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을의 선한 선비는 그 고을의 선한 선비와 벗하네”
안동의 계(契)
“한 고을의 선한 선비는 그 고을의 선한 선비와 벗하네”
안동의 계(契)
  • 백소애(경북기록문화연구원 운영위원)
  • 승인 2017.12.24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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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14)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은 문화, 풍속, 인물, 장소와 지역사를 통해 우리의 생활문화사를 다루고 있다. 이번에는 상부상조의 민간 협동조직인 ‘계(契)’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계’의 명칭은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최초의 계는 고려 의종 때 문관과 무관 집안의 자제들로 구성된 문무계(文武契), 벼슬에서 물러난 70세 이상의 원로대신들로 조직된 기로회(耆老會), 동갑계(同甲契)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 선비들의 친목계인 유계(儒契), 문도들이 중심이 된 학계(學契), 정자와 관련된 인물을 추모하고 그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자계(亭子契) 등이 활발히 활동 한다. 또한 종친회에서 운영하는 종중계(宗中契) 등이 있고, 동년자의 동갑계, 동갑 노인의 친목을 위한 노인계, 동성자의 화수계(花樹契) 등이 있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친목을 다지는 친목계, 낙찰자가 곗돈을 타고 남은 액수는 앞으로 탈 사람에게 분배하는 낙찰계, 상사(喪事)를 공동 부조하기 위해 만든 상포계(喪布契), 여행이나 명품가방, 금반지 취득 등의 특별한 목적을 가진 계 등 다양하게 있으며 심지어 로또복권을 함께 구입해 당첨 시 당첨금을 분배하는 ‘로또 계’도 존재한다.

‘계(契)’는 두 사람 이상이 상호 부조 정신에 입각하여 여러 생활상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체로, 주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받거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만든 전래의 협동 조직을 말한다.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가 갖는 의미와 사회적 역할 또 우리 지역에는 어떠한 계모임이 있었고 계원들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모임을 이어왔는지 2017 근대기행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 2006년에 건립한 우향사(왼쪽)와 2004년에 건립한 우향각(오른쪽).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계회인 우향계 창립계원 13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봄, 춘향제가 봉양되고 있다. 안동시 성곡동 안동민속박물관 야외에 자리하고 있다.

우향계(友鄕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계모임

우리 고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전승되어온 우향계(友鄕契, 1478)을 비롯해 애일당구노회(愛日堂九老會, 1533년), 임계계회(壬癸契會, 1613년) 등 역사 깊은 전통 계가 맺어져 내려왔다.

1478년(성종 9)에 결성된 ‘우향계’는 안동지역 전통 사회의 대표적인 계다. 이 계는 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이원(李原, 고성이씨)의 아들 이증(李增)이 안동에 낙향하여 안동권씨 3명(권자겸, 권곤, 권숙형), 흥해배씨 4명(배효건, 배효눌, 배주, 배정), 영남남씨 4명(남경신, 남치공, 남치정, 남경인), 안강노씨 1명(노맹신)을 조직해 계원 13명이 계첩을 하나씩 나누어 가진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당시 조정의 원로이자 문장가인 서거정이 장편의 7언 고시를 지어 축하하였다.

서로에게 덕업을 권하고 친목도모와 풍화를 밝히기 위해 결성된 이 모임의 이름은 ‘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일향지선사 사우일향지선사; 한 고을의 선한 선비는 그 고을의 선한 선비와 벗한다)’는 《맹자(孟子)》의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우향계는 뒷날 후손들에 의하여 진솔회, 세호계, 수호계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도 하였으나, 다시 당초의 이름을 회복해 지금까지도 계회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1478년(성종 9년)에 시작되어 1903년(광무 7년)까지 425년 동안 이어진 우향계의 기록을 담고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7호 ‘우향계안’이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잠시 중단되었던 우향계는 1950년대 후반에 부활돼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안동시 성곡동 안동민속박물관 야외에 자리한 우향사(2006년 준공)에서 매년 봄 춘향제를 봉양하고 있으며 5개 문중이 매년 돌아가면서 윤번제로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아홉의 노인이 애일당에 모이다,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

▲ 애일당구로회첩愛日堂九老會帖』(보물 1202호) 애일당구로회'의 초기 관련된 책으로 1569년 벽오 이문량이 제작했다. 초기 구로회 회원의 이름과 나이 관직과 '애일당속구로회' 취지의 글과 회원의 명단이 적혀있다. (사진:농암종택)

농암 이현보(1467~1555)선생이 1519년 안동부사로 봉직했을 때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80세 이상의 노인을 청사마당에 초청해 안동의 옛 이름인 화산(花山)에서 따온 ‘화산양로연’을 베풀었다. 이후 고향에서 선생의 아버지와 동년배인 80세 이상 노인을 초청했는데 마침 그 숫자가 아홉이고 애일당에 모였기에 ‘애일당구로회’라 이름 지었다.

