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안동시 평화동1] 경북선 간이역과 철도관사 마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동네
[우리동네-안동시 평화동1] 경북선 간이역과 철도관사 마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동네
  • 안동시공동기획연재
  • 승인 2018.12.10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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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12)

프롤로그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 따라 나무가 우거진 오래된 큰 숲인 쑤가 있고 야트막한 산 아래 집들이 점점이 모여 있고 그 앞으로 배추밭이며 뽕나무밭이 있고 낙동강 강가로 흘러가는 개천 따라 논들이 펼쳐져 있었던, 그야말로 평화롭던 동네 평화동에 본격적으로 집들이 들어서고 지금의 동네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동네에 철도관사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지금도 그때 닦은 도로와 골목이 그대로 있고 철도관사로 쓰였던 집들이 있고 오래전 여기가 옥동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옥동삼층석탑이 말없이 지키고 서 있는 동네 평화동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평화동 관내구역도
평화동 관내구역도

 

경북선 간이역과 철도관사 마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동네

평화동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철도관사 집들이다. 철도관사가 지어지려면 그만한 규모의 철도망이 연결된 요충지여야 했다. 당시 안동에 평화동 규모만한 철도관사가 지어졌다는 건 안동역이 그만큼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동에 처음 철로가 놓인 것은 김천과 안동을 잇는 경북선 철로였다. 경북선에 이어 중앙선까지 연결되면서 안동은 철도를 통해 사방으로 연결이 될 수 있었고 사람과 물자가 끊임없이 오가는 경북지역 철도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시대 철도는 그냥 오는 게 아니었다. 철도를 건설하고 감독할 사람, 그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를 통해 실어내갈 물자를 조달하고 수송을 담당할 사람들과 관리들, 그리고 그 식솔들과 함께 일본사람들이 왔고 그들이 지낼 공관이 필요했다. 다른 지역의 관사가 철도 주변 지역에 주로 형성된 것과 달리 안동역 부근은 이미 시가지가 형성되어 부지를 지을 만한 공간이 없었던 터라 당시 주민 수가 비교적 적고 뽕나무밭과 밭이 대부분이었던 평화동 구역이 철도관사 부지로 선정되었다.

 

그전에 평화동 그 터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집을 비워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언덕빼기로 물러나 앉았고 운안천 건너 안기동이나 운안동 산꼭대기로 올라가야 했다.

1940년대 평화동 지도사진(안동역 제공)
1940년대 경북선 노선과 평화동에 있던 간이역이 그려진 지도. 안동역 제공

 

그전에 어른들한테 듣기로 원래는 우리집이 철도관사 있는 그쪽에 살았다고 그래요. 그런데 철도관사 짓는다고 쫓아내니까 사람들이 그 뒷산 대박(산등성이)으로 다 올라갔다고. 산비탈로 올라가고 토지는 다 뺏겨버렸다고. 철도 관사 한다고 나가라는데 어째. 그때 보상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때 사람들이 운안동 산 쪽으로 다 올라갔어요. 운안동은 그전에는 집도 별로 없었어요. 지금 진명학교를 지을 때 거기 있던 산을 밀고 지어 놨잖아요. 거기 앞에 철도청장 집이 있고요. 진명학교 있는 데가 그전에 다 산이었는데 거기 우리 산이 있었어요. 그런데 학교 짓는다고 내놓으라고 해서 우리 할아버지가 그때 내줬다고 그래요. 그냥 줬는지 얼마 받고 팔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1967년 건립 당시의 진명학교. 뽕나무밭이 있던산을 밀고 학교를 지었다
1967년 건립 당시의 진명학교. 뽕나무밭이 있던 산을 밀고 학교를 지었다

 

그때는 이 동네 철도관사에 일본사람들만 살았고 한국사람들은 안 살았어. 관사동네 주위로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우리 서부초등학교 다닐 때도 혹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그 동네 바로 옆으로 안 가고 빙 돌아서 다녔지.”

철도관사를 지을 때 어른들이 평화동에서 운안동으로 이사를 갔다는 조영래씨의 말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1967년 건립 당시의 진명학교. 뽕나무밭이 있던산을 밀고 학교를 지었다
평화동의 중심지였던 진명학교 앞길

 

철우회장에게 듣는 평화동 관사동네

안동철우회 회장을 맡고 있는 류응하씨가 마침 철도관사 터에 살고 있어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류응하 회장을 처음 만난 곳은 서부초등 지나 GS25 편의점이 있는 건너편 길가였다.

