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 천의 이름을 가진 검무산
천의 얼굴, 천의 이름을 가진 검무산
  • 안상학 시인
  • 승인 2009.10.01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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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시인의 검무산 기행> 경북도청 이전 예정지 주산 검무산(劍舞山)

산 이름을 두고 이렇게 말 많은 산은 본 적이 없다. 거물산(巨?山), 흑운산(黑雲山), 검무산(劍無山. 劍舞山), 검모산(劍帽山) 등이다. 여기에 최근 김휘동 안동시장이 주창한 문학산(文鶴山)까지 가세하고 보니 점입가경이다.

『영가지』(권기. 1601.)에는 거물산과 흑운산을 같이 쓰고 있다.

『경상북도지명유래총람』(경상북도교육원회. 1984.)에는 검모산(劍帽山)으로 나온다. 근방에서 지관으로 활동하는 어떤 사람은 이 산을 승전한 장수가 칼을 놓고 투구를 쓰고 앉아 있는 형상으로 풀이하고 있다. 인근 가일마을의 뒷산인 정산은 포로로 잡은 왜군을 형상한다고 말한다. 구담을 비롯한 이 지역은 왜군들이 퇴각하며 약탈을 일삼다 패퇴한 기록이 남아 있은 것으로 보아 민담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경북마을지』(경상북도?경상북도사연구협의회. 1992.)에는 검모산은 자취가 없고 대신 검무산(劍舞山)이 자리 잡고 있다. 거물산, 흑운산은 괄호 안에 넣어 놓았다. 유사 기관에서 하는 일인데 십여 년 만에 이름이 바뀐 것이다.

최근 도청 이전 문제가 눈에 잡히면서 김 시장은 이참에 산 이름을 문학산으로 바꾸자는 의견을 내놓은 상태다. 문학산은 문수산(文殊山. 1206m)과 학가산(鶴駕山. 882m)에서 따온 것이다. 백두대간의 소백산 북동부에 자리 잡은 옥돌봉(玉乭峯. 1242m)에서 곁가지 친 용이 문수산을 낳고 문수산은 학가산을 낳고 학가산이 검무산을 낳은 것이다. 이 지맥은 화산을 낳고 화산의 기운은 하회마을에서 맺혀 낙동강에 잦아든다. 검무산을 문학산으로 바꾸자는 의견은 문수기맥의 족보를 따져 윗대의 의미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불교적이고 도교적인 이름을 유교를 숭상하는 지역의 주산 이름으로 쓰자는 이야기다. 삼박자가 맞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그럴 듯한 작명이다. 문학도인 나로서도 비록 뜻은 다르지만 반가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산세를 보거나 주민들의 정서를 들추어 보면 과연 격에 맞는 이름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게다가 인천에는 이미 한글과 한자가 같은 문학산이 있다. 근처에 문학경기장이 있어서 낯익은 이름이다. 산의 형상이 학을 닮았고 서원이 있어서 문인이 많이 배출된 곳이라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격에 맞는 이름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알려진 이름을 구태여 도청의 주산 이름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검무산의 첫인상은 남성적이다. 정상 부분에 노출된 거대한 바위는 학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 거대한 투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산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은 자못 검푸르다. 검과 투구와 친한 장수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칼이 없는 장수의 이미지에서는 무과 급제를 한 엘리트 장군보다는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 걸고 나선 의병장 형상이 우선 떠오른다.

검무산은 평지돌출 형상이다. 기개가 서릿발 같은 이미지는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이 지역의 정서와도 닮았다. 이 산을 안산으로 둔 풍산 오미 출신의 근전 김재봉(槿田 金在鳳.과 추강 김지섭(秋岡 金祉燮.), 검무산을 배산한 가일 출신의 권오설(權五卨) 등 이곳에서 배출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기개를 닮았다. 그들의 비타협적인 큰 뜻의 굳고 거침없음은 이 산의 기운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본다. 평화의 시기에는 자신을 갈고 닦고, 위기의 시대에는 맨주먹으로 떨쳐 일어나는 선비정신의 기운이 느껴지는 산이 검무산(劍無山)이 아닐까. 손에는 검이 없으나 마음에는 검이 있는, 평시에는 검이 없다가 전시에는 비수를 뽑아 견위치명을 다하는 정신이 훨씬 가까울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공사 구별 없이 대체로 이 산을 검무산(儉舞山)으로 부르고 있다. 오랜 굴곡의 역사를 씨줄로 삼고 수많은 인물들을 날줄로 엮어 짠 영욕의 옷을 철마다 갈아입으며 우뚝하다. 이름을 바꾸는 일보다 여기에 싱싱하고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더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검무산이면 충분하다.


