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특별판〈영남의 어른③〉-평생을 짊어졌던 '충효'
오래된 약속 특별판〈영남의 어른③〉-평생을 짊어졌던 '충효'
  • 강병규(안동MBC PD)
  • 승인 2020.08.31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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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종가 14대 종부 최소희 여사

평생을 짊어졌던 '충효'

서애종가 14대 종부 최소희 여사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
어릴 적부터 배워오던 가치다. 당연히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어린 아이들에게도 '충효'는 '불변'의 진리였다. 하지만 요즘은 국기에 대한 맹세에도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부분은 빠져 있으니 특히나 젊은 세대라면 '불변'의 진리가 마음에 와 닿기란 어려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회로 몸을 옮겨온 지 70년, 종부로 살아온 날도 무려 반 백 년에 가까운 그분에게는 여전히 유일한 '가치'다. 이제는 몸에 배고 마음에도 깃들어있는 가치, '충효'를 지키며 하회마을 서애종가를 지탱해 온 14대 종부 최소희 어른을 만났다.

연세에 비해 이름이 참 곱습니다 종부님. 그 당시에 비해 신식 이름이기도 하구요?
당연히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인데 내가 생각해도 그러네요. 참 마음에 드는 이름입니다. 언니 이름이 희, 나는 소희 아래로 경희, 정희 그리고 남동생은 염(경주 최 부잣집 종손)이, 영환이 이렇게 6남매입니다.

경주 교촌이 친정이시죠?
우리 친정 옆에 향교가 있었어요. 그래서 향교가 있는 동네라 해서 교촌, 교동이라고 했어요. 집에서 클 때는 교촌이 참 좋았어요. 우리는 대소가 이렇게, 여남은 집 밖에 안돼서 대촌은 아니었지만 육촌들, 사촌들 이렇게 한 집에 한 식구 같이 살았어요. 큰집에 모두 와서 밥도 먹고 그 시절이 좋았지요.

 

서애종가 14대 종부 최소희 여사
서애종가 14대 종부 최소희 여사(ⓒ안동MBC)

경주 최부자댁이면 그 당시 살림이 어마어마했겠군요.
우리는 전 재산을 지금의 영남대학에다 모두 다 넣었어요. 그리고 우리 조부가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부산에 회사를 차려서 거기서 나는 수입을 상해로 모두 보냈어요. 그러니까 지금으로 보면 5억원 이상일 거라. 안희재 씨라고 의령 사는 친구를 자금책으로 보내곤 했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는 만석꾼이 많지만 최부잣집 같은 부자는 없었지.

우리 집에는 가훈이 여섯 가지가 있어요. 우선 만석꾼에게 돈 있고 벼슬 높으면 사람은 교만하기 쉬워요. 그래서 그것을 피해서 벼슬은 진사 이상은 못하게 했고, 두 번째는 백리 안에 사방으로 굶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고 했고, 또 시집온 색시는 검소하게 무명옷을 입고, 집을 찾아오는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 흉년이 지면 땅 이라도 팔아 양식을 마련해야 하니까 헐값에 땅을 판다고, 그러니까 절대 흉년에는 땅 사지 말라고 했어요.

재미난 얘기가 있어요. 우리 조모께서 저 인천에서 바다 구경하러 백사장에 앉았는데, 노인네들이 모여서 “야, 부자는 경주 최부자가 옳은 부자다” 그런 소리를 하더라는 거야.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최부자의 며느리인지 모르고 그런거지. 우리 조모는 참 많이 베풀었지요.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들었던거야. 사람은 베풀어야 돼. 재벌들도 벌었으면 베풀어야지 안 그래요?.

당시에 부산 동래여고를 다니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안 동으로 시집을 오게 되셨어요?
동래여고에 다닐 때는 기숙사 생활을 했었는데 4학년까지 밖에 못 다녔어요.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편집자)때도 그렇고 미국 놈이 오면 처녀들을 집 밖에 내놓으면 큰일 난다고 어머니가 와서 나를 강제로 끌고 갔지 집으로, 그래서 학교는 마지막이 됐어요. 그리고는 집에 한 2년 있었나 그 후에 시집을 왔어요.

최부잣댁에서 하회로 시집오셨잖아요. 당시 엄청난 화제였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지금도 종가가 잘 사는 집 별로 없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진짜 반대를 했어. 없는 집의 종부로 고생한다고. 그래도 우리 조부 명령에는 절대복종이어서 여기 왔지. 그렇게 혼인 말이 나왔는데, '경상도지사를 할래, 서애 종손을 할래'하면 남들은 다 서애 종손하지 도지사 안 한다고 했어요. 도지사보다 서애 종손이 더 낫다는 얘기죠. 그래서 내가 굉장히 좋은 자리인 줄 알았어요 참말로.

