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와 편지의 시대는 가도'
'엽서와 편지의 시대는 가도'
  • 장호철(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
  • 승인 2019.10.18 2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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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편지(3) - 장호철(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悲哀)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衣裳)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 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愛情)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 이수익, 「우울한 샹송」(삼애사, 1969)

봉함엽서와 우체국

고향의 시골집 옆이 우체국이었다.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지은 슬래브 건물로 인근에서 일제 강점기에 지은 면사무소보다 훨씬 세련된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유치환의 연시 ‘행복’을 외우던 시절부터 내 머릿속에 각인된 우체국의 모습과는 달리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인조대리석 접수대 너머 몇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는 우체국은 늘 한산했다.

건물의 상단 중앙에 날개 달린 빨강 ‘우’자 모양의 우체국 상징이 박힌 우체국 건물 앞에는 요즘과는 달리 빨강과 초록으로 단장한 우체통이 매우 얌전하게 서 있었다. 당시의 집배원은 정모(正帽)에다 어깨에 메는 가죽가방을 메었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했다.

우체국과 이어지는 기억의 자락은 꽤 깊다. 70년대 후반에 고향에도 전화가 들어왔다. 몸통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서 교환원을 부르는 ‘자석식’ 전화기였다. 두 자릿수 전화번호를 불러주면 교환원이 연결해주었는데, 젊은 여성이 듣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고 통화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전화 덕분에 도회에서 들어온 젊은 여자 교환원과 지역 청년과의 로맨스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나서 입대하기 전까지 나는 우체국에 가서 엽서나 봉함엽서를 샀고, 이런저런 일상과 젊음의 번민을 담은 이야기를 중언부언한 엽서를 친구들에게 부치곤 했다. 스무 살 넘어서도 그건 유일하게 내가 마음을 붙였던 일이기도 했다.

 

봉함엽서는 따로 봉투에 넣을 일도, 우표를 사 붙일 필요도 없으니 시간에 지친 20대 젊은이에게 아주 생광스러운 도구였다. 봉함엽서라면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서 보낸, ‘검열필’ 스탬프가 찍힌 편지(뒤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린)가 널리 알려져 있다. 편지지와 봉투를 하나로 묶은 이 엽서는 수형생활을 하는 이들이 즐겨 썼다. 전교조 초대 위원장 고 윤영규 선생이 수감 중일 때 보내주신 봉함엽서가 지금도 내 서랍 속에 남아 있다.

몇 해 전, 만년필을 마련하면서 나는 인근 우체국에서 봉함엽서를 사려다가 실패했다. 우체국 직원은 봉함엽서라니까 고개를 갸웃하더니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저런 것이라고 설명했더니 며칠 있다 와 보라고 했고 사나흘 후에 갔더니 본청에 가보란다. 맥이 빠져서 알았다고 돌아서 버렸다. 뒤에 국내우편 봉함엽서가 2007년에 왕복엽서와 함께 폐지되었다는 걸 알았다.

사라진 게 어찌 봉함엽서뿐이겠는가. 우체통도 사라져 가고 있다. 웬만한 길목이면 만날 수 있었던 우체통을, 이제 찾으려면 동네 뺑뺑이를 돌아야 하기에 이르렀다. 하긴 요즘 누가 편지를 쓰는가 말이다. 철거되는 우체통 수만큼 우리 삶에서 편지로 나누는 교유는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세대에게는 여전히 우체국과 우체통이 환기하는 것은 교감의 본능이다. 이수익 시인이 <우울한 샹송>에서 노래한 우체국은 바로 그런 곳이다. 우체국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 애정(愛情)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가는 곳이다.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할 것 같은 곳, 시인이 그걸 노래한 때는 1969년이었다.

시인이 우체국을 노래한 지 어느새 반세기가 흘렀다. 사람들은 더는 우체국에서 ‘잃어버린 사랑’ 따위를 찾지는 않는다.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대신 연인들은 휴대전화로 육성을 나누고, 혀 짧은 문자메시지로 교감한다. 자본이 노동자에게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통지하듯 연인들도 몇 마디 문자로 이별을 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세상의 변화를 마치 남 말하듯 했지만, 나 역시 그 ‘사람’의 무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나마, 가물에 콩 나듯 전자우편으로 안부를 나누기는 한다는 게 변명이 될까. 그러나 용건만 간단히 보내는 사무적 편지가 아니라, 편지로 정서적 교감을 나눈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참 좋은 시절’의 편지

마지막으로 편지를 쓴 게 4년 전 5월이다. 스승의 날 즈음하여 익일 특급으로 보내온 제자의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나는 이름만 보고 그 애가 누군지를 단박에 알았다.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임용을 준비 중이라는 아이는 자기가 조용했던 편이라 내가 기억하지 못할 수 있겠다고 썼지만 나는 편지를 읽으면서 그 아이의 표정과 모습을,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기억해 냈다.

