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애증 깊었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포토에세이] ‘애증 깊었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 유경상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19.04.02 1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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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 따스한 날 산소 옆에 그냥 앉아있고 싶다’
- 사진에게 말을 걸다 (4)

▲ 1984년 경 아버지의 모습. 문 앞에 앉아 푸짐한 음식상에 수저를 드는 중이다. ⓒ유경상

생전에 아버지는 늘 벽처럼 다가왔다. 추정해보니 내 나이 10살부터다. 어느 날 꾸지람을 듣는 태도가 불량했는지 불같은 화를 내며 내 볼을 때렸다. 코피가 흘렀지만 아버지는 그냥 바깥으로 나갔다. 피를 닦을 생각도 없이 오기로 버티고 서 있는 나를 발견한 건 어머니였다. 이십대가 될 때까지 아버지가 싫고 미웠다.

가난한 생활은 아버지 탓이었고 어머니만 고생을 도맡았다고 판단했다. 멀리 일일노동자로 떠난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은 날들은 행복했다. 무수한 날을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21살, 대학생 시위 사건으로 짧은 수배생활을 한 적이 있다. 경찰이 수시로 고향집을 찾아왔고, 나는 한 달 넘게 집을 떠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친구 연락으로 안동시외버스터미널 뒤 허름한 식당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경찰서에 출두만 하면 해결 된다’고 설득했지만 난 거절했다. ‘고개를 숙이는 건 타협이고 패배이다’고 주장했다.

머리가 굵은 아들을 한참 바라보던 아버지는 소주잔만 기울였다. 밥 챙겨 먹고 다니라며 구겨진 만원짜리 다섯장을 주셨다. 난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담배를 피웠다. 그때서야 농사지을 땅 한 평 없이 도지를 내어 반농반노(半農半勞)로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나는 그동안 죄송했다는 말을 겨우 꺼낼 수 있었다. 아버지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걸 훔쳐 보았다.

며칠 전 새벽 잠결에 동생들과 아버지 생신 상을 차리는 꿈을 꿨다. 돼지갈비에 양념을 버무렸고 술은 정종을 준비했다. 자식들이 준비한 맛있는 진수성찬에 술잔을 기다리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인 아버지의 얼굴을 잠깬 후에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한참을 우두커니 앉았다가 커피를 마시는데 울컥 올라온 뜨거운 기운이 눈물로 변했다. 아마 위 사진을 몇 번 본 기억이 투영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슬프고 화난 기억만 왜 유독 많은 걸까? 즐겁고 행복한 적이 많았을 텐데. 중학교 3학년 때 ‘책 읽는 걸 좋아하니 아무래도 기술계통보다는 관료가 되든지 선생이 좋을 거 같다’며 인문계통 진학을 적극 권유한 건 아버지였다. 집에서 키우던 정든 개를 팔고, 정관수술 후 받은 사례금이 내 고등학교 진학에 보태어졌다는 걸 돌아가신 후에 들었다.

1990년 7월 여름밤에 주무시다가 불현듯 돌아가신 아버지는 겨우 58세였다. 2007년 봄 18년 만에 아버지 산소를 이장하는 날 당신의 육신은 흙과 먼지로 풍화돼 있었다. 누워계셨던 자리 흙 색깔은 더 짙고 검었다. 정성스레 보자기에 쓸어 담았다. 살다 보니 2006년 가을에 어머니도 아버지를 뒤따라 떠나셨다. 아득한 외로움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어느 날 면도를 하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중년의 아버지 모습이 스며들어 있었다. 정한(情恨)이 묻어나는 내 얼굴에 겹쳐지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진다. 꽃샘추위가 반짝 엄습하더니 봄기운이 천지를 휘감기 시작했다. 아버지 산소 옆에 가서 그냥 봄볕을 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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