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아내가 할아버지 산소서 나물 캤어요
'빨치산' 아내가 할아버지 산소서 나물 캤어요
  • 임기현
  • 승인 2010.03.2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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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며느리 챙기는 할아버지의 고들빼기

 

▲아내가 뽑고 있는 것은 ‘고들빼기’였다. 벌써 손에는 뿌리가 쪽쪽 곧은 고들빼기가 한 줌 들려있다.

봄이 오면 아내는 몸살이 난다. 여자나이 마흔 다섯, 이젠 봄바람에 가슴 설렐 나이도 아닌데 해마다 이맘때면 과부 바람난 듯 나를 조른다. 아내의 등살에 차라리 일요일을 포기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는 판단을 내리는 데는 단 몇 초면 충분했다.

"지난 주에는 자기 혼자 소백산으로 내뺐잖아, 빨리 일어나!"
"아이고 알았다, 알었어. 나 원 참!"

휴일 늦잠 좀 자보자는 나의 미련한 기도는 채 아홉시도 못 되어 산산 조각이 나고 있었다. 사실 지난 일요일에는 후배와의 산행을 핑개로 아내가 그렇게 조르던 봄나들이를 펑크냈었다. 오늘 솔선수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결코 한 해가 편치 못하리라는 것쯤은 20여년 결혼생활이 일깨워준 슬픈 각성으로 깨닫는다.

그렇다고 아내와 봄나물을 캐러가는 연중행사가 나 또한 싫지는 않다. 어기적 어기적 대충 세수를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상큼한 냉이된장국 생각에 침이 도는 즐거움을 아내 몰래 만끽한다. 작년 봄나들이에서 만났던 향기 짙은 돌미나리와 왕고들빼기 생각을 하면서 올해도 뭔가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은근한 기대마저 든다.

"근데 여보, 임동 할아버지한테 가보면 어떨까?"
"거긴 왜?"
"아니, 큰 형님 얘기가 할아버지 산소에 자꾸 멧돼지가 내려온다고 하더라고. 산소도 한 번 살펴볼 겸 임동 쪽으로 가보자는 얘기지. 뭐 어딜 가면 냉이 달래 없을라고."

변명하듯 둘러대는 내 모습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캐내려는 듯 빤히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해 보던 아내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제깟 인간이 꾀를 내봐야 한 수 아래지'라는 표정도 역력하게 씨-익 하얀 이를 드러낸다. 이미 아내는 스스로의 봄나물 나들이 코스를 잡고 있는 것이다.

냉이부침개가 아니고 막걸리가 죽이는 거겠지

▲ 할아버지 산소 아랫밭 고랑과 고랑 사이가 온통 냉이들로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제법 모양새가 큰 냉이에서 자잘한 아기냉이까지 누군가 씨를 뿌려 가꾸어 놓은 듯하다.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임동면은 안동 시내에서 30여분 거리다. 과거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대부분의 마을은 수몰되었고 그나마 할아버지 산소를 포함한 비교적 고지대만이 남았다. 할아버지가 내려다보던 실개천이 흐르던 마을이 호수가 되어 버린 셈이다. 그 은은한 경치가 제법이다.

산소 입구 귀퉁이에 차를 세우고 나지막한 야산을 오르는데 아내는 길이 아닌 밭으로 발을 옮긴다. 역시 아내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집을 나서면서 이미 '할아버지 산소와 아랫밭에는 OO이가 있다'라는 확신을 갖고 내 제의를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역시 아내는 고수였다.

"아휴, 아예 냉이밭이구만 밭이야."

아내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밭으로 달려간다. 정말 냉이밭이다. 길게 검은 비닐이 덮인 고랑과 고랑 사이가 온통 냉이들로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제법 모양새가 큰 냉이에서 자잘한 아기냉이까지 누군가 씨를 뿌려 가꾸어 놓은 듯하다. 벌써 아내의 대바구니에는 하얗게 뿌리를 드러낸 냉이들이 수북하다. 어느샌가 나도 다부지게 호미질을 하고 있다. 내가 더 신나 있는 모습에 아내가 피식 웃는다.

"냉이는 말이야 된장찌개에 듬뿍 넣어서 먹는 게 최고야. 아니지 부침개, 부침개 해도 맛 끝내주더라. 향기가 엄청 진해. 막걸리까지 한 잔하면 죽이지..."
"아이고 냉이부침개가 아니고 막걸리가 죽이는 거겠지."
"빨리 집에 가서 냉이 부침개 해먹자, 응."

