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포토에세이]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유경상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19.03.17 2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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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봄, 농가부채 탕감을 외치는 농민 시위대’
- 사진에게 말을 걸다 (3)
[사진에게 말을 걸다] - 빛바랜 사진을 바라보니 1986년 4월16일 안동문화회관에서 개최한 <농민 노동자를 위한 기도회 및 농가부채탕감 농민대회>이다. 안동기차역과 안동문화회관, 안동군청을 잇는 4차선 도로의 양쪽 상가 간판들을 훑어보았다. 필자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이 그 옛날 상가 공간이다. 상가는 모든 바뀌었지만 도로와 가로수는 그대로이다. ⓒ천주교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

대학 2학년 봄, 농민들이 시위를 한다는 소식에 중간고사를 끝내고 서둘러 안동문화회관 앞에 도착했지만, 기도회는 끝나고 벌써 거리행진이 시작되고 있었다. 빛바랜 사진을 바라보니 1986년 4월16일 안동문화회관에서 개최한 <농민 노동자를 위한 기도회 및 농가부채탕감 농민대회>이다.

몇몇 친구와 도로 옆 인도에 서서 박수를 치며 응원을 했다. 오른손을 힘껏 치켜 올리진 못했지만 구호를 따라 외치며 행렬을 따라 가려고 잠깐 도로에 내려섰다. 그때, 경찰간부 복장의 사나이가 “학생 같은데 다시 인도로 올라가” 라며 나를 지목했다. “구경도 못하느냐? 당신이 뭔데 간섭하느냐?”고 대들었다. 순간 눈초리가 사나워지더니 “저놈 잡아넣어!” 명령이 떨어졌다.

사복경찰 서너 명이 달려들어 내 양팔과 허리띠를 잡아챘다. 발버둥을 쳤지만 덜컹 호송차에 내던져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양반이 누군데 날 체포했냐고 악을 쓰니, 돌아온 답변이 그럴듯했다. 경찰서장이었다.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이빨을 악다물었다. ‘농민들이 단결하고 조직화되면 저렇게 두려움 없이도 맞서 싸울 수 있구나’ 유치장에서의 밤은 나름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1985년 스무 살 여름에 읽은 <전태일 평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등을 읽고 통곡으로 밤을 지새웠다. 생존에 허덕이는 노동자·농민의 빈곤한 처지가 내 아버지․어머니의 삶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양민이 군인에게 무차별로 학살당하는 불의한 시대를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까? 번민으로 다가온 불면의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분노에 휘감겨 싸울 방법을 찾아 헤매던 그때, 내 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아우성이 들려왔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국가의 본질이 군사독재정권이었다니. 극악무도한 정권을 물리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반공이라는 핑계로 또다시 학살을 자행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80년대 이 땅의 모든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회적 저항의식은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광주정신의 아들·딸이었다. 민중생존권과 민주민권회복은 국민의 자각과 대중운동의 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33년 전인 1986년 봄부터 그해 겨울이 끝나도록 유기·무기정학, 수배를 거치며 내 의식은 단단해져 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당시 그날의 농민집회 사진을 보며 아이러니한 건, 장소 즉, 공간이다. 안동기차역과 안동문화회관, 안동군청을 잇는 4차선 도로의 양쪽 상가 간판들을 훑어보았다. 내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이 그 옛날 상가 공간의 일부이다. 상가는 모두 바뀌었지만 도로와 가로수는 그대로이다. 돌고 돌아 이 자리에 내가 서 있구나.

그러나 40여 년이 지나도 데자뷰를 겪는 느낌이 든다. 아직도 광주항쟁 정신을 왜곡하는 세력이 온존하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모든 역사가 미완성이듯, 광주민중항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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