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 안동시 법상동>
법상사가 있던 유서깊은 마을 법상동
황소 팔아 이사 온 할매가 사는 동네
<우리동네 - 안동시 법상동>
법상사가 있던 유서깊은 마을 법상동
황소 팔아 이사 온 할매가 사는 동네
  • 안동시 공동기획연재
  • 승인 2018.07.10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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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공동기획연재] 2018 안동 예천 근대기행(1)
법상동 전경  ⓒ김복영

프롤로그

2018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밀도 있게 전달하고자 한다. 공동체의 삶이 해체되는 시대에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 즉 ‘동네’를 테마로 한 이야기를 들려줄 참이다. 우리가 살아왔던 공간에 대한 추억과 기록을 도시재생의 기로에 선 원도심, 구도심과 신도심을 비껴간 변두리, 자연부락의 변화를 오롯이 간직한 각 동네사람들의 생활사를 통해 탐사해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 동네는 행정구역상 서구동에 속하는 안동시내 서쪽에 위치한 법상동이다.

법상동 사거리의 아름드리 레코드
       

법상동 사거리

레코드, 테이프, LD, CD. 법상동 입구의 아름드리 레코드는 학창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오토리버스가 되는 마이마이(mymy)에 좋아하는 곡으로 꽉 채운 테이프 하나로 즐거워했던 그 시절 말이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아닌 안동MBC 권중기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필두로 쭈쭈바를 물면서 내려왔던 언덕길의 보성슈퍼, 호랑이 할아버지 몰래 두 권 읽고 한 권 값만 냈던 법상만화방, 낙엽에 시를 적어 코팅하고 생일 때면 북적였던 선물의 집 몽블랑, 롯데리아가 들어서기 전 유일한 햄버거집 달라스 햄버거. 그리고 새마을금고 유니폼과 흡사해 조기 취업했냐는 시답잖은 농담을 듣곤 했던 안동여고의 파란색 교복까지 말이다. 이문세의 별밤이 아니라서 듣고 싶지 않다곤 했지만, 사실 권중기의 별밤으로 아이들은 관제엽서라 불린 우편엽서에 부단히도 사연 담은 신청곡을 띄우곤 했다.

법상동 입구

아랫동네 법석골, 윗동네 논골

25년 세월을 넘긴 아름드리 레코드 맞은편으론 인쇄, 도장, 열쇠집을 겸한 명인당 인쇄사가, 그 옆 같은 건물 1층엔 에덴문구, 드림디포 문구를 거쳐 지금은 한일냉난방이 자리 잡고 있다. 명인당 2층엔 학생들의 졸업앨범 사진을 전문으로 찍었던 크로바 사진관이 있었다. 15년 전 김수원 사장이 고인이 되면서 사진관은 문을 닫았다. 광석동 농협사거리, 법상동 사거리라 불리는 이곳이 바로 법상동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법상동은 법석골, 법석곡, 법상골로 불리는 아랫동네와 논골이라 불린 윗동네로 이루어져 있다. 논골은 광복 전까지 254평의 천수답(天水畓)이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집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논이 있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법상이란 명칭은 통일신라시대에 법상사(法尙寺)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졌다. 『영가지』에는 부성의 서쪽 2리(약800m)쯤 되는 곳, 옛 법상사 터에 향사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법상동은 옛날 안동부성 안에서는 가장 부유하고 의식이 높았던 계층의 집단촌락으로 알려진 동네다. 북으로 마을 뒷산엔 안동여고와 안동여중이, 성소병원이 있는 서쪽으론 서당골이라 불린 금곡동, 안동교회가 있는 동쪽으론 잿골이라 불린 화성동, 광석동 농협이 있는 남쪽으론 넓은 돌이 있다 하여 너븐돌이라 불린 광석동이 있다.

2018년 법상동 우체국

60년 역사의 법상동 우체국

법상동의 서쪽 경계에는 60년 역사의 법상동 우체국이 있다. 1968년 12월 21일, 43평 콘크리트2층 건물을 준공하여 12월 28일에 개국한 법상동 우체국에는 현재 25번째로 부임한 김은희 국장이 2년째 근무 중이다. 노년층의 단골들이 있어 금융거래는 늘었지만 주차공간도 없는데다 대량우편물과 택배가 많지 않은 터라 법상동 우체국은 몇 년 전부터 폐국 이야기가 솔솔 오가고 있다. 당북동의 안동우체국과 거리가 가깝고 우편, 체신거래 고객이 감소하니 본점과 가까운 우체국부터 정리하는 수순이 전국적인 추세라고 한다.