호미질한 지 10분도 안 되어서 막걸리 타령을 하는 나에게 은근히 아내는 구박을 한다. 나는 속으로 '사돈 남말하고 있네' 해 본다. 사실 아내의 주량도 만만치는 않다. 막걸리 서너 사발은 단 숨에 들이키는 실력이다. 무엇보다도 아내의 부침개 솜씨는 웬만한 주점의 그것보다는 백배 낫다. 연신 호미질에 여념이 없는 아내가 냉이부침개를 할 때는 콩가루를 조금 넣으면 더 고소하다며 중얼거리는 걸 보면 '냉이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 제의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냉이가 지천인 비탈밭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보니 벌써 캐낸 냉이가 한 보따리다. 이 정도면 부모님 모시고 사는 안기동 큰 형님 집과 송현동 큰 누님네와 나누어 먹어도 넉넉해 보인다. 쪼그리고 앉아 냉이와 씨름을 하고 있으려니 슬슬 허리도 아파 오고 넌더리도 난다.
▲ 벌써 아내의 대바구니에는 하얗게 뿌리를 드러낸 냉이들이 수북하다.
손주며느리 이뻐서 할아버지가 챙겨주신 건데 뭘!

"이제 산소 올라가 보자."
"그래, 딴 거도 좀 해야지."

아내 대답에 나는 '아니 또 뭘 더해'라고 역정을 낼 뻔했지만 꾹 참아본다. 자칫 거슬렸다가는 냉이부침개는커녕 국물도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본능적 방어기재가 작동된 것이다. 빨리 산소를 둘러보고 멧돼지들의 헤코지가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얼른 형님 집에 들러 냉이를 나누고 '할배 산소 이상무' 보고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맛있는 냉이부침개에 막걸리 한 사발이.
▲ 넙죽 절을 하기가 무섭게 아내는 산소주변 잔디밭에서 뭔가를 뽑아내고 있었다.
밭둑을 지나 할아버지 묘역 날등을 오른다. 우려했던 멧돼지의 흔적은 없어 보인다.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는 묘역 잔디에 지난 가을 내가 벌초를 잘했구나하고 스스로 대견해 하여 본다. 아내와 함께 할아버지께 인사를 넙죽하고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소 주변을 둘러본다. 몇몇 군데 고라니들이 놀고 간 흔적들이 차라리 정겹다. 동글동글한 새까만 똥들이 한 웅큼씩 흐트러져 있다. 토끼똥보다는 배 정도나 굵으니 고라니들이 놀고 갔음은 단박에 들통이 난다.

"아니 당신 뭐해?"
"응, 할 게 있어. 좀 있어봐."

넙죽 절을 하기가 무섭게 아내는 산소주변 잔디밭에서 뭔가를 뽑아내고 있었다. 정성이 오지게 뻗쳐서 얼굴도 모르는 시 할아버지 산소의 잡초를 뽑을 리도 없을 터인데... 그럼 그렇지 하고 나는 무릎을 친다. 아내가 뽑고 있는 것은 '고들빼기'였다. 벌써 손에는 뿌리가 쪽쪽 곧은 고들빼기가 한 줌 들려있다. 아내는 이미 할아버지 산소에 그것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산소를 둘러보자던 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이유였다.

아내 계획을 알아차리고 나니 지난 가을 벌초 때가 떠오른다. 잔디 속에 자리를 잡고 자라던 고들빼기 싹들을 아내는 잊지 않고 기억했던 모양이다. '봄에 와서 할아버지 고들빼기 해야지' 라던 아내의 얘기까지 어렴풋하게 되살아난다.

"시할아버지 산소에서 나물 캐는 여편네가 어딨냐?"
"왜, 뭐 어때서. 자기네 할아버지가 나 이뻐서 챙겨주는 건데 뭐!"

내가 핀잔투로 내뱉자 아내는 입을 삐쭉하며 볼멘소리를 한다. 이런 아내의 뒷모습 위로 언젠가 큰 형님이 물고기를 잘 잡는다고 붙여준 아내의 별명이 휙 날아오른다.

'빨치산'. 나는 허허 웃고 만다.
▲ 할아버지가 내려다보던 실개천이 흐르던 마을이 호수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 은은한 경치가 제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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