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기록과 기억을 모아 공동체의 삶을 회복시킬 때다'
'지역의 기록과 기억을 모아 공동체의 삶을 회복시킬 때다'
  • 유경상 (사단법인 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19.06.0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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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창고] 2019 봄호를 발간하며

유경상 /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유경상 /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근현대 생활영역의 민간기록물에 대한 가치와 의의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먼저, 영화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될 때 화면에 자막이 흘렀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노먼! 너는 글쓰기를 좋아하니까 언젠가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쓰거라. 그래야 우리가 겪었던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단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한 인물인 ‘노먼 매클린’의 회고이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사랑했던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고향인 미국 몬태나주 미줄라에서의 생활을 추억하고 있었다. 송어가 많이 잡히는 아름다운 블랙풋 강의 협곡에서 펼쳐지는 세 부자의 플라이 낚시의 환상적인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 원작은 고향을 떠나 시카고대학에서 평생 영문학자로 살았던 노먼 매클린이 쓴 자전적 소설이다. 이 책은 1976년 출간돼 이듬해 퓰리처상 후보작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노먼 매클린 사후 1992년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은 이 자전 소설을 영화로 제작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관람객의 뇌리에 영상의 이미지와 함께 감동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특히 기억을 반추하는 주인공의 남동생으로 출연한 브래드 피트의(폴 매클린 역) 젊은 날 얼굴도 쉽게 잊혀 지지 않는다는 소감을 들려주었다.

이 영화를 다시보게 되면, 눈길이 가 닿는 게 이전과는 달라진다. 대학교수를 은퇴한 노먼 매클린이 일흔 살이라는 할아버지가 되어서 이 자전적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자전적이면서도 가족과 함께 살며 성장했던 ‘지역’을 무대로 삼았다는 점에 눈길이 한참 머문다.

소설과 영화의 원래 텍스트는 바로 몬태나주 어느 특정 대지의 산과 강, 마을과 도시이다. 그리고 노먼의 가족과 동생인 폴, 그들의 이웃공동체로 압축될 수 있다. 영상의 도입부분에는 수많은 사진자료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교회당, 채목장, 소풍, 꼬마들, 깊고도 드넓은 대지, 단란한 가족 등의 사진엔 1900년 초 어느 소도시의 풍경과 삶이 저장돼 있었다.

시대가 흘렀지만 인간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렇듯 은빛세대의 기억에는 소중한 스토리가 체화돼 있다는 것을 상기해 낼 수 있다. 지식인으로 살아온 노먼 매클린은 노년에 자전적 소설을 세상에 남겼고 영상콘텐츠로 빛을 보았다.

이렇듯 ‘기록물’은 지역과 인간의 삶을 반추하고 성찰해 줄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에게 또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지역’ 입장에서 다시한번 생각과 관점을 가다듬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안동문화권 또는 경북광역권에는 조선시대의 기록문화유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고 이를 보존 계승하는 사업이 활발한 편이다. 이는 곧 과거 우리 선조들이 그 기록물을 치열하게 생산했다는 것이고, 나아가 지역과 가문, 개인의 자산으로 남기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행위를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러한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세대가 문화유산으로 자랑하고 자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많은 기록물을 보유한 지역이 탄생한 것이다.

다시 질문을 해 보자. 마찬가지로 이미 과거사가 되어가고 있는 지난 100년의 근현대시기의 생활사나 문화사를 우리들은 나름의 전략을 갖추고 목적의식적으로 수집․보존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가? 이다. 민간생활 영역에 엄청나게 쌓여있는데 그냥 방치하고 있지 않는가에 대한 소박한 질문에 대해 자신 있는 답변이 어려울 것이다. 그럼 우리는 곧 다가올 미래세대에게 과연 무엇을 남겨 줄 것인가에 적절한 해법을 내놔야 하지 않을까 한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지방자치의 한 영역인 기록자치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공공기록에서 민간기록의 수집 보존으로 활동반경을 확장해 나가야 때라는 점을 주장한다. 당대의 기록물을 먼저 더 빨리 축적하게 되면 지역정체성 뿐만 아니라 경쟁력에서도 더 유리한 지위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후 모든 지역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양성하고 문화지킴이 활동이 발생했듯, 이제는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담지하고 있는 근현대 민간기록물을 수집하고 생산해낼 주민아카이브 역량을 하나의 운동으로 만들어내어야 할 때이다. 특히 지방소멸 위기는 이런 활동을 재촉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지역의 기록현실은 척박하다 못해 공허한 게 사실이다. 도서관에 수만 권의 책을 꽂아 놓았지만 중앙과 유명인의 책만 즐비한 게 현실이다. 영상을 틀어 봐도 화려한 인물의 연기와 문화인들의 향연만 펼쳐지고 있다. 아직도 지역은 생활사의 변방일 뿐이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은 변방의 작은 점에 불과하다.

주민 스스로가 산재되어 있는 기록물을 발굴하고 수집하는 활동가가 되는 길은 무엇일까? 민간기록물을 지역사회의 공공자산으로 전환시켜내고 미래세대의 자산으로 창조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흩어져 있고 방치되고 있는 민간기록물인 사진, 편지, 일기, 기념간행물, 개인단행본, 학교앨범 등을 모으고 가다듬어 숨결을 불어넣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민간기록물 속에는 지역과 주민의 기억과 경험, 삶의 문화들이 담겨 있다는 걸 호소한다. 지역주민 스스로가 배우고 깨우쳐서 우리의 삶, 우리의 당대 생활사와 기록물을 모으고 구축하는 큰 흐름이 시작될 그 날을 상상하며, 두 번째 <기록창고>를 발간한다.

<2019년 3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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