1982년 법상동 우체국 (사진제공: 법상동 우체국)

공과금 내는 날과 노령연금 받는 날, 월말 외에는 크게 붐비는 일 없는 아담한 우체국. 매달 같은 날에 들리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거나 중절모에 지팡이 짚고 오던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을 때면 그 이유를 짐작하고 씁쓸해하거나 어느 요양원엘 갔더라는 소식에 안타까워하는 동네 사랑방과 같은 곳이다.

1988년 법상동 우체국 (사진제공: 법상동 우체국)

법석골 샛길의 꽃님미용실

법상동 우체국에서 법석골로 향하는 샛길에는 4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킨 꽃님미용실이 있다. 올해 나이 77세가 무색하게 이홍자 사장은 재작년에 홀로 인도여행을 다녀온 멋쟁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그니는 설악산 대청봉 봉정암에만 벌써 열아홉 번을 다녀왔다. 직업 특성상 계속 서서 하는 일이라 체력도 체력이지만 오늘날까지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73년 개업한 꽃님미용실

화성동이 고향인 이홍자 사장은 깜찍한 외모의 미용 솜씨 좋은 아가씨였다. 기술이 있으니 굶기야 하겠나, 사람 하나 착실하면 좋겠다 싶어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역전 지금의 삼성생명 자리쯤에 있던 아카데미 다방 앞에서 루비미장원도 하고 사장뚝으로 옮겨서도 몇 년 착실히 일을 했다. 남편은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지차인데도 홀어머니 모시고 형님이 어려울 땐 도와주기도 하는 마음 넓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돈복은 없었던지 운수사업이 실패하면서 고생도 많았다. 큰아들이 첫돌 지난 50년 전 때꺼리가 없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 조그마한 방 한 칸 얻어 살고 있는데 시청직원들이 찾아와선 ‘제발 날 좀 살려달라’곤 했다. 이유인즉 기술 하나로 먹고 살아야하니 속칭 ‘야매’로 미용을 한 것 때문이었다. 시청에 투서가 들어오니 단속 나온 공무원들은 곤란해 죽을 지경이고, 미용실은 얻어야하는데 빚은 많았던 그땐 참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꽃님미용실 내부

어느 날 광석동에 있던 한 미용실 원장이 손님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이홍자 사장에게 외상으로 미용실을 살 것을 권했다. 벌어서 돈을 갚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미용실을 인수한 게 지금의 ‘꽃님미용실’이다. 미용실은 있으나 기술은 없던 형편과 미용실은 없으나 기술은 있는 형편에 서로가 윈윈이었다. 외상도 다 갚고 지금의 법상동 자리로 이사와 몇 번의 수리를 해서 정착했다. 그렇게 73년도에 개업한 꽃님미용실의 역사가 시작됐다.

 

     
15년 전의 미용요금표

꽃님미용실의 탄생

파마가 5천 원, 7천 원 하던 시절에 고데는 3천 원이었다. 옛날엔 고데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감으면 풀리는 머리니 일주일을 안 감고 그대로 두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40년 넘는 단골들이니 개중엔 연세 80~90세가 된 분들도 있다. 영덕으로 이사 간 단골도 이홍자 사장에게 머리를 맡기러 일부러 안동까지 오곤 한다고. 이제는 돌아가시기도 많이 돌아가시고 손님도 예전만 같지 않지만 불제자들도 많이 찾아오곤 한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미용실인 요즘 이렇게라도 소일거리하고 단골들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한다.

미용사 위생교육차 경주에 갔을 때. 40대 초반의 이홍자 사장.

아들만 셋을 뒀는데 셋 다 착해서 고맙고, 직장 반듯해서 고맙고, 며느리 잘 들어와 형제들 우애 있어 고맙단다. 자신이 덕을 닦으면 음으로 양으로 다 잘되는 게 순리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나날이 후회되지 않는다.

“이 계통이 사치하기가 되게 쉽거든. 젊어서부터 미장원한다고 허영에 들떠서 내 잘났네, 하는 경우 많은데 그런 마음 안 갖자고 노력했어.”

