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특별판〈영남의 어른①〉-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오래된 약속 특별판〈영남의 어른①〉-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 강병규(안동MBC PD)
  • 승인 2020.08.2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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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소년, 통일을 꿈꾸다”

임시정부의 소년, 통일을 꿈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나에게는 외외종조부,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남동생이셨다. 가끔은 우리 집에 들르기도 하셨기에 낯설 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외할머니를 무척이나 따랐었던 내겐 비교적 친근한 존재였다. 서른이 넘어 장성 한 내가 늦게나마 알게 되었던 사실은 그 분이 바로 동산 유인식 선생의 손자였던 것이다.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로부터는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나는 외외종조부께 동산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대 해 듣기를 청했다. 인터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 악화로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내가 했던 작업은 그 어른의 마지막 육성이 되었다.

그 일 이후로 나에겐 '기록'이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조직이 보유하고 있는 영상자료는 적어도 경북북부의 30년 이상을 기록해 온 소중한 지역 자산이며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차근차근 기록해 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 도중 우연한 기회에 또 한 번의 '기록'을 기획 하게 된다. 지난 2014년부터 제작해 오고 있는 <정신문화기획시리즈 오래된 약속>의 특별판을 제작하 기로 했다.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또 잘못하면 더 이상 들어볼 기회가 없어지는 분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어른들을 만나 육성을 담고 삶을 기록해 나가자는 뜻이 었다. 지역에서 태어나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나에겐 그 어른들이 그 누구보다 소중한 역사라 고 생각했다. 나는 그 분들을 만나 기록하는 작업에 '영남의 어른'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첫 번째 기록을 여기서 풀어놓으려 한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동농 김가진의 손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안동과 인연이 깊은 그 어른을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몇 달 앞에 둔 10월의 마지막 날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나뵈었다. 구순이 넘은 연세에 걸음도 불편하고 귀도 어두워지셨지만 '임시정부의 소년 김자동' 어른의 당시 기억만은 또렷했다.

1928년 중국 상하이 출생. 상하이, 자싱,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으로 이어진 임시정 부 이동 경로를 따라 성장했다.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서울법대에 진학, 조선일보, 민족일보 등의 언론 사에서 기자로 일했다. 2004년에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 를 창립해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아 사 업회를 이끌어오고 있다.
1928년 중국 상하이 출생. 상하이, 자싱,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으로 이어진 임시정부 이동 경로를 따라 성장했다.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서울법대에 진학, 조선일보, 민족일보 등의 언론 사에서 기자로 일했다. 2004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아 사업회를 이끌어오고 있다.(ⓒ안동MBC)

안동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신가요?

할아버지 본관이 안동인데, 서울서 태어나셨어요. 그런 데 중년에 안동부사로 부임했어요. 할아버지뿐만 아니 고 증조부, 고조부도 안동부사를 지내셨기 때문에 안동과는 인연이 좀 깊죠.

동농 김가진선생이 할아버님이시죠? 어떤 분이셨나요?

조선 말에, 벼슬도 많이 하셨는데 말하자면 농상공부대신도 하시고 법무대신도 하시고 그랬어요. 그리고 구한말에 의회 비슷한 걸 만들었어요. 그때 부의장을 지내셨기도 했지요.

동농 선생은 상당히 개혁적인 분이었다고 알려져 있던데?

할아버지는 일찍이 좀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었지요. 한 말에 일본하고 수교를 하고 일본의 공관이 수립되어 있었어요. 공관에 할아버지가 참사관으로 계시다가 돌아 오셨는데, 그러니까 일본이 그때 명치유신이라고 해서 나름대로의 개혁을 하는데, ‘일본사람들이 국내 개혁하는 걸 보고 참 배울 점도 많다’ 그렇게 생각하셨고 또 우리가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해야 되겠다 해서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신문을 발행하는데 할아버지가 관여를 하셨어요. 독립문이 있죠 원래 그 자리에 영춘문이 라고 있었어요. 청나라 사신이 올 적에 마중한다는 뜻에서 영춘문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헐고 그 자리에 파리 개선문을 본떠서 그것보다 좀 규모가 작게 독립문을 만들 었어요. 그때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서 독립문이라는 것을 세웠는데, 그 독립문의 필적이 한쪽은 한글로 되고, 한쪽은 한문으로 되고 그게 할아버지 필적이에요. 구한말에 명필로 꼽히셨던 분이예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신 것은 농상공부대신을 하시기 전이었나요?