그때는 영감이 세브란스의대 다녔었어요. 당시에는 하회가 무의촌인데, 종손 영감이 '나는 의과대학 나와서 이 동네를 위해 의사 노릇하겠다'고 그런 꿈을 갖고 있었다고 그래요. 그러다가 그때 한참 사회주의에 심취해서 결국 의과대학도 그만 둬버리고 나중에 만학으로 성균관대 생물학과 나와서 대학원까지 다니긴 했었지요.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 본래 내 시집 올 때는 삼백대촌이라고, 우리 마을에 삼백호까지는 안 살아도 한 270호는 살았어. 마을 크기로는 하회가 유명했지요. 옹기종기 여러분들도 많이 살았는데. 요즘에는 뭐 다들 불편하다고 하면서 이제 다 나가고 지금 한 120호 있을라나 모르겠네요.

 

그런 하회에 류씨 집안은 어떻게 터를 잡게 된 건지요?
터를 잡으신 어른이 저 화산에 3년 동안 움막을 짓고 사셨어요. 강을 끼고 동네에 물이 들어오는지를 확인하고, 이제 집을 짓는데 양진당을 다 지어놨는데 하룻저녁에 집이 넘어가더라고, 그래 또 다시 세웠더니만 또 넘어지고 그래서 꿈에 현몽을 하셨어요. 적선을 해야 된다고 했던 거지요. 그래서 여기 하회 오는 중간 마을에다가 자리를 잡고 오는 사람 맞아서 배고픈 사람 밥 먹이고, 노자 없는 사람 노자 주고 그랬더니 지금의 저 집이 건재하게 서더라는 거예요. 결국 사람은 베풀어야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거죠.

이 충효당도 서애 선생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지어진건데, 서애 선생 돌아가셨을 적에 집 한 칸도 없었어요. 영의정까지 하셔도 청백리로 사셨는데 삼간초가에서 사시다가 66세 때 거기서 돌아가셨어요. 그 이후로 자손들 하고 제자들이, 이런 훌륭한 어른 집이 없으면 안된다고 안채는 손자 대에 짓고 증손자 대에 사랑채 따로 내고 또 8대 손이 병조판서 때는 행랑 12칸 지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집이죠.

지금 앉아계신 집 당호가 강숙재네요? 돌아가신 종손어른 아호를 땄다고 들었는데 종손어른은 어떤 분이셨어요?
영감님이 현판을 달아 놨지. 이거 지어 놓고 돌아가셨어요. 이 집은 원래 내 돈으로 지으려고 해도 못 지었어요. 문화재로 지정돼서 수리도 어렵고 새로 짓는 것도 불가 했지요. 영감 계실 때 4년을 싸웠어요 이 집 짓게 해 달라고. 내가 안채에서 떨어져 팔이 다 부러졌는데 안된다고 하고, 우리 며느리도 여기 와서 못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샤워를 할 수 있나 화장실을 갈 수가 있나 참 어려웠지요. 영감님이 문화재청에 몇 번을 얘기해도 안돼서 결국 주인 양반이 유사를 불러놓고 ‘대문 걸어 잠그고 관광객이고 뭐고 받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한 달 동안 문 잠궜더니만 해결이 되더라고. 근데 이렇게나 편하게 해 놓고는 그만 돌아가셨어 당신은.

금슬이 좋으셨나봐요?
뭐, 하여튼 영감님 마음이 너무 착해. 날 보고 ‘왜 이랬노?’ 소리 평생 못 들어봤으니까요. 그리고 나보고 '당신이 참 좋은 점은 어떻게든지 이렇게 동기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은 참말로 당신이 너무너무 잘한다'고 그렇게 칭찬해줬었지요. 그리고 내가 마당에 나있는 풀을 뽑으면 저 문 열고 '그만 들어오소, 풀은 그만 뽑고 나하고 놀자' 이렇게 하고 그랬지요. 그게 지금도 자꾸 생각이 나, 풀을 뽑으면 그 생각이 나요. 여든 여덟에 내가 여든 여섯에 가셨으니까 4년 됐네요. 그때 가는 날도 아침 식사 잘 하시고, 내외간에 커피 마시고, 안방에 와서 둘째 아들하고 전화해서 아들이 온다고 하니 좋아서 그러셨는데, 그러고는 내가 밖에 나가서 한 20분 있으니까 그만 돌아가셨어요. 편하게 가셨지.

이렇게 큰 종가인데 시집살이는 안 하셨나요, 그럼?
없었어요 시집살이. 우리 시어머니는 훌륭하셨어요. 시집살이라는 건 모르고 살았어요. 우리 어머님은 누가 놀러 오면 '야야, 어서 온나. 여기 화투치자' 이러시고 할 정도로 좋으신 분이었죠. 백수를 하셨어요.

