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특별판〈영남의 어른②〉-장병하 애국지사
오래된 약속 특별판〈영남의 어른②〉-장병하 애국지사
  • 강병규(안동MBC PD)
  • 승인 2020.08.2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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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는 소년들의뜨겁고 격정적이었던 이야기
안동농림학교 조선독립회복연구단 장병하 애국지사

가슴 뛰는 소년들의 뜨겁고 격정적이었던 이야기

-안동농림학교 조선독립회복연구단 장병하 애국지사-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인 올해 사회 곳곳에서 그 역사적인 날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수많은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안동MBC는 임시정부수립, 항일독립운동과 함께하겠다는 연중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고 나 역시 그 대열에 발맞춰 지역 시·청취자분들께 보내드릴 몇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무장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자취를 기리는 라디오 드라마를 비롯해 나라꽃 무궁화가 독립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려내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헌신해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1만 5,511명 중 2,231명이 경북 출신이다. 경북 출신 독립운동 유공자 중 안동 출신은 374명*으로 그 수가 월등히 많다. 최초의 항일 의병 운동으로 꼽히는 1894년 갑오의병의 발상지 역시 안동으로, 이른바 독립운동의 성지라 불린다. 안동의 독립운동은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51년 동안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이제 여기서 항일독립투쟁의 유구한 역사 속 해방 직전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의 처절했던 투쟁을 소개하려 한다. 학생운동은 조선독립회복연구단 활동이었고 그 가운데 섰던 유일한 생존 애국지사 장병하 선생은 아직도 청년으로 남아 그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대구에 있는 자택에서 장병하 지사를 만났다. *2019년 3월 현재 전국, 경북, 안동지역의 독립유공자(자료 제공: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연세에 비해 무척 건강해 보이십니다. 고향은 어디신가요?
1928년 2월 1일, 도산서원 근처인 안동군 도산면 분천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거기서 4살 때 안동으로 나왔어요. 어릴 적 안동은 참 한산했던 기억이 있어요.

당시는 일제치하였지만 안동에서는 만세운동도 있었고 분위기가 좀 다르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가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1944년 45년 당시에는 조선사람 대부분이 일본말을 했어요. 어떤 때는 일본 사람보다 더 심하고 그러니 누구를 믿고 얘기할 사람도 없고, 또 우리나라가 옛날에 독립된 나라로 살았다고 하는 것도 모르고, 그런 지식이 없이 살다 보니까 서로가 그런 얘기를 주고받고 하는 것은 드물었습니다.

그럼 학교는 어디를 다니셨습니까?
안동중앙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안동농림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로 봐서는 일본 사람들이 고등교육기관을 덜 만들 때입니다. 또 우리 스스로는 못 만들게 억압할 그런 때인데, 원래는 안동에 인문고등학교를 세우기 위해서 많은 유지들이 노력을 했다고 하네요. 결국은 그렇게 안되고 유일한 갑종실업고등학교로는 북부지방에 안동농림학교가 유일했습니다. 그래서 당시로 봐서는 서울이나 대구로 유학을 못 갈 형편에 있는 수재들이 안동농림학교로 많이 모였습니다.

집안 형편이 좀 괜찮았던 모양입니다.
당시에 안동농림학교에 입학전형 절차를 보면 어느 정도 재산이 없으면 공부를 잘하더라도 입학 허가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수재들이 다 못 들어오고 그런 경우도 있었는데, 저는 다행히 형님이 취업해 있는 데서 월급증서인가를 가져와서 그걸 증거자료로 갖다 내니까 아마 재산관계는 무난히 통과가 된 것 같아요. 그 당시에 형님들은 거의 학교를 못했습니다.