류응하 철우회장
류응하 철우회장

 

서부초등학교 지나 여기가 옛날부터 평화동 입구야. GS25 자리가 예전 경북선 다닐 때 임시정거장이 있던 자리고 평화동 철도관사에 근무하는 철도직원들이 출퇴근 할 때 그걸 타고 다녔다고 부친한테 들었어. 그리고 평화동하고 서부초등학교 사이로 안기천이 흐르고 있었고 이 사거리 입구에 하천 위로 평화동에서 서부국민학교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었어. 일본사람들이 철도관사 동네를 만들 때 철로 깔 때 놓는 철목으로 놓았어. 나도 그 다리 건너서 학교 다니고 했으니까. 그러다가 안기천이 복개되면서 그 다리도 없어지고 지금 우리집 골목 끝 목욕탕 건물 앞에 있던 개천가에 일제시대 때부터 있던 우물터도 없어졌지.”

일본에 있는 관사동네도 그렇고 일본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철도관사 동네를 건설할 때도 기본으로 주거공간과 함께 마을 앞이나 중앙에 동네 공동우물과 목욕탕, 운동시설을 기본적으로 배치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평화동에 있었던 우물터의 위치가 파악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 11번 버스가 서는 평화동 도로변 어학원이 있는 곳부터 그 다음 블록 구간이 철도직원들을 위한 운동장과 정구장이 있었던 자리이다. 지금 진명학교 앞쪽 옥동삼층석탑이 있는 그 아래 골목 앞쪽으로 해방 후 평화동 사람들의 휴식공간이자 산책하는 곳이 되었던 놀이터가 있던 자리라는 것도 확인을 해주었다.

철도관사 목욕탕 자리
철도관사 목욕탕 자리

 

내가 이 동네 살면서 철도관사에 대해 알고 있는 철우회 직원들하고 선배님들한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여기에서부터 큰 도로 따라 나가면서 철도운동장이 있었고 철도병원이 있었어. 그리고 여기서부터 철도관사 골목이 시작되는 거지. 이 골목 꺾어서 바로 지금 공사하고 있는 곳이 당시 1호 관사가 있던 곳이라고 보면 될 거야.”

 

평화동의 큰길은 폭이 8미터고 구획마다 꺾어드는 작은 골목길은 폭이 6미터인 것에서부터 하수구 배관 연결망에 하수구 뚜껑 위치까지 하나하나 데리고 다니며 설명을 해주었다. 한 골목씩 돌아 들어가며 당시 흔적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집들을 찾아 보여주고 자신이 사는 집으로 데려갔다. 자신이 사는 집이 오래되어 양옥으로 다시 지었는데 덕분에 집을 허물 때 지붕을 반으로 딱 가르면 정확히 두 개의 집으로 분리가 되어 출입구까지 둘이 되는 관사집의 구조를 눈으로 확인하고 세세히 알게 되었다고 했다.

 

5호 관사였던 예집을 허물고 새로 지을 때 깊이 박혀 빼기 힘들었던 관사집의 지지대 역할을 했던 침목과 하수구 덮개가 정원의 일부에 남아있다.
5호 관사였던 예집을 허물고 새로 지을 때 깊이 박혀 빼기 힘들었던 관사집의 지지대 역할을 했던 침목과 하수구 덮개가 정원의 일부에 남아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데다 오래된 동네지만 주차나 교통이 편리해 전부터 평화동에 퇴직한 철도직원들이나 퇴직 공무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내가 평화동 저 언덕 너머 동네 살다가 부친 따라 이 이 집으로 이사온 게 고등학교 2학년 때인데 65년도일 거야. 고등학교 졸업하고 철도학교를 들어갔어. 그때는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는데 취직이 우선 보장 됐으니까. 우리 부친이 그전에 철도역장도 지내시고 했는데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지. 그때 보니까 집집마다 골목 따라 라인 따라 집앞 하수구로 다 연결이 되어 있었어. 그리고 각 집 앞에 하수구를 모으는 시설이 묻혀 있었고 그렇게 모아진 하수가 도로 옆으로 만들어진 하수구로 흘러들어가게 되어 있었어.”

진명학교 교문 바로 오른쪽 옆에 있는 집이 철도청장 집이고 철도청장 사택 아래 쪽으로 과장급들 집이 있었어. 그 집들은 규모가 있는 집들이지. 지금 보이는 저 집이 운수과장 집이고 그 건너가 기술과장 집일거야. 그리고 반대편 이쪽 골목으로 꺾어드는 이집이 안동역장 이 살았던 집이었어. 지금은 보수를 했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관사 형태가 고대로 남아 있었던 집이야. 여기가 아마 30번지 쯤 될 거야. 이 골목 끝에 보이는 저 집이 우리집인데 우리집이 33번지니까. 이 안동역장 집도 옛날에는 이런 담장이 아니고 집집마다 쭉 둘러가며 측백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그 나무가 담장 역할을 했어. 철도청장 집 둘레에는 아마 소나무가 심겨져 있었을 거야. 큰 도로가에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집집마다 나무담장이 둘러쳐져 있던 게 생각 나.”