오늘 제사상 준비로 분주하네요 종가가?
내일이 서애 선생 시사예요. 시월 초하루 날. 시사는 산에 가서 제를 모시는 게 보통인데, 다른 집안 사람들은 8월 추석에 모두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10월 초하룻날 지네요. 그리고 차사도 9월 9일에 지내지 8월 추석에는 안지내요. 8월에는 아직 신곡이 안 나오거든 조상님한테 햇곡식, 햇과일을 올려야 하니까요.

1년에 몇 번이나 제사를 지내십니까?
1년에 열한 번. 한 달에 뭐 두 번도 있고 그래요. 5월, 7월, 8월에는 두 번씩 있어요. 8월에는 우리 시어머니, 시조 모님, 또 이제 우리 영감 제사도 8월이라. 이제야 뭐 상차림 할 때 위에서 지시나 하지 직접 뭐 밥하고 이러진 않아도 돼요. 그래도 책임이 무겁기는 하지요. 우리 충효당은 불천위가 두 분인데, 대종가인 양진당은 서애 선생 부모님까지 계시고 하니, 거기는 불천위가 네 분이라. 형님(겸암 선생) 내외분, 부모님 내외분. 1년 불천위라고하면 4대 봉사가 지나도 계속 제사를 지내는 거야. 그래서 항상 종부도 애 먹어요. 우리는 두 분 지내는 것도 어렵다고 하는데 말이예요.

말씀처럼 종가의 기본이 봉제사 접빈객이라고 표현을 하던데 어떤 의미일까요?
종가 종부의 책임이 그거예요. 봉제사는 조상님 제사 잘 받들고 접빈객, 오는 손님에게는 물 한 잔이라도 정성스레 대접하고, 그게 종부의 책무라고 할까 본분이라고 보면 되죠. 우리는 제사 때 정성스레 음식을 차렸었어요. 옛날 내가 시집오기 전에는 서애 선생 제삿상에 소도 한 마리 잡고, 돼지도 잡고 기름 한 말씩 짜고 오탕을 했어요. 탕이 다섯 가지라. 정승을 하셨으니까 오탕, 임금은 칠탕이고, 명나라 황제는 구탕이라. 오탕에는 육탕, 계탕, 소탕, 아무 것도 안 넣는 나물만 넣는 탕, 그리고 병산 앞에 민물고기로 만든 어탕까지 다섯 가지죠. 그리고는 생고기 쓰고 떡하고 나물하고 탕하고 과일하고 그렇게 하는 거지요.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하는데 생고기를 끼워서 나머지 한 가지씩 넣어서 가는 거죠. 그러면 하룻저녁 반찬거리는 되는 거죠. 음복은 조상 제사에 복을 받는다고 다 가져가라고했죠.

그럼 접빈객 때는 친정에서 배워 온 경주 법주를 내 가겠네요?
경주법주 다르고 교동법주가 달라요. 우리 친정이 경주 교동이거든. 교동법주는 시중에 파는 법주하고는 달라요. 교동법주는 찹쌀로 해서 한 달쯤 숙성시켜야 해요. 찹쌀하고 누룩하고 겹술을 해요. 고두밥으로 술하면 그 맛이 들 때까지 한 달 동안 숙성시켜서 만들거든. 우리 클 때는 방에 술 단지가 떠날 날이 없었지요. 손님 대접도, 제사도 그 술을 쓰니까요. 그 술 떨어지려고 하면 또 담고, 또 담고 그래서. 그것도 이제 내가 살림 살 때는 했는데. 이제는 물려주고는 애들은 애들 지 솜씨로 딴 술을 해요.