우리말도 못 배우게 했을 것이고 말씀하신 대로 일본말을 쓰셔야 했을텐데, 식민지 시대의 학교생활은 어떠셨나요?
학교생활,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암담했는데 당시에는 그것을 또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아,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인가 보다'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농림학교는 우선 복장이 군인하고 똑같습니다. 뒤에 배낭 매는 거라든지, 발목에 각반 차는 거 허리띠 매는 것까지 군인과 똑같았어요. 학교 교문 앞에 가면 상급생들한테 경례하고, 들어가면 일본 천조대신(天照大神) 앞에 가서 배례하고 들어갔습니다. 또 조례를 하면 궁성예배라고 해가지고 일본 동경에 있는 일왕에게 인사를하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실업학교인 안동농림에서는 일제 말에는 거의 공부를 안 가르쳤어요. 대부분 오전에는 실습을 하고, 오후에는 근로봉사를 나갔습니다. 동시에 총검술이라든지 군사 교육을 받았는데 예를 들면, 완전무장을 해가지고 안동에서 청송 주왕산까지 행군해가는 훈련이라든지, 물이 가득 찬 낙동강을 건너는 도하작전도 하고 군사훈련을 아주 철저히 했습니다.

처음에 지사님께서는 '독립'이라는 말도 '임시 정부'라는 말도 전혀 모르고 계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독립'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되셨습니까?
소설 중에 심훈의 〈상록수〉가 있지요. 그게 농촌 생활을 너무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를 해가지고 거기에 크게 감동을 받았어요. 또 〈유정〉이라든지 〈무정〉이라든지 이런 소설을 통해서 우리 백성들이 얼마만큼 곤궁하게 살고 있었는지, 또 나라를 잃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가 은연중에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아, 우리나라가 일본 놈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서 모든 백성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사는구나'하는 걸 그때서야 이제 알게 되었어요. 책을 통해 알게 된 겁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해서 독서모임도 가지셨군요?
안동농림 1학년 때, 같은 하숙에 있는 아이들 중심으로 다섯 친구가 모였어요. 얘기가 잘 통했고 기왕에 이렇게 모였으니까 그대로 있을 게 아니고, 제일교회 앞 서점에서 우리가 책을 가져다가 읽고 공부를 하자 이렇게 된 겁니다. 서점에 가보니까 조선문학전집도 있고 세계문학전집, 일본문학전집도 있었어요. 책이란 책은 다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서 우리의 시선을 끈 것이 한국말로 되어 있는 소설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자, 그러면 우리 목표를 세우자. 여기에 있는 한국문학전집, 일본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이거 다 전부 다 독파하자. 그렇게 해서 모인게 '상지회'라고 하는 독서모임입니다. 독서모임을 하고 나니까, 할 얘기가 그렇게 많아요. 책 내용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든지, 저렇게 생각한다든지 얘기를 했고, 그 가운데에서 한국 농촌의 농민들이 얼마만큼 참혹하게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저절로 얘기가 나오게 된거예요. 그래서 아,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빼앗겨서 이렇게 되었구나라는 것을 이제 느끼게 됩니다.

임청각에 봉사하러 나갔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만?
그러니까 당시에는 방학이 되면 학교에서 지방에 여러가지 실태조사 같은 것을 시키기 위해 봉사를 나가도록 했어요. 그때 안동 월곡면으로 차출되어서 가는 학생 가운데 황병기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이대용(이병화)씨하고 만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얘기하다가 임청각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임시정부가 있다하는 얘기를 들었고, 독립운동을 해야 된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야 된다는 얘기도 들은 거예요. 이 친구가 이런 사람을 만났다고 얘길해요. 이건 참말로 가슴 뛰는 이야기였어요. 생전 첨 듣던 얘기.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되어 있다는 것도 잘 모를 때, 이 얘기를 듣고. 그럼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를 고민하고 참회하자고 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번도 생각도 안해봤던 얘기 아닙니까. 아, 우리나라가 있다. 우리나라를 찾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해야 된다. 이거 가슴 뛰는 얘기라요. 가슴이 멍하고, 옆에 누가 혹 엿듣는 사람 없는가, 살피게 되고 그랬어요.

