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편지 - 지금은 종이에 펜으로 편지를 주고 받지 않지만
옛 편지 - 지금은 종이에 펜으로 편지를 주고 받지 않지만
  • 김월길(시인)
  • 승인 2019.10.2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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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편집〈편지〉 - 김원길 (시인)

연초에 나는 이삿짐 속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옛날 편지 꾸러미를 발견하고 놀랍도록 반가웠다. 거기엔 30년 전 안동시내에서 지례 산골로 들어갈 때 그때까지 모아 둔 편지 꾸러미가 있었는데 그것이 이번에 내가 다시 시내로 나올 때 되묻어 나온 것이다. 그 중엔 가족과 친지,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편지가 뒤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이 문인들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시기적으로 1974년 내가 첫 시집을 내고 1984년 두 번째 시집을 냈을 때 전국의 유명문인들에게서 받은 축하와 격려의 편지였다. 시대가 달라져서 지금은 아무도 종이에 펜으로 쓴 편지를 주고받지 않게 되어서 그분들이 내게 보낸 옛 편지는 귀중한 고문서가 되었다. 나는 주변의 권유로 이 종이편지를 공개하기로 했는데 1965년부터 2017년까지 반세기 동안의 것이니 그동안의 편지문화의 변천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 지면을 빌려 내가 받은 몇 통 편지에 얽힌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모윤숙(1910~1990) 시인의 초청장
모윤숙(1910~1990) 시인의 초청장

모윤숙의 초청장

내가 첫 시집을 낸 1974년께에 모윤숙은 ‘한국현대시인협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나 보다. 나는 미당의 권유로 무조건 그 단체에 입회는 했지만 시골에 사는 내가 회원이 된들 활동을 잘 해낼 것 같지도 않아서 회장이 누군지도 관심 밖이었다. 그러니 모윤숙으로부터 공문을 받은 기억도 없다가 43년 만에 그분의 육필을 보니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내용은 1975년 12월 27일에 서울의 <시문학사> 옆 유성다방에서 망년회 겸 합동 출판기념회에 오라는 것인데 초청 대상은 서정주, 문덕수 외 34인이고 회비는 그 때 돈 1,000원이었다. 놀라운 것은 타자기도 없었던지 초대장 36장을 일일이 손수 써서 직인을 찍어 우편으로 부쳤다는 것이다. 용지도 없었던지 4백자 원고지를 반 접어서 보낸 걸 보면 변변한 용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70년대 중반까지도 우리는 그렇게 가난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참석했던 기억이 없다. 아마 전 해에 단독으로 출판기념회를 서울의 ‘호수그릴’이란 데서 미당을 모시고 가졌었고, 연말이라 안동에서도 문학단체 행사로 발이 묶였을 것이다.

초정 김상옥(1920~2004) 시인의 편지
초정 김상옥(1920~2004) 시인의 편지

초정艸丁의 편지

내게서 첫 시집 《개안》을 받은 김상옥은 원고지에 칸을 무시하고 빽빽하게 쓴 답장을 석장이나 써서 보내 왔다. 내가 평생 받아본 모든 편지 중 가장 긴 편지였다. 그는 편지에서 “내가 단정해서 평하기는 염치없는 일이나 우리나라 현대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시가 〈라일락〉과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라고 말하고 싶읍니다.”라고 썼다. 이러는 그를 어찌 찾아뵙지 않을 수 있을까? 어째서 내 시를, 그것도 〈라일락〉같은 다분히 모던한 초현실주의 시를 시조의 대가인 그가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지 듣고 싶었다. 상경하여 오전에 피천득 선생을 찾아 뵙고 오후에 초정께 전화를 드리고 아파트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중풍으로 인한 반신불수의 몸으로 방바닥에 누워 있지 않는가! 나는 금방 그가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와 〈라일락〉이 어째서 그에게 그렇게 감동적이었는가를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병져 누운 칠십 노인에게 적막이란 단어는 사무쳤을 것이고 특히 〈라일락〉엔 휠체어가 나오는데 그 또한 휠체어 신세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김상옥 시인(왼쪽)과 함께 지례예술촌에서
김상옥 시인(왼쪽)과 함께 지례예술촌에서

정원 한 쪽의/ 라일락 그늘에 서서/ 그녀는 환히 웃고 있었다.

나는 반가웠으나/ 휠체어에 앉아/ 그녀를 향해 쓸쓸히 웃어 주었다.

내게로 닥아 올 때 / 웨이브 진 머릿결이/ 옛날처럼 나부끼었다.

손길이 이마에/ 꽃향기로 얹히더니/ 시야엔 다시/ 라일락 꽃더미 뿐--

그때 나는 내 속에서/ 남몰래 울고 있던 한 사내의/ 울음의 끝부분을 듣고 있었다.

-라일락 전문

그는 이 시를 읽으며 고독 속에 기약 없는 병마와 싸우고 있는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고 또 울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그가 기적적으로 털고 일어나 9년 후 내 세 번째 시집 출판기념회 때는 안동까지 와서 축사를 해주었던 것이다.

