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왕②-공동체의 복원을 꿈꾸는 수집가 김혁동
수집왕②-공동체의 복원을 꿈꾸는 수집가 김혁동
  • 김은경(안동인터넷뉴스 기자)
  • 승인 2020.08.2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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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홍보물 수집에서 윷놀이까지, 공동체의 복원을 꿈꾸는 수집가
한국민속윷놀이협회 김혁동 회장

 

선거홍보물 수집에서 윷놀이까지, 공동체의 복원을 꿈꾸는 수집가

한국민속윷놀이협회 김혁동 회장

한국민속윷놀이협회 김혁동 회장.(ⓒ김은경)

한국민속윷놀이협회 문을 열면 “늘 처음처럼”이란 글귀가 보인다. 김혁동 회장(72세)이 언제나 마음속에 새겨두는 말이다. 사무실 책장에는 1970년대에 받은 아주 오래된 공로패를 비롯해 감사패, 각종 단체전 우승트로피, 상장들이 빼곡하다. 그렇다고 그가 이런 패들을 수집하는 건 아니다. 그가 살아온 삶의 결과물이 이렇게 다양한 패로 남은 것이다. 그 패들은 우승의 전리품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이력의 소중한 이야기를 담고 그곳에 자리매김 하고 있다.

선거홍보물을 수집한다는 한 가지 정보만 알고 김혁동 회장을 만났지만 그건 수많은 이력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수집행위를 사물에 국한시키지 않는다면 그의 삶도 넓은 의미에서 수집가와 결을 같이 한다. 그는 배구·탁구·양궁·사격·롤러스케이트 등 스포츠계의 비인기종목들을 안동에 창립했고, 무던히 지역 스포츠계의 발전과 선수 발굴, 봉사활동에 매진한 남다른 이력을 가졌다. 그러한 기록들을 개인 책자와 사진첩에 꾸준히 남기며 '늘 처음처럼' 살 것을 다짐한다. 전혀 다른 영역을 종횡무진하는 것 같지만 그 밑바탕에 흐르는 것은 언제나 지역에 대한 관심과 충만한 애정이다.

 

선거가 끝나도 그들의 '첫 말'을 수집한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지방선거와 총선 홍보물들을 모으기 시작해 별도의 책자 형태로 만들었다. 책자 안에는 각 후보들의 선거공약과 선거유인물, 당 공천신청자 명단, 지방선거 예비후보자 등록현황, 선거사무실 개소식, 지역구별, 후보별 명함, 관련 기사 스크랩 등 당시 선거활동의 이모저모를 묶어두었다. 책자 안에는 지역을 발전시켜보겠다는 각 후보들의 야심찬 계획과 장밋빛 미래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어느 후보는 “초심을 잃지 않고 시민만 바라보고 안동의 미래만 생각하겠다”고 했고, 어느 후보는 “확 바꿔야 한다”며 변화와 희망에 대해 거침없이 말했다. 선거철이 지나면 휴지조각이 될 홍보물을 왜 손수 한 장 한 장 책자로까지 만들었을까? 누구도 챙기지 않는 그것을 말이다.

“이 사람들이 날 찾아와가지고 선거때는 늘 처음처럼 열심히 하라고 하는데, 지나고 나면은 그게 안 되고 하이께네. 선거때 홍보물 나온 거 수집해가지고 앞으로 평가도 하고 질책도 하고, 좋은 점을 구상해서 제가 글을 달아서 책자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혼자서 만든 거예요. 임기가 끝났을 때 이 책자를 시의원들에게 갖다 줬을 때 과연 본인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그런 생각도 들고. 아직 한 번도 갖다 주진 않았는데.”

그는 그동안 시간낭비와 예산낭비를 목도하면서 현실정치에 대한 답답함을 느꼈다. 선거는 끝났고, 사람들은 모두 잊어버린다. 묵묵히 그들이 뱉은 ‘첫 말’을 수집하고 기억하고 있다. 시정활동을 잘해주기를 응원한다.

“시의원들이 자기 지역구 예산만 따갈려고 시 예산을 안 나갈 것도 다 나가도록 하는데, 자기 당과 자기 지역구에만 준하지 말고 시의원 전체가 시장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각 당과 계파를 떠나서 화합이 돼서 밤 낮으로 불 켜놓고 일하면 시민들이 볼 때 이번에 시의원들은 일 참 잘한다고 다음 선거 때도 찍어줄텐데 말예요. 시의원들이 정말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예산도 줄이고 자기 구역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사업에 지원해줄 건 꼭 해주고. 시의장은 그런걸 염두하고 시의원은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하면 얼마나 좋겠냐는 거죠. 의원들이 그런 자부심을 가졌으면 하는 게 가장 바람이에요."

시정활동이 제대로 이뤄져 안동시민의 삶과 지역이 고루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그동안 정치를 해야겠다 생각해본적은 없는지 물으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남후면 고상리에서 태어났다. 논 밭이 200마지기, 정미소, 과수원을 할 정도로 잘 사는 집이었다.