그래도 어렸을 때인데 두려운 마음은 없었습니까?
많이 주저했지요. 막내인 나만 바라보며 중등교육을 시키며 기대하는 연세 많으신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얘길할수록 그쪽으로 자꾸 빨려 들어가더라고요. 그게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부모보다도 나라를 한 번 생각하자,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갑룡이나 황병기가 8회생 권영동이라든지 이런 친구하고 모두 다 의기투합이 되어 가지고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상지회에서 활동하던 친구 가운데 조선독립회복연구단에 들어간 것은 다섯 사람 중에 세 사람 뿐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참여를 안 했고요.

당시가 일제 말엽이었으니 탄압도 매우 심했을 시기입니다. 결국 민중들 전체가 봉기하기에는 사회적인 여건이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당시에 사회상을 보면 집집마다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저 밥 먹고 연명할 정도 되는 안노인들하고 여자들 뿐이었어요. 남자들은 크면 보급대 가고, 조금 더 젊으면 지원병으로 가고, 징병 가고 이렇게 거의 모두가 죽지 못해, 참 초근목피로 산다고 하는 식으로 됐었지요. 조금 산다고 하는 집은 관공서에 다니는 분들, 그 다음에 우리 학생들 정도가 젊은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전부 노약자뿐이었어요. 그 당시에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준비하면서 집안에 있는 밥숟가락까지 다 가지고 가고 그랬잖아요. 모든 것이 전쟁에 동원된 그런 시대가 되니까.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필요한 인원은 전부 다 끌고 갔습니다. 여자는 여자 정신대, 뭐 위안부, 온갖 것으로 끌고 가고. 그러니 젊고 팔팔하고 돈 벌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가 전부 다 이렇게 되었는데. 이런 항일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조직은 학생들뿐이었어요. 또 바깥에 나가보면 모두 무기력하고 일본 사람 다 된 것 같이 그저 기가 죽어 살고 있는데, 우리가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는 게 친구들의 모두의 한 목소리였지요.

말씀하신 내용 중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매우 심하게 받으셨다고 했는데, 당시 학생들이 그 훈련에 반발이 있었다구요. 그게 조선독립회복연 구단이 만들어진 계기가 되었던 것 같은데요?
맞아요. 일제는 그런 군사훈련을 하면서 학생들을 자꾸 지원병 쪽으로, 나이 어린 아이들은 소년 항공병, 특별간부 후보생, 또 뭐 이런 식으로 일본 군대에 가는 것을 많이 권장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나도 언젠가 저렇게 군대에 뽑혀 가지 않겠느냐, 하고 모두 걱정을 했습니다. 4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 우리는 학교에 입학할 때 월사금에다가 수학여행비를 적립했어요. 그렇게 적립한 것을 졸업 할 때까지 한 번은 일본 가고, 한 번은 금강산 가고, 한 번은 중국 만주를 가고, 이 세 군데를 여행하도록 여행경비를 모았는데 4학년이 될 때쯤 전쟁 쪽으로 기운이 점점 기울어진 겁니다. 그래서 여행도 못 가게 되니까 학교에서 생각다 못해 여행 대신 우리 학생 4학년 전원을 기차를 태워 대구에 갔어요. 대구에서 그 다음날 갔던 곳이 24연대, 군대를 구경시키고 난 다음 공회당에서 우리 신체검사를 시켜요. “이거 거 뭐하는 겁니까?”하니까 합격되면 특별간부 후보생으로 간다고 합디다. 그러니까 학생 전원을 군대를 보내려고 응시를 시켰던 셈이죠. 그래서 그 시험을 보는데 시험 내용이 누구든지 대답할 수 있는 그런 문제로 필기시험을 보더라구요.