지난 9월 14일 검무산으로 갔다. 풍산읍을 지나 구담 지보 방향으로 난 916번 지방도로 접어들었다. 소산 가일을 지나 갈전삼거리 바로 못 미처 오른쪽으로 난 길로 따라 올라가면 여자지못(好民池)이다. 검무산이 넓은 호수를 껴안고 당당한 위풍을 드러낸다. 못에 드리운 그림자도 깊어 보인다. 못에는 전에 없이 붕어마름과 부레옥잠이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다.

갈전 1리 본동 마을 들머리에는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축대를 쌓아 보호하고 있다. 들판 가운데 또 한 그루 소나무가 있다. 어깨 좋은 추신수가 최선을 다해 공을 던지면 닿을 정도의 거리다. 한 눈에 보아도 동제를 지내는 나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고샅에서 만난 오치댁(83)은 “동구에 있는 게 할매고 저 논 가운데 있는 게 할배시더. 동제는 정월 대보름날 드니더”라고 귀띔을 해 준다.

공소 앞에 차를 받쳐놓고 산머리로 들어가는 고샅에는 솔가리댁(80)할머니가 땅콩을 캐고 있었다. “땅콩은 잎싸구에 파리똥 같은 게 앉으면 물을 대서 캐요”하며 한사코 까먹어 보고 가라고 인심을 쓴다. 도청이전에 대해서는 “아직 도청이 올 지 안 올 지 몰시더. 보상도 아직 안 나왔고”하며 심드렁하다. 여느 농촌이나 다름없이 이곳도 보이느니 노인들이다. 연안이씨 종가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산밑마을도 종가만큼이나 퇴락해 가고 있었다. 마을 바로 뒤 산머리에는 지은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원당정이 있었다. 한 때 조상의 삶을 기리려는 후손들의 정성이 엿보였다. 그러나 도청이전부지로 확정되면서 살기에도 그렇고 떠나기도 그런 갈피 없는 마음이 그랬을까. 사람이 자주 드나든 흔적은 없었다.

원당정을 끼고 산에 들어가면서부터 아름드리 맞춤한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간벌을 하여 소나무 숲을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일손 모자라는 고령의 동민들이 그랬을 리 만무하다. 얼마 안 올라가서 답이 나왔다. ??숲 가꾸기 사업??을 하고 있었다. 전기톱과 자루 긴 톱으로 잡목을 베고 마른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대체로 소나무들을 살리고 다른 나무들은 어지간하면 베고 있었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곳에서는 소나무라고 별 수 없었다. 몇몇은 베기 아까울 정도로 나이테를 둘렀다.

간벌꾼들을 지나 올라가는 길섶에는 일명 초롱꽃으로 불리는 도라지모싯대가 피어 있었다. 군데군데 커다란 바위들이 앉아 있었고 잡목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몇 시간 후면 이들도 베어질 것이다. 뒤따르는 전기톱 소리가 요란하기만 했다.

산에 든 지 오래지 않아 산길은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땅만 보고 헉헉대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아주 커다란 바위는 들판과 산의 거죽을 뚫고 도깨비 뿔처럼 솟아 있었다. 아니, 위용도 당당한 장군의 기개로 서서 부드러운 팔을 뻗어 너른 들판을 감싸고 있었다.

남쪽으로 굽어보니 갈전, 도양 들판과 시루봉, 낙동강 건너 광덕, 기산, 신성리로 이어진 강남평야를 끼고 앉은 봉화산(400.6m)이 마주 섰다. 왼쪽으로는 풍천 가일마을의 주산인 정산(232m) 너머 멀리 낙동강이 풍산평야를 끼고 화산(328m)으로 숨어들고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산합리(예천군 호명면) 주산인 거무산(227m) 너머로 모래펄도 좋은 내성천이 넉넉하게 꼬리를 감추며 호명면 소재지를 돌아나가고 있었다.

가근방에서 가장 높은 산답게 사방 조망이 시원하다. 거느리고 있는 산과 들, 그 사이로 넉넉하게 흘러가는 강, 사람들의 집이며 논과 밭은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소통하며 사는지 고스란히 볼 수 있다. 도청 하나는 참하게 끌어안을 수 있는 지세다. 다만, 좌청룡 정산과 우백호 거무산이 등을 돌리고 있는 형상이어서 마음에 쓰인다. 검무산 입장이다. 바꾸어 생각해보자. 멀리서 검무산을 바라본다면 정산과 거무산이 보호하고 있는 형상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외면하고 있다고 해서 탓할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경호원들의 표정이나 동작을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가는 것이다. 산도 앞과 뒤가 엄연히 존재한다.

