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으로 떠난 바보
사진 속으로 떠난 바보
  • 임기현
  • 승인 2009.06.02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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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당신이 그립습니다.
윗동네 마실가듯 훌쩍 떠나신 지 이제 겨우 아흐레
바보같이도 바보같은 당신이 모질게 보고 싶네요.
미안해 마라 원망 마라 하셨다지만
죄스럽고 원통함은 눈물만큼이나 삭지 않습니다.

뒷걸음치는 수레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포기하지 말고 바등바등 용이라도 써보라고
꽃잎처럼 한 몸 지그시 던지셨나요.
조금 더 버티면 일꾼들 모두 짐 벗어 던지고
햇살 좋은 곳으로 도망이라도 칠까 걱정되셨나요.
당신은 역시 바보였습니다.

마을 어귀 오리 논들은
이제 겨우 물대고 써래질로 단장했는데
당신은 사진 속으로 먼 길 떠나셨네요.
길바닥에 쭈그리고 촛불 하나 켭니다.
손바닥 만한 액자가 좁지는 않나요.
머뭇머뭇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잔뜩 심각한 표정에 발치도 쳐다보시다가
이내 다시 넉넉하게 웃고 계십니다.

풀썰매 나딩구는 개구쟁이 뒷모습
장군차 북돋우는 흙 묻은 목장갑
담배 불 길게 댕기던 마을 귀퉁이 구멍가게
당신의 미소 속에서 너울거립니다.
그리고 또렷하게 당신이 들립니다.

분명히 오고야 만다던 신 새벽과
흐르는 강물처럼 멈추지 말라는 다그침과
두런두런 사람 사는 세상의 아픈 기별들
그리고,
운명이다 운명이다 하늘 우러르는 못다핀 아침
이슬 젖은 뒷짐 소리, 소매 깃 스치는 소리

답답한 들숨에 여명조차 부시지 않는 산자락
한 마디 안부도 없는 미련한 바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자맥질치며 당신 떠나셨네요.
하늘 맑고 물 고운 논길따라 훠이 돌다
볕 좋은 날 하시던 손녀 나들이 마냥

부엉부엉- 낮은 소리로 당신을 부릅니다.
아으아으- 노래도 없이 눈물도 없이
운명이다 운명이다 그리운 당신이 떠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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