원래는 대신이었는데 대신을 그만 두고 충청도 관찰사로 가시게 됩니다. 말하자면 좌천이에요. 근데 당신이 좌천을 당한 게 아니고 '나 서울서 못 해먹겠다', 그러니까 왜 놈들이 내정에 간여하지 않고 협조한다고 해놓고 사사건건 간섭하는데 못 해먹겠다 그러면서 관직을 그만두겠다 했는데, 고종이 말리니까 지방에라도 가야되겠다고 해서 충청도 관찰사로 가셨죠. 그때 을사보호조약이 일어난 걸로 알고 있어요. 을사보호조약을 맺을 적에는 이미 중앙정치에 관여를 안 하고 지방에 나가 있었는데. 그때 을사5적이라고 박재순 등등이 왜놈들하고 밀실에서 한 거니까 실제로 서울에 있는 대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뤄 지다시피 한 거죠. 그래서 을사늑약 이후 사표를 내고 그만 두셨지요.

그 이후 동농 선생의 행보는 어떻게 되었나요?

나라가 망한 다음에는 그냥 기가 죽어 계시다가 기미년에 독립선언이 있었잖아요? 그 다음달 4월에 동지들하고 모여서 지하조직으로 조선민족대동단이라는 단체를 만들 었어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총재로 계셨어요. 그때 대동 단에 주요한 간부들이 의논한 끝에, 대동단 본부를 해외로 옮기자는 그런 얘기가 있고, 할아버지가 상해로 가서 대동단을 계속 이끌어가는 게 좋겠다라는 논의가 있었죠. 그래서 1919년 10월에 할아버지가 당시 스무 살이었던 우리 아버지하고 상해로 함께 망명을 했어요.

할아버님이 상해로 가셨을 때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거 아닙니까?

그때 우리 정부가 있었죠. 4월에 임시정부가 수립이 되고 할아버지가 10월에 망명했어요. 망명하시기 전에 임시정부에 망명과 관련한 연락을 했어요.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안내원까지 보내줘서 같이 중국으로 갔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많은 서울역을 피해 한 정거장 북쪽 수색역에서 출발해서 신의주를 거쳐서 안동다리 건너가셨어요. 그때 농군복장을 하고 가셨어요. 그때가 10월이었는데 할아버 지가 귀가 좀 크신 편이라 그걸 가리기 위해서 귀마개를 하고 가셨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저 노인은 혼 자 겨울을 맞는다고, 벌써 귀마개를 했다고, 이런 얘기까 지 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 할아버님이 상해로 가셔서 하셨던 일은 어떤 일이었습니까?

상해로 가서 조선민족대동단 본부를 설립하고 거기서도 총재를 맡으셨는데, 그때 이미 나이가 74세였습니다. 망명할 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건강하셨다는데 가셔서는 고생을 하니까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서 별로 활동을 못 하셨어요. 하지만 돌아가실 때는 임시정부의 어른 대접을 받았죠. 그때 임시정부에 대통령으로 모시자 이런 얘기도 나오고 했는데, 결국 역시 여러분의 의논 결과 연세가 너무 많으시고 건강도 문제가 있고 해서 임시정부 고문으로 모셨죠.

그러면 회장님 어머니 정정화 여사는 언제 상해로 가셨습니까?

어머니는 한 석 달 후에 혼자 가셨죠. 물론 안내자는 있었죠. 어머니가 상해로 가시기 위해 친정아버지한테 가서 그 얘길 하는데 그때 생각에, 그런 얘기 하면 '여자가 어디 거기 가려고 하냐'고 야단을 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친정아버지가 반색을 하시더랍니다. '니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하시면서 북경까지 다니며 장사를 하는 육촌 오라비와 함께 상해로 보냈다고 해요. 상해 북역에 내린 다음 인력거꾼이 데려다 준 곳이 독립운동을 하는 손정도 목사님 댁입니다. 손정도 목사는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보다 독립운동 하는 분들은 도와줬는데 그 사람이 김일성 아버지하고 친구였어요. 그래서 손 목사가 우리 집으로 안내했는데, 어머니 기억에 그 집에 갔더니 그 집에 한 10살 된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소년이 바로 손원일이에요. 손원일은 대한민국의 초대 국방장관이에요. 손목사는 손원일의 아버지입니다.

어머님은 이후에도 한국과 중국을 계속 왕래했다고 하던데?

어머니가 겁이 없었어요. 굉장히 담대해요. 상해에 가보니까 할아버지가 돈도 떨어져서 고생하고 하니까 '내가 친정에 가서 돈 좀 마련해 와야겠다' 하면서 임시정부의 일도 함께 보곤 하셨죠. 임시정부에서 필요한 자금을 조 달해 오는 역할을 하신 겁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혼자 다니기 어려웠는데, 그렇게 한 두어 번 다니고 난 후에는 안내 필요 없다 여자 혼자 다니면 조사도 덜 받으니까 그래서 기차 타고 그냥 넘어오기도 하고 그러셨다고 합니다.

윤봉길의사도 직접 보셨다면서요?

