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이 문제인가? 당내 민주주의가 문제인가?
이념이 문제인가? 당내 민주주의가 문제인가?
  • 김대호 소장
  • 승인 2009.06.2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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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 서평 (3)

이념이 문제인가? 당내 민주주의가 문제인가?

유시민은 열린우리당의 이념적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열린우리당은 미국 민주당처럼 보수적 자유주의와 사회자유주의 세력이 제휴한 연합정당이었다.(p 344)

그렇다면 현 민주당에 대해서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다수파가 그 연합정당을 매우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소멸시키고 잔류 민주당과 합치는 과정에서 민주당은 자유주의 연합정당의 성격을 상실했다. 오늘의 민주당은 사실상 호남 지역 기반위에서 보수 자유주의 세력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보수 야당이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민주당이 다시 자유주의 연합정당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p 336)

그러면 유시민은 사회자유주의 혹은 사회적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까?

사회적자유주의는 우리 헌법이 규정한 정치와 경제의 다원주의적. 자유주의적 기본 질서를 전적으로 승인하는 가운데 사회적 형평과 통합, 기회 균등과 경쟁의 공정성, 사회적 안전과 평화, 환경 보호 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국가의 개입과 사회적 타협을 추구하는 사상적. 이론적. 정치적 흐름을 가리킨다. 이것은 전통적인 보수와 진보를 인정하면서 그 장점을 취하는 중도통합 또는 중도진보적 이념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p 339)

이렇게 본다면 참여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열린우리당과 현 민주당의 주류적 이념도 사회자유주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 이념적 측면에서의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주 전선은 과거나 지금이나 오른쪽에서는 한나라당과 대치하고, 왼쪽에서는 민주노동당, 진보언론, 시민단체와 대치한다. 유시민은 그 양쪽의 전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거대 보수 신문들은 한나라당과 재벌, 보수 지식인 집단과 손잡고 참여정부의 진보적 측면 또는 사회자유주의의 ‘사회’적 측면에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집중함으로써 정부를 국민에게서 이념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세금폭탄론’, ‘좌익포퓰리즘론’, ‘대북 퍼주기론’, ‘잃어버린 10년론’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반면 상대적으로 약세인 진보 언론은 참여정부의 ‘자유주의’적 측면에 비판의 화살을 집중했다(이른바 좌깜박이 우회전론-필자 주)……’담론 전쟁’의 결과를 보면, 진보 세력은 사실상 빈손이었고 값진 전리품은 거의 모두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이 챙겨 갔다. (p 341)

그런데 참여정부 집권 후반기에는 한미FTA 등을 계기로 열린우리당 내 분란이 극심하였다. 여기에는 참여정부와 차별화 하여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는 열린우리당 대권 주자(김근태, 천정배 등)들의 정치적 쇼맨십이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이와 더불어 이념적 차별성도 상당 정도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2006년 가을에 잠깐 변죽을 올린 김근태의 뉴딜 정책이나, 천정배, 적지 않은 386의원들의 발언의 조각을 맞춰보면 이들의 노선은 (연성)사민주의 내지 사회자유주의 좌파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결코 보수자유주의라고는 볼 수 없다. 김근태, 천정배가 한미FTA를 목숨을 걸고 단식까지 해가면서 반대한 정서의 이면에는 한미FTA로 인해 유럽형 사회로 가는 길이 영구적으로 막히는데 대한 두려움, 반감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미국이 가진 합리적 핵심을 높이 평가하는, 이른바 자유시장경제론자도 한미FTA를 반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통상전략.전술상의 이유로 한미FTA를 반대하기에 김근태, 천정배처럼 ‘나라가 망한다’고 그렇게 극렬하게 반대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자유주의를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유시민이 말하는 사회적 자유주의는 진보개혁 물을 조금만 먹은 사람이라도 거의 동의할 수 있는 이념이다. 민주당 내 존재한다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도, (연성)사민주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차별 없는 성장, 가족행복시대’를 내건 정동영의 이념도 사회적 자유주의가 아니면 뭐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는 자신의 살아온 인생이 뒷받침하는 핵심 가치가 아니라, 대선을 앞두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만든 포장지 이상이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2000년 2월에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이라는 책을 펴낸 손학규는 아예 사회적 자유주의의 원조라 자처할 지도 모른다. 사회적 자유주의와 가장 근접한 단어가 진보적 자유주의 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여정부의 이념적 계승자에 가장 가까운 유시민, 이해찬, 김두관이 탈당한 것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손학규가 민주당 대표를 맡고 난 직후다. 손학규는 한미FTA까지 전향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정책 노선만 보면 유연한 진보에 가장 근접한 정치인이다. 이래저래 현 민주당이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정당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하는 행태가 보수적이거나 비민주적이거나 ‘토끼과’인 사람들이 많을지언정……