누구나 합격할 수 있도록 쉬운 문제를 내서 무조건 군대에 징집을 하려고 했던거군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모여서 얘기하기를 “여기에 만약 잘 되면 틀림없이 군에 뽑혀 간다, 그러니 우리가 백지동맹을 하자” 그래서 만약 백지동맹이 잘못되면 똑같이 오답동맹을 하자고 했어요. 그렇게 100명이 시험을 다 봤어요. 그런데 세 사람이 합격을 했어요. 그래서 합격한 세 친구들보고 “너는 왜 그렇게 했냐?” 그러니까 “그래도 졸업반인데 너무 적게 맞추면 누가 뭐라고 하지 싶어서 적당히 몇 개 맞도록 했다”는 얘기였어요. 그렇게 군에 뽑혀 간 것이 잘 아시는 김재규, 그 친구가 특별 간부 후보생으로 가고, 김형규, 김태형이라는 친구, 세 친구가 뽑혀 갔죠.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나왔는데 그때부터 문제가 됐어요. 이 학생들이 뭔가 일본에 반대하는 기미가 보인다 해서 우리를 요 시찰 인물로 살피더라구요. 그러다가 갈정호라는 친구와 대구에 이준택이라는 친구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조선회복연구단 얘기를 썼던 모양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이라는 단체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었나요?
여러 가지 얘기가 있습니다만. 8회생 권영동, 고재하, 윤동일이라는 친구들은 조금 색다르게 독립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었어요. 특히 윤동일 같은 사람은 소련 공산당에 있던 윤장현씨 집안인데 그런 것에 대한 기초상식이 많은 친구였어요. 이런 친구들이 모여서 우리 한 번 독립 운동단체를 만들자고 얘기가 되어서 몇 사람들의 의견을 취합하고 8회생 중심으로 얘기가 됐습니다. 나중에 기록에도 나오는 구체적인 모임은 10회생 서정희라는 친구의 집이 그 당시에 대포사 진관이었습니다. 사진관을 했었는데 사진관에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 이제 거기에 몇 사람이 모여가지고 비밀스럽게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대포사진관에서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을 만들자고 발기가 되어 단원을 많이 포섭해 단세를 확장해 나간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9회생도 10회생도 이제 자꾸 끌어 모으게 된 거죠.

그게 3년이 걸린 거네요. 매우 비밀스럽게 움직이다보니?
네, 3년이 걸렸습니다. 모르기는 모르지만 그 뒤에 보면 조직표가 있는데, 이 조선독립회복연구단에는 유일하게 우두머리가 없습니다. 단장이 없어요. 왜 없느냐면 처음에는 8회생이 중심이 되어서 했는데, 단장 할 것 없이 서로가 의기투합해서 독립운동하자고만 했지 누구를 단장으로 뽑고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졸업해 버렸다 말입니다. 그리고는 9회생이 맡았습니다. 황병기가 중심이 되어서 참모부를 맡아 전체 조직을 운영하고 이끌고 나가는 걸 하고 그 밑에 교화부를 둬서 단원을 훈련하고 교육하고 조직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특공부라는 것이 있고, 신풍부라는 것이 있었는데, 우리가 일본 헌병대하고 안동경찰서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봉기 하자는 얘기를 했으니까 이 특공부가 필요하다. 이 특공부에 소속된 사람은 주먹도 쓸 수 있고, 신체도 건강하고 또 운동도 잘 하고, 이런 친구들로 조직하자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그러면 우리가 누구를 처단해야 하느냐? 악질 일본인, 악질 친일파, 이 사람들 조사하는 부서가 있었고, 그 다음 연락부라는게 있어서 서로 의사소통이 될 수 있는, 그런 연락을 하는 책임을 졌습니다. 끝으로 하나 더 있는 게 위생부. 위생부는 이주영이가 그때 안동 성소병원에 렌트겐 기사로 있었습니다. 안동역에서 거사를 해서 부상자가 생겼을 때 이때는 그 친구가 다 감당하겠다고 해서, 의사 백태성 씨를 포섭하기도 하면서 조직 확장을 했습니다. 참모부 황병기는 전체 조직의 구조를 알고 있으니까 그 위에 있는 책임자만 데리고 얘기 하면 되고, 밑에 이 책임자는 자기가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단합만 끌면 되고, 그러니까 각 단원을 끌고 있는 그 단체에서 거기서만 알지 모두가 비밀을 유지하는 그런 조직이었습니다. 서로 잘 모르고 지냈지요. 나는 어쩌다보니까 황병기하고 늘 아침저녁으로 만나니까 참모부에서 같이 일을 거들었죠.