지금은 작고한 법상동 사거리2층 크로바 사진관 김수원 사장이 찍어준 사진.

설악산 대청봉으로, 하와이보다 먼지도 없고 길이 확 뚫린 뉴질랜드로, 발이 시커멓게 될 정도로 걸어 다녔던 인도까지, 그렇게 갠지스강에 뛰어들어 마음까지 정화시키는 여행을 두려워않는 멋진 황혼을 즐기고 있는 법상동 멋쟁이, 꽃님미용실 이홍자 사장. 미용실 내부에는 52세 때 찍은 사진이 액자 속에 걸려있다. 법상사거리 2층 크로바 사진관 김수원 사장이 찍어준 사진으로, 예쁘게 나온 터라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법석골 샛길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홀로 우뚝 솟은 상일파크맨션

한낮에도 능소화는 지친 기색 없이 담장에 피어있다. 이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소박한 꽃은 법상동 동네와 제법 어울린다. 법상길 좌우로 난 골목은 가늘고 길게 이어져 있다. 죄 떨어진 자목련 꽃잎이 흩날리는 골목에는 상추, 깻잎, 토란, 고추가 심겨있다. 수확의 기쁨을 알고 가꾸는 기쁨을 아는 연령대가 거주하는 골목에는 특유의 옛 감성이 묻어난다. 가령 쓰레기 무단투기 경고문이나 ‘존경하는 노인이 되자’는 문구가 적힌 상일파크맨션의 노인정, 골목 어귀마다 있는 정자를 보면 말이다.

골목 곳곳에 자라는 상추

 

 

상일파크맨션 노인정 벽에 새겨진 글귀 "존경 받는 노인이 되자"

낮은 담장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도도하게 서 있다. 고만고만한 집들 사이로 혼자만 우뚝 서 있는 상일파크맨션은 법상동 골목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가운데 하나다. 법상경로당 앞 지대가 높은 곳에 서 있기도 하지만 2,3층 건물이 대부분인 근처 건물 중 유독 높이를 뽐내고 있는 까닭이다. 1991년 10월 14일에 준공, 2개동 각각 지상12층, 지상 15층 123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고양이의 망중한
1991년 준공한 상일파크맨션

71년째 거주, 법상동 최고령자 이위규 할머니

법상아랫길엔 법상동 최고령자인 이위규(李渭奎) 할머니 댁이 있다. 올해 101세 되신 이위규 할머니는 놀랍게도 보청기를 안 하고도 일상 대화가 자유롭고 그 연세에 틀니도 아닌 본인 치아를 지닌, 무척 정갈하고 건강한 분이다. 다만 다리가 불편하여 거동이 힘든 점만 빼면 할머니는 80대 동안(!)으로 보였다. 보청기는 있지만 굳이 끼지 않는다는 할머니, 이렇게 한마디 던지신다.

달랑 집이 세 채밖에 없던 시절 법상동으로 이사와 71년째 거주 중인 이위규 할머니. 올해 101세 되신다.

“나가 많으면 좀 덜 듣기는 게 나을똥 몰래.”

1918년 와룡면 주하리 진성이씨 가문의 8남매 셋째 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열일곱에 서후면 태장리 양주송씨댁 맏아들 송종옥(宋鍾玉) 할아버지와 혼례를 올렸다. 열 넷된 할아버지는 난생처음 갓 쓰고 가마 타고 당시 증조모 별세로 복인이었던 아버지를 대신한 종숙부와 함께 할머니댁으로 왔다. 짐 지는 사람까지 합이 8명이 와서 상견례 후 3일 만에 가마를 타고 돌아갔다. 당시 안동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할아버지는 혼례 후 같은 반 친구들에게 새신랑이라며 엄청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8년 전 새집을 짓기 전의 이위규 할머니의 한옥집 전경

할아버지, 안동군 공무원이 되다

1921년생인 할아버지는 7살 때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우고 한문 글쓰기를 배웠다. 안동읍까지 학교 갈 형편이 안 되어 인근 저전동 학남학습강습소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4학년 때부터 안동공립보통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송종옥 할아버지. 유서 깊은 법상동에 뿌리내기로 결심했다.