사실 유시민도 열린우리당내 투쟁 전선으로 보나, 탈당의 변으로 볼 때 민주당/대통합민주신당에 대한 문제의식의 핵심은 당내 민주주의 내지 정치노선 이전의 기본과 원칙에 관한 것이 주된 것이었다. 유시민의 탈당의 변은 “유연한 진보정치를 하고 싶었으나 신당에는 제가 꿈꿨던 `진보적 가치'가 숨 쉴 공간이 너무나 좁아 보이고 노선 경쟁을 할 정상적 의사결정 구조도 없다”는 것이었다. 당내 민주주의 문제를 핵심으로 보는 것은 <후불제 민주주의>의 다른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자유주의자, 사회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가 한 지붕 아래 공존 경쟁하는 미국 민주당의 길은) 보수 자유주의 다수파가 열린우리당이라는 연합정당을 파괴함으로써 봉쇄되었다. 사회자유주의자들은 오늘의 소수파가 내일의 다수파가 될 수 있는 규칙을 허용하지 않는 정당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다.’(p 346~347)

나는 2005년4월2일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당의장 선거에 출마해 4등 턱걸이로 집권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이 선거를 치르면서 나는 열린우리당이 붕괴할 운명임을 예감했다……전당대회를 코앞에 두고 당원과 대의원 자격에 관한 당헌과 당규를 고쳤다. 그 결과 국회의원과 직업 정치인들이 대의원 선출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부 후보들은……금품 제공, 값비싼 식사와 향응 제공 등의 구태를 저질렀다……열린우리당이 창당 정신으로 내세웠던 ‘깨끗한 정치’와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대의가 내부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었다. 대의원들의 표심은 일반 당원들의 뜻과 멀어졌다……결과적으로 당원과 국민들 속에서 거의 아무런 정치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압도적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 지도부를 채웠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두어 달이 지난 시점에서 당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니 열린우리당은 어느 계층, 어느 세대, 어느 지역에서도 확실한 지지층을 가지지 못한 주변부 정당이 되어 있었다. 당의 뿌리가 썩고 잎은 말라가고 있었던 것이다.(p 248)

열린우리당의 창당 정신조차 어떤 국가개조의 이념이 아니라 ‘깨끗한 정치’와 ‘지역주의 극복’이었으니 당내 민주주의가 중심 가치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당내 민주주의는 비주류 세력(비당권파, 영남민주파 등)이 돈과 토호와 호남향우회 세력 등과 결탁한 주류 세력에 도전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이다. 이 제도의 핵심은 기간당원제 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간당원제 사수 세력이건 반대 세력이건 확고한 국가개조 노선=이념이 없었다는데 있다. 아니 표방하는 이념이 있었다 손 치더라도 그럴 듯하다는 확신을 주면서 대중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살아있는 이념이 아니었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이 어느 계층, 어느 세대, 어느 지역에서도 확실한 지지층을 가지지 못한 주변부 정당이 되는 것은 누가 당권파가 되어도 막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민주당의 문제는 이념의 보수화가 아니다. 다시 말해 보수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사회자유주의자 축출에 있지 않다. 그것은 첫째, 비기득권 세력이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한 당내 민주주의 문제이다. 즉 당원이 모호하고, 대의원은 의원과 지역위원장이 지명하며, 지역 유력자나 토호들이 그 다음의 동심원을 싸고 있다. 둘째, 지역.계층적 기반이 협소하다. 한마디로 호남 지역당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셋째, 이념이 모호하고, 시간이 가도 철학, 가치, 정책과 건강한 조직 문화가 정상적으로 성장, 발육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넷째, 전문가 네트워크 등 인재풀이 빈약하다. 요컨대 전반적으로 민주당은 대영남-소호남 구조하에서 소선거구제 단순다수득표제와 지역주의가 결합하고, 정당 기반이 향우회 조직과 업자 조직에 의존하다 보니 구조적으로, 컨텐츠에 관한 한 깡통정당, 이념적으로는 짬뽕정당, 실천적으로는 진정성이 없는 생색내기 정당적 성격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유시민식으로 말하면, 거의 모든 정신적 에너지가 재선과 지역구에 집중되는 토끼들이 번성하기 쉬운 구조인 것이다. 물론 이는 한나라당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지식 소매상적 태도가 문제다