“옛날에 아버지께서 면의원을 하셨는데, 가족들이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어렸을 땐 안동시내에서 면까지 오려면 차가 없으니까 손님이 한 번 집에 오면 자고 갔어요, 동네에서 집도 제일 컸는데, 어머니께서 밥도 다 해드리고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정치를 싫어하게 됐어요. 대신 봉사를 택한 거예요.”

 

안동 스포츠계의 '마이다스 손'… 비인기종목 연달아 창립
그는 운동을 좋아해 학창시절엔 배구, 탁구, 달리기 선수를 했다. 스포츠의 불모지 였던 지역 스포츠계에 대부라고 불릴만한 굵직한 이력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비인기 종목 창립의 선구자다. 1970년대 중반 안동 배구협회 창립을 비롯해 안동양궁협회, 안동시탁구협회, 안동시사격협회, 안동시롤러스케이트협회 등을 잇달아 창립하고 지역 선수들을 발굴하고 키우는 역할까지 직접 도맡았다. 그가 지역에서 시도하는 것엔 언제나 '최초'가 따라붙었다. 다양한 스포츠 협회의 창립도 “기존에 없던 것을 모은다”는 점에서 수집의 성격과 닮았다.

27살에 안동교회 인근에 차린 100평에 달하는 스포츠센터를 마흔 살까지 운영했다. 안동경찰서 맞은편 누에공장 자리에 청소년들에겐 추억의 장소인 200평 규모의 롤러스케이트장도 운영했다. 이밖에도 당시 골프인도어장, 볼링장, 탁구장, 사격장, 양궁장 등을 협회 창립과 동시에 운영했다. 안동에서 주민들이 다양한 종목을 접해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 그는 운동에만 미쳐있어 부인이 삯바느질로 아이들 교육을 했을 정도였다고.

1976년 안동농아학교(현 안동진명학교) 배구코치를 맡아 경북북부지구 배구대회에서 8개월 만에 준우승을 시켜 중앙일간지에 그의 활약상이 상세히 보도되기도 했다. 그가 코치까지 맡게 된 데에는 지역의 열악한 스포츠 환경을 두고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역 내에서 선수를 길러서 도민체전을 보내야하는데, 당시엔 돈으로 스카우트를 하는식이었어요. 보다 못해서 자비로 지역 선수를 길러보자고 마음먹게 된 거죠. 학교에 배구팀을 창설하자고 제안했는데, 안동농아학교도 처음엔 무조건 안 된다고 해서 다음번에 찾아갈 땐 당시 귀했던 배구공 50개를 들고가 승낙을 받아냈죠.”

선수들 운동복과 경비도 모두 그가 부담 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죠. 안동시사격협회를 창립해 경북도민체전을 치르는가 하면, 탁구협회를 창립해 경북선수 선발전도 치렀는데 많은 대회를 자비로 유치할 정도로 지역스포츠계에 끼친 그의 공로는 실로 지대하다. 소문이 밖으로 새어나간 걸까. 지역의 열악한 스포츠 시설을 그에게 도와 달라는 요청까지 들어왔다.

“프로축구가 안동에서 처음으로 경기를 할 때였는데, 연도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아요. 안동공설운동장에서 축구대회할 때 경기장에 감독, 코치 대기실이 없어서 축구협회에서 저를 찾아와서 좀 도와 달라 해서 파이프로 대기실을 지어준 적도 있죠.” 안동에서 도민체전을 치를 때 사비를 들여 사격장, 양궁장 시설을 갖춰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롤러 선수 출신인 이정화 코치도 그가 키운 선수 중 한명이다.

“이정화 코치가 안동여고 1학년 때 원래 육상을 하던 선수였는데 제가 롤러스케이트 선수로 스카웃해서 총 7명을 데리고 서울, 부산, 대구, 강릉 등에 다니면서 전지훈련을 시켰어요. 안동에만 있으면 우승을 못하니 타지에 나가 잘하는 선수랑 연습도 하면서 실력을 쌓은 거죠. 제가 롤러스케이트를 타지는 못해도 유능한 코치한테 데리고 가서 훈련을 시켰죠. 이정화(현 안동지역 롤러부 코치), 한미경(현 대한롤러경기연맹 심판), 김근수(현 포항시롤러경기연맹 전 무) 현재 세 명이 롤러종목 주요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어요.”

안동대, 가톨릭상지대, 안동과학대의 교양체육과목도 그의 스포츠센터에서 도맡았다. 지역의 대학에서 체육대회를 할 때 양궁대회와 사격대회가 가능하도록 시설 지원도 아낌없이 했다. 지나온 날을 돌이 켜보니 이제야 그는 한 개인으로서 그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안동스포츠계의 숨은 기록이다.

김혁동 회장이 수집한 기록물들.(ⓒ김은경)

돌아가신 아버지의 현몽 “어른들 잘 모셔라”
그의 집에서 내려오는 상조계 문서는 100년이 훨씬 넘었다. “지금은 부조를 다 돈으로 하잖아요. 옛날에는 마구 큰 행사에 가면 묵 한 다라이, 정종 한 병, 감주 한 독, 막 그런 것들을 가지고 왔는데 부조에 그런게 다 써 있어요. 우리 할아버지, 윗대 할아버지가 행사한 것까지 써 있는 거니까 귀한 자료죠.”