손님을 정성스레 맞이한다는 것이 참 의미가 있습니다. 충효당 종가는 늘 이렇게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봐요?
그럼요 현직 영국 여왕 오셨다 갔지요 또 현직 대통령도 오셨었지요. 노 대통령 그리고 이번에 문 대통령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도 퇴임 후에 다녀가셨으니까요. 노대통령 오셨을 때는 점심을 했는데 우리 집에는 앉을 데가 비좁고 해서 대청이 너른 양진당에서 모셨는데 그때 내가 경주에서 계란 200개를 떠서 수란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모두 오신 분들 대접을 했더니 이게 뭐냐고 하면서 먹어 보니 맛있네 그러더라구요. 하여튼 나는 내 힘껏은 물심 양면으로 집을 위해서 일을 했거든. 몸이 고달파도,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하면서 견뎌냈죠. 그래 참 이제는 살만큼 살고 나니까 뭐 지금은 모두 종부, 종부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옳게 하지는 못해도 또 동네서 그렇게 평을 해주니 고생한 보람이 있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정말 큰 손님도 한 번 치르셨죠? 대청에 보니까 줄이 하나 내려져 있던데?
그거는 여왕이 마루에 올라 갈 때, 잡고 올라가라고 매달았었지요. 보통 그것은 사랑 마루에 매는데 그때 여왕 온다고 그걸 했어요 잡고 올라가게. 여왕님이 신 벗는 것도 여기서 처음이었고, 당신이 동양의 풍속을 따라 주신거지요. 사실은 여왕님 오시기 전에 영국대사 부인 내외가 두 분이나 여기 우리 집에 왔어요. 한 번은 와서 저 사랑방에 자고 그때 겨울에 한참 추울 때 코트를 입었는데도 덜덜 떨고 했지요. 그랬는데 안방에서 따뜻한 밥을 대접하고 했더니 나중에 그 분들이 그랬나봐. ‘동양에 가보니 참말로 하회라고 하는 데가 좋다’고 그 후에 여왕이 오셨지. 마을이 야단이었죠. 여왕 오셨을 때는 밥을 않고 차랑 떡하고 과일을 곁들인 다과상을 차려 드렸지요.

그럼 그렇게 궂은 일 마다하지 않았던 종부 자리는 언제 물려주신 거예요?
종부로 집안을 물려받은 지 45년 되던 해라. 우리 영감 돌아가시고 길사라고 종손, 종부 되는 행사가 있어요. 그 행사는 거창하게 했는데 그 이후로는 살림을 아랫대한테 다 물려줬지요. 길사라는 것이 30년에 한 번씩 하는 거예요 대를 바꾼다는 의미도 있고 임금님이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때는 참 시원했어요 허허.

종손인 아드님 낳았을 때도 참 기쁘셨겠어요, 제사를 받들 자식이 태어났으니까요. 혹 시아버님이 상이라도 주시진 않으셨어요?
그때는 상 같은 건 모르고 낳아 놓고 보니까, 나는 세상 걱정이 없어지더라고. 어쨌든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났으니 종손으로 교육은 해야 했었는데 따지고 보면 뭐 특별한 교육은 없었던 것 같아요. 자기가 듣고 보고 직면교화로 그리하지 뭐 이렇게 옛날부터 엄하게 교육시키고 그런 건 없었어요. 그래도 지금 보면 잘하고 있어요. 한 가문의 종손은 문중을 받들고 세워야 하는 직분이 있는 거니까 자기 혼자 가정 하나 꾸리기도 힘든데 이 문중을 다 거느리고 하자니까 힘든 일이지요. 그럼에도 종손이 잘못하면 또 남의 문중에서 욕하고 하니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죠. 특히나 서애 선생 같은 훌륭한 조상의 뜻을 받들어서 살아야 하니 자기가 빗나가거나 하면 큰일 나지요. 살아도 늘 조심조심해야 하는 것이구요.

그렇게 또 대를 이어가야 할텐데 그 일은 잘 되고 있습니까?
이제 나도 손부를 봐야 되는데 이런 종가에 누가 올까 걱정이 되지요. 요즘은 맏이한테도 시집 안 가려고 하는데 종가 오기가 진짜 어렵잖아 종부 구하기가 어려워요. 그래 한 20년 전인가 한 번은 고려대 지리학과에서 학생들이 구경을 왔어요. 이런 집에서 살면 좋겠다라고들 하길 래 내가 “여기 종부로 올 사람 누구 있노”하니까 “막 저요! 저요!” 이러더라고, 그때는 우리 손자가 고등학교 때라 “아직 고등학생인데…” 했더니 “연상의 여인도 안 좋습니까” 이러더라고 요즘 아이들이 허허. 그런데 진짜 이제는 종부로 시집오려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난 어서 손부 봐서 혼인하는 거 보고 깨끗하니 가면 좋겠어요.

다시 태어나서 서애 종가 종부하라고 하면 하시겠습니까?
종부라는 것이 내 식구 먼저 위하기가 참 어려워요. 이 큰 집을 지키고 조상 모시고 손님 대접하고 해야 하니까 귀한 거 있으면 진짜 영감 못 드리고 남을 우선했었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어째서 남을 위해서 사는가 싶기도 했고, 우리 식구는 뒷전이고 당장 손님을 치뤄야 하니까 참 어려웠어요.
나는 45년 종부로 있어서 지금도 생각하면 그래요. 돌아가신 우리 영감님한테도 그랬어요. '나는 다시 태어나면 종손 되고 당신은 종부되소' 했었지요. 종부 일이 너무 많아서 종손은 가만히 있어도 되지만. 이제는 안 하겠어요. 그래서 내가 종손 될라 했지. 종부는 안 하고 싶다 했지요 허허.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3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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