유시민은 지식소매상이라는 직업에 대해 제법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소매상은 최종 소비자를 상대로 거래하는 유통업자를 말한다. 나는 전문가가 아닌 보통 시민들에게 지식을 판다. 어떤 때는 말로, 어떤 때는 글로 지식을 유통시킨다. 영어, 한문, 라틴어, 수학 등 학술 정보 생산에 필수적인 작업 도구를 충분히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능력이 없다. 학자들이 보는 전문 저널에 논문을 실을 실력도 되지 않는다……그렇지만 나는 지식소매상이라는 직업에 대해 제법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유명한 맛집을 경영하는 식당 주인 겸 주방장이 느끼는 자부심과 닮았다.(p357)

사실 나도 영어, 한문, 수학 등 학술 정보 생산에 필수적인 작업 도구를 충분히 보유하지 못했다. 학자들이 보는 전문 저널에 논문을 실을 실력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전문가가 아닌 보통 시민들에게 어떤 때는 말로, 어떤 때는 글로 지식을 판다. 그런 점에서 나도 지식소매상이다. 하지만 나는 때로는 통계라는 거대한 밭에서 뭔가를 캐내는 직접 생산자이기도 하다. 동시에 나는 여론 주도층(오피니언 리더)과 선출직(정무직) 공무원 또는 그것이 되려고 하는 예비 정치인들을 상대로 지식을 팔려고 하는 지식도매상 내지 1차 생산자이기도 하다. 비유하자면 유시민이 고객들이 줄을 길게 서는 음식점 사장 내지 주방장이라면, 소매상으로서의 나는 고속터미널 지하도 계단에서 텃밭에서 직접 기른 야채 몇 가지와 집에서 만든 떡 몇 가지를 이고 와서 파는 할머니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요즈음은 직접 기른 야채도, 직접 만든 떡도 없다고 하지만……

어쨌든 내가 상대하려고 하는 고객들은 전문가들이다. 이들 정치인의 전문성은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것도,. 선거 기술도 아니다. 수많은 가치들 중에서 우선순위를 잡고, 정책 기조를 잡는 것이 핵심 전문성이다. 우선순위와 정책기조를 정확하게 잡으려면 학자들처럼 자신 만의 우물에 갇히면 안된다. 대중과 소통하고, 세계를 호흡하고, 우물에 들어앉은 수많은 학자들, 기업인들, 시민운동가들의 지적 정수들을 쓸어 담고 녹여서 정치담론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정치인의 전문성이다. 정치인의 전문성은 결국 현실에서 작동하는 이념(정책 패키지)과 대중 지지(설득력)와 법안으로 귀결된다. 이는 혼자서 쌓을 수 있는 전문성이 아니다. 일조일석에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유시민은 이런 전문가 층에 대한 배려가 약하다.