그러면 그렇게 학생들이 조직한 조선독립회 복연구단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까? 물론 최종적으로는 대한의 독립이었겠습니다만…….
하나는, 우리가 이렇게 있다가 군대에 끌려가서 일본놈 총알받이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목숨 바쳐서 독립운동 하다가 죽자 이게 첫째 목표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를 연구하자, 이게 이제 둘째 목표. 세 번째 목표는 우리가 이렇게 만세운동을 하고 무력봉기를 함으로 인해가지고 사회가 시끄러우면 연합군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 연합군의 활동에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세 가지 목표였습니다.

그렇게 목표를 세우고 거사를 준비하신 거네요 그럼?
그러니까 전체 참모부에서 전부 다 지휘를 하는데, 첫 번째 모임은 비상연락망을 깔아 놓고 이 연락망을 통해서 몇시까지 어디로 모이라고 하면 그때 모여라, 그렇게 모이게 되면 하나는 헌병대 쪽으로 간다, 하나는 경찰서 쪽으로 간다, 하나는 읍사무소 쪽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읍사무소에는 안동읍민들이 들을 수 있는 방송시설이 있었어요. 그 방송시설을 장악해서 방송을 통해 우리가 거사했다고 하는 것을 시민에게 알려서 봉기하는 데에 동참할 사람 다 나와라, 이렇게 해가지고 만세운동을 시작하는 거였죠. 그러면서 한 머리에는 경찰서와 헌병대로 가는 것이었는데, 일본 헌병들은 대여섯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능히 제압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렇게 무력봉기를 하면서 대구 24연대가 안동으로는 오는 것을 막기 위해 통신망을 끊고 만세운동을 하면서 계속 진격한다는 것이 대략의 거사 계획이 었습니다.

1945년 3월 10일 날 저녁에 거사를 하기로 했는데, 일제가 3월 7일부터 시작해서 수뇌부 아이들을 검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갑룡, 황병기, 김호섭이 경찰에 잡히게 됩니다. 갖은 고문 끝에 거사의 전모가 다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친구들이 붙들려 간 것도 모르고 연락이 오도록 기다리면서, 3월 8일 거사일인데 표 안나게 한다고 학교에 갔습니다. 학교에서 그날은 남선면으로 토끼를 잡으러 간다는 거였습니다. 끝나고 나니 11시가 조금 넘었는데, 선생이 갑자기 인솔해서 시국강연을 들어야 된다고 하면서 4학년 전원을 안동경찰서 무덕관에다가 다 잡아 넣는 거라요. 뭐, 시국강연 비슷한거 조금하고 난 뒤에는 고등계 형사들이 쫙나와 가지고 사방 딱 둘러싸고 난 뒤에 지금부터 이름 부르는 사람 나오라, 이거예요. 그래가지고 일제히 소탕한 거예요. 하나, 하나, 이름 부르는데 뭐 틀림없어요. 그래서 9회생 전원이 완전히 검속 당했고. 10회생하고 8회생은 그 뒤에 12일까지 계속해서 잡혀왔었죠. 모두 54명인가 그랬어요.