이 구로회는 수백 년을 이어오는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애일당구로회는 1533년부터 1547년까지 14년을 농암이 주관했다. 1547년 농암 81세, 그해부터는 아들 이문량, 이중량 등이 계승했다. ‘애일당구로회를 잇는다’는 뜻으로 ‘애일당속구로회’라 하여 11년을 계속했다. 이 모임은 그 후 1569년까지 36년간은 매년 9인 모임으로 이어졌다

농암가문의 구로회(九老會) 전통은 1940년대까지 이어오다가 중단, 2005년 와룡 오천군자리에서 ‘애일당구로회’를 재현하고 있다. 450년 이어왔을 당시 1902년의 모임에선 회원수가 37명이나 되고 나이 합계가 2,561세에 이르렀다고 한다. 구로회는 모임 때마다 특이하게 나이 합계를 기록해놓았다고 한다.

광흥사에서 가진 계모임, 임계계회(壬癸契會)

임계계회(壬癸契會)는 1613년(광해군5) 9월에 안동 향내에 사는 임자생(壬子生), 계축생(癸丑生) 11명이 우의를 다지기 위해 만든 계회다. 참석자 11명은 권위(權暐 1552~1630), 박흡(朴洽 1552~1615), 최첩(崔 1552~?), 김윤사(金允思 1552~1622), 안담수(安聃壽 1552~1628), 하우성(河遇聖 1552~?), 손경홍(孫慶弘 1552~1635), 이호(李瑚 1553~?), 조승선(趙承先 1553~?), 허응길(許應吉 1553~?), 권행가(權行可 1553~1623)로 임자생(1560년)이 7명, 계축생(1561년)이 4명으로 계모임 당시 모두 60세를 넘겼다.

▲ 임계계회도(壬癸契會之圖) 학가산 광흥사에서 가진 임계계회를 기념하기 위해 화공이 그린 임계계회도. (사진:한국국학진흥원)

학가산 광흥사에서 가진 임계계회를 기념하기 위해 화공이 그린 임계계회도(壬癸契會之圖) 상단에는 전서체로 ‘임계계회지도’라고 표제를 적고 그 아래에 계회 모임장소인 광흥사를 그리고, 하단에는 이 계에 참석한 11명이 지은 시와 이름, 본관, 거주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1988년 길안, 임하 무진생 동갑계

시골에선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처지다. 일손이 항상 부족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길안, 임하에 사는 1928년 무진생 계원들 21명이 각각 회갑연을 하면 잔치만 한 달에 두 번 한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농사지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계산이 섰다. 유난히 단합이 잘된 무진생 계원들은 궁리 끝에 합동회갑연을 기획했다. 인당 백만 원씩 걷기로 했으나 강제성은 없었다. 형편껏 냈다. 적게는 10만원부터 많게는 100만원까지. 총 합계가 1,700여만 원. 그렇게 돈을 모아 도시락을 맞추고 답례품으로는 수건 한 장, 소주 한 병, 음료수 한 병을 준비했다.

당시 부조가 보통 5천원 혹은 만원을 하던 시절이었다. 부조 장부에는 501명(팀)이 부조를 한 것으로 적혀있다. 총 부조는 3,941,000원. 이윽고 1988년 4월 10일 길안면 복지회관에는 때깔 좋은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무진생 계원 19명의 합동회갑연이 열렸다. 두 명은 미처 참석치 못했는데 회갑 당일 버스 사고를 당한 계원과 부인이 편찮은 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갑연을 마치고 버스 사고로 입원한 심의원 할아버지를 병문안 한 후 부부 동반으로 서울구경에 온천구경에 전국을 일주했다. 간만에 호강한 것이다. 1988년 당시 무진생 동갑계의 파격적인 회갑 퍼포먼스였다. 당시 유사를 하셨던 김서동 할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되셨다.

▲ 1988년 4월 10일 길안면 복지회관에서 열린 길안, 임하 무진생 합동회갑연. 오른쪽에 치마 색깔이 다른 분은 남편이 먼저 고인이 되어 홀로 참석한 부인. “말도 마세요. 규합하는데 애를 먹었어요. 이래저래 갈그채는 일이 한정 없어요. 처음엔 두루마기 하나 맞춰 입는데도 말이 많았어요.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하고 저고리. 딱 그렇게 정해서 밀어붙였어요. 결과가 좋아서 나중에야 다들 흡족해했지만.” -故김홍대 회장

답례품은 수건 한 장에 이홉들이 소주 한 병과 음료수 한 병

무진생의 계 모임은 한동네서 나고 자라 어린 시절부터 이어왔으나 체계를 갖고 계첩을 작성한 것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1988년 이후의 일이다. 김홍대 회장이 작년에 사망하고 무진계 명단 앞에는 “亡”자만 늘어났다. 현재는 오대리의 김병희, 천지리 천병문 어르신 두 분만 생존해 계신다.

1988년 회갑연 당시 회비와 경비, 그리고 회갑연에 참석해서 부조를 한 분들 성함이 빽빽하게 적힌 장부가 지금까지도 정갈하게 보관이 되어있다. 또, 회원 각자의 고향과 가족관계, 성격과 살아온 세월까지도 기록해두었다. 이 기록은 꼼꼼하기로 두 번째 가면 서러울 김홍대 회장이 해둔 것이다. 당시 처음 합동 회갑연을 하자고 의견을 낸 분도 故김홍대 회장이다.