사실 지식소매상을 하면 대중의 기호와 호기심에 영합하기에 많은 팬이 생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는 대중의 정치의식이 저열해서 문제라기보다는, 이들을 이끌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의 혼미와 정치조직의 취약성과 정치생태계의 피폐가 훨씬 심각한 문제다. 한마디로 지식 도매상 내지 정치 분야 전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유시민이 대중 지지자(팬)를 모으는 데는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지만, 정치조직을 만드는 데는 젬병인 이유는 아무래도 지식소매상적인 스탠스를 견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개혁당과 참정연이 이념이 없는 정치조직이 된 것도-개혁당은 노무현 일병 살리기 정치연대 비슷했고, 참정연은 기간 당원제 관철 정치연대 비슷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유시민의 지식소매상적 스탠스와 과연 무관할 수 있을까? 물론 다른 사람들은 지식도매상도, 지식소매상도 하지 못했으니 유시민 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솔직히 지식도매상 노릇은 돈도 안 되고 피곤한 일이다. 도매상이 상대해야 할 고객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이치를 대충 다 안다고 생각하고, 말도 많고, 책도 잘 안 사본다. 물건(담론)에 대한 비판적 안목은 높지만 좋은 물건(담론)이 생산되는 시스템이나 생태계(뿌리, 토양)에 대한 고려는 별로 없다. 그렇기에 원래 돈이나 대중세(대중적 영향력) 없이는 정리가 안 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지식소매상이 되어 돈도 벌고, 많은 대중과 소통하는데 역점을 두는 유시민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사소한 결함이 크게 증폭되니 이런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역량부족이라는 모호한 말

유시민은 참여정부가 외상값을 과소 계상하므로서 범한 (개혁) 전략.전술적 오류에 대해서는 ‘역량 부족’이라는 모호한 말로 넘어갔다. 유시민의 말을 종합해 보면 참여정부는 정도(正道)를 걸었는데, 다시 말해 전략적 방향성(사회자유주의 노선)은 맞았는데, 역량(힘) 부족으로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금 역량을 키워 툴툴 털고 일어나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된다는 것이리라. 그런데 역량 부족이라는 말은 ‘부덕’이나 ‘유감’이라는 말처럼 모호한 말이다. 어찌 보면 객관적 환경과 주체적 역량을 정확하게 타산하여 올바른 전략 전술을 세우지 못한 오류(현명함의 부족)를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갑자기 닥친 천재지변처럼 당시의 주체적 역량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라고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유시민은 오류 측면보다는 한계 측면을 주요하게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한 유시민의 평가, 즉 ‘참여정부는 시대적 과제에 잘 대응했지만 (실제 의미는 ‘비교적 잘 인식했지만’이다.-필자주), 사회자유주의적 정책 패키지를 만들어가기에는 역량이 부족해서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사회자유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것도 이를 내면화한 확고한 정치세력의 부재에서 찾는 것도 그렇다. 현명했으면 피할 수도 있는 오류가 아니라, 당시의 주체역량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로 보면 반성이 자리 잡을 여지는 적고, 제약조건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을 여지가 크다. 그래서인지 전략전술 감각이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패배를 자초한 전략전술적 오류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강하고 간악한 적들을 원망하는 논법이 곳곳에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유주의자답게 권력의 힘이 아니라 말과 논리로 국정을 운영하려했다. 노대통령은 재래식 살상무기를 버리고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가운데 전쟁에 나섰다. 검찰, 국정원, 감사원, 국세청을 모두 청와대에서 독립시켰고, 야당과 보수 세력의 거센 정치공세에 시달리면서도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힘을 사용하는 대신 말을 사용하는 전투에서 대통령이 야당과 보수 언론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다. 말에 의존하는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은 정치적 적대세력의 집중적 타격 목표가 되었고, 그러면서 국민과 정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정서적 토대가 파괴되었다. (p343~344)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사회적, 정치적 계약의 산물로 보았기 때문에 국가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재신임, 사임, 임기 단축 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제한된 권력을 가진 민주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언론, 사법부, 헌법재판소, 선관위, 정당 등 다른 권력기관과 수평적인 다툼이나 권한 쟁의를 벌이면서 서로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것이 대통령답지 않은 언행이라고 생각했다. 보수 언론과 싸우고 검사들과 논쟁하고 선관위나 헌재와 대립하고 여야 정당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국정수행 지지도가 낮았던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고 생각한다......예전의 대통령은 운명이 맺어준 만백성의 왕처럼 말했다.(p 209)

모든 평가가 그렇듯이 일을 잘 했느냐 못했느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목표(시대적 과제)-객관적 환경-주체 역량을 종합해야 한다. 목표는 잘 세웠는데 환경이 안 좋았고, 주체 역량이 모자랐다는 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목표 자체는 환경과 주체역량을 냉철하게 타산해야 한다. 물론 주체역량은 실천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도 많다. 그래서 사후적인 평가가 많다. 하지만 이것을 고려해도 참여정부는 무리한 일을 많이 내질렀다.

