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가 에 서
강 가 에 서
  • 김영태
  • 승인 2010.05.2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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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지율스님을 따라 무작정 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1박2일 낙동강 숨결느끼기’ 순례 행사가 벌써 6개월이 다 돼간다. 그 동안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밤을 새워 얘기해도 못다 할 것이다.

우린 그동안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물길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물길을 거슬러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들었고, 낙조에 흩뿌려지는 백사장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낙동강 수변가에서 몰래 짝짓기하다 들켜 도망치는 새들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또 보았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워 감히 발자국을 내 딛기 조차 겁이 나던 금빛 백사장이 포클레인 굉음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지는 아픔의 순간을 생생하게 지켜봤고, 뽀얀 먼지를 내며 달리는 트럭바퀴에 깔려 울부짖는 산하의 고통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또 여주 남한강에 갔을 땐, 전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는 희귀식물인 ‘단양쑥부쟁이’ 서식지가 마구 파 헤쳐지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도 미안해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낙동강 숨결느끼기 순례 출발지는 ‘물과 함께 흐르는 다리’ 강창교다. 낙동강에서 가장 낮은 다리로, 다리 위를 걸으면서 강물을 바라보기에 아주 좋은 다리다. 처음 순례를 시작할 때만 해도 1급수에 가까운 맑은 물이 흐르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누렇게 변한 황톳물이 아주 볼썽사납다. 강창교 다리 위만 매일 지나다녀도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

두 번째 들르는 곳은 상주보 건설현장이다. 처음 한 두 번은 제방을 따라 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요즘은 제방을 철책으로 막아 놓아 오상2리 마을을 통해 우회해서 걸어 들어간다. 오상2리에서 버스에서 내릴 때쯤이면 늘 코끝이 찡한 장면과 부딪친다. ‘하남우향(河南禹鄕)’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새겨진 표지석이다. 1990년대 안동 임하댐이 들어설 때 하남마을을 비롯한 6개 마을의 수몰민 30여 가구가 흘러흘러 낙동강을 따라 내려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앞으로는 이곳을 고향으로 삼겠다는 뜻의 ‘우향(禹鄕)’이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정 붙이고 사는 마을이다. 그런데 하필 이곳이었을까? 낙동강에 물을 채워 수위가 올라가면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다. 아직까지 말은 없지만 아마 언젠가는 이곳도 떠나야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주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다.

상주보 건설현장에 도착하면 강 건너편에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 병풍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아버지로 상주가 고향인 아자개가 고려의 왕건과 마지막 일전을 불살랐던 곳이다. 병풍산 꼭대기에서 아자개가 두 눈을 부릅뜨고 상주보 건설 현장을 내려 보면서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는 것 같아 난 죄스런 마음에 병풍산을 향해 고개를 바로 들 수가 없다. 그런데도 저들은 공사 진행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작년 11월에 터파기를 시작한 공사가 지금은 벌써 보의 기둥이 서고 거의 완전한 형태가 드러날 정도까지 진척이 됐다.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느끼지만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이 더욱 한탄스러울 뿐이다.

상주보 건설현장을 지나 상류로 올라 갈수록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직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곳들이다.

낙동강 1300리 중 최고의 절경을 자랑한다는 경천대 전망대를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조선시대 마지막 주모의 전설이 어려 있는 삼강주막과 강호동의 1박2일로 유명해진 회룡포, 백사장이 아름다워 지율스님이 특히 편애하는 내성천, 하회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부용대, 영남의 차마고도로 불리워도 좋을 병산습지 가는 길과 병산습지, 선사시대 유적이 서려있는 마애습지 등을 거닐 때는 눈부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하면서도 이곳이 곧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면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숙연해 하면서 분노하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김영태 (강과 습지를 사랑하는 상주사람들 운영위원)
처음 지율스님을 따라 강을 걸을 때만 해도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7~8명으로 시작한 순례가 10명이 되고 스무명이 되고 차츰 불어나더니 어느 때는 100여명이 훨씬 넘을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학교에서 또는 단체에서 합동으로 참석할 때도 있었다. 요즘은 각 단체별로 순례 문의를 해 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따로 순례일정을 잡지 않아도 될 정도다. 이렇게 순례객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가능성을 보기 시작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픔의 현장을 찾아 함께 아파하고 함께 분노한다면 저들도 결국에는 저 삽질을 멈출 수밖에 없다는 희망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누군가는 낙동강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으리라.

상주에서 순례를 시작하면서 전담조직으로 ‘강과 습지를 사랑하는 상주사람들’이라는 단체를 만들면서 슬로건이 ‘1000개의 눈으로 낙동강을 지켜내겠다’였다. 우린 확신한다. 낙동강을 지키려는 1천개의 눈, 아니 1만개의 눈이 모여서 반드시 저 아름다운 낙동강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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