옥상 위에서 바라본 전경1. 서부시장 맞은편 철도병원이 있던 자리가 보인다.
옥상 위에서 바라본 전경1. 서부시장 맞은편 철도병원이 있던 자리가 보인다.

 

옥상에 올라가서 보면 동네 남아있는 관사집들을 확인할 수 있다며 옥상으로 안내를 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집들이 더 많았지만 동네 관사집들 중에서 옛날 형태가 남아있는 집이 지금은 15채 쯤 될 거라고 이야기를 들으며 옥상에서 동네집들을 보니 군데군데 옛집 형태가 남아있는 집들이 보이고 집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지만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되었던 집을 각각의 집으로 분리를 하고 담장을 두르거나 지붕 기와나 부엌 화장실 등 일부를 보수를 하기도 했고, 아예 집을 허물고 새로 양옥 건물을 올린 집들에 요즘 지어지는 높은 건물들까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공중목욕탕자리였다는 붉은 지붕집과 골목 건너 관사를 짓던 당시 그대로의 바둑판 모양의 박공지붕이 그대로 남아있는 집도 보였다. 관사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집들도 목조와 지붕은 세월에 내려앉기 마련이라 기와지붕을 올린 집이 대부분인데 박공지붕까지 그대로인 집이 한 곳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은 새 집들이 훨씬 많지만 그래도 그 사이에서 옛 관사 건물들이 묻히지 않고 존재감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 층을 더 올라가 3층 옥상에서 보니 앞쪽에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된 두 개의 집 형태가 잘 드러나는 관사집이 보였다.

옥상 위에서 본 40호 관사 전경
옥상 위에서 본 40호 관사 전경

 

 

예법 선생 서영규의 평화동 살이

1932년생 서영규 선생은 무주무 서씨로 일제시대 학교를 다녀녔다. 남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안동농림학교를 나와 교사 생활을 했다. 선생보다 두 살이 적었던 할머니는 아프다가 8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떴다.

서영규 선생
서영규 선생

 

내가 일정시대에 학교를 다녔어. 남후초등학교 졸업하고 농림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어. 국민학교 졸업하고 예법 공부를 따로 배웠어. 해방되던 무렵인데 내 나이가 열다섯인가 그랬어. 할배가 이조말기에 조정 중신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하니까 안동으로 왔거든. 그때 안동 지금 영호루 바로 아래 집에 한림 선생이라고 있었어. 그분도 조정에 있다가 내려왔는데 그전에 한림학사였다고 하더라고. 우리 할배가 그분하고 친구래. 할배가 너 그 어른한테 가서 배워라 해서 내가 그 남한림 선생한테 전통예법을 배웠어. 아마 요즘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 내처럼 그렇게 정통으로 예법공부를 한 사람이 없을 거래. 그 덕에 내가 방송국서 전통예절 방송도 하고 했어. 내가 전통예법을 공부를 해서 안동문화원에 예절 강의도 하고 했어.”

예학에 밝아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야기를 그린 사극 '바람의 화원'에서 축홀을 읽고 있는 서영규 선생
예학에 밝아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야기를 그린 사극 '바람의 화원'에서 축홀을 읽고 있는 서영규 선생

 

아예 모르면 그만일 텐데 아는 게 병이라고 보이는 거 듣는 거에서 잘못된 것들이 자꾸 눈에 보여 큰일이라고 한다.

지금 나와 있는 예법서 내용 중에 잘못 알려진 게 많아서 내가 성균관이고 문화원이고 정정해 달라고 자료도 보내고 했어. 예법이 현실에 따라 바뀌는 것도 어쩔 수 없고 좋은데 틀린 사실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인데 자꾸 틀린 거 지적하니까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애. 그거 좀 틀리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뭐 일일이 따지느냐고 말이야. 그런데 한 번 잘못된 자료가 책이나 교재로 나오면 다른 사람들은 그게 맞는 줄 알고 또 그걸 보고 쓰니 처음 근본이 뭐였는지도 모르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그게 안타깝지. 내가 그래서 예법 책을 세 권 냈는데 그런데 이제 나도 나이를 먹고 하니 전처럼 나서서 그러지를 못해.”

늙은이가 주책이라는 소리 듣기 싫어서 굳이 먼저 나서지는 않지만 지금도 요즘 새로 나오는 예절관련 책자들과 예법서를 구해 들여다보며 잘못된 점을 찾아 일일이 표시를 해 둔다. 혹 그 책을 만든 사람이나 혼인을 앞두고나 상을 당하거나 일이 있을 때 자신을 찾아와 예법에 관해 물을 때를 대비해서다.

경안고등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운안교를 거너 걸어서 출퇴근을 하던 시절.
경안고등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운안교를 거너 걸어서 출퇴근을 하던 시절.