대의명분이 아니라 전략전술을 따지는 ‘선수’의 시각으로 본다면 참여정부는 애초부터 이기기 힘든, ‘정의의 전쟁’을 너무 많이 벌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참여정부는 언젠가는 필요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 지형상 그리 유리하지 않는 전선에서 전투를 많이 벌였다. 당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민생 문제와 유리된 채(물론 관료들이야 민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밑에서 부지런히 움직였겠지만......), 진보를 불필요하게 분열시키고(어차피 시대착오적인 진보와 유연한 진보로 분화 발전하게 되어 있었을지라도......), 보수는 단결시키기 좋은 전선에서 전투를 많이 벌였다. 언론과의 전쟁, 국가보안법 및 과거사 관련 전쟁, 지역주의와 전쟁(전국정당 시도, 대연정 제안 등), 한미FTA 관련 전쟁 등이 그런 것이다. 게다가 참여정부는 그리 좋지 않은 시기에, 결코 유리하지 않은 방식으로 전투를 벌였다.

참여정부의 자부심과 참여정부에 대한 대중적 지지의 뿌리는, 성과는 비록 신통찮았을지 몰라도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해 사심 없이 노력했고, 따라서 역사의 법정에서는 그 성과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도 할 수 있는 얘기다. 5년간 국가권력을 쥐었던 주체로서는 너무나 안이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승패나 성과 이전에 정의냐 불의냐를 따지는 것은 일종의 시민단체 내지 재야 인사(志士)의 특성이다. 이들은 정의의 전쟁을 과감하게 벌이고 산화해 가는 것이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권능의 한계도 있고, 제약조건이 많았을지라도 어쨌든 한국 최강의 권력을 쥔 주체라는데 있다. 그런 점에서 志士의 정서가 참여정부와 범진보 세력에게는 과잉이었다.

전쟁의 대의명분(옳고 그름)을 중시하는 대중 앞에서는 ‘우리는 옳았지만 힘이 부족해서 좌절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은 대중을 상대하는 지식소매상답게 철저하게 대중 앞에서 말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유시민의 주요 발언과 행보에 대해 ‘선수’들 중에서 분노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은 것은 ‘선수’들을 의식하는, 반성적 성찰이 담긴 진솔한 발언은 많지 않고, 자신과 참여정부의 정치적 행보의 정당성을 대중들에게 강조하는 발언들이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유의 발언은 정당 대변인의 발언과 비슷해서 자화자찬적, 대중 조작적 요소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정당 대변인의 발언들에 대해서 앞뒤가 안 맞는, 대중 조작적 요소가 있다고 분노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유시민의 대중을 의식한 발언에 대해서 기만적 요소가 있다고 분노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지만 유시민도 ‘선수’의 시각에서 참여정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세력이 없어서 죽었는가, 이념다운 이념이 아니어서 죽었는가?

유시민은 민주당을 보수 자유주의자가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정당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실제 문제 삼는 것은 이념이 아니다. ‘오늘의 소수파가 내일의 다수파가 될 수 있는 규칙을 허용하지 않는’ 당내 민주주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소수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내용(국가개조의 철학, 가치, 비전, 전략, 정책)이 모호하거나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념이 문제라는 것은 틀린 얘기는 아니다.