▲ 무진생 계원 명단. 이름 앞 ‘亡’자가 서글프다. 그마저 지금은 두 분 빼고 모두 세상을 떠났다.

“말 꺼낸 장본인이 내라. 저녁으로 집집마다 가서 둘 내외 앉혀놓고 물으니, 하니 안하니 의견이 분분해. 한 가정에 회비를 백만 원씩 내기로 했는데 그게 안 쉬웠어요. 그래서 형편에 맞게끔 냈어요. 살림살이가 궁색해서 좀 덜 낸 이도 있어요.”

돈이야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기도 하고, 오늘 없다가 내일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돈 때문에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오던 동갑계원 간에 의가 상할 것 같아 최종 결론은 ‘가정 형편껏’ 내기로 하고 진행을 했다. 장부에는 십만 원 2명, 오십만 원 2명, 백만 원 16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무진생 계모임은 위로는 어른들 공경하고 아래로는 협동, 단결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자 만들어졌다. 계원 상호간에도 음력 정월 초사흘에 두루마기에 갓 갖추고 맞절하며 덕담하는 예의도 차리고 협동도 잘됐다. 요즘으로 치면 벤치마킹하려고 다른 계모임에서도 많이들 보고 갔지만 무진생 계원처럼 잘 뭉친 경우는 본적이 없다고 한다.

이제는 길안면 노인회관에서도 높은 연령에 속한다는 할아버지들은 가장 최근의 무진생 계원 여행이 5-6년 전에 갔던 동해안이었다. 포항에 해돋이를 보러 갔었는데 당시만 해도 부부 동반해서 열 명은 넘었었다. 지나고 나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진생 계모임 때 모았던 돈으로 뜻 깊은 일을 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하신다. 무진생 장학금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촌로들이 너무 오지랖 넓나 싶어 관두었다고 한다. 후에 생각해보니 어차피 계모임 때 쓸 돈으로 합동연을 더 빛나게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었을텐데,  지역사회에 좋은 일 하나 남겼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 말이다.

그 외 계모임

안동시에 거주하는 16인의 벗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기 위해 조직된 우정계는 계를 통해 우의를 닦을 뿐만이 아니라 각 가정의 경조사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서로 살펴준다는 취지에서 계의 명칭도 ‘우정(友庭)’이라 칭했다. 창계 이후 계첩 없이 운영해오다가 2002년에 계첩을 완비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강원도 친목계인 ‘강원친목계’는 강원도 태백, 황지 등에서 안동으로 이주해온 조직한 계이다. 개중에는 탄광촌에 근무한 이력이 있는 회원도 꽤 있는데 진폐증 등의 후유증으로 부부계원 중 남자회원의 사망률이 높은 편이다. 현재 15명의 회원 중 10명이 여자회원이다.

안동, 의성, 청송, 영양, 봉화 등 경북북부지역에 거주하는 남성들 가운데 갑술(1934년)년에 태어난 이들이 모여 만든 동갑계인 갑술계(甲戌계)는 지역별 모임을 통해 계원간의 우의를 다지고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지향점을 갖고 있다. 원래 1972년 안동시 길안면의 ‘갑술생 동갑계’에서 출발하였으며 이어서 ‘삼사동인회’와 ‘갑술계’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길안면의 갑술계원인 김옥근, 류무수, 권종구 등이 ‘갑술계첩’3권 1책을 편집하여 발간하면서 당시 석학제현의 서문과 함께 총 637명이 명첩에 올라 근래 흔치않은 계첩을 발간, 품격을 높이기도 하였다.

▲ 2008년 당시의 무진계원(왼쪽)과 2014년 무진계원(오른쪽). 21명의 동갑계원은 이제 2명으로 줄었다.

‘나’보다는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계’가 갖는 의미는 무척 크다. 심지어 한 가족 내에서 형제자매끼리 ‘계’를 조직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부모님 부양과 가족 간의 화합을 가족 공동의 문제로 인식하고 정신적 · 경제적인 협동을 꾀하는 것이다.

학연, 혈연, 지연 등 관계 맺기를 통한 공동체 생활과 평판과 이목을 중요시 여기는 우리민족의 특성이 만들어 낸 ‘계’는 공평한 분배와 평등한 관계 속에서 작은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두레와 품앗이처럼 이웃과 소통하고 나이, 성씨, 성별 혹은 취미생활 등 공통분모 속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방법을 찾아내고 기어코 조직화해내는 근성이 오늘날 우리 민족 특유의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냈는지 모른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먼 가족보다 낫다는 말처럼 우리 생활사에 깊숙이 자리 잡은 ‘계’문화는 오늘날처럼 1인 가구, 독거노인, 핵가족화 시대에 대안이 될 수 있는 문화가 될 수도 있다. 나이를 먹고 사회에 소외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인정욕구’가 강해진다. 지나온 삶에 대한 긍정과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지속적 관계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계’의 지향점으로, 덕업을 서로 권장하고, 과실을 서로 규제하고, 어려움을 서로 구제하는 일 등을 계원이 응당 행하여야할 조목으로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정신에는 과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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