김구용(1922~2001) 시인의 엽서
김구용(1922~2001) 시인의 엽서

김구용의 엽서

대학시절 나는 영문과에 다녔지만 구용의 현대시 강의을 매우 좋아해서 국문과 강의를 많이 도강했다. 학내 문학동아리에도 열심이어서 그는 어느 제자 못지않게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1963년 겨울, 성균관대학교 안동문화권 학술조사 때 나는 국문과도 아니면서 따라 나서서 칼바람 부는 날 퇴계종택에서 노송정까지 그와 단둘이 걸어서 갔다 온 일도 있다. 졸업을 하고 안동에 내려와 있을 때 연하엽서를 보내주시고, 결혼했냐고 적어 보내기도 하고, 내 첫 시집에 제자를 써 주기도 했다. 1990년엔 한 해 전 준공한 지례예술촌에 부인과 함께 와서는 나와 내 아내가 금슬 좋으라고 ‘日月相照’란 휘호까지 써 주신 것이다. 구용의 글씨는 구용체라 할만큼 독특하고 고졸한 매력으로 정평이 나 있다. 나는 우연히 서울의 인사동 고서화 점포에서 구용이 즐겨 쓰는 관제엽서의 앞뒷면을 둘로 갈라서 쇼윈도에 전시해 놓은 걸 본 일이 있다. 그렇게 인기 높은 그의 글씨를 세 번이나 보내 주신 것이다.

이성선(1941~2001) 시인의 편지
이성선(1941~2001) 시인의 편지

동인활동을 같이 하자던 이성선

내가 등단을 하고 얼마 안 되어 얼굴도 모르는 이성선이 내게 편지를 해서, 나태주와도 상의했는데 나랑 몇이서 동인을 결성하자고 했다. 나는 그것의 필요를 그닥 느끼지 않았지만 나와 친하고 싶다는데 만나보지도 않고 거절하기 뭣해서 일단 그러자고 했다. 그는 강원도 정선에, 나태주는 충청도 공주에, 하청호는 대구에, 그리고 나는 안동에 살아서 자주 만날 수도 없으면서 동인활동을 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전국 최고의 동인지를 내보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꺾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일찌감치 동의를 해 주었으나 나태주가 송수권을 영입하는데 실패하고는 그도 그만 다른 단체에 입회함으로써 이성선이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동인 결성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는 가운데 이성선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무려 일곱 통이나 된다. 지금은 이성선도, 송수권도 고인이 되시고 이 편지들이 그간의 내력을 말해 주고 있다.

김종길(1926~2017) 시인의 편지
김종길(1926~2017) 시인의 편지

김종길의 편지

김종길 시인은 나와는 동향으로 촌수가 먼 일가 어른인데 워낙 근엄한 분이어서 가까이 가 지지가 않았다. 내가 〈취운정 마담에게〉로 월간문학 신인상에 응모하여 당선작 없는 가작에 입선했을 때 그는 김광균, 박두진과 함께 심사위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왜 내가 당선이 되지 못했는지 까닭을 묻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고려대학교 전용 편지지에 내 작품이 가장 훌륭했으나 가작을 준 것은 내 작품의 서정주 ‘투’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은 심사평에는 없던 말이다. 그때 심사평은 ‘무기력을 지양하라’였는데 나는 둘 다 수긍할 수 없었다. 〈취운정 마담에게〉는 무기력이 아니라 한국시에 이제까지 없던 초저음의 새로운 리듬을 구사한 것인데 심사위원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 여겨졌다. 미당 ‘투’가 결함이라 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 게, 좋아하는 투를 닮은 예로는 이백과 농암, 퇴계와 남명이 모두 도연명을 본보았음을 들 수 있다. 나를 당선시키고자 했으면 그것을 오히려 장점으로 봐 주었을 것이다. 이 편지는 당시 김종길 할배가 미당과 유명한 문학논쟁을 하느라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을 때임을 은연 중 말해주고 있다. 

이일향(1930~ ) 시인의 연하카드
이일향(1930~ ) 시인의 연하카드

이일향의 연하카드

이일향의 연하카드에는 ‘성냥’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남들은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이 단어는 그녀와 나만이 주고받고 웃는 암호이다.

내가 시조시인 이일향을 알게 된 것은 1988년 가을 조병화 시인을 단장으로 모시고 10명이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에 갔을 때 함께 갔던 일행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가 중풍을 이겨낸 김상옥 선생 내외분을 모시고 내가 침이 마르게 자랑했던 지례예술촌을 보러 안동엘 왔다. 내 짚차에 세 분을 태우고 덜컹거리는 산골길을 따라 지례로 들어 갈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구불구불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산길을 지루하게 차를 몰던 나는 몸이 불편한 초정이 속으론 몹시 짜증이 나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는데 길이 끝이 나질 않으니 모두들 지치고 차 안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이일향이 불쑥 “집에 가면 불이 있지예?”했다. 나는 이분들이 ‘캄캄한 밤을 걱정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물론이죠”했다. 그러곤 이 걱정스런 분위기의 전환을 시도했다. 음악이 제일일 것이다. 이럴 때 걸맞는 노랫가락이 떠올라 낮게 흥얼거렸다. “석양 산로에 막걸리병을 차고요~” 그러자 뒤에 계시던 초정이 겁에 질린 음성으로 물었다.

“우리 그라마 까막나라에서 자나?”

“와예?”

“석냥 찾는다 캤잖나.”

차안이 발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이일향이 서울 가서 퍼뜨려 놓아서 내가 서울서 문인들을 만나면 모두 내게 그날의 해프닝을 확인하고 웃었다.

김광섭
김광섭

 

빅완서
박완서
박재삼
박재삼

 

이영도
이영도

 

이오덕
이오덕

 

이원수
이원수

 

피천득
피천득

 

황금찬
황금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2018년 겨울호 <기록창고>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김원길(시인) poetkwg21@naver.com

안동 지례마을에서 태어나 1971년 《월간 문학》에 〈취운정 마담에게〉로, 1972년 《시문학》에 〈四行數題〉 외 2편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開眼개안》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들꽃다발》 등이 있다. 도천문학상, 금복문화상, 경상북도문화상, 옥관문화훈장, 안동예술인상을 수상했다. 지금도 문예창작마을인 지례예술촌의 ‘촌장님’으로 불리며 뛰어난 입담과 글솜씨로 인해 안동의 해학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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