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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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5.2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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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그 뜻을 거역하지 않는 것
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그 뜻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인들은 의복이나 음식, 거처하는 것에 관심이 많으므로 어머니를 섬기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유의해야만 효성스럽게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어버이날 아침에 고향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향집 전화가 아니라 어머니의 휴대전화로 신호를 보냈다. 약간 코맹맹이 소리가 들려서 혹시 고뿔에 걸리신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어머니는 한사코 괜찮다고 했다. 올해도 꽃을 달아드리지 못하는 불효자의 심정을 이런저런 문안으로 대신했다. 외지로 유학을 나온 이후 이십여 년 동안 어버이날은 ‘조조(早朝) 통화’를 하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의 통화라고 해서 전화 요금이 싼 것은 아니고, 오히려 자식의 마음씨가 싸게 느껴지시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런데 저녁 늦게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약주 한 잔 걸치신 목소리에 기분도 좋으신 듯했다. 아버지는 그날의 자랑을 늘어 놓으셨다.  맏이 내외한테 용돈도 받고 손자들이 달아주는 꽃도 달고 이웃 사람들이랑 읍내 정육점에 가서 소고기도 맛있게 드셨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이내 서운한 마음을 보이셨다. 왜 어버이날에 전화도 한 통 안 해주냐고 다그치셨다. 말문이 막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버이날에 두 분 중 한 분과 통화하면 으레 두 분과 통화한 거 다름없다고 생각해왔다. 또 예전부터 전화 요금 많이 나오니 바꿔주지 않아도 된다고 거절하는 목소리도 자주 들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연세 드신 아버지의 마음이 여려지고 자식에 대한 감성도 커졌다. 또 어머니는 휴대전화가 울려서 객지의 자식과 통화를 했는데, 아버지는 하루 종일 기다려도 휴대전화가 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푸념 같은 넋두리, “먼 친적보다 이웃이 낫다.” 분명 많이 서운하셨던 거다. 아버지에게는 이미 자식의 마음이 싸구려가 돼 버렸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에 휘말려 경상북도 포항 부근의 ‘장기’로 유배당했다. 그 후 18년간 아내와 자식들과 떨어져 살며 서신을 주고받았다.

위의 인용구는 1802년 12월 22일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여기서 다산은 “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그 뜻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하고 나서 곧 바로 “어머니를 섬기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유의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 두 문장을 곰곰이 다시 읽어보면 이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너희는 내 뜻을 거역하지 말고 어머니를 잘 모셔라.” 즉 앞 문장은 뒤 문장의 실행을 강조하기 위해 앞세운 으름장과 같다. 자신의 아내이기도 한 아들들의 어머니를 얼마나 각별히 염려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울러 다산은 어머니를 섬기는 법과 아버지를 섬기는 법을 구분하는 세심함도 보인다. 대표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의식주에 민감하다는 점을 들며, 사소한 일에 특별히 신경 쓰라고 당부한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똑같이 전화 문안도 드리지 못한 불효자가 이런 생각을 할 수나 있을까. 과연 그렇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냥 “노인”이기 전에 여자와 남자다. 다산의 당부처럼, 자식들이 사소한 일에 조금만 더 신경 쓴다면 부모는 훨씬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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