 

서영규 선생이 평화동으로 집을 사서 온 것이 경안고등학교에 재직하게 되면서였다고 한다.

“6.25 사변나고 군인 모집되고 가기 싫어 도망가다 잡혀갔는데 경산 하양에 있는 부대서 훈련받는데 장교가 구둣발로 막 차더라고. 그런데 한 3일 있다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어. 그러니까 상황이 급박하니까 훈련시키고 할 시간이 없으니까 우선 집에 가 있으라고 하더라고. 그 길로 전쟁통에 끌려갔으면 죽었을 텐데 그 바람에 집에 와서 있다가 안동여고 선생으로 들어갔지. 안동농림학교를 3년 만에 1등으로 졸업하고 그 나이에 안동중학교 강사를 하다가 안동여고 선생을 했다고. 그때 가르친 중학교 제자 중에 안동시장 한 정동호도 있어. 안동여고 있다가 사립인 경안고등학교 가서 교장을 하다가 20년 전에 퇴직을 했지.”

 

그때 55평집을 23만원인가 그래 주고 사서 이사를 했다. 그전에 어른들 모시고 집에서 다니다가 시내로 나오려니까 어른들이 못 나가게 해서 신시장 인근에 살던 고모네 집으로 와서 얹혀살다가 평화동 한옥을 사서 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없던 그 시절에 집 한 채의 가치는 컸다. 방 한 칸이라도 놀리는 이가 드물었다.

 

우리도 여기 한옥 사서 와서 안채는 우리가 쓰고 사랑채하고 아래채는 두 집에 세를 줬어. 세 집이 산 거지. 집집마다 식구들이 네다섯이니까 다해서 이 집에 스무 명이 넘게 살았지. 그때는 이 동네 사람도 많고 방이 귀했어. 없어서 못 줬어. 우리 집에서 조금 올라가면 나이아가라 식당 있는 데서 운안동에서 안기동 쪽으로 건너가는 나무다리가 하나 있었어. 운안교라고. 경안고등학교가 길 건너면 바로니까 거기로 해서 걸어서 출퇴근 했지. 내가 여기 올 때만 해도 공설운동장 부지 자리 거기가 복숭아밭이었어. 거기 운동장 만들려고 터 닦다놓은데 미군정 시절 미군들이 주둔하기도 했지. 터가 좁아서 공설운동장은 저 건너 정상동에 공설운동장을 짓고 나중에 그 땅은 택지를 분양을 했거든. 그때 나도 거기 택지를 분양받아서 집을 지었다가 후에 팔았어.”

 

경안고등학교 재직시절 찍은 사진으로 당시 미군정 시기로 안동 평화동에 주둔했던 미군장교들과 군인들과 경찰 간부 모습도 보인다
경안고등학교 재직시절 찍은 사진으로 당시 미군정 시기로 안동 평화동에 주둔했던 미군장교들과 군인들과 경찰 간부 모습도 보인다

 

그때 택지를 분양 받아서 집 지은 사람들 중에는 평생 써 온 일기로 이름이 알려진 해병대 나온 권오전 어른도 있는데 그때 분양받아 지은 2층집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는 반가운 이야기도 들려줬다. 90년대 들어 낡은 집을 허물고 양옥을 올렸다. 지금 동네에 보이는 양옥집들도 그 무렵을 전후해서 새로 지어진 집들이 많다.

 

철우회관에서 만난 조영래씨가 기억하는 평화동 이야기

 

평화동 살다가 운안동 사람된 새골길 조영래씨
평화동 살다가 운안동 사람된 새골길 조영래씨

 

마을의 옛 모습을 떠올리자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오랜 세월 마실을 지켰던 두 개의 큰 쑤 마을숲이다.

우리 집이 운안동 새골인데 나는 어릴 때부터 사무 거 살았어. 우리가 철도관사 짓는 거부터 봤지. 그 동네 옆으로 사무 지나 학교다니고. 그전에 복개되기 전에는 평화동하고 운안동하고 한동네같이 살았어요. 마실 사이로 개울도 흐르고 쑤도 두 개나 있고 그랬어요. 안기천과 운안천이 이쪽 저쪽으로 흘렀고 마실 앞뒤에 쑤가 있었고 논밭도 많고 사람 살기에 좋았어요. 앞에도 쑤가 있고 마실에 저 위에 올라가면 거기에 뒷쑤가 있고. 옛날에 거기는 온통 뽕나무 배나무밭이었어. 이쪽 안기천 쪽으로는 논이고. 옛날 철도운동장이 나이아가라 식당 있는 데서 안기천 따라 가다 평화동쪽으로 건너가면 왼쪽으로 쑤가 있고 운동장 터가 있고 저 우에 운안동 쪽으로 올라가며 뒷쑤가 또 있는데 쑤가 큰 숲을 말해. 시에서 공설운동장 한다고 터 닦다가 말았던 복숭아밭은 6.25후에 생겼는데 쑤를 지나 그 우로 있었어.”

