 적이 있다. 가벼운데다 열전도율도 높아 도시락통으로 많이 사용됐다. 사진 속 도시락통은 덕신상회에서 8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지금도 병원에선 알콜솜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 쓰기 위해 가끔씩 찾는 이가 있다고 한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근배 씨는 자전거를 타고 시골로 배달을 다니기 바빴다고 한다. 전화로 배달 주문이 쇄도해 온 가족이 장사에 매달렸었다. 멀리는 무릉리에서도 배달 주문이 들어와, 1시간 이상을 자전거로 달려 물건을 전하곤 했다. 70~80년대 안동 군지역과 임동·영양·청송·진보 등지에는 소위 '장차'라고 하는 운송차량이 다녔다. 장이 열리는 바로 전날 지역 소매점에 미리 물건을 전해 주는 5톤 트럭을 말하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화물택배차량 개념이다. 장차는 90년대 초반에 사라졌다고 한다.

"7~8㎏들이 제기세트 10개를 싣고 하루 종일 비포장길을 달려 배달했죠. 자전거에 물건을 실으면 앞바퀴가 달랑 들렸을 정도였어요. 가게에서 물건만 보고 집까지 배달해 달라는 손님들이 많았어요. 대부분 부피가 큰 물건들이었는데, 꼬맹이가 제 몸집보다 두세 배 큰 짐을 자전거에 싣고 가는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겁니다.(웃음)"

당시에는 무조건 현찰 거래였다.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쉴 새 없이 지폐를 구겨 넣었다. 밤이 되면 하루 동안 벌었던 돈을 새기도 바빴지만, 온 가족이 밤새도록 수저세트를 포장하는 작업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에 항상 잠이 부족했다. 당시 안동에는 결혼식을 찾은 내빈들에게 스테인리스 수저세트를 답례품으로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기본 500개에서 2천개씩 주문이 들어오는데, 일일이 비닐로 싸서 종이상자에 담는 작업도 큰 일거리 중 하나였다. 이러한 유기상의 호황기 덕분에 덕신상회 가족들은 사글세로 있던 가게를 매입하고, 몇 년 뒤엔 번듯한 집도 한 채 샀다.

▲덕신상회에서 70년대까지 팔았던 워낭(소의 목에 메다는 방울). 40년 이상 지난 물건이지만 누런 황동빛과 청아하게 울리는 소리가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호황은 계속되지 않았다. 유기상회는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쇠퇴기를 맞는다. 대가족 사회에서 핵가족화, 1인 가구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제사문화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덩달아 제기의 판매량도 급감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가벼운 나무로 만들어진 목(木)제기세트가 유행하면서 그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목기는 주로 전라 지방에서 사용했었는데, 먹거리가 풍부한 호남에선 많은 수의 그릇에 다양한 음식을 조금씩 담아 내놓기 때문에 그릇의 바닥 면적이 좁고 나무와 같이 가벼운 소재라야 한다.

이에 반해 경상지역에선 소수의 음식을 푸짐하게 담아 올리기 때문에 무겁고 그릇의 직경이 큰 철기(스테인리스)가 알맞다. 하지만 최근 목기를 대량 생산·판매하는 회사들이 TV홈쇼핑을 통해 대대적으로 광고하면서, 경상도 지방에서도 철기 대신 목기를 사용하는 가정이 많아졌다.