16살에 학교를 졸업한 할아버지는 농사일로 집안일을 돕다가는 앞날이 암담할 거라 생각하여 안동읍 서부동의 안동농림학교 지정 모자점을 인수하여 잠시 장사를 하다가 안동군 미곡통제조합 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안동군 내무과 사회계장, 안동군 보건소 보건소장 직무대리, 안동군 식산과 양정계장 등을 거쳐 1977년 정년퇴임하였다. 퇴직기념으로 받은 벽걸이 괘종시계는 아직도 할머니 집 거실에서 똑딱이고 있다. 35년간의 공직생활을 하면서 주로 자전거로 군내 1읍 15개 면을 출장을 가곤 했는데 하루에 5, 6개 면을 출장을 다닐 정도로 근면 성실했다. 대통령표창과 훈장을 받아 그간의 노력에 보답을 받기도 했다.

1965년 할아버지가 군청 산업과 양정계장으로 재직 당시의 사진. 박재환 군수 송별기념사진. 증산, 반공, 방첩 등의 용어가 눈에 띈다. 앞줄 중간(오늘쪽에서 네번째)에 앉아있는 이가 박재환 군수, 송종옥 할아버지는 뒷줄 중간에 있다.

 

1968년 군청 직원들과 고산서원에서. 오른쪽 뒷줄이 송종옥 할아버지. 

황소 팔아 산 법상동 집

할머니가 법상동에 둥지를 튼 건 1947년 10월이다. 서후 태장리 시집에 있다가 처음엔 군청 뒤 동부동으로 살림을 났다. 안어른이 맏이는 안 내보낸다고 했는데 막상 나간다고 하니 말은 못하고 마당가에서 애꿎은 바가지를 솥에다 탁탁 내리치며 역정을 내셨다. 동부동 종고모네에 세 들어 살았는데 남의 집만 못하더란다. 이후 1944년 구농고사거리 부근 당북동으로 이사를 했다. 할아버지가 군청으로 출근을 하면 할머니는 콩나물을 내어 시루 채로 점방에 내어 파는 일을 했다. 결혼한 지 10년 만인 그해 첫 아이를 낳고 1947년 둘째를 낳았다.

1960년 사랑어른(시아버지) 환갑잔치 때 사진. 뒷줄 정중앙에 젊은 시절 할머니가 있다. 쪽진 머리를 자른 모습이다. 

하루는 부엌문 뒤에 큰애가 서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걸 모르고 부엌문을 여는 바람에 국수버지기에 넘어져 뜨거운 국물에 목을 데는 일이 생겼다. 즉시 백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고생이 많았다. 그렇게 애 둘을 데리고 살만한 집을 알아보다가 안동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이라 판단한 할아버지의 뜻으로 법상동을 택하게 됐다. 법상동 안산 밑에 밭이 딸린 4칸짜리 집을 부부가 그간 모은 돈과 태장리 사랑어른이 황소를 판 돈을 모아 70만원에 샀다. 대지가 89평이라 계사도 짓고 돼지집도 지어 닭과 돼지를 먹이고 땔나무 껍데기를 풍로로 부쳐서 밥을 해먹기도 했다. 처음 법상동에 왔을 땐 달랑 집이 세 집 뿐이라 외딴 기분이 들었다. 법상아랫길 끝 터 조그마한 함석집이었다.

“달랑 세 집 뿐인데, 그래도 둘 집은 어울려 있었고 산대배기에는 한 집뿐이랬어.”

시어머니 환갑 때(1957년) 받은 은수저 두벌.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할머니가 즐겨 쓰던 1970년대 화장품 아모레 타미나 콜드크림

 

법상동 집을 두고 떠난 피난길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7월 29일 후퇴하게 되어 대강 가재를 정돈하고 남하를 하게 됐다. 큰딸이 7살, 둘째인 아들이 4살, 할머니의 뱃속에는 셋째가 있었다. 일직에 갔다가 일직역에 폭탄을 들이부으니 서둘러 의성 탑리를 지나 군위 우보역 앞 냇가에서 방장을 치고 있다 이튿날 경주 가는 기차를 타게 되었다. 강변에선 아이도 태어나고 사람도 죽어나갔다. 아침이면 그 물에 밥 해먹고 그렇게 견뎌왔다. 피난길이 여름이었으니 흰 옷의 물결이었다. 길가에는 풀 한포기가 없었다. 양대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먹을만한 건 모두 다 뜯어먹었던 시절이다.