유시민은 ‘국가 비전 2030’을 ‘한 정당의 기본 정책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만한 정책 조합’이라며 사회자유주의 이념의 총화로 내세우는 듯하다. 그리고 이것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이를 받아 안는 정치세력이 업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부설 정책연구원이 장기 정책 비전을 만들 역량이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 직접 '국가비전 2030'이라는……한 정당의 기본 정책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만한 정책 조합을 만들었다. 그런데 여당 국회의원이나 정책연구원 실무자들이 작업에 참가지 않았다. 여당 지도부는 '국가비전 2030'을 세금 폭탄으로 규정한 보수 언론의 보도가 난무하는 상황을 보고 너무나 위축된 나머지 이것을 공식발표하는 보고회에 참석하기를 거부해버렸다. 결국……'국가비전 2030'은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확고한 정치세력이 없이는 어떤 정부의 정책 지향도 제대로 실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사례라 하겠다.(p 345)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견지해 온 경제사회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점차적으로 재정을 늘려 문제를 해결하는 ‘국가비전 2030’ 방식이 호응을 받았다면 지난 대선과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유권자들 중에서 ‘국가비전 2030’을 읽어 본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범진보개혁 세력의 정치 행태를 보면서 문제의 핵심을 파악했다고 보아야 한다. 드물게도 ‘국가비전 2030’을 꼼꼼히 살펴본 전병유 교수(한신대)는 이에 대해 “성장전략이 제시되지 않은 채 복지국가의 비전만 보여주는데 급급”했으며, “복지가 투자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사회투자국가’에서도 구체적인 성장전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평가한다.(<노무현 시대의 좌절>, p 92)

거칠게 보면 지난 대선 때 참여정부와 정동영은 ‘갈아봐야 별 수 없다(민주적이고 도덕적인 우리 이상 할 수 없다)’며 ‘참고 기다리면 ‘국가비전 2030’의 세상 온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은 ‘이대로는 못 살겠다’ 내지 ‘그렇게는 못 기다리겠다’면서 ‘확 갈아보자’며 이명박을 통한 획기적인 변화를 도모하였다. 그런 점에서 ‘국가비전 2030’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세력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이 자체가 대중에게 꿈과 기대를 주지 못하여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

.짜..수가 진보다.

내가 본 바로는 1970~80년대 운동권이 한국 사회의 속살을 보지 못하고, 바닥 현실을 훑지 못하고, 기업, 금융, 재정, 노동, 복지 등 여러 분야를 종합적으로 보지 못하면 그 이념적 귀결점은 대체로 사민주의나 (연성)사민주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노선의 핵심은 유럽식 사회적 시장경제 내지 조정시장 경제를 대안 모델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델이 한국 현실에서 작동 가능한지를 치열하게 캐묻지 않는다. 큰 공공부문과 높은 세금을 진보의 상징으로 생각한 나머지 공공부문의 방만함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다. 과거 네덜란드나 스웨덴에서 구현된 노. 사. 정 대타협 모델 내지 사회적조합주의가 지금 한국에서 구현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기업과 시장을 잘 통제하면, 한마디로 이들의 탐욕을 제어하면 좋은 일자리가 계속 늘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 중요한 가설을 치열하게 실사구시(검증)하지 않는다.

당연히 기업과 시장에 대한 이해가 떨어져, 일부 재벌 대기업이 쌓아 놓은 엄청난 이익잉여금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보지만, 엄청나게 많은 적자 기업에 대해서는 두 눈을 감아 버린다. 노동(피용자) 1단위가 가져가는 잉여가 OECD국가 중에서 최상위권이라는 사실에도 눈을 감아 버린다. (이는 지난 수십 년간 진보의 핵심 가설이었던, ‘노동의 단결투쟁력을 키워서 자본의 몫을 더 가져오는 방식으로 삶의 질을 개선하는 방식’의 적실성을 의심하게 한다) 조직노동의 높고 안정적인 처우를 담보하는 존재가 우월적 지위가 확고한 재벌.대기업(대형 유통점 포함). 공기업이다 보니, 이들의 하청.협력업체에 대한 불공정 거래는 그 심각성에 비해 거의 이슈화가 되지 않는다. 반면에 OECD 최하위권인 각종 분배 지표는 두 눈 크게 뜨고 본다. 기득권 노동의 높은 처우와 고용안정은 중시하지만, 이들을 태우고 있는 말(馬)인 수많은 기업들의 후들거리는 다리는 보지 않는다. 이 사업장들의 급속한 고령화(한번 들어가면 나가는 사람이 없으니)도 보지 않는다. 기업의 고용 창출 의지와 창업의지가 말라가고 있는 것도 보지 않는다. 한국에서 가장 잠재력이 뛰어난 청년인재들이 국가의 보호 규제가 처진 분야(법조계, 의료계, 공무원, 교사 등)로 엄청나게 쏠리는 현실에 대해서도 무덤덤하다.