추억 속 포목상가 전성기

결혼문화의 변화로 쇠퇴길

당시 혼수품 1호는 부라더 미싱

▲한때 호황기를 누렸던 중앙신시장 포목상점 거리에는 폐점한 상점들의 옛 간판이 군데군데 걸려있다.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 국번은 한자릿 수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긴 포목상점 거리에는 청년창업 상점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중앙신시장 1지구 맞은편에 위치한 포목전문점 경신상회는 시장 내 다른 점포의 위치를 설명할 때마다 등장하는 이정표이자, 시장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경신상회 바로 앞에 떡 방앗간", "경신상회 맞은편 골목 들어서자마자 세 번째 집". 그야말로 '경신상회 맞은편' 포목상가 지구는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대성황이었다. 지금은 결혼문화가 바뀌어 혼사에 필요한 모든 품목을 웨딩업체에 맡기는 추세지만, 당시만 해도 결혼을 앞둔 양쪽 집안에선 신랑·신부를 포함해 그들의 가족들이 입을 한복과 예단, 이불 등 혼수품 일체를 중앙신시장 포목점 골목에서 구입했다. 일감을 하나 따내면 양가 집안의 혼수 일체를 도맡아 제작·판매했기 때문에 거래금액이 상당했다. 더군다나 한번 연을 맺게 되면, 그 집안의 모든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찾는 단골집이 됐다. 그러면서 해당 집안에 혼기가 가까워진 젊은 규수가 있는지, 경제수준과 집안내력은 어떤지 등 시시콜콜한 생활 사정을 두루 파악해, 또 다른 단골손님 집안의 비슷한 상대와 혼사를 맺어주는 중신 역할도 꽤나 중요한 영업(?)이었다. 이러한 포목상들의 중매로 가정을 이룬 부부도 안동에 더러 있다고 한다. 한복과 예단물품을 취급하던 우덕상회, 계림주단, 성림주단, 제일포목상회 등 포목점은 혼사를 앞둔 사돈 간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골목은 결혼철인 봄·가을에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1950년대 당시 포목은 남성들만이 취급·판매하던 물품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70~80년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여성들이 운영하게 됐다.

▲1954년 안동중앙신시장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는 안동포목상연합회 회원들이 안동 하회마을 옥연정사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이다. 시장 내 원로 상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포목상연합회원의 수는 50명을 넘었다고 했다. 50년대에서 90년대까지 결혼을 앞둔 양쪽 집안에선 혼수품 일체를 중앙신시장 포목점 골목에서 구입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당시 포목은 남성들만이 취급하던 물품이었는데, 60년이 지난 현재 포목상점을 대부분 여성들이 운영하는 것과 상당히 대조적이다.<사진제공 - 경북기록문화연구원>

한때 호황을 누렸던 포목상점 거리는 현재 빛바랜 유물로 전락했다. 오늘날 결혼인구의 감소와 혼례문화의 변화로 예전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지난해부터 정부예산이 투입돼 청년창업몰이 운영되고 있지만, 예전 호황기의 추억을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마지막 남은 계림가구점도 현재 점포를 임대로 내놓고 남은 물건을 정리 중이다. 몇 남지 않은 포목점들도 생명력을 잃고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탓이라기보다는, 시대가 원하는 전통시장으로 진화되어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 봐야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재봉틀은 1960년대 중반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그 효시는 1965년도에 첫 출시된 부라더미싱이다. 1970년대 "꽃님이 시집갈 때 부라더미싱"이란 광고문구가 대유행 했었다. 재봉틀은 당시 빼놓을 수 없는 혼수품 중 하나였다.

본격적인 공업화가 이뤄지기 전인 60~70년대만 해도 미싱은 혼수물품 목록 1번이었다. 아이들에게 입힐 옷을 직접 재봉하고, 커튼과 앞치마 정도는 손수 만들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일등 신붓감으로 인정받았다. 천 등을 바느질하는 기계를 '미싱'이라고 한다. 영어인 '소잉 머신'이 일본어를 거쳐 우리말로 오는 과정에서 '미싱'으로 바뀐 뒤 굳어졌다. 순 우리말로 '재봉틀'이라고도 한다. 경상도 지방에선 아예 팍 줄여 '틀'이라 불렀다. 1965년 국산 브랜드인 부라더 미싱이 출시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부라더 미싱은 부산정기 주식회사가 일본의 부라더 공업과 합작하여 생산한 재봉틀이었다. '꽃님이 시집갈 때 부라더 미싱~'은 1970년대 유행했던 광고 카피로,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60~70년대만 하더라도 집집마다 한 대씩 보유하고 있을 정도도 대인기였다.

현재 태평양약국에서 신시장마트로 이어지는 대안로는 60~70년 당시 신시장 일번지라 불릴 정도로 시장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드레스미싱기(브랜드)를 취급하던 경안미싱은 1968년에 생겼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준성 씨가 20년간 운영하다 1989년 즈음해 폐업했다고 한다. 80년대 미싱 한 대 가격은 평균 3만5천원 정도로, 공무원 봉급이 8만원쯤 하던 것과 비교하면 꽤나 비싼 가격이었다 1982년도에는 신규호 씨가 사장둑에서 부라더미싱점을 차렸고, 2000년에 대안로로 이전했다.