이름 불리셨을 때 깜짝 놀라셨겠어요. 상황을 몰랐을 거 아니에요?
상황을 몰랐죠. 설마, 일본놈이 그렇게 알겠나 싶었는데 들어가서 보니, 참 일본 그 고등계라고 하는게 무서울 정도로 정보력이 있었어요. 우리 동태를 전부 다 파악하고 집집마다 어디 가고, 누구 만나고 하는 걸 거의 다 안 것 같아요. 그렇게 된 것이 2월에 대구 이준택이 불려가고 갈정호가 붙들려갔는데, 그 중 현필규라는 학생이 미군 숙사에 근로봉사 갔다가 나중에 종전되면 미국을 알아야 한다면서 미군 사람들이 쓰던 책을 들고 나오다가 적발이 되었어요. 그래서 현필규네 집이 가택수색을 당했는데 거기서 조선회복연구단 단원 명부가 나와버린 겁니다. 그렇게 발각된 거죠. 제일 처음에는 1944년 12월 22일날 우리가 거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거사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학제가 변경이 돼가지고 5년 졸업하는 학생, 그러니까 8회생을 그해 12월 달에 당겨서 졸업을 시켜버린 거예요. 이 아이들이 졸업을 해버리니까 12월 22일에 거사를 못했습니다.

전말이 그렇게 된 거군요. 그럼 다들 붙잡힌 이 후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안동경찰서 유치장으로 잡혀갔는데 경찰서 유치장이 대만원이라요. 한 무리는 그 사무실 하나를 터 가지고 거기에다가 긴 의자에 앉혀놓고 쇠막 대기 기다란 것을 구하고 그 다음에 말굽형으로 되어 있는 이런 걸 해가지고 쇠막대기를 여기다 끼워가지고 말목을 넣어, 전부 다 잠그도록 이렇게 해가지고 다섯 사람, 여섯 사람, 이렇게 끼워 가지고 끝에 자물쇠로 잠그고 누가 하나 소변 보러간다고 하면 다섯 사람이 같이 가야 되고, 이런 식으로 서너 달 동안 지냈어요. 지냈는데. 조사가 대충 끝나고 여론이 안 좋아질까봐 일부를 안동 형무소에 갖다 넣은 거예요.

당시 황병기 지사님은 보셨습니까?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던가요?
황병기 씨는 참 고문도 많이 당했어요. 뭐 피투성이가 된 옷이 나오고 할 정도로 그렇게 많이 당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게, 갑하고 을하고 관계 되는데 갑이 한 말과 을이 한 말이 다르면 지독하게 많이 맞는 거라요. 똑같은 말이 나올 때까지. 그런 여러 가지 고초를 당하면서 우리 일이 일단락이 됐습니다. 형무소에서 있을 때, 우린 모두 다 이 징역을 몇 년 살면 되느냐, 그 얘기하고 어느 형무소로 이송되겠느냐, 이 얘기가 주로 중심이 되었죠. 중심이 되어서 인천형무소는 바닷가에 있다고 하는데, 거기 좋다고 하더라. 김천형무소는 뭐 어떻더라, 하고 그런 얘기도 주고받는데…. 그러나 이제 한 머리는 우리를 집단으로 놔뒀다가 일본이 망하면 우릴 가만히 두겠느냐 제일 미운털인데, 일제히 데려가서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 그런 걱정도 하고 그랬어요.

해방되고 그 이튿날 출옥하셨죠? 감옥에서 해방 소식은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글쎄, 8월 15일에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는 들었어도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알 수가 없잖아요. 일본 간수들이 울고불고 한다, 그런 얘기도 들리고 하는데 뭔지는 모르고 무슨 일이 있구나 그 정도로 알고 있었죠. 그러다가 8월 16일, 한국인 간수들이 우리나라가 해방이 됐다, 너희들 풀려난다, 그렇게 알려줘서 알았어요. 바로 형무소 문을 열어주지는 않더라구요. 그것도 절차가 있어서 거기에서 전부 다 수속을 한 후 다시 안동경찰서로 호송되고 안동경찰서장이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사죄하는 것도 보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전원 풀려나온다 하는 걸 알았어요.

해방을 맞고 감옥 밖으로 나왔을 때 그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첫 번째 나와서는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또 해방 되자마자 어째 그렇게 아는 사람도 많은지 좌익이다 우익이다 하고 떠들고 신탁통치 반대라고 하고 세상이 시끄럽게 이렇게 하니 우리 같이 어린 나이에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 우리가 잘못하다간 큰일 나겠다고 그래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고, 다른 길을 택했죠. 저는 그 길로 교직생활을 시작했구요.