무엇보다도 안정될 고용 그 자체가 없는 실업자, 반실업자, 영세자영업자를 보지 않는다. 대기업, 공기업 사업장 내 비정규직 수십만 명은 크게 보지만(이들은 투쟁을 하면 정규직이나 중규직이 될 수 있다), 사업장 바깥에 존재하는 수백만 명의 일용 노동자, 가내 하청 노동자는 보지 않는다.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의 차이가 별로 없는 중소기업에 대해서도 대책이 없다. 나쁜 일자리 수백만 개를 만드는 것 보다 공무원 같이 좋은 일자리 수 만개 혹은 수십만 개를 만드는 것을 높게 친다. 나쁜 일자리는 기득권 노동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쁜 일자리는 신자유주의가 만든다고 생각한다.(내 문제제기도 아마 신자유주의로 치부할 것이다) 그래서 청년실업을 성토하지만 사실상 대책이 없다. 좋은 일자리를 많이 늘려라고 요구 하지만, 낼 모레 죽을지 살지 모르는 쌍용자동차에다가 들이미는 임금인상, 고용보장 요구안과 비슷하다. 물론 국가사회의 책임성이나 분배의 중요성과 조세재정의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옳다. 하지만 성장과 일자리 관련 대책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돈 천원 주고 ‘좋은 술, 좋은 담배, 좋은 안주 사오고 거스름돈 까지 남겨 오라’고 명령하는 쌍팔년도 군대 고참과 비슷하다. 말로는 진보를 외치지만, 실제는 ‘지금 이대로’를 외친다. ‘경쟁 그만, 고용 안정, 국가와 대기업이 책임져라’는 그 정신의 정수다. 변화시킬 무엇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진짜 保守’라는 의미에서 ‘진保’라고 부를 만하다.

이 ‘진짜 보수’ 노선은 지금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전형적으로 체현하고 있는데, 열린우리당에서는 김근태의 뉴딜 노선이 여기에 약간 근접하였다. 하지만 김근태 뉴딜 노선은 재벌도, 노동계도, 시민단체도 시큰둥하거나 단호히 외면하였다. 노동계는 재벌에게 너무 많은 현찰을 주고, 자신들에게는 부도 가능성이 높은 어음을 준다고 생각했고, 시민단체는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을 타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제는 이념이다.

정치인이나 정당이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면, 이념은 오케스트라의 악보라고 할 수 있다. 이 악보는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피아노, 심벌즈, 큰 북 등 개별 악기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악보, 즉 세부 정책으로 구현 되어야 한다. 지휘자는 이것을 종합하고 조율해서 관객에게 선보인다. 그런데 한국은 개별 악기에 관한 한 명연주자가 있을지는 몰라도 오케스트라 악보가 없거나 너무 엉성하다. 또한 의욕만 넘치는 지휘자 아닌 지휘자만 넘쳐난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악보와 지휘자가 실물(정치)과 멀리 떨어진 강단에서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단 학자들은 멀리서 뒷짐만 지고, 정치인들이 별로 귀담다 듣지도 않는 훈수꾼 노릇에 자족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초월하여 정치 세력과 지식사회의 최대, 최고의 과제는 객관적 환경과 개혁 주체들의 역량에 맞는 국가.사회 개조의 이념과 이를 구현할 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념은 철학, 가치, 역사/현실인식, 비전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거시 담론과 바닥현실과 속살을 꿰뚫어 대중으로 하여금 '저 것이 살길'이라는 확신을 주고, 부푼 기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미시담론(개혁 각론)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정책 패키지다. 이념은 특정 집단의 이해와 요구를 중심적으로 대변한다는 의미에서의 당파성과 인간, 사회, 환경, 시장, 국가 등 주요 인자들의 동력학을 천착했다는 의미에서의 과학성이 결합된 정책패키지다. 돈 천원에 좋은 술, 담배, 안주 사고 거스름돈도 남겨오겠다는 식의 공약은 비전도 이념도 아니다. 한마디로 박정희 모델을 대체할 새로운 경제사회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름지기 시대정신을 제대로 구현하는 이념다운 이념이라면, 한때 공화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가 그랬듯이 대중의 가슴에 불을 지르며, 생활 현장에서 살아 숨쉬며, 다양한 대중운동을 일으킨다. 모순.부조리가 곪아 터지는 한국 땅에서 대중운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이념은 이념이 아니라 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부르짖는 이념도 마찬가지다.