▲현대화사업이 추진되기 전인 1997년 중앙신시장의 북문 모습. 2000년대 들어서 철제 빔을 기둥으로 세워 천장에 비가림 시설을 설치했다. 중앙신시장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은 시장 중앙통로는 비만 오면 바닥에 빗물이 고여 걸어다니기 힘이 들었다고 한다. <사진제공 - 김상진 전 중앙신시장상인회장>

당시 우리 정부는 여성들의 가사능력을 키우기 위한 정책 일환으로 여중·여고 학생들에게 재봉틀 사용법을 가르쳤는데, 이때 지역의 각 학교에 미싱이 대량으로 납품돼 큰돈을 벌었다. 현재 부라더미싱은 신시장 인근에 점포를 옮겨 영업을 하고 있다. 중앙신시장상인회 초대 회장을 지낸 김상진 씨가 운영한다. 김 전 회장은 "당시 결혼을 앞둔 여성들이 챙겨야 할 혼수품 중 첫 번째가 미싱이었어요. 당시에도 꽤 비싼 가격에 팔렸는데, 지금 미싱 한 대 가격이 150만원 정도라고 계산하면 대략 어느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최근에는 옷감을 구해 입을 옷을 직접 만드는 DIY(DO IT YOURSELF) 열풍이 또다시 불고 있어 매출이 다소 올르는 추세입니다."라고 말했다. 말대로 옷감을 구해 입을 옷을 직접 만드는 DIY(DO IT YOURSELF) 열풍이 최근 또다시 불고 있어, 미싱이 옛 전성기를 회복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은다.

현재 중앙신시장 북문 입구 우측에는 (현재는 사라진)과거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3층 건물이 있었다. 1층에는 음식점인 신창식당이 있었고, 좌측에는 77당구장이 있었다. 지금의 안동제유소 길 건너편에는 물레방아 음악다방과 길 다방이 있었다. 이들 상가는 모두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져 갔다. 경신포목상회와 지구당은 아직도 영업 중이며, 인근 안동약방, 영제의원, 명공사 시계점 등은 추억의 상호로만 남아있다. 당시 시장 상인들은 대부분 농협과 거래했다. 안동농협 광석동지점은 당시 태평양약국 4거리에 있었다.

건어물 도·소매로 거상된 우덕상회 천태진 씨

종자돈 100만원으로 마산에서 멸치 떼와 첫 장사

▲중앙신시장에서 건어물상은 운영하던 젊은 남자들이 창고에 모여 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이다. 70년대 시장 내 건어물 전문점은 50곳이 넘었다. 아침 장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젊은 상인들이 건어물 창고에 삼삼오오 모여 장기를 두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사진제공 - 김동욱(풍산상회)>

안동은 내륙임에도 수산물의 소비가 많은 곳이다. 전국에서 문어의 소비량이 가장 많고, 지역의 대표 특산물은 다름 아닌 간고등어이다. 양반의 도시답게 어물을 많이 사용하는 제사문화가 아직 잔존해 있기 때문인데, 단순히 제수음식을 넘어 관혼상제를 비롯해 손님 접대 등에도 다양하게 쓰인다. 덩달아 건어물의 소비량도 유독 많다. 70년대 중앙신시장은 건어물 상회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장옥이 지어졌던 1970년대 초반 시장 내 건어물거리에는 상점마다 문전성시를 이뤘다. 장날이면 거리에 좌판을 펴고 마른 명태나 멸치, 새우 등을 파는 상인들도 상당수였다.

▲선거철만 되면 안동중앙신시장 앞 경동로는 각 후보들의 유세전으로 뜨거워졌다. 선거를 앞둔 각 후보들은 서민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장날 마다 화랑로 양쪽으로 유세차량을 세워놓고 자신을 알리기 바빴다. 1995년 초대 민선 시장을 뽑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6.27)를 앞두고 각 후보들의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지고 있다. 현재 공영주차장과 시장을 잇는 육교가 생기기 전의 거리 모습이다.<사진출처 - 안동시 승격 50주년 기념 화보집 안동의 어제와 오늘>

중앙신시장에서 건어물점을 42년째 운영하고 있는 천태진 씨(우덕상회 대표)는 시장 내 원로 상인이다. 1975년 대구은행에서 대출 받은 돈 100만원을 종자돈 삼아 장사를 첫 시작해, 당시 마산 어시장에서 멸치를 싼 값에 사와 이문을 조금 붙여서 팔았다. 늦은 밤 구마고속도로를 달려 마산에서 물건을 싣고 안동에 도착하면 이른 새벽이 됐다. 그때부터 멸치를 펴고 장사를 시작하면 오전이 가기 전에 물건이 동났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홉 평짜리 장옥 두 칸을 당시 800만원에 매입해 지금껏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장옥이 지어진 70년대 초반만 해도 건어물상점이 50개가 넘었다. 건어물 상회 대표들끼리 계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야유회를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관광버스 2대를 빌려야 할 정도로 인원이 많았다. 현재 이 거리에는 10여개 점포만이 남아있다.