“군에서 안동을 비우라캐서 사무 걸어서 의성까지 갔어. 우리 큰아는 다리 아프다카는 것을 달래갖고 걷게 하고 할바이는 보따리 지고 둘째는 시집집촌의 일꾼을 우연히 만나 거가 지게에 아를 걸머지고 그래 떠났어. 한창 더울 때라 삼베치마 입고 나선 피난길이잖아, 우리가 추석 쉬고 다시 왔으이 다리는 다 틀고 매라이 아니랬어.”

경주 가는 기차에 소똥은 왜 그리 많은지 그래도 조자앉아 기차 타고 동방역에 내려 방 한칸 빌려놓고 지냈는데 할배가 영글어서 경주군 조달청에서 피난민 식량배급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수일을 있다가 경주를 또 비우라하니 울산으로 가게 되어 그곳에서 이웃을 만나 추석 무렵 인민군이 물러갔다는 말에 안동으로 돌아왔다.

할머니집 앞집으로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파놓은 굴이 있었던 자리. 얼마전 집터를 정비하면서 없어졌다.

전쟁에 폐허가 된 시내, 굴을 파놓은 법상동 집

피난을 다녀오니 안동은 폐허가 되어 붕괴된 집 투성이었다. 성소병원도 폭격을 맞았었다. 다행히 할머니의 법상동 집은 멀쩡하였으나 이불 쪼가리 하나 남아있질 않더란다. 다 들고간 거다.

“맨방에 그냥 잤지 뭐, 그래도 집이 있으이 되드라. 숟가락 하나 살림살이라곤 하나 없었어.”

집이 폭격 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튿날 보니 뒷산 밑에 인민군들이 굴을 판 흔적이 있더란다. 굴을 파서 개도 잡아먹은 흔적이 있고 흙이 무져있길래 할머니네는 그 흙으로 밭을 다 메웠다한다. 최근까지도 앞집에는 굴이 있었는데 집터를 닦으면서 메웠다 하니 그 흔적이 없어져 안타깝기 그지없다.

할머니의 장롱. 전쟁 이후 구입한 것이다.

그해 음력 11월, 할머니는 셋째를 낳았다. 만삭에다 밤새도록 애를 낳지 못하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백병원 의사를 모셔왔다. 간호사도 없이 할아버지가 가방 들고 급히 모셔오니 별다른 방법이 없는지라 상방에서 문고리 잡고 셋째를 낳았다 한다.

“그래 모셔와도 뭐 줄줄도 모르고 줄 것도 없었어. 간호원도 없이 혼자 와서 보고 갔지.”

할머니는 모두 5남매를 뒀다. 결혼 후 10년간 아이가 없었지만 웃대 식구가 많아서인지 할아버지가 맏이임에도 누구 하나 왜 아가 없노, 하는 타박 한번 없었다 한다.

할머니는 쪽진 머리를 안어른 환갑 때 잘랐다. 안어른이 사랑어른보다 4살 연상이었다.

“다리-는 다 끊었는데 우리 할배가 못 끊게 해서 안어른 환갑 때 돼서야 내가 잘랐지.”

한창 시내서는 쪽진 머리 끊고 파마하던 시절이었다. 돈 무서워 자주는 못 갔지만 간혹 극장에도 가곤 했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도 없다. 한번은 대안극장에 구경을 갔는데 옆자리에 사람이 없더란다. 알고 보니 안 말리고 비녀 찌른 머리에서 나는 쉰내 때문이더란다. 머리를 자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족히 100년은 된 일제 재봉틀. 베 한필과 맞바꿔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

베 한필과 맞바꾼 재봉틀

할머니네 집에는 커다란 일본식 도자기 화로가 있다. 해방 때 일본사람들이 쫓겨갈 때 놔두고 간 살림살이를 한꺼번에 샀었다. 쟁반부터 그릇 화로, 라디오까지 다 사놨는데 전쟁 때 싹 가져간 것이다. 무거운 화로만 빼고 말이다.