1932년에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했거든요. 그 직전 임시정부 청사에는 백범 선생이 혼자 청년만 한 7, 8명 데리고 있었어요. 그 중에 한 분이 윤봉길 의사에요. 그런 데 윤봉길 의사는 고향이 예산이다 보니까 우리 어머니가 고향사람이라고 해서 우리 집에 자주 오셨어요. 국내에 저랑 동갑내기 아들이 있다고 하면서 나도 귀여워 해 주고 그러셨대요. 아버지하고도 친하고 어머니하고도 가까이 지냈는데 그때 윤의사가 공원에서 돌 던지는 연습을 하던 것을 보고는 우리 아버지가 '너 뭐하냐?' 하니까 운동한다고 그러셨답니다. 그런데 그게 폭탄 던지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거라. 그 폭탄에 대한 비화 들어봤어요?

윤봉길 의사가 거사하기 전이었어요. 1월에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히로히토를 죽이려다가 실패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때 백범 선생이 수류탄 그런 거 가지고 안되겠다. 다음에 할 때는 특제폭탄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하셨대요. 그때 이봉창의사도 자신이 일왕을 죽이겠다 고 했지만 사실 그 계획도 윤봉길의사가 세워서 백범 선생한테 보고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윤의사는 고향인 예산에서 보내온 사과 한 상자를 나눠 먹고는 남은 것을 들 고 홍쿠 공원 앞에 일본인들이 사는 시장에 가서 길바닥 에 놓고 팔았는데, 데리고 간 아이에게 좌판을 맡겨 놓고는 자기는 일본 사람들하고 어울리더라는거야. 그래서 저 사람이 처음에는 윤의사를 아주 이상하게 봤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왜놈들한테 정보를 얻는 거라. 그래서 4월 29일이 일본 천황의 생일에 맞춰 거사를 계획한 거예요. 그때 윤의사가 시장에 가서 장사를 하는 척하고 정 보를 얻어가지고 백범 선생한테 왜놈 도시락을 사다 드리면서 폭탄을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한 거죠. 그래서 그 도시락 폭탄으로 거사를 한 거예요.

해방은 중국에서 맞으신 겁니까?

중경임시정부 시절이었는데 해방되는 8월 15일 그날도 임시정부청사하고 1백미터도 안되는 곳인 집에 있었어요. 사람들과 같이 있는데 누가 박수치고 만세를 부르면서 뛰어 들어왔어요. 왜 그러나 했더니. 일본 놈이 항복 했다고 하더라고 근데, 그때 일본이 항복했다는게 놀랄 뉴스는 전혀 아니야. 우리끼리는 원자탄 던진 후에 왜놈 이 얼마나 버티냐 뭐 이런 얘기를 할 적에 나는 왜놈들 한 달도 못 버틴다 그랬었거든. 그렇지만 일제가 항복했다니까 나 역시 신이 나서 임시정부청사로 뛰어 갔어요. 그때 다 퇴근하고 거기 경비대에 있는 청년들, 광복회 회장 지낸 윤영빈 같은 사람들이 거기 있었어요. 거기에 얘기를 해주고 나오니까 거리에는 중국사람들이 폭죽을 터 트리면서 기뻐해요. 새벽까지 나도 같이 휩쓸려 다녔지요. 아마 새벽 2시나 돼서 어머니 아버지 계신 데를 갔더니 그때 안 주무시고 나라 걱정 하고 있는 거라. 왜냐면 항복해서 좋기는 한데 우리 광복군이 국내 침투작전을 성공시킨 다음에 해방이 되었으면 우리가 더 큰소리 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못돼서 섭섭하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회장님은 태어나서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와 거의 같이 하신 것 같습니다.

임시정부 얘기하면 나한테 있어서는 내 집 같은 생각이 들죠. 내가 가흥이라는 데 있다가 중국 관청에 가서 4년 있는데 그 중에서도 2년은 난징에 와 있으니까. 내가 1931년에 상해에서 들어가서 1946년 귀국할 때까지 기 간 중에 임시정부를 떠나서 지낸 기간은 아마 한 2년 정 도였죠. 그 외에는 계속 임시정부와 같이 움직였으니까 그리고 어렸으니까 항상 귀여움만 받았죠.

그러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겨레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임시정부가 의의가 있죠. 해방을 위해 싸우던 분들이 해 외로 망명했을 때에도 항일단체 집결의 정신적 중심이었 고, 중국에 있을 때는 그 당시에 좌익도 우익도 모두 임시정부에 다 가담했어요. 아쉬운 것은 처음 광복군을 만들 때만 해도 백 명도 못된 군대였지만 나중에는 늘어나서 몇 백 명 수준이 된 광복군이 무력으로 해방을 쟁취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죠.

앞서 말씀하신 내용 중 백범 선생이 회장님을 매우 귀여워 하셨다면서요? 서거하셨을 때는 굉장히 남다르셨겠습니다.