"건어물상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멸치를 최고 상품으로 쳤습니다. 하지만 3년쯤 지나선 쥐포가 대유행을 했는데, 대구 서문시장에서 1상자를 가져와 신시장에서 맛을 뵀더니 가져다 놓기 바쁘게 불티나게 팔렸어요. 그 뒤로 삼천포 시장에서 1톤 화물트럭으로 도매업을 했고, 구시장과 신시장 건어물점에 납품도 많이 했죠. 예천과 의성 등지에서도 쥐포를 구입하기 위해 신시장을 찾는 상인들이 많았어요. 봉화 춘향까지 직접 용달차로 배달을 간 적도 있어요. 1978년부터 1988년까지는 그야말로 쥐포 전성시대였어요. 그때 돈도 엄청 벌었죠. 그 이후에는 명태를 주로 팔았어요. 80~90년대에는 직접 차를 몰고 묵호와 주문진 등지에서 건명태를 가져와 도매로 팔았어요. 요즘은 영덕·강구에서 명태를 공수해 옵니다"

▲중앙신시장에서 42년째 건어물상회를 운영하는 천태진(좌)씨와 최근 청년창업지원사업을 통해 포목상거리에 국수전문점을 차린 청년상인 김경화(우)씨. 천씨는 얼마전 문을 연 청년점포 10곳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청년상인들로 인해 중앙신시장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활짝 웃는 그들의 미소에서 중앙신시장의 밝은 미래를 엿본다.

1997년 한국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중앙신시장은 본격적인 하향길을 걷는다. 2개의 댐(안동댐·임하댐)이 생긴 이후 꾸준하게 진행된 인구감소현상, 농업의 기계화, 대형마트의 입점, 경기침체의 장기화 등 복합적인 이유로 중앙신시장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은 점차 줄어들었다. 전통시장은 이제 오랜 단골 고객들만이 찾는 추억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 단위로 전통시장 살리기 사업을 추진 중이다. 중앙신시장도 시대적 흐름과 더불어 제2의 번영기를 위한 화려한 변신을 준비 중이다. 2016년 청년창업사업으로 10개 점포가 1지구 포목상점 내에 입점했고, 2018년에는 20개 점포가 추가로 문을 열 예정이다. 시장 거리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형형색색의 다양한 조형물도 설치할 계획이다.

천 대표는 "예전과 달리 썰렁하게 변해버린 시장의 거리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중앙신시장이 예전처럼 시끌벅적하게 손님들로 붐비고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되찾기를 바라봅니다. 최근 청년상인들이 경영하는 창업점포가 생겨나기 시작해 기대가 큽니다. 이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신시장 상권 활성화에 앞장서 주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 "2일 7일 안동장은 이웃사촌 잔칫날

어물전서 채소전서 웃으면서 인사하네

아이구 아지매요 장에 왔니껴

(집안 마카 괜찮은껴 마카 펴느이껴)

점심 나절 법석골서 다시 만난 아지매

아이구 아지매요 점심은 자셨니껴

(안동국시 한 그릇 할라니껴 찜닭 한 마리 할라니껴)" ~

안동가수 안동희와 전우정이 안동장날을 소재로 부른 노래 '껴껴껴'의 한 구절이다. 장터에서 만난 이웃끼리 구수한 사투리로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따뜻하고 정이 서려있다. 서민들과 함께 시대의 변화를 묵묵히 견뎌 온 중앙신시장이 최근 변화를 앞두고 있다. 젊은 상인들의 속속 들어와 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고, 시장 내 시설도 알록달록 색칠을 해 새 옷을 입었다. 지금은 썰렁해진 시장 거리가 정겨운 노랫말처럼 시끌벅적 정이 넘치는 공간으로 재탄생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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