오르는 길에는 육송과 왜송이 등성이를 중심으로 좌우로 포진하고 있었다. 동록을 타고 내려가는 길은 아름드리 아카시아가 많고 사이사이 기세 좋은 육송이 자라고 있었다. 등성이에서 내려 양광리로 내려가는 길에는 물봉선화가 많았다. 군데군데 구절초가 순한 백색의 자태를 소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초가을 어수선한 길섶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한 바퀴 돌아볼 요량으로 호명으로 차를 몰았다. ??할매동수나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고개를 넘었다. 호명면 산합리 1리와 2리 사이에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917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거기에서 우회전하면 흥구마을 삼거리가 나온다. 지방도에서 내려 우회전하면 풍천 오미동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흥구마을 삼거리 못 미친 곳에서 검무산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랐다. 웅크리고 있는 거무산 위로 검무산 봉우리가 얹혀 있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거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동행한 권기상 기자와 들풀 전문가 권대성도 한 눈에 거미로 판정했다. 거무산은 거미의 몸과 각진 다리의 형상이며 검무산은 거미의 머리 형상이었다.

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서 형세가 바뀌기 마련이다. 거무산은 호명에서 바라보면 한 마리 거대한 거미다. “거무”는 안동 말로 거미가 아니겠는가. 거무산은 호명에서 부르는 산 이름이었을 것이다. 장수의 기개를 느끼게 하는 검무산도 호명에서 보면 거무산과 합체가 되어 거대한 거미 한 마리로 다가온다.

검무산의 북록 쪽으로는 오미동이 있다. 풍산김씨 집성촌이다. 죽자봉(竹子峰. 248m)을 주산으로 삼고 검무산을 안산으로 두고 있다. 풍산김씨 종택에서 검무산을 바라보면 집의 중심축에서 남쪽으로 어슷하게 틀어 앉아 있다. 안산을 마주보길 꺼려하는 지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기세 좋은 검무산도 오미동에서는 좌청룡 아미산(峨嵋山. 160.1m)이 다정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는 그 너머에서 안산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에 우뚝한 바위 봉우리도 오미에서는 느낄 수 없다. 안동의 여느 산과 같이 부드러운 모습이다.

마을 가운데 솟은 동산에는 수령 280년 된 청백송(靑白松)이라는 매우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다. 최근에는 이곳에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마을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석조물들이 둘러 있고 가운데는 누각을 지어 놓았다. 여기에 올라 청백송과 검무산을 감상하는 멋은 가히 일품이다.

오미동과 마주하고 있는 검무산 골짜기는 안동권씨 별장공파 일족이 세거했던 방계미다. 대여섯 호 남짓한 마을에는 삼암정(參巖亭)과 충효사(忠孝祠)가 있다. 그리 유서 깊은 곳은 아니지만 검무산이 지니고 있는 삶의 흔적에 보탤만한 곳이다.

오미동을 빠져나와 괴정으로 해서 풍산으로 들어서는 길에 돌아본 검무산은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무산을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는 소산마을의 뒷산과 정산이, 오른쪽으로는 오미동 뒷산이 나란히 섰다. 다정한 삼형제의 모습이다.

검무산, 천의 이름과 천의 얼굴, 천 가지 인간사와 만 가지 세상사를 안고 있는 산, 안동에서는 가장 넓고 비옥한 곡창을 끌어안고 있는 산, 안동에서 유일한 평야지대인 이 산의 품을 도청과 맞바꾸는 모양인데 득실을 따지기가 힘들다. 아깝고, 안타깝고, 하릴없고, 어쩔 수 없는 심정은 나 같은 떨거지나 하는 소리일까. 강 건너 강남평야까지 머지않아 안동의 또 다른 강남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면 더 그렇다. 세상은 사람 사람마다 그 나름 나름으로 돌아가는 게 이치지만 자연과 가까운 삶을 희생해서 얻는 것이 과연 슬픔일까 기쁨일까. 정신관은 보수 일변도인데 자연관은 어찌하여 그 반대로 질주하는지 모르는 지금이다. 자연의 일부였던 인간이 자연을 밀어내고도 살아갈 수 있을지 아는 사람 어디 없을까. 돌아오는 길에는 검무산에서 바라보았던 내성천과 낙동강 또한 자꾸만 눈에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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