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남
나와 다른 남
  • 서강홍
  • 승인 2009.11.10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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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은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면 어느 교회에서 나왔다는 불청객의 방문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내미는 홍보물을 거절해 보지만 막무가내로 내 맡기는 끈기에 거의 굴복하고야 만다. 그것을 보든 말든 받아들었을 때 그도 일차적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만족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절이나 성당에 다닌다는 말 한마디로 떨어지면 좋으련만.

‘잠시 실례합니다. 한 번만 읽어 봐 주십시오.’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길에서 만나는 반갑잖은 손님이다. 못 본 듯이 지나치거나 손사래를 쳐 보지만 아랑곳 않고 따라 붙어 끈질기게 내 맡기는 유인물은 대개 특정 종교단체나 사회단체의 홍보물이다.

‘제겐 필요 없습니다. 단 한 장이라도 이것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낭비를 막는 일이 아닐까요?’ 억지로 받은 유인물을 휴지통에 넣으면서 내가 준비해 둔 말인데 요즘 들어 이 말이 통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내겐 필요 없는 자료라고 하찮게 여겨서도 안 된다.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는 천금보다도 귀한 자료가 될 수도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한다. 절망에 처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종교도 약이 될 수 있다. 설령 내가 사교라고 단정 지은 종교라 할지라도 그에겐 태양 같은 희망의 신앙이 될 수도 있다.

내게 좋다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무리하게 권함은 실례다.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이 타인의 입에도 맞으리라는 미련함과 같다. 사물의 좋고 나쁨은 그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결정지어 지는 것이지 개인의 주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공자님께서도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하여 꼭 그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無適也) 또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반대하지도 않는다(無莫也) 고 하셨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듣는 대상에 따라서는 욕이 될 수도 있다. ‘백 살 까지 사시겠습니다.’는 인사도 구십 구세의 노인에게는 어울리지 않고 ‘자리를 빛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는 칭송도 대머리에게는 욕이 되는 것이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유독 혼자만의 이야기로 즐기는 사람을 본다. 그것도 간략한 요지만이 아니라 긴 설명까지 곁들이는 경우이다. 어지간한 흥미나 긴요한 내용이 아닌 이상 끝까지 듣기에는 많은 인내가 요구된다.

남의 말을 듣는 것은 내가 이야기하는 것 보다 세배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일생일대의 중대사인 주례사도 오분을 초과하면 지루하다. 다카이 노부오라는 일본인은 ‘삼분력’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인간의 주의력은 삼분이 넘어가면 주의가 산만해 진다. 때문에 최상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필요로 하는 시간은 삼분이다 고 하였다.

그는 또 삼분 안에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면, 삼분 안에 상대를 사로잡을 수 있다면, 삼분 안에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막힐 것이 없다, 삼분은 인생에서 기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고 하였다.

▲서강홍 수필가
컵라면은 삼분 만에 끓는다. 권투의 한 라운드도 삼분이다. 면접시험은 대체로 삼분 이내에 이루어진다. 삼분이란 한 마디로 말해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총합 단위이다.

짧은 시간에 상대방을 설득함에는 단순한 말솜씨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기업의 면접시험이 요구하듯 고도의 상황 판단력과 사고력, 의사전달력, 타인과의 친화력 등이 필요하다.

이러한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와 다른 남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와 나의 관계를 통찰하는 안목과 겸허한 자세에서 나온다. 진득하게 늘어놓는 나만의 이야기로 남을 감동케 하려는 이는 미련한 사람이다. 이야기에도 급소가 있다. 말이 곧 수행(修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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