해방 이후 김구 선생은 1945년 11월에 귀국을 하시고 나는 그 이듬해 5월에 들어왔어요. 1949년 총탄에 맞고 돌 아가셨을 때 내가 6년제 보성중학을 막 졸업했을 적에 총에 맞으셨어요. 대학교에 합격만 해서 있는 상태에서 그날 성신여대 밑에 있는 버스 종점에서 우리 보성 다닐 적에 영어 가르치던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나한테 백범 선생이 총 맞았다고 알려줬어요. 집에 얼른 들러서 어머니하고 같이 경교당까지 갔죠. 가니까 벌써 돌아가 시고 상처에 뭘 붙여놓고 그랬어요. 그때는 뭐 말할 것도 없었죠. 내 친아버지 우리 집안의 제일 가까운 분이 돌아 가신 거나 마찬가지였고 민족의 지도자이길 떠나서 내 개인적으로도 어려서부터 날 귀여워해주고 했는데, 또 중경서도 자주 뵙고 하여튼 그 아들하고 난 한 학교 다니고, 할머니도 한 집에서 살면서 아주 가까이 지냈으니까요. 엄청난 아픔이었죠.

회장님은 아버님이셨던 김의한 선생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셨잖아요. 나중에 성묘는 하셨나요?

북에 있는 묘소를 찾아갔죠. 처음에는 아버지 묘소를 간 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김대중 대통령 때 내가 성묘를 가겠다 승낙해 달라 그랬죠. 남측에서는 승인이 되었는데 이북에서 초청을 안 해줄 거라고 했어요. 다들 그런데 나는 여전히 갈 거다, 초청해 줄거다라고 했죠. 결국 2006년 재북애국지사후손 성묘단을 만들 어서 평양을 방문해 아버지가 묻혀있는 재북인사묘역을 참배했죠. 잊을 수가 없는 장면입니다.

지난 2004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드셨는데 숙명 같은 일이었겠습니다, 회장님께는?

내가 임시정부 기념사업회를 한것도 90년대 말쯤 되면서 조금 여유가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그랬거든, 우리 애들도 할아버지기념사업회를 만든다고 나한테 그랬어요.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것보다는 임시정부 어 른 중에 후손이 여유가 없어서 기념도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 하니까 임시정부 기념사업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 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념사업회도 만들고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고 있는거예요.

내년이 임정수립 100주년인데 특별한 계획은 없으신가요?

그런데 내가 요즘 별로 할 일이 많지가 않아요. 다행인것이 지금까지 임시정부에 대해서 다른 대통령들은 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이명박이고 박근혜 정부 때는 보훈 처에서 임시정부 관심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번 정부는 임시정부기념관 문제도 잘 하고 있고, 청와대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도 보훈처에 서 다 알아서 하니까 나는 그저 옆에서 돕고 또 자료 같은 거 달라면 내가 더러 제공하고 그러면 되는거죠. 어쨌든 전 같이 내가 열심히 움직이지 않아도 돼요.(웃음)

다시 할아버님 얘기로 좀 돌아가보죠. 동농 김가진 선생은 독립운동에 힘쓰셨음에도 불구하고 서훈을 못 받으셨어요, 많이 섭섭하실텐데요?

지금은 될 수 있다고 보는데. 곧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봐 요. 보훈처에서도 알고 있겠지만 쉽지는 않겠지요.

우리나라는 분단국가입니다. 회장 님은 아직도 독립운동이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씀 하셨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글쎄 나는 우리가 독립이 통일된 나라를 바라보고 항일투쟁을 한 것인 데 지금 통일이 안 됐으니까 반쪽 나라라고 봐요. 아무리 대한민국이 국제적인 지위가 높다고 해도 반쪽 나라야. 이북도 아무리 뭐라고 해도 반쪽 나라고. 그래도 다행인 것이 양쪽이 지금 전 같이 적대시하지 않고 대화를 하고 정상회담도 벌 써 세 번을 했잖아요.

그럼 회장님이 생각하시기에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이제 마무리가 되는 겁니까?

그렇죠. 통일이 되면 비로소 독립이 제대로 된 거죠. 지금은 반만 독립이 됐다고 할 수도 있고. 그래서 남북관계가 지금보다 조금 더 좋아져서 말하자면 연방제라도 됐 으면 하는게 바람입니다. 느슨한 연방제 형태로 따로 있더라도 서로 한 나라라는 정신을 갖고 만나는 정도로 지금 현재 대통령하고 또 북쪽하고도 서로 대화가 잘 되고 하면 좋겠어요. 90을 넘긴 노구였지만 임시정부의 기억만은 생생하게 안고 있는 김자동 회장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년에 는 선친의 묘소를 다시 한 번 다녀오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답방을 앞두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선물 보따리가 풀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마감했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1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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