돌아가신 아버지가 언젠가 꿈에 나타나 고향 어르신들 잘 돌봐드리고 대접 잘해야 한다고 현몽한 후부터 더욱 봉사에 매진했다. 고향인 남후면 어르신 위안잔치를 처음 치룰 때는 1년간 계획을 하여 150분을 초청해 다양한 공연 행사로 마련했다. 한때 용상동에 살았던 인연으로 용상동 어르신 300여 명을 모시고 용상초등학교 실내체육 관을 빌려 위안공연을 했다. 모두가 자비로 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지난해에도 1만 명에게 소소한 선물들을 기증했고 올해도 1만 명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스포츠를 한 이력에 열정이 더해서일까. 그의 스케일은 일반인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규모다. 꼼꼼히 정리해놓은 그의 사진첩을 보고 있으면 그저 입이 벌어질 뿐이다.

“봉사한 자료는 따로 수권을 만들어놔도 혼자만 갖고 있는 거예요. 집에서는 집사람이 이런 자료들이 너무 많으니까 전부 다 불사르라 카고 저런 트로피 같은 것도 수 없이 없앴죠.” 훗날 그의 부인도 봉사활동에 음식을 만들어 동참하면서 언제나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윷말과 윷판 없이 건궁윷을 즐겼던 '윷의 본고장 안동'
고희를 넘긴 그는 지난해 4월 15일 한국 민속윷놀이협회를 창립했다. 잊혀져가는 민속 윷놀이를 지속가능한 도시공동체문화속에서 다시 신명나게 복원시켜보자는 생각에서다. 국내에서 안동이 1호다. 윷놀이 대회를 개최할 때마다 항상 4~500명이 참여했다. 지역사회에 봉사했던 그의 삶이 가진 저력이다.

“내가 죽을 고비를 세 번 넘겼어요. 특히 4년 전에 감나무에서 떨어져서 아산병원에서 의사들이 천명 중에 한명 살았다 그래요. 떨어지는 순간에도 그동안 내가 가르쳤던 회원들이 뇌리에 떠오르더라고요. 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시민들한테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윷놀이를 찾아낸 거예요. 모든 사람들하고 만날 수도 있고 봉사할 수도 있고 손자손녀들도 할 수 있고. 모든 계층이 즐길 수 있어서 창립하게 된 거죠.”

안동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오래된 윷가락부터 윷말판, 윷노래까지 수집하기에 이르렀다. 500년 전부터 풍산 현애리 안동 김씨 종가에서 윷놀이 유래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수집한 윷가락에는 손때가 반질반질한 100년 된 사리윷(안동김씨 김광현 씨 기증)을 비롯해 70-80년 된 오동나무 장작윷, 안동시민 유동철 씨가 기증한 50년 된 사리윷, 공기윷 등도 있다.

100년 된 윷과 안동에만 있는 윷노래 자료
100년 된 윷과 안동에만 있는 윷노래 자료.(ⓒ김은경)

특히 안동에선 윷판과 윷말 없이 편장이 머릿속으로 윷말을 그리는 ‘건궁윷’을 놀았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한 기록이다.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암기식 윷놀이가 안동에서 성행했다는 것이다. 또 부유한 정승들은 이름조차 생소한 ‘존경도윷’을 놀았다며 한자가 빼곡히 적힌 희귀한 윷말판(김광현 씨 기증)을 보여주었다.

“이건 선비들이 놀던 윷말이에요. 우리는 풀이도 할 줄도 모르고, (수집하지 않으면) 이런 건 누가 아는 이도 없죠.” 북후면 도촌리와 예안면 정산리에 가서는 윷노래 자료를 수집했다. 윷놀이를 할 때 회원들이 실제로 윷노래를 재현하고 있다.

“옛날 종가에서 윷노래도 불렀는데, '윷노래'가 안동에만 있어요. 또 안동에는 산속 동네마다 가보면 큰 바위 위에도 윷말판이 그려져 있어요. 전국에 100개가 있다면 안동에 50개가 있다고 보면 돼요. 그 윷말판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농사짓는 농부들하고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윷말에서 모걸윷이 제일 빨리 나는데, 절기로 말하면 동지예요. 그 다음에 제일 먼 길은 하지고요. 윷말판이 이렇게 사계절을 담고 있어요. 춘분, 추분은 거의 같거든요. 씨를 뿌리고 씨를 거두는 건 길이가 같으니까. 또 윷 말은 '도'가 돼지, '개'는 개, '걸'은 염소, '윷'은 양, '모'는 말이에요.”

이러한 안동 윷놀이 문화의 고유한 특징을 살려 협회에서는 현재 유네스코 등재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모든 자료는 안동에서 수집했다, 안동은 '윷의 본고장'이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가지게 됐다. 그의 수집은 수집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공동체 문화의 복원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민속 놀이인 윷놀이를 통해 건강한 공동체의 복원을 꿈꾸는 사람이다. 그의 주변이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유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2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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