윗대까지는 평화동에서 살았던 데다 서부초등학교까지 걸어다녔던 조영래씨는 손으로 위치까지 그려낼 정도로 평화동에 관한 기억이 또렷했다.

나이아가라 식당 있는 데서 지금 복개해서 도로가 돼서 그렇지 운안동 그쪽으로 거랑이 있었어. 거랑 따라 길이 나 있으니까 반은 거랑이고 반은 길이래. 나이아가라 식당 자리가 지금 완구점에서 안기동 쪽으로 조금 올라간 길가 자리래. 거기 완구점 있는 데서 안기천 쪽으로 운암교라고 다리가 있었어. 안기천하고 운안천이 만나는 지점에 운안교가 있었다고 봐야지. 운암교에서 나이아가라 식당은 도로 쪽에 있었기 때문에 식당 자리는 복개되면서 도로가 되어버렸지.

공설운동자부지로 조성되었다가 후에 일반에 분양되어 70년대 부터 집들이 들어선 평화동 골목길. 저 멀리 언덕길을 넘어간 곳에 평화동 주민센터가 있다.
공설운동자부지로 조성되었다가 후에 일반에 분양되어 70년대 부터 집들이 들어선 평화동 골목길. 저 멀리 언덕길을 넘어간 곳에 평화동 주민센터가 있다.

 

공설운동장이 운암교 건너가지고 앞쑤 있는 데서 위쪽으로 있었는데 철도직원들이 운동도 하고 6.25 사변 나고는 또 미군이 거기 주둔해 있었는데 미군들이 거기서 야구도 하고 그랬어. 안기천 바로 건너서 거기서부터 운동장이었고 목욕탕도 그 한쪽 가에 있었고. 지금 안기천 복개된 도로가 목욕탕 그 자리가 철도운동장 북쪽 끝이라고 보면 돼. 목욕탕에서 운동장까지 거리가 한 백미터쯤 떨어져 있었을 거라.

옛날에 평화동에는 본래 집이 별로 없었어요. 평화동, 운안동도 사람들 집 있는 데 말고는 그전에는 다 들이랬는데 거기를 밀고 철도관사가 들어선 거지요. 철도관사 집이 숫자가 많았는데 평화동 입구에서부터 저 우리 동네 운안동 사단 넘어가는 길 중간까지 관사가 있었어요. 사단 넘어가다가 남쪽으로 해가지고 가다가 관사 끝이 중간에 혜성방앗간 있는 데서 난 길이 있는 데 거기까지 있었어요. 옛날에 혜성방앗간 쪽에서 내려오면서부터 거기에 사람이 많이 살았어요. 음달에 많이 모여 살았어요.

 

목욕탕 있는 데까지 안 가고 혜성방앗간 기준으로 갈림길이 있어서 운안동하고 평화동으로 중간에 갈라져. 혜성방앗간 거기는 운안동이고 거기서 조금 아래로부터는 평화동이고 그래.

 

1995년도인가 행정구역은 평화동으로 합해져서 운안동도 평화동으로 되어 있지. 조군학이라고 그 친구가 지금 운안동 마무골에 살고 있는데 자기 본적은 평화동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이는 우리보다 아랫대인데 그 집 윗대 어른들이 거기 평화동 살다가 올라갔으니까 본적이 그래 돼 있다고 그러더라고.

 

조영래씨의 말에서 새로이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은 철도관사의 범위에 관한 언급이다. 지금까지 철도관사 관련해서 나온 대표적인 자료는 1954년에 찍힌 흑백 항공사진인데 거기에는 이미 지금 산림청자리인 보안대 아래로만 철도관사 모습이 보여서 안동의 철도관사 규모가 현재 다른 지역에 남아있는 동네에 비해 작게 형성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어졌다. 그런데 만약 구술증언뿐이지만 KBS방송국 언덕 아래 운안동과 평화동의 경계가 되고 있는 혜성방앗간 아래까지 관사가 형성되어 있었다면 관사동네의 규모가 훨씬 더 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조사가 주로 6.25를 전후해서 관사를 불하받거나 그 이후 60년대에 관사를 사서 평화동으로 와서 남아있는 관사만 본 사람들의 증언이 대부분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실제 관사가 지어질 당시까지 조부와 부친과 함께 평화동에 살았고 운안동으로 올라가서도 관사동네가 형성되는 것을 지켜본 조영래씨가 그 시대를 산 어른들한테 직접 듣고 본 상황에 대한 구술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크기 때문이다.