한편 실력은 올바른 이념을 공유하고, 구체화하는 전문가 네트워크와 이를 실행할 인재풀이다. 이들은 건강한 정치생태계의 토양위에서 자라나는 나무와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참여정부와 범 진보세력이 동반 몰락한 핵심 이유는 진보의 오래된 고정관념과 정책기조가 대중의 요구, 기대, 고통, 불만에 제대로 응답할 수 없었고, 또 이것이 세력을 결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노무현은 시대정신의 대전환과 이념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여기에 응답하려고 노력이라도 하였다. '유연한 진보'론, '비전 2030'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보개혁 세력들은 아직도 노무현의 고민을 따라 잡지도 못하고 있다)

이 모든 오류 내지 한계는 참여정부와 범진보개혁 세력이 공유한다. 물론 이명박 정부와 보수 세력도 다를 리가 없다. 하지만 보수 세력은 원래 큰 틀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으려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념 부재가 큰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진보개혁 세력은 큰 틀을 획기적으로 바꾸려하기 때문에 이념 부재나 조야한 이념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 보다 이념도 조야하고, 실력도 없으면서도, 더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정말로 훌륭한 책

서평 치고는 너무 길었다. 책을 읽으면서 메모한 촌평을 보니 아직도 쓸 것이 많이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서평 형식으로는 쓰지 않으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크게 공감하는 바를 나누고 싶다. 유시민은 이렇게 썼다.

지식소매상은 '결핍'과 더불어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만약 내게 100억원의 자산이 있다고 한다면......부지런히 읽고 쓸 리가 없다.......너무 혹독한 결핍은 사람을 좌절에 빠뜨리지만 적당한 결핍은 창조적 에너지를 일으킨다. 적당한 결핍을 느끼며 사는 오늘의 삶이 내게는 무척 소중하다. (p359)

이 얘기는 바로 지금 나의 얘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헌법이라는 사회적으로 너무나 소중한 잣대이자 안경을 대중 속에 퍼뜨린 것에 대해 감사하고 싶다. 사실 내가 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력 중의 하나가 2007년 초에 ‘좋은헌법만들기 국민운동본부’ 일을 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이를 ‘노 빨아주기’라고 폄하했지만 나는 개헌 논의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것이 무조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적극 참여했다. 나는 사회디자인연구소(주) 이사 시절인 2006년 말부터 개헌 논의및 운동을 연구소 주요 사업으로 올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개헌 논의 촉구 1인 국회 앞 1인 시위라도 해 보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이러던 차에 2007년 1월 9일 노대통령의 개헌 발언이 나왔고, 나는 만시지탄이라고 받았고, 1월 13일에 연구소 식구들과 함께 국회도서관에서 토론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개헌에 대해서 대부분의 시민단체와 학자들은 정략이라고 폄하하고, ‘왜 뜬금없이 불쑥 내미냐’고 성토하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고 점잖게 충고했다. 물론 개헌논의를 2004~6년 기간에 전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기 반성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뒤늦게나마 거칠게 제기한 노대통령만 욕했다. 또 개헌 발의 철회 이후 근 2년이 넘게 흘렀지만, 그렇게 점잖게 충고한 사람들 중에서 제대로 된 개헌 논의 및 연구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를 통해 우리 학자들과 시민단체의 교사연한 태도가 특기이자 고질병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다시 말해 역사를 (작은 계기라도 잡아서)주동적으로 변화시켜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세력이 뭔가를 하면 이상적인 잣대를 가지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본령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내가 길게 유시민의 책 내용에 대해서 씹어댔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한민국 헌법을 시민들의 관심 속으로 끌고 들어온 공적은 조금도 퇴색될 수가 없다. 이는 <후불제 민주주의>는 정말 시대가 요구하는 좋은 책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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