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주년 광복절 맞아 안동출신 독립운동가 2명 추서
제64주년 광복절 맞아 안동출신 독립운동가 2명 추서
  • 경북인
  • 승인 2009.08.17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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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성지 안동, 독립운동가 최다 1,023명

▲이옥

제64주년 광복절을 맞아 안동출신 독립운동가 2명이 포상을 받았다. 이번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신간회 안동지회 등 1920년대 안동지역에서 활동한 남병세(南炳世, 이명 南東煥, 대통령표창),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사원 등 중국 상해?일본 동경 등지에서 활약한 이옥(李鈺 , 건국훈장 애국장)이다.

이로써 안동 출신의 독립유공자는 323명으로 늘어났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치로 미 포상 독립운동가 700명을 포함하면 무려 1,023명이다.

이번에 포상을 받은 남병세(南炳世, 1898.12.23~1956.5.24, 일직면 망호리)는 1925년 2월 20일 경북 청년대회의 발기회에서 선전부 위원에 선임되었고, 그 해 8월 화성회(火星會) 회원으로 예천시민 대(對) 형평사원 폭행사건에 대한 조사회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지난 1926년 봄 김남수(金南洙:예안면 오천출신)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에 참여하여 안동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고, 그 해 여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안동야체이카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27년 8월 창립된 신간회안동지회에 참여하며, 1928년 1월 18일에 열린 신간회 안동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는 전형위원 및 간사로 선출되었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1930년 7월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30년 12월 대구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또 이옥(李鈺, 1895.6.11~1928.12.25, 도산면 토계리)은 지난 1919년 11월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조사원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 철혈단원(鐵血團員)으로 동지규합을 위해 북경·봉천(奉天) 방면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1921년 일본 동경(東京)에서「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서무부장을 역임했으며, 1922년「동경조선노동동맹(東京朝鮮勞動同盟)」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1924년 3월 1일 在東京 조선인 단체 學友會, 조선노동동맹회(朝鮮勞動同盟會) 등의 연합 주최 하에 열린 3·1기념식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에게 피체되었다.

같은 해 4월 在東京 學友會 대표에 선임되어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창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1927년 2월부터 1928년 12월까지는 신간회 조사부원·의안작성부원·대표회원 등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또 1924년 6월 사회사정연구회(社會事情硏究會)를 창설하기도 했다.

안동은 1894년 갑오의병의 발상지이자 한국독립운동사의 출발점으로 독립운동을 가장 먼저, 제일 많이, 가장 오래 한 곳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안동 내앞마을 옆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있으며, 입구 기념비에는 1천명의 독립운동가 이름이 적혀 있다.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지금의 국무총리)인 이상룡, 초대 국민대표회의 의장(국회의장)인 김동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 지역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문의처 안동독립운동기념관 823-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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