 

내가 1927년생이래. 우리가 쪼매할 때 관사 짓는 거 보만 일본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지진에 대비해서 먼저 12개 말목을 집 지을 곳에 돌아가며 박더라고. 돌아가면서 말목을 박고 그리고 나서 세멘 공사를 하더라고. 그래가지고 큰 쇳덩어리를 가지고 여기서 당기고 저기서 당기고 해서 그때 말로 망께 박는다고 그랬는데 그렇게 말목을 박아가지고 일하는 걸 우리가 봤어요.”

 

우리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해방 되었으니까 내가 서부초등학교 5회래. 우리는 기록이 없어. 그때는 학교 이름이 옥동국민학교랬어. 우리가 들어가니까 최고 학년이 5학년이더라고. 여기 평화동을 옛날에는 옥동이라고 그랬다고. 파출소도 옥동파출소고 삼층석탑도 옥동삼층석탑이고. 학교도 옥동국민학교이고.

류응하 회장은 처음 들어갈 때는 옥동국민학교였는데 졸업할 때는 서부국민학교라고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왜 그랬냐 하면 역 앞에서 가까운 동부국민학교가 일본사람들이 댕기는 학교랬어요. 관사는 평화동에 있어도 서부학교 안 댕기고 일본 철도직원 자녀들은 다 동부국민학교를 다녔어요. 거기는 일제 때는 한국사람들은 안 댕기고 일본사람들 자식들만 다녔어요. 그때는 학교 이름이 동부가 아니었어. 조선사람들은 여기 옥동초등학교 다니고. 그쪽 동북국민학교 옆에 세웠던 신사에도 일본사람들만 다녔어. 해방되고 학교 명칭이 그래 바뀌게 됐다고.”

그때 시내 복판에 중앙초등학교 생기고 저쪽 법흥동 있는 데는 동쪽에 있는 학교라고 동부국민학교라고 하고 이쪽은 서부국민학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세월 지나 우물터도 없어지고 안기천하고 운안천하고 같이 복개가 됐고 평화동과 운안동은 복개한 도로를 기점으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조영래씨에 이어 또 한사람 마무골 살지만 본적은 평화동으로 되어 있다는 조군학도 철도관사에 대한 기억을 보탰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기억들이 보태지면서 평화동 관사동네의 윤곽이 어느 정도 선명해져 간다. 철도관사에 대한 조군학의 말을 최대한 들은 그대로 옮겨 적어 보자면 이렇다.

철도관사는 운안동에서 보면 거리가 멀지요. 내가 알기로 평화동 입구에서 쭉 가다가 서부시장 후계자식당 있는 곳을 건너면 유의원이라고 있었어요. 지금 유내과 거기가 철도병원 자리였어요. 옛날에 그 유의원이 우리 동네까지 왕진가방을 들고 와서 진료를 봐줬어요. 그분 이름이 유경열인가 그래요. 우리 어른들도 보러오고 우리 아부지 아플 때도 까만 왕진가방 들고 왔다 가고 했던 게 기억나요. 거기서 진명학교 앞쪽 거기가 관사동네 중심지였어요. 유의원이 하던 철도병원 거기서부터 해서 진명학교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도로 따라 그 일대가 관사동네 중심이었고, 옛날 방첩대 일명 보안대 있는 곳에서부터 현재 농협북부지소 있는 데까지가 원래 철도관사지역이었고, 그 위로 지금의 평화약국 있는 데까지 다 공터였어요.

그리고 더 올라와서 매일세탁소 위로 올라오면 평화약국 거기서부터 상일아파트 입구 건너편 거기까지 다 복숭밭이었어요. 공설운동장을 만든다고 부지를 조성했는데 못 하고 비어있었는데 나중에 미군들이 안동에 사단을 만들 때 거기에 천막을 치고 주둔을 하면서 사단 공사를 했어요.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보면 미군들이 낮잠을 자고 있고 했는데 거기 천막 밑으로 아이들이 손을 펴서 넣으면 미군들이 그 위에 설탕이나 건빵을 주기도 했어요. 천막을 열거나 들여다보면 안 주고 슬그머니 손만 밀어 넣으면 건빵 같은 걸 얹어주고 그랬어요. 그때 우리는 그걸 그냥 안 먹고 집에 가지고 와서 놋그릇에 물 붓고 불려 먹었어요. 그때 미군 건빵 두 개만 물에 불려도 두 세배로 불어나서 그때 어려운 시절에 그거 먹으면 점심 한 끼 때우고 했어요.