당시 안동도 무척이나 혼란스러웠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뭐 제일 앞장서서 만세 부르는 사람은 소위 말하는 친일 세력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면죄부를 받기 위한 것인지 굉장히 열렬하게 독립만세를 불렀어요. 일장기를 가져다가 잉크로 밑에 시커멓게 칠해가지고 괘를 적당히 그려서 그것을 들고 모두 나가고 했죠. 해방되고는 모두 다 자기 덕에 그런 줄 알고 날뛰기를 말도 못 했어요. 그러니까 뭐 신탁통치 반대 깃발이 지나가면 또 찬성 깃발이 들어가고 서로가 옥신각신 거리고 하는 걸 봤으니, 우리 나이로는 도저히 분간을 못하겠더라구요.

더군다나 옥살이 후에 해방되고 나가보니, 경찰서에 옛날에 우리를 취조하던 형사가 그대로 그 자리에 있고 읍사무소나 어딜 가 봐도 그때 그 사무 보던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고, 친일파가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구요. 그랬으니 독립 운동 했다고 “아이고, 참 수고했습니다” 하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백안시 하는 거라요. 저게 날 해코지 할까하는……. 그래서 참 조심 많이 했습니다. 사회가 너무너무 암울했습니다. 그러니 정작 큰소리 쳐야 할 사람은 뭐가 뭔지 몰라서 가만히 있고, 큰소리 치지 말아야할 사람들이 큰소리 치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는 조금 신중해야 되겠다 생각했고, 더군다나 나는 나이도 어리고 하니까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교직에 들어가 버렸어요.

해방 이후에 친구셨던 황병기 지사님은 다시 만나셨습니까?
네, 우리 자주 만났습니다. 이이와 함께 누군가가 정리를 해서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안 되겠느냐는 얘기를 하다가, 황병기가 그럼 내가 하겠다고 했지요.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1978년에 안동농림 모교에다 이 조선독립 회복연구단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글을 실었습니 다. 그게 제일 처음 나온 우리들의 얘깁니다.

졸업앨범이 있는데 얼굴이 모두들 중년입니다.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겁니까?
여기 보면 졸업35돌입니다. 안동농림 9회생들입니다. 1945년 3월에 졸업한 학생들입니다. 졸업 할 때는 우리 9회생 28명이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70여 명이 졸업을 했는 셈인데 졸업 같지 않은 졸업을 한 겁니다. 졸업 후 모두 객지에 뿔뿔이 흩어져버렸습니다. 헤어지고 나니, 8월 15일 광복이 됐고. 일제시대 때 쓰던 일본 이름은 다 없어져버리고 한국이름으로 돌아왔다 이거에요. 옛날 친구 찾으려고 해도 찾지를 못해요. 일본 이름으로 알던 친구가 한국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이렇게 되서 지금 지내고 있습니다. 참 서글프지요.

졸업하고 35년, 1978년경부터 시작해서 동창회가 만들어졌어요. 보안사령관도 하고 건설부장관도 했던 김재규가 동기생이다 보니 그나마 동기회가 조직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동기회 모임을 했는데 졸업앨범을 만들어보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모으고 했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졸업 35돌 앨범입니다.

그러면 35년만에 처음 세상에 알리신 거네요? 그동안은 왜 침묵하고 계셨습니까?
침묵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누가 알아줍니까? 아니면 누가 칭찬하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1963년도에 독립운동유공자를 발굴해 포상한다는 얘기가 있었을 때, 우리가 서류를 만들었어요. 우리도 독립운동 했으니까 서류를 내자고 해서 황병기, 이갑룡, 강동석 이런 친구들하고 같이 안동 경찰서에 찾아갔어요. 관계된 서류를 찾아봤지만 하나도 없었습니다. 취조한 서류라도 있어야 했는데 없다고 하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어요. 왜 없는 것인가 하며 물었더니 해방되고 반민 특위에서 당시 고등계 형사였던 손대용을 단죄하기 위해 서류를 가지고 갔었는데 그 반민특위가 습격을 받아서 난리통에 서류가 몽땅 없어져 버린 겁니다.

