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혁명 50돌을 맞는 단상
4월혁명 50돌을 맞는 단상
  • 임기현
  • 승인 2010.04.21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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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50돌이다. 그 날의 함성을 기억하는 이들은 칠순의 노인이 되어 잊혀져 가고 그 함성이 갖는 민족사적 의미도 세월 속에 퇴색되어지고 있는 듯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4월혁명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투영되어 있고 또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 것일까. 혁명은 반세기를 지나며 거꾸로 우리에게 반문하고 있다.

해방과 분단 그 질곡의 역사 한 가운데 반민족 반인륜의 부정한 사조들이 유령처럼 우리 사회에 드리웠던 시절, 모든 반칙은 유효했고 온갖 술수도 정당화되었다. 전쟁과 분단의 혼란 속에 권력은 다시 친일파들에게 돌아갔고 항일민족주의자들은 다시 감옥으로 감옥으로 핍박의 행군을 해야 했다. 1958년 12월 경찰이 야당의원을 감금한 상태에서 이승만 독재정권은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혁명의 기운은 이미 차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 후보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 자리를 무혈로 확보한 이승만 정권은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 당선마저 저지하기 위해 3.15부정선거를 기획했고 투표함에 미리 자유당 후보의 표를 뭉텅이로 쏟아 넣는 방법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킨다. 그러나 역사의 법칙은 냉정한 법이다. 부패하고 부정한 권력은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국민들은 이미 온몸으로 알고 있었다. 역사의 법칙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한 횡포는 대구에서 신성한 학원을 정치적으로 이용 말라는 2.28 학생봉기로,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무효 시위로 이어졌고 결국 마산 앞바다에서 고교생이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르자 국민들의 가슴과 머리는 혁명의 불길로 타오르고 만다.

다시 맞는 4.19혁명기념일. 우리가 4.19를 혁명이라 부르게 된 것도 사실은 오랜 일이 아니다. 30여년 이상을 우리는 혁명을 4.19의거나 4.19학생운동으로 불렀다. 자유당의 맥을 잇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군부독재 정권이 혁명을 좋아할 리 만무했을 터이고 혁명은 5.16 군사혁명으로 족했을 터이다. 그들에게 5.18은 폭도들에 의한 광주사태가 알맞은 명명이었을 까닭과도 같다. 지금 우리는 5.16 군사구데타라 부른다. 우리는 또 광주민주항쟁이라 부른다.

부정한 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을 향한 경찰의 총탄에 4월 19일 당일에만 180여명이 희생된 4월 혁명은 대통령의 사임과 부통령 일가의 자살로 끝났다. 새 공화국 성립으로 이어졌다. 미완의 혁명이라는 꼬리표도 따라 붙는다. 그러나 분명 4.19는 각성된 국민들의 항거로 이룩한 혁명이다. 한 번의 혁명으로 모든 불의를 일소한 역사는 없다. 그렇기에 혁명기념 50돌을 맞는 우리사회는 4.19의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4월혁명이 있었던 1960년과 2010년 오늘은 하늘만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가슴도 맞닿아 있어야 한다. 막아서고 때리고 끝내 방아쇠를 당기는 권력의 시녀가 된 경찰과 동원된 관제 폭력단, 학생들의 시위가담을 막아보려 일요일 등교까지 강요한 당시 교육당국자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서울광장을 메운 촛불과 광화문의 컨테이너 산성 물대포를 쏘아대던 경찰, 서울광장을 봉쇄하는 차량의 행렬 그리고 가스통 위협이 난무하고 전직 국가원수의 묘역마저 파내겠다는 정체불명의 단체들, 특목고 자사고를 외치는 교육정책 아래 무한 입시노동으로 허덕이는 우리의 젊은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날의 4월과 오늘의 4월을 무거운 가슴으로 규정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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