마음씨나 행동거지가 넉넉해서 남을 편안하게 해 주는 아이였다. 아이의 선량한 표정과 다소곳한 태도를 떠올리면서 나는 문득 불과 오륙 년 전이지만 그 시절이 내겐 정말 ‘참 좋은 시절’이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아이는 ‘지루하고 재미없었던’ 고등학교 생활 가운데서 유일하게 ‘즐길 수 있었던’ 시간으로 문학 수업을 이야기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게’ 해 준 내가 수업 중 들려준 이야기를 회고했다. ‘정말 뵙고 싶습니다.’라는 구절 앞에선 아이의 진심이 정말 따뜻하게 전해져 왔다.

혹시 싶어서 휴대전화에서 아이의 번호를 찾아 문자를 보냈더니 금방 답이 와서 나는 잠깐 그 애와 통화를 했다. 꽤 시간이 지났어도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았던 것도 아이다웠고 목소리도 귀에 익었다. 우리는 지난 4년의 안부를 가볍게 나누었다. 고맙다고 치하하면서 곧 답을 쓸게, 별로 자신이 없으면서도 약속하고 말았다.

그러고 이러구러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모니터 옆 바구니에 넣어둔 아이의 편지를 볼 때마다 거 참, 하고 입맛을 다시면서. 학교 앞 문방구에서 아이들이 쓰는 곱고 예쁜 편지지를 사와 묵혀 둔 만년필로 편지를 쓴 건 그러고도 한 주는 지나서였다.

수업이 비는 시간에 짧게 답을 썼다. 편지지에 바로 쓰려다가 문서편집기로 써서 그걸 옮기는 방법을 택했다. 오랜만에 쓰는 손 글씨는 생각대로 써지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좋은 교사’가 되어 교단에서 만나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그리고 퇴근길에 그걸 학교 앞 우체통에 넣었다.

엽서와 편지의 시대는 가도

먼지가 잔뜩 낀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서 나는 문득 손으로 쓰는 편지, 혹은 엽서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우체통에는 토요일에는 우편물을 수집하지 않는다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이 우체통에 손수 쓴 편지를 넣는 사람은 얼마나 되며 그들은 누구일까.

아이들도 이젠 편지를 쓰지 않는다. 방학 중이나 연말이면 교사들의 자리에 쌓이던 편지와 성탄 카드, 연하장 따위는 이제 옛이야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편지 대신 전화를 하고, 어느 날부터는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 따위로 안부를 전해온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편지와 익숙하다. 우리는 편지질로 우정을 나누고 연애를 했던 세대다. 나는 결혼 전에 아내에게 꽤 많은 편지를 썼는데, 아내는 그걸 여태까지 간직하고 있다. 부피야 얼마 되지 않지만 짐이라길래 버리라고 했더니 아내는 그렇다고 그걸 어떻게 버리겠냐고 되묻는다.

우리는 친구들끼리도 꽤 편지를 주고받았다. 습작 시절에 나는 글을 쓰는 대신 편지질이나 엽서질로 빈약한 문학적 감성을 다스렸다. 나는 엽서를 잔뜩 사놓고는 생각날 때마다 무료한 일상과 책읽기 따위를 시시콜콜 끼적댄 글을 벗들에게 띄우곤 했던 것이다. 그 시절의 벗들이 지금도 엽서의 세로 면에 깨알같이 쓴 내 편지를 되뇌곤 할 정도로.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서 나는 새삼 우표를 사고 편지를 부친 게 얼마 만인지를 헤아려보았었다. 각종 고지서나 안내문, 광고성 편지 등 오는 우편물은 넘치지만 정작 답을 해야 할 편지는 없다. 받는 편지가 없으니 보내야 할 편지도 당연히 없다.

휴대전화가 생활필수품이 되면서 공연히 시간과 돈을 들여서 손편지를 쓴다고 끙끙거릴 일은 없어졌다. 그 대신 사람들은 통화와 문자메시지로 나누는 짧고 간명한 ‘전언(傳言)’의 세계에서만 살아갈 뿐이다.

편지쓰기, ‘효율과 편의’를 넘어

책상 앞에 앉아 부재의 대상을 그리며 마음속에 맴도는 사연을 불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꼭꼭 눌러 종이 위에 옮긴다. 고이 접어 봉투에 넣어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집어넣는다……. 속도를 신봉하는 21세기에 이렇게 성가신 과정의 편지 쓰기는 어쩌면 시대 지체(遲滯)의 일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계 장치에 의존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다시 몸을 수고로이 하여 누군가에게 내 마음의 안부를 보내는 것은 단순한 효율이나 편의를 뛰어넘는 행위다. 그것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오늘날 관계의 미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훨씬 더 관계의 본질에 가깝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만년필에 잉크를 다시 넣고, 김미숙이 낭송하는 ‘우울한 샹송’을 들으면서 언제쯤 다시 편지를 쓰게 될까, 하고 가늠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2018년 겨울호 <기록창고>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장호철 qq9447@gmail.com

국문학을 전공했고 국어교사로 정년퇴임했다.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https://qq9447.tistory.com/)로 활동 중이며 오마이뉴스에 200편의 기사와 800여 편의 블로그 기사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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