그래서 다시 부산형무소 창고까지 가서는 열람 신청을 했더니 사전검명부라고 하는 서류가 있었습 니다. 일본식 이름과 한국식 이름, 나이, 혐의와 위반한 법률 등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945년 3월 10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1945년 8월 16일 집행유예로 출옥했다는 기록이었어요. 딱 한 가지 남아있던 그 기록으로 원호청(보훈처)에 신청을 했는데 판결문도 없고 공적인 증빙자료가 없어서 포상을 할 수 없다고 결과가 나왔어요. 결국 추가 자료는 없었지만 재검토를 통해서 독립 운동을 한 사실은 틀림없으니 대통령 표창을 주자고 결정이 난 모양입디다. 옥중에서 순국한 손성한은 조금 높은 서훈을 받았고 나머지 31명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그제서야 독립운동을 한 사실을 인정받으신건데, 받으시면서도 마음은 좀 서운하셨을 것 같네요.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사건을 국가에서 독립운동으로 인정해 줬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어린 학생들이 생명을 내놓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하는 것은 너무 과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정부에서 독립운동으로 인정을 해서 표창을 준 것에 우리는 만족 합니다. 증거자료도 더 없지 않습니까?

장병하 지사 인터뷰 장면
장병하 지사 인터뷰 장면(ⓒ안동MBC)

살아계신 동안 그 부분을 조금 더 명확하게 기록으로 남겨두길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내가 여태까지 살고 있는 것도 아마 그런 걸하고 오라고 우리 친구들이 날 살도록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사는 동안에 내가 이 독립운동의 주모자도 아니고 그저 참여해서 같이 활동 했던 한 사람으로서 이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세상 사람들이 '아, 그런 운동이 있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고 국가에서도 독립운동으로 인정을 해서 “고맙다 그 사람들”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그냥 안 알리면 아무 것도 안 한 것이 되지 않습니까? 안동이 원래 독립운동이 번성한 곳입니다. 제일 처음 의병이 일어난 곳도 안동 지방이고, 제일 마지막에 독립운동도 안동농림학교 학생운동입니다. 그러니 처음과 끝을 잇는 독립운동인데,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은 너무 억울해요.

아픈 역사는 기억되어야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반복되지 않아야 됩니다 반드시…….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날뛰고 있잖아요. 독도도 자기 땅이라고 하고. 독립운동은 지금도 계속 되어야 합니다. 남북이 하나가 되어서 완전 독립이 될 때까지 우리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이 독립운동은 계속 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렇게 모진 세월을 살아오시면서 후회는 없으세요?
후회? 후회 없습니다. '난 참 모든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봤다' 이게 내 생각합니다. 교육계에 있을 때는 교육에 전념했고, 광복회에 와서는 또 광복회 활동에 전념하고, 하여튼 나한테 처해져 있는 내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하면서 살 았다고 난 느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병하' 라는 함자가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되시길 바랍니까?
하……. 기록되기를 바라진 않습니다. 내가 뭐 했다고 기록에 남습니까? 나보다도 더 훌륭한 사람들이 더 많은데요. 그러니 그런 분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옛날의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살았고,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앞으로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이렇게 해야 된다,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기회와 교육의 장이 마련되어 졌으면 좋겠어요.

아흔이 넘었어도 장병하 지사님은 여전히 청년으로 살아가고 계셨다. 남북이 하나가 되어야만 진정한 독립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고, 피 끓는 청춘으로 독립운동에 참여만 했다는 겸손함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받을 분이셨다. 다시 한 번 그분들의 투쟁을 기억하겠다는 다짐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2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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