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게 말을 걸다①-1987년의 행진
사진에게 말을 걸다①-1987년의 행진
  •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20.08.2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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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목성교에서 안동역으로 행진하다


누구나 흔적을 남기고 흘러갔다. 나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1987년을 까맣게 망각하고 있는데 이 사진을 발견하다니! 정말 깜짝 놀랐다. 2017년 9월1일, 안동 나섬식생활교육원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선한 '안동지역 6월항쟁'에 관한 기록화 구술모임에 참석했다. 당시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사진앨범 한 권이 올려졌다. 1986~7년 전후 안동가톨릭농민회의 누군가 열성적으로 찍은 천주교와 가톨릭 농민회 활동 및 시위 사진을 넘기며 기억 조각을 꿰맞추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22살의 내 얼굴이 포착된 사진 두 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게 되었다.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와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를 빼놓고 1987년을 설명할 수 없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박종철을 물고문으로, 이한열을 직격최루탄으로 살인행위를 저질렀다. 고문살인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조종이 울리고 있었다. 불타오른 국민적 분노는 2.7 추도회, 3.4 고 박종철 추모제 및 고문규탄대회, 4.14 호헌철폐로 이어졌다. 6월 10일 이한열이 쓰러지며 전국민적 6월 항쟁으로 발전했고, 노태우의 6.29 개헌선언을 받아내게 된다.

 

1987년 7월 9일, 안동시 목성교에 모인 청년과 대학생들이 고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천주교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
1987년 7월 9일, 안동시 목성교에 모인 청년과 대학생들이 고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천주교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

안동과 경북북부권에서도 전국 일정에 맞춰 기도회, 추모제, 집회가 진행됐다. 안동지역에서 먼저 양심에 입각해 두려움을 떨쳐내고 거리로 나선 세력은 천주교사제단,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와 농민단체 학생들이었다. 청년학생인 우리들이 뛰쳐나올 역량을 키우는데 천주교와 농민운동은 든든한 울타리였다.

2월 7일부터 6월 29일까지 우리는 목성교와 목성성당, 조흥은행 앞과 안동문화회관, 안동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을 넘나들며 시민의 동참을 간절히 호소했다. 분명하게 기억이 나는 장면이 있다. 3월 3일 개강과 함께 고 박종철 49재가 열리던 날 송천캠퍼스에서 안동 용상동 선어대까지 국도를 따라 행진하던 도중 선후배들이 닭장 차에 연행될 때 비가 내렸다.

7월 5일 사망한 이한열의 국민장이 7월 9일 서울역에서 개최되었다. 7월 9일 그날 우리들은 안동 목성교에 모여 앉아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추도' 근조 플랜카드를 만들었고, 안동역과 시외버스터미널 방향으로 행진했다. 지금의 안동기차역 앞 승공탑 조형물 옆으로 대열지어 걸어가고 있 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그날의 뜨거 웠던 구호가 함성과 함께 떠오른다.

 

1987년 7월9일 집회를 마치고 안동지구대학생연합 학생들이 고 이한열 열사 추모 행진을 하고 있다. 안동기차역 앞 승공탑 조형물 옆에 지나고 있는 모습이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천주교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
1987년 7월9일 집회를 마치고 안동지구대학생연합 학생들이 고 이한열 열사 추모 행진을 하고 있다. 안동기차역 앞 승공탑 조형물 옆을 지나고 있는 모습이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천주교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

'한열이를 살려내라'

20대 청년시절 낯익었던 얼굴들이 겹쳐 보인다. 1987년 애국청년학생을 자부했던 동지들은 이후 회사원으로, 교사로, 시인으로, 노동자와 농민으로 진출했거나 흩어졌다. 30여 년이 지났으니 한번쯤 묻고 싶어 진다. 우리가 꿈꾸던 세상은 어디에 있는가? 사진에게 말을 걸어본다.

 

1986년 봄, 농가부채 탕감을 외치는 농민 시위대

대학 2학년 봄, 농민들이 시위를 한다는 소식에 중간고사를 끝내고 서둘러 안동문화회관 앞에 도착했지만, 기도회는 끝나고 벌써 거리행진이 시작되고 있었다. 빛바랜 사진을 바라보니 1986년 4월 16일 안동문화회관에서 개최한 <농민 노동자를 위한 기도회 및 농가부채탕감 농민대회>이다.

몇몇 친구와 도로 옆 인도에 서서 박수를 치며 응원을 했다. 오른손을 힘껏 치켜 올리진 못했지만 구호를 따라 외치며 행렬을 따라 가려고 잠깐 도로에 내려섰다. 그때, 경찰간부 복장의 남자가 “학생 같은데 다시 인도로 올라가”라며 나를 지목했다. “구경도 못하느냐? 당신이 뭔데 간섭하느냐?”고 대들었다. 순간 눈초리가 사나워지더니 “저놈 잡아넣어!” 명령이 떨어졌다.

사복경찰 서너 명이 달려들어 내 양팔과 허리띠를 잡아챘다. 발버둥을 쳤지만 덜컹 호송차에 내던져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양반이 누군데 날 체포했냐고 악을 쓰니, 돌아온 답변이 그럴듯했다. 경찰서장이었다.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이빨을 앙다물었다.

'농민들이 단결하고 조직화되면 저렇게 두려움 없이도 맞서 싸울 수 있구나' 유치장에서의 밤은 나름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1986년 4월 16일 안동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농민 노동자를 위한 기도회 및 농가부채탕감 농민대회'.(ⓒ천주교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
1986년 4월 16일 안동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농민 노동자를 위한 기도회 및 농가부채탕감 농민대회'.(ⓒ천주교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

1985년 스무살 여름에 읽은 《전태일 평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등을 읽고 통곡으로 밤을 지새웠다. 생존에 허덕이는 노동자, 농민의 빈곤한 처지에 내 아버지 어머니의 삶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양민이 군인에게 무차별로 학살당하는 불의한 시대를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까? 번민으로 다가온 불면의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분노에 휘감겨 싸울 방법을 찾아 헤매던 그때, 내 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아우성이 들려왔다.

80년대 이 땅의 모든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회적 저항의식은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광주정신의 아들·딸이었다. 민중생존권과 민주민권회복은 국민의 자각과 대중운동의 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33년 전인 1986년 봄부터 그해 겨울이 끝나도록 유기·무기정학, 수배를 거치며 내 의식은 단단해져갔다.

당시 그날의 농민집회 사진을 보며 아이러니한 건 장소 즉, 공간이다. 안동기차역과 안동문화회관, 안동군청을 잇는 4차선 도로의 양쪽 상가 간판들을 훑어보았다. 내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이 그 옛날 상가 공간의 일부이다. 상가는 모두 바뀌었지만 도로와 가로수는 그대로 이다. 돌고 돌아 이 자리에 내가 서 있구나. 그러나 40여 년이 지나도 데자뷰를 겪는 느낌이 든다. 아직도 광주항쟁 정신을 왜곡하는 세력이 온존하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모든 역사가 미완성이듯, 광주민중항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2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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