한국전쟁 속에서 유일하게 건진 할머니 재산인 일본식 도자기 화로. 해방 때 쫓겨간 일본사람의 살림살이를 샀던 것인데 전쟁 통에서도 무거워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 옛날 베 한필이랑 바꾼 일본식 중고 재봉틀도 있다. 이 재봉틀로 몸뻬와 셔츠, 치마 등을 모두 직접 만들어 입었다. 지금 75세 된 큰딸이 태어나기 전, 해방 전에 산 것이니 족히 100년은 됐지 싶다. 그런데 할머니 말씀하시길 “틀이 약해, 고물상이 와서 달라고 했는데 안줬어.”하신다. 돋보기 쓰고 젊은 사람마냥 바늘귀도 잘 꿰는 할머니는 비록 무학이나 언문을 모르지 않는다. 심심할 때면 곁에 두고 읽는 책도 있다. 얼마 전 지방선거 때는 투표도 했다. 오전에 할머니 댁에 들리는 가정방문 요양보호사와 함께 투표소에 가서 7장의 용지를 받아들고 4장 째 찍으려 하는데 한참 걸리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대충 찍고 와요!”했더니 투표소 사람들이 와- 하고 웃더란다.

1972년 삼영출판사에서 나온 책자. 할머니가 심심할 때면 읽는 책이다.

얼추 백년해로

할아버지는 용상동에 과수원을 꾸렸다. 할아버지가 5학년 때 소풍을 갔는데 옆 과수원에 사과가 발갛게 달려 있는 걸 보는데 선생님이 ‘따지 말고 눈으로만 보라’고 하길래 ‘내가 크면 꼭 과수원을 해야지’결심을 했다한다. 퇴직 후를 대비해 5천 평 되는 과수원을 가꾸며 그 꿈을 이루었다. 73년도에 첫 사과 수확을 2,370상자를 했다. 95년에 용상동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주택공사에 수용되기 전까지 과수원 농사를 계속했다.

1977년 퇴직기념으로 받은 괘종시계
   

할아버지는 95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병원에 있는 것을 싫어해서 집에서 이태동안 할머니가 병수발을 했다. 지금 사는 집은 돌아가시기 5년 전에 지었다. 평생을 술도 담배도 안한 사람이었다. 술이라곤 제사지내고 음복만 했을 뿐이다.

“내 나이 아흔여덟까지 살면서 평생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 할배가 점잖앴어. 내가 나도 더 많고 학교도 안했잖아. 십년간 아-가 없어도 남의 사람 안 넘보고.”

할아버지는 평생을 근면 성실하게 가족을 위해 일했고 조상 모시기에 진심을 다한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에게 옷 한 벌 뚝딱 만들어서 옷깃 카라가 낡고 때 타면 뒤집어서 돌려달고 또 그것만 떼서 새로 달고, 솜씨 좋게 수선했던 그 야무진 손으로 100년의 세월을 훌쩍 살아온 이위규 할머니.

돌아가시기 며칠 전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더니 써놓은 글. 할아버지의 마지막 작품이다. 

에필로그

이위규 할머니는 1918년 말띠생이다. 예부터 말띠는 드세고 궁합이 맞지 않다하여 선자리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내가 정월 말띠거든. 그래도 말띠라고 안 되진 않더라 뭐.”

1947년 가을 볕 좋은 법상동에 터를 잡아 지금까지 이 골목을,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야무지고 차롬한 성품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 4년째 한결같이 아침을 함께 보내고 있는 요양보호사와 함께 모닝커피를 즐기는 할머니.

“커피? 먹으나 안 먹으나 잠이야 똑같이 안 오는데 글거 같음사 내가 먹고 말지.”

"마시나 안마시나 잠 안오는 건 똑같애, 글거 같으면 마시고 말지."
아침이면 믹스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할머니

밝고 위트 있는 할머니의 대답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100년의 시간을 소녀처럼 보낸 할머니의 장수비결을 굳이 묻지 않아도 될 듯하다. 법상동에서 가장 연세 많은 이위규 할머니의 법상동 마실은 오늘도 계속된다. 가다가 최소 세 번 이상은 쉬곤 하는, 71년을 오고간 법상동 그 길에 오늘도 할머니의 족적이 남겨진다.

“이제는 구루마 없으면 못 움직여. 그래도 화투라도 치고 놀아야 편치.”

글: 백소애 sodoor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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