 

그게 원래 시에서 김태동인가 하는 사람의 복숭아밭을 사가지고 공설운동장 부지로 조성을 하려고 구입을 해 놓았는데, 내내 공터로 있다가 전에 거기에 운안동 동사무소를 지었어요. 상일아파트 들어가는 입구 건너편에 운안동 동사무소가 있었어요. 그게 66년도부터 69년도까지는 거기에 동사무소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70년대 들어서면서 그 땅을 일반에 분양을 해서 매각을 하고 정상동 쪽에 부지를 사서 공설운동장을 거기 지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 분양을 받은 사람들이 70년대 후반부터 그쪽 평화동에 하나둘씩 집을 지어서 집들이 들어서고 지금 모습이 된 거죠.

 

평화동 관사 40호집 할머니

류응하씨 집 옥상에서 보았던 옛 관사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 집 앞으로 가보았다. 한낮인데 사람이 없다. 대문을 닫아 놓고 돌로 문을 고정시켜 놓았다. 다른 날 해거름에 다시 가서 집주인 이연향 할머니를 만났다. 올해 93세인 이연향 할머니가 해가 다 넘어간 텃밭에서 나물을 캐고 남아있던 고추대궁을 뽑고 있었다. 지난 번 왔더니 안 계시더라고 하니 골목 뒷집에서 고추꼭지 따는 일을 하고 있는데 5시에 마치고 오는 참에 텃밭 추수를 마저 하고 있다고 하신다.

 

골목길 안 40호관사 이연향 할머니
골목길 안 40호관사 이연향 할머니

 

요 뒤에 바로 돌아가면 고추꼭지 따는 집이 있어. 혼자 있으면 심심코 하이 가서 고추꼭지 따는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뭐라도 나누어 먹고 많이는 못 따도 매일 쪼매씩이라도 따면 한 푼 두 푼 모으면 용돈도 되고 좋아. 노인정 가면 거기도 돈 없는 사람은 마음이 안 편코 혼자 누워 있으면 온갖 잡생각에 속만 어지럽고 몸이 더 안 좋아. 자식들이 못하게 말리지만 혼자 누워 있으만 괜히 70 다 된 아들 걱정만 더 시키지. 내가 작년까지만 해도 까딱없이 안 아팠는데 올해부터는 조금 아파서 걱정이야. 그래도 움적거릴 수 있으면 일어나서 일 나가고 싶지 방에 누워 지내고 싶지는 안 해. 일할 거리만 있으면 아침에 7시에 가서 저녁에 5시에 마치고 와. 한 대여섯 명 여자들이 모여 같이 따는데 내가 나이가 많아서 다른 사람보다 적게 따지만 백 원 어치씩만 따도 그래도 모이면 돈이 되잖아.”

내 이름? , , . 우리 아부지가 지어준 이름이래. 우리가 풍산 우렁골 이씨인데 우리 아부지가 선비래 가지고 이름을 그래 지어줬어. 그런데 그런 선비가 왜 딸래미 학교는 안 시켰나 몰라.”

라고 하는 이연향 할머니는 1925년생으로 올해 93살이시다.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 속에는 못되게 굴었던 왜놈들과 무섭던 코쟁이 미군들과 절룩거리며 지나가던 인민군 병사들이 있었다. 동생들 넷이 다 와룡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인본인 선생이 집에 가정방문을 올 때 일본서 가져온 물건이나 비단 같은 걸 가지고 동네에 와서 쌀하고 바꾸어갔다고 한다.

그때는 쌀이 귀하고 일본사람들이 쌀밥은 먹어야 하니까 촌으로 그래 바꾸어 달라고 오고 했어. 일본사람들하고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애도 동생들이 학교 다니니까 아부지가 쌀을 바꿔줬어. 먹고 살기도 힘들 땐데 일본놈들이 그때 못된 짓 많이 했어. 흰옷 입고 다니면 물총 나버리고. 안동장에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가면 일본놈들이 나와가지고 뭐라 그러고 물총에 검은 물을 넣어서 일부러 흰 옷에다가 대고 쏴고 그랬어. 어른들이 안동장에 갔다 흰 두루마기에 검은 얼룩 같은 거를 묻혀서 시커멓게 해가지고 오고 그런 걸 봤어. 흰 옷 입지 말고 물들인 옷 입으라고, 양옷 입으라고 그렇게 하는 거지. 있는 사람들은 그때 검은 두루마기를 해 입었지만 못 사는 사람들은 없는 형편에 양잿물이라도 들여야 되는 거지. 그러디 일본놈들 가고 해방되고 좀 있다 이번에는 또 미군들이 들어오니 미군들은 코도 크고 몸뚱이도 크고 소리도 그렇고 말도 솰라솰라 그러고 무서웠어. 그때는 세월이 모도 참 어렵게 많이 살았어.”

평화9길 골목길 안 40호 관사 이연향 할머니집
평화9길 골목길 안 40호 관사 이연향 할머니집

 

8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와룡면사무소 있는 친정 마당에서 열여덟에 풍산 사는 배씨네 아들 스무 살 배선형과 식을 올리고 철도에 들어간 신랑 따라 부산에서 첫살림을 시작했다. 이동이 잦은 신랑을 따라 옮겨다니다가 아이들이 크면서 평화동 철도관사집을 사서 이사를 왔다.

