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한열이를 살려내라!”
[포토에세이] “한열이를 살려내라!”
  • 유경상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19.02.22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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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목성교에서 안동역으로 행진하다’
- 사진에게 말을 걸다 (2)
[사진에게 말을 걸다] - 1987년 7월9일, 안동시 목성교에 모인 청년과 대학생들이 고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천주교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
[사진에게 말을 걸다] - 1987년 7월9일 집회를 마치고 안동지구대학생연합 학생들이 고 이한열 열사 추모 행진을 하고 있다. 안동기차역 앞 승공탑 조형물 옆에 지나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 보면 당시 기차역 앞 건물들이 매우 낯설게 보인다.  ⓒ천주교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
[사진에게 말을 걸다] - 1987년 7월9일 집회를 마치고 안동지구대학생연합 학생들이 고 이한열 열사 추모 행진을 하고 있다. 안동기차역 앞 승공탑 조형물 옆에 지나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 보면 당시 기차역 앞 건물들이 매우 낯설게 보인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천주교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

누구나 흔적을 남기고 흘러갔다. 나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1987년을 까맣게 망각하고 있는데 이 사진을 발견하다니! 정말 깜짝 놀랐다.

2017년 9월1일, 안동 나섬식생활교육원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선한 ‘안동지역 6월항쟁’에 관한 기록화 구술모임에 참석했다. 당시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사진앨범 한 권이 올려졌다. 1986년~87년 전후 안동가톨릭농민회 누군가 열성적으로 찍은 천주교와 가톨릭농민회 활동 및 시위 사진을 넘기며 기억조각을 꿰맞추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22살의 내 얼굴이 포착된 사진 두 장을 한참동안 바라보게 되었다.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와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를 빼놓고 1987년을 설명할 수 없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박종철을 물고문으로, 이한열을 직격최루탄으로 살인행위를 저질렀다. 고문살인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조종이 울리고 있었다. 불타오른 국민적 분노는 2.7 추도회, 3.4 고 박종철 추모제 및 고문규탄대회, 4.14 호헌철폐로 이어졌다. 6월10일 이한열이 쓰러지며 전국민적 6월 항쟁으로 발전했고, 노태우의 6.29개헌선언을 받아내게 된다.

안동과 경북북부권에서도 전국 일정에 맞춰 기도회, 추모제, 집회가 진행됐다. 안동지역에서 먼저 양심에 입각해 두려움을 떨쳐내고 거리로 나선 세력은 천주교 사제단,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농민운동, 학생운동이었다. 청년학생인 우리들이 뛰쳐나올 역량을 키우는데 천주교와 농민운동은 든든한 울타리였다.

2월7일부터 6월29일까지 우리는 목성교와 목성성당, 조흥은행 앞과 안동문화회관, 안동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을 넘나들며 시민의 동참을 간절히 호소했다.

분명하게 기억이 나는 장면이 있다. 3월3일 개강과 함께 고 박종철 49재가 열리던 날 송천캠퍼스에서 안동 용상동 선어대까지 국도를 따라 행진하던 도중 선후배들이 닭장차에 연행될 때 비가 내렸다.

7월5일 사망한 이한열의 국민장이 7월9일 서울역에서 개최되었다. 7월9일 그날 우리들은 안동목성교에 모여 앉아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추도’ 근조 플랭카드를 만들었고, 안동역과 시외버스터미널 방향으로 행진했다. 지금의 안동기차역 앞 승공탑 조형물 옆으로 대열지어 걸어가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그날의 뜨거웠던 구호소리가 함성과 함께 떠오른다. ‘한열이를 살려내라’

20대 청년시절 낯익었던 얼굴들이 겹쳐 보인다. 1987년 애국청년학생을 자부했던 동지들은 이후 회사원으로, 교사로, 시인으로, 노동자와 농민으로 진출했거나 흩어졌다. 30여 년이 지났으니 한번쯤 묻고 싶어진다. 우리가 꿈꾸던 세상은 어디에 있는가? 사진에게 말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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