이 집이 40호 관사인데 이 골목 바로 옆으로 안기천 거랑이 흘렀어요. 우리가 이 동네 이사온 게 50년 넘었어. 65년인동 66년인동 그래. 우리 큰 애가 올해 71인데 큰 애만 딴 데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그 밑에 둘은 여기서 학교 다녔지. 우리 딸이 5살 때 왔는데 그 딸도 지금 57살이래. 철도국에서 누가 불하 받아 놓은 걸 우리가 샀지 뭐. 할아버지가 처리를 해서 내가 잘은 모르는데 현금 조금하고 연부(대부이자) 해서 사서 온 걸로 알고 있어. 와 보이 일본사람들 살던 데라 가지고 큰 집에는 목욕탕이 있었고, 여기처럼 일반 직원들이 사는 집에는 목욕탕이 없고 방 2개하고 부엌, 좁은 마루 그래 돼 있었어요. 목욕탕은 동네에 공동목욕탕이 있었어요. 우리가 오니까 방이 다다미 깔려 있고 그랬는데 방이 6조 방도 있고 4조 방도 있고. 방 두 칸에 일곱 식구가 살았어요. 지금 우리집하고 똑같은 옆집은 비어 있고 내 혼자 살고 있어.”

 

한참 전에 먼저 가신 할아버지는 철도에 다녔지만 젊어서부터 몸이 약해 늘 약을 달고 살았다. 살림을 쥐고 돈을 잘 안 줘서 애들 학비에 생활비에 돈 한 번 타 쓸려면 사정을 설명하고 몇 번을 졸라야 줬다고 한다. 어디라도 나갈라면 얼굴에 분이라도 바르고 베니도 사 발라야 하고 여자가 따로 돈 쓸 데도 많는데 그걸 일일이 말하기가 그래서 젊어서부터 일거리를 찾아서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탰었다는 할머니다.

칠십 난 우리 아들이 영양서 농사지어 작년 이맘 때 갖다 준 쌀 한 가마를 지금껏 먹었어. 혼자 해 먹으니 일 년을 먹고도 아직 저래 조금 남았어. 좀 있으면 청송서 농사짓고 있는 71된 우리 아들 올 때 또 햅쌀 한 가마 가지고 온다고 해. 그럼 또 그거 내년까지 먹어야지.”

1년에 쌀 한 가마니도 다 먹지 못한다면서도 93셋인 지금도 그냥 가만히 누워 잡생각만 하며 지내는 건 싫다는 93살 연향 할머니도 평화동 관사 골목길 안에 살고 있다.

진명학교
진명학교 정문 옥동삼층석탑이 있는 구역의 반대편에서 본 모습. 부장급 이상 철도간부 집이로 석벽이며 석축도 쌓을 당시 그대로라는 권중수 어른의 말처럼 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사방으로 침목을 박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평화동이 주택가로서는 안동에서 제일 조용하고 살기 좋은 동네래요. 형편이 조금 어려운 사람들도 적십자회관이 있어 도움을 받기고 낫고 이 동네가 전반적으로 살기가 괜찮은 동네래요. 교장 퇴직한 분들도 많고 공무원 퇴직한 사람들도 많고 한 게 나이 들어서도 살기 좋은 동네라고 소문이 나서 늦게 이사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보니 경로당 회원들 숫자가 다른 데보다 많아요. 그래서 시에서 경로당에 지원해주는 경비로 남자 여자 같이 밥해먹고 난방하고 하려면 힘이 들어요. 백여 명이 넘다 보니 쌀 한 포대를 주면 그걸 가지고 한 끼 해 먹으면 거의 다 없어지는 거래요. 인원수에 관계없이 동네 경로당마다 지원하는 금액이 같아서 적으니까 주로 안노인들이 모여서 밥 해 먹고 남자들은 경로당에 나와서 같이 시간보내고 하다가 밥은 각자 해결하거나 가끔 따로 돈을 거둬서 식사를 한 번씩 하거나 해요.”

 

평화동 골목길
관사번호가 지워져 희미하지만 위치상 평화동관사 30호일 거라는 집이 있는 골목 저 끝에 평화동회관경로당이 있다.

 

평화동회관경로당에서 만난 어르신들을 대표해서 나선 권기정 총무의 말이다. 안동병설중학교를 나온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총무님이 마침 병중 앨범을 가지고 있었는데 안동병중의 상징인 운동장의 나무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셨다. 그 앨범을 건너다보며 이야기 한도막씩 거드시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문